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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캄보디아 여행기
박 승 렬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사 package tour를 통해 2010. 10. 17(일)~10. 22(금) 간 4박 6일 동안 다녀왔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각각 2박씩 하면서 그곳의 명소를 관광하는 형태인데, 날자로 6일이 되는 이유는 1박을 비행기에서 하며,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시차가 우리나라보다 2시간 늦기 때문에 시차로 인한 피로와 비행시간 (약 4시간반-5시간) 으로 인한 피로는 크다고는 할수 없으나, 비행기에서 잠을 자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여행사 프로그램 상 어쩔 수 없었으나, 가급적 이러한 형태의 여행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먼저 방문했던 베트남의 위치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에 남북으로 뻗어있는 S자형의 국가이며, 총면적은 33만 2천로 우리나라 보다 1.5배 크다. 북쪽은 중국, 서쪽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와 인접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남중국해에 접해 있다. 인구는 2008년 기준 약 8600만명이다.
정치형태는 공산당 정권의 사회주의 국가로 지금도 연좌제, 5호담당, 10호담당의 감시체재를 유지하고 있으며,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체재이나, 형태만 그렇고 실제로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국가라는 guide의 설명이다.
베트남은 대략 중국의 1000년 지배 프랑스의 100년 지배, 미국과의 10년 전쟁 등을 겪었으나, 결국에는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고 한다. 정착된 유교문화는 우리와 매우 유사하며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지금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반바지를 입으면 상민취급을 한다고 하며, 허례허식도 매우 심한 편이라고 한다. 일례로 베트남 거리에는 오토바이가 많은데, 오토바이의 종류는 곧 타고 있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오토바이보다 더 비싸고 좋은 것을 사기위한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남북 간의 길이가 세계에서 칠레다음으로 길다보니 지역별로 기후화 음식 맛이 제각각이며 사람들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북부사람들은 근면하고 계획성이 있으며 자존심이 강한반면, 남부사람들은 개방적이며 밝고 새로운 것을 좋아 한다고 한다.
베트남 여성은 강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친 전쟁에서 가정과 사회를 지켜오다보니, 여성이 생계의 8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가족을 먹여살리며, 나라를 구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여성의 3대 덕목으로 알려지고 있다. 길거리 찻집 운영은 여성의 몫이고, 환경미화원의 98%가 여성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여성에 비해 하는 일이 적으며, 남자들이 하는 중요한 일은 저녁식사후 가족들을 오토바이에 태워 산책을 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사람들은 몽고반점이 있고 머리카락 DNA가 우리와 같으며, 성격도 끈질기고 집요한 일면이 있다고 한다.
베트남을 관광버스로 여행하다보니 거리에는 오토바이가 홍수를 이룰정도로 많으며, 교통법규가 엉망이어서 어쩌다 버스에서 내려 음식점으로 가기위해 길을 건널때는 오토바이에 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길을 건너야만 했다. 길에는 중앙분리선이 없는 곳이 많으며, 오토바이 사고사망자가 1년에 15.000여명이 나온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베트남의 교통질서는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베트남의 경제상황은 1인당 GNP가 2007년 기준 1000불 정도이나 경제성장률은 8.3%로 높다고 한다. 쌀농사는 북쪽은 2모작, 남쪽은 3모작을 하고 있어, 쌀 생산이 세계 2위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도이모이 개방정책, 풍부한 자원, 높은 교육열(문맹률 2%) 등을 토대로 2020년 경에는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진출은 초기에는 대우의 김우중 사장이 고아원을 설립하여 희사하는 등 한국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놓았으며, 현재에는 북쪽은 LG, 남쪽은 삼성의 진출이 현저하고, 베트남의 2대강이라 불리는 홍강과 메콩강중 서울시가 홍강의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의 관광버스의 80%는 현대버스이고 택시의 60%는 한국차라고 한다.
관광하고 있는 동안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에 해당하는 현지어를 배워 베트남에서는 신짜오, 신까몬, 캄보디아에서는 섭섭아이, 옥분지란을 사용해 봤는데, 발음과 억양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굳어 있는 표정들이 미소로 바뀌는 것을 보고 내심 기쁨을 맛보았다.
