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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 회의가 있는 월요일. 주말 동안 쉬는 것에 익숙해진 탓인지 일어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5분만 더 자야지 하다가 번쩍 눈을 뜨고 부리나케 출근 준비를 한다. 아이폰에 설치해둔 애플리케이션에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나갈 수 있는 시간을 입력하니 가장 빨리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는 실시간 교통편을 알려준다. 다행히 회의에 늦지 않겠다.
#2. 하지만 날씨가 끄물끄물한 것이 비가 올 것만 같다. 하루 동안의 비구름 양과 이동 방향을 시간대별로 보여주는 날씨 애플리케이션을 보니 퇴근할 시간 즈음에 맞춰서 비가 올 듯하다. 운 좋게 비를 피해 집으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작은 우산 하나만 가방에 넣도록 한다.
#3. 독일어는 여전히 가장 큰 적. 리서치 중 마주치는 어려운 독어 단어를 스마트폰 독한사전으로 검색해본다. 금세 또 잊어버리겠지만…
#4.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다. 회사 근처는 초행인 그에게 위치공유로 와야 할 장소를 전송한다. 별다른 실수 없이 함께 식당으로 향한다.
#5. 식사 너머로 한참 대화하다 보니 회사 스케쥴과 연동된 스마트폰 알람으로 인턴쉽 지원자 인터뷰 시간이 15분 남았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아쉽지만 이제 회사로 들어갈 시간이다.
#6. 무료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미국에 사는 친형이 조카 사진을 보내왔다. 뿔뿔이 흩어져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고, 미국으로 휴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7. 퇴근 후 시간이 흘러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 팟캐스트(Podcast)로 밀린 한국 라디오 방송을 취침모드로 틀어놓고 잠을 청한다.
최근 필자가 겪은 하루의 일상을 되돌려 기억하며 떠오르는 중요한 장면들을 정리해보았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미 예상했겠지만 모든 장면에는 필자와 스마트폰이 등장한다. 스마트폰은 이미 현대인들의 생활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인한 폐해들도 많이 거론되고 있는데, 그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일상에서 스마트폰이 사라져 버린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족이 모두 멀리 떨어져 사는 필자에게 모두를 쉽게 연결해주는 스마트폰은 너무나도 소중한 도구일 수밖에 없지만, 혹여 함께 모인 식사시간에 모두 각자의 스마트폰만 바라보며 대화가 단절된 어느 가족의 어머니에게 이 엄청난 기술의 발전이란 남은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분리수거를 해버리고 싶을 만큼 쓸모없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스마트폰 없이는 못살게 되어버린 입장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친(親) 스마트폰의 입장과 반(反) 스마트폰의 입장에 선 모든 사람이 ‘이거라면 스마트폰이 필요할 수 있겠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필자가 4년째 몸담은 Pilotfish는 독일과 네덜란드 국적인 두 명의 설립자가 있다. 그중 독일계 수장인 마크 나겔(Marc Nagel)은 성공한 디자이너이자 기업가이다. 한 회사를 이끌어가는 대표로써도 그렇지만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둔 가족의 가장으로써도 늘 따뜻한 남편이자 아버지(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렇게 비친다)이다. Pilotfish의 가족적인 분위기는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인데, 평소 직원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일터로 데리고 오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마크의 둘째 아들 라이너스(Linus Nagel)는 회사 휴게실에 설치된 엑스박스 게임기나 탁구대를 특히 좋아하고 회사 행사에도 늘 따라나설 만큼 붙임성이 좋은 아이이다. 하지만 이렇게 밝아 보이는 마크와 라이너스의 가족에게도 한가지 걱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몇 해 전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라이너스에게 생긴 소아 당뇨. 가족이 겪었을 슬픔과 힘든 시간을 전부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평생 매일 혈당과 먹는 음식을 체크하고 인슐린을 소지하고 있어야 하는 라이너스를 바라보는 마크에게서 조금이나마 그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2012년 Pilotfish는 이런 마크와 라이너스를 위한 선물을 구상하게 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라이너스에게 영감을 받은 Pilotfish의 디자이너들이 준비하고 있는 선물의 포장을 조금 열어 공유하고자 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해 라이너스가 매일 겪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의 혈당 체크 과정을 쉽게 만들어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된 Pilotfish의 내부 프로젝트 “I Say U Count”를 소개한다.
1. I SAY U COUNT
▲ I Say U Count (ISUC) (Image ⓒ Pilotfish) :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한석봉 어머니의 유명한(?) 말에 대한 오마주일 리는 절대 없고, 수많은 번거로운 과정의 계산과 데이터 관리를 “내가 말할 테니 너는 (계산을) 대신하거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작명이다. ISUC는 2012년 3월 Pilotfish의 내부 프로젝트로 시작하여 다양한 분야의 팀 내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 엔지니어가 협업을 통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클라이언트 프로젝트가 우선될 수밖에 없는 디자인 에이전시의 구조때문에 조금은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대부분의 컨셉 작동이 증명되어 빨리 양산화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 USER OBSERVATION
당뇨 환자들이 매일 맞닥뜨리는 문제점을 발견하기 위해 Pilotfish의 디자이너들은 라이너스(Linus Nagel)의 학교를 찾아가 아이가 생활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어떠한 과정으로 매 끼니의 식사를 하는지를 살폈다. 점심을 학교에서 제공하는 급식으로 해결하는 라이너스, 부모가 곁에 없을 때 아이는 모든 과정을 어떻게 수행하게 될까?
▲ 측정: 음식 무게 측정 (Measurement: Weight Food) (Image ⓒ Pilotfish) : 먼저 급식 되는 음식을 종류에 따라 다른 접시에 담아 따로 무게측정을 한다.
▲ 측정: 혈액 추출 및 혈당 측정 (Measurement: Extract Blood & Retrieve Blood Sugar Level) (Image ⓒ Pilotfish) : 음식을 먹지 않은 현재 상태의 혈당을 체크하기 위해 손가락에서 혈액 샘플을 채취하고 혈당 측정기를 이용해 수치를 얻어낸다. 이미 익숙한 이 과정을 라이너스는 능숙하게 해낸다.
▲ 계산: 음식, 혈당 정보 입력 후 인슐린 용량 계산 (Calculation: Input Food, Blood Sugar Data & Calculation Insulin Dosage) (Image ⓒ Pilotfish) : 계산은 아직 어린 라이너스에게는 조금 복잡한 과정이다. 측정한 음식의 종류와 무게, 혈당 수치에 대한 정보를 아버지 마크에게 전화로 알리고, 마크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음식의 종류와 무게, 현재 라이너스의 몸 상태에 맞는 인슐린 주사액의 양을 계산해낸다.
▲ 주사: 인슐린 주사 (Injection: Inject Insulin) (Image ⓒ Pilotfish) : 전화로 마크에게 받은 정보대로 인슐린 주사를 몸에 주입하는 라이너스
▲ 관리: 일지 업데이트 (Manage: Update Log Book) (Image ⓒ Pilotfish) : 아직 데이터 정리가 미숙한 라이너스가 식사하는 동안 마크는 아이를 대신하여 그가 시간별로 먹은 음식과 혈당량, 인슐린 주사량을 기록한다.
3. ISSUE FINDING
라이너스가 식사하는 과정을 예로 관찰하며 당뇨 환자들이 식사마다 마주하는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 다른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 다가온 두 가지 문제점을 정리해본다.
▲ 문제점 1 (Issue 1) (Image ⓒ Pilotfish) : 이 과정은 매번 수행 시 약 5분가량의 시간이 소요된다. 매끼의 식사를 포함해 평균 네 번 이상 반복된다고 가정할 때, 20분 이상의 시간을 앞서 확인한 작업들을 수행하는데 보내게 된다. 또한, 소아 당뇨일 경우 아이를 위해 부모가 이 모든 과정을 대신하게 되고,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전화를 통해서라도 꼭 수행되어야만 한다.
▲ 문제점 2 (Issue 2) (Image ⓒ Pilotfish) : 가장 기본적인 주사, 인슐린, 형당 측정기 등을 제외하고도, 음식의 무게를 재는 저울, 음식마다 고유한 혈당 정보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 계산기, 필기도구, 일지 등의 부수적인 준비물들이 필요하다. 당뇨 환자들은 어디를 가든 늘 이 준비물들을 가지고 다녀야 하고, 라이너스와 같은 어린이의 경우에는 특히 더 곤욕스러울 수 있다.
4. SOLUTION & VISUALIZATION
이렇게 발견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Ideation 과정을 거쳐 두 가지 방향의 해결책을 모색해 보았다.
▲ Solution 1 (Image ⓒ Pilotfish) : 첫 번째 해결방안은 요즘 흔하디흔하다는 스마트폰 케이스를 이용한 방법이다. 스마트폰 케이스에 전자저울에서 쓰이는 하중 측정 기술을 적용하여, 접시 위에 올린 음식의 무게를 재는 아이디어. 스마트폰 케이스 채로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모바일 기능을 최대화한 컨셉이다.
▲ GUI Concept (Image ⓒ Pilotfish) : 함께 제공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음식과 그 음식의 무게, 현재 혈당 수치를 입력하면 주사해야 하는 인슐린의 양이 자동으로 계산되어 표시되고, 손쉽게 그동안의 기록들에 업데이트된다.
▲ Solution 2 (Image ⓒ Pilotfish) : 두 번째 해결책은 조금은 더 쉽게 실현할 방법이다. 기존의 전자저울을 그대로 미니멀하게 디자인한 후 개발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연동시키는 아이디어.
5. PROOF OF CONCEPT - PROTOTYPING
지금까지의 아이디어들을 실현하기 위해,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컨셉을 증명했다. 전자식 저울을 분해하여 아두이노(Arduino)와 연결한 후 개발한 프로그램과 연동시키는 작업을 Pilotfish의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가 함께 진행하였다.
▲ Working Prototype (Image ⓒ Pilotfish) : 아두이노 회로와 저울을 연결하고 이를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과 연동한다. 다양한 음식들의 정보들을 입력해둔 프로그램은 입력된 혈당값에 맞는 인슐린 주사량을 정확히 계산해낸다.
ISUC의 개발은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많은 시간의 투자와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아이폰 4S를 대상으로 개발을 시작했지만, 어느새 아이폰5, 5S, 5C가 출시되었다. 앞서서 밝혔듯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를 우선으로 진행하는 에이전시의 숙명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ISUC 프로젝트가 세상에 선보이게 될 때에 라이너스를 비롯한 수많은 당뇨 환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Full Process of ISUC (Video ⓒ Pilotfish) : 현재까지 진행된 프로젝트 “I Say U Count”의 프로세스와 컨셉설명 동영상
스마트폰을 둘러싼 기술의 진화는 분명 인간 생활의 “질”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이 생활의 “질”이 어떠한 방향으로 바뀌었는지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쉽게 확언하기 힘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뒤로하고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삶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는 많은 시도가 지금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고, 이러한 노력이 분명 우리에게 대답을 줄 것이라 믿는다.
리포터 소개
리포터 양성철은 독일 뮌헨의 디자인 에이전시, Pilotfish GmbH(www.Pilotfish.eu)에서 Senior Industrial Designer로 일하고 있다. 그는 유럽에서 겪는 디자이너의 일상들이나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지만,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