베트남에서의 관광은 첫 번째로 문학사원을 들렀는데 우리나라의 성균관에 해당되는 베트남 최초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공자를 모신 곳으로 만세사표
(萬世師表) 등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한자문구들이 많이 있으며, 같은 유교권 국가이었기에 친근감이 생기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두 번째 방문지는 한기둥 사원이다. 한기둥 사원은 1개의 기둥위에 세워진 사원이라 일주사라고도 불리며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고 하노이를 상징한다고 한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베트남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들을 낳아달라고 기원을 한다고 하는데 과거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세 번째 방문지는 하롱베이 (Halong Bay National Park) 이다. 하노이의 동쪽에 위치한 하롱베이 국립공원은 그 미려한 장관으로 유명하다.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립공원으로 전체국토중 1553를 차지한다. 이만을 차지하고 있는 3,000개 이상의 섬들이 보여주는 장관은 스펙터클 그 지체이다. 하롱(下龍)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용(龍)이 바다로 내려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무리의 용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내뱉은 보석들이 섬이 되었다고 한다. 하롱베이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세계 8대 절경중 하나이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계림, 금강산과 함께 3대 절경중의 하나라고 한다. 배를 타고 3시간 관광하는 동안 아름다운 광경과 청정한 공기는 정말 일품이었다. 하롱베이의 섬들중 방문한 곳은 Ti-Top섬과 천궁동굴이다. Ti-Top섬 정상에서 보는 다른 섬들의 모습은 한 장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다. 너무 아름다워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Ti-Top 이라는 섬의 이름은 호지명이 러시아의 우주여행가 Ti-Top (유리 가가린의 동료) 을 하롱베이로 초청했을 때 Ti-Top이 그 섬이 너무 아름다워 호지명에게 그 섬을 달라고 하였을 때 호지명이 하롱베이의 섬들은 베트남 인민들의 소유이므로 줄 수는 없고 대신 그 섬의 이름을 Ti-Top이라고 명명하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궁동굴은 푸르고 깊은 바다위에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석회동굴로 석회석이 탄산가스, 바닷물과 작용할 때 열이 발생하여 녹아내려 사자, 용 등의 각종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천궁동굴안에서는 모든 관광객들이 그곳의 광경에 감탄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하롱베이는 베트남 관광의 하이 라이트라고 생각된다.
네 번째 방문지는 바딘광장 (호지명 묘 앞 광장 ) 이다. 베트남 남북통일에 일생을 바친 영웅 호지명이 잠들어 있는 곳 앞의 광장이며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고 한다. 기념일 이면 많은 베트남인들이 참배하러 온다고 한다. 호지명(호치민)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싸웠던 북부 월맹의 최고사령관이므로 호의적인 생각은 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호지명에 대한 몇가지 일화를 듣고는 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호지명은 민족주의자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독신으로 산 이유는 가정이 있으면 인민에게 헌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쟁중인데도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외국에 내보내 선진문물을 배우게 하였고, 전쟁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을 테니까 반드시 전쟁이 끝난 후에 귀국하여 국가건설에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중 북한에 파견된 젊은이들은 전쟁중에 귀국하였으며, 호지명이 이들에게 그 사유를 물으니 그들은 북한에서 더 배울 것이 없어서 귀국하였다고 보고 하였다 하며, 그 대신 북한에서 가져온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호지명에게 바쳤다고 한다. 호지명은 목민심서를 12번이나 탐독하고 목민심서를 호지명의 통치철학의 기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호지명의 위대함은 월남에서도 인정하여 1969년 호지명이 죽었을 때는 월맹과 월남이 전쟁중인데도 불구하고, 상호간 휴전 했을 정도라고 한다. 호지명은 지금도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있어 호주석이라는 명칭과 함께 호아저씨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청렴결백한 삶의 자세, 교육입국, 힘없는 백성들을 비롯한 소외계층을 항상 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초상난 곳이 있었다. 그런데 초상집에 군인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그지방 유지의 장례식이라는 guide의 설명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과시욕이 심하여 그 지방의 유지일수록 성대하게 초상을 치룬다고 한다. 상을 당할 때 윗사람이 죽었을 때는 하얀띠를 머리에 두르고 손아래 사람의 경우에는 하얀띠를 배에 두른다고 하며, 3일장, 5일장, 49재를 치루는 등 장례문화가 우리와 유사하다고 한다. 우리와 차이는 논밭에 3년 모시고, 논밭지하에 물이 흐르기 때문에, 3년 후 에는 다시 화장한다고 한다.
베트남 비행기로 하노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캄보디아의 씨엠립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시간은 한시간 반정도 소요되었다. 캄보디아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공항에서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공식적인 visa fee는 US$20 이지만, 공항 세관원들이 별도로 돈을 달라고 하여 추가로 몇불 더 주었다. 해외 여행시 흔치 않은 일이라 당황도 했지만 캄보디아의 상황을 알고는 어느정도 이해도 되었다.
캄보디아는 왕국(Kingdom of Cambodia)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남북 최대거리 450km, 동서 최대너비 580km이다. 서쪽과 북서쪽은 태국, 북동쪽은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은 베트남과 접하고 있으며, 면적은 18만, 인구는 14백만명(2008년 추계)이다. 캄보디아의 입국은 Time Machine을 타고 우리나라의 50-60년 대로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970년대초 아시아에서 축구를 잘하는 나라인 크메르가 오늘날의 캄보디아이다. 그러한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세계의 빈민국의 하나로 전락한 것은 정치지도자를 잘못 만난 것으로 생각 된다. 캄보디아는1975-79년 공산주의 정권인 크메르루즈 시대에 폴포트 총리 같은 못된 지도자에 의해 지식인들이 대량학살(킬링필드) 되었다. 이 4년간 캄보디아 총인구 800만중 28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유는 지식인들은 국가를 통치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베트남에 의해 10년간(1979-1989년) 점령 당한 바 있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였을 때 크메르루즈군은 산악지대에 주둔하며 베트남에 대한 저항으로 지뢰를 사용하였다고 하며, 이로 인하여 캄보디아는 지뢰 매설량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라고 한다.
지금도 사회불안요인은 상존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전쟁시 지급된 총기류 회수가 안되었고, 캄보디아의 군대도 국가의 군대로 일원화 되지않고, 정당별(여당2,야당1)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훈센수상이 수상직을 5번하며 정권을 잡고 있다.
관광을 하기위해 관광버스를 타거나 내릴 때에는 항상 어린아이들이 one dollar를 달라고 구걸행위를 하는데, guide는 돈주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생각은 하지 않고 돈벌이에만 내몬다고 하며 차라리 물건을 파는 아이들의 물건을 사주는 것이 낫다고 한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여 돈을 안주더라도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으며, 어떤아이는 good-bye라고 인사까지도 하였다.
캄보디아는 국토의 80%가 평야이고, 국경지대에는 우거진 삼림이 있으며, 유명한 보석광산, 풍부한 석유매장량 등 자연자원 면에서는 복받은 나라라고 한다. 베트남의 호지명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 국가발전에 매진한다면 캄보디아의 앞날은 밝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캄보디아에서의 관광은 앙코르유적군부터 시작하였다. 앙코르유적군은 802년-1432년간 존속했던 앙코르왕국의 수도이다. 앙코르유적군은 126개의 사원으로 이루어 졌을 정도로 앙코르 왕국이 번성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앙코르왕국은 싸얌(현재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와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후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물학자 앙리무어에게 재발견될 때까지 앙코르유적군은 삼림속에 묻혀 있었다. 앙코르유적군의 각 사원에 사용된 돌은 두 종류이다. 황토석(화강암)과 사암인데 황토석은 건물의 기저에 사용되었으며, 사암은 건물중간 위쪽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돌의 색깔은 원래는 붉은색 돌이었으나 화재로 인해 현재는 검은색 돌로 보인다. 현재 앙코르유적군은 자연파손과 내란으로 인한 손상이 심해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앙코르유적군중 첫 번째 방문한 사원은 프놈바켕(Phnom Bakhen)이다. 앙코르왓과 바이온 중간의 높은 언덕에 지어진 유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수직으로 70도 이상으로 고소 공포증이 있으면 올라갔다가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간신히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일행중의 젊은이의 도움을 받았다. 정상에 서면 발밑으로 앙코르왓이 보이고 석양이 환상적이라고 하는데 방문한 때가 오전이라 석양은 볼 수가 없어 유감이다. 남녀의 성기를 나타내는 링가와 요니의 모습도 보았다.
앙코르유적군중 두 번째 방문한 사원은 앙코르왓 (Angkor Wat) 이다. 앙코르왓은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13년-1150년(37년간)동안 건설한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로서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세계최대 석조사원이다. 불가사의라고 하는 것은 사원에 사용된 거대한 돌들을 먼데서 운반하여 현장에서 아름답게 조각하고, 균형미를 맞추어 건설한 능력을 어떻게 보유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앙코르왓이란 「사원(에 의해 조성된)마을」이란 뜻이다. 중앙사당은 폭 190m의 해자와 주벽으로 둘러싸인 외곽과 높이 65m의 3겹의 회랑을 가진 석조의 기하학적인 대가람이다. 이것은 힌두교의 우주관을 상징한 것으로 중앙사당을 중심으로한 5개의 높은 탑은 힌두교세계의 신이 머무는 땅인 수미산이라고 한다. 5개의 탑은 정면에서 보면 3개만 보이게끔 되어있는 완벽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9개의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5개의 탑만 남아 있다. 또한 중심부에는 목욕탕으로 추측되는 네 개의 연못이 있는데 이것은 지상의 성지를 나타내고, 중앙사당에 있는 네 개의 성지(聖池)는 천상의 성지를 나타낸다. 앙코르왓은 물을 가지고 건축물의 균형을 맞추었다고 하며, 그만큼 역대왕중 물을 잘 다스리는 왕이 훌륭한 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고 한다.
앙코르왓은 종교적인 의식 등에 이용됐다. 왕과 신을 일체시하는 사상아래, 사당의 중심탑은 비슈누신과 수리야바르만 2세를 일체화한 상을 모신 신성한 장소였다. 또한 앙코르왓은 수리야바르만 2세의 묘이기도 하다. 앙코르유적군의 다른 사원은 모두 동향인데, 앙코르왓만 서향인 것은 서방정토를 받들기 위함이라고 한다.
앙코르유적군중 세 번째 방문한 사원은 바이욘(Bayon) 사원이다.
12세기말, 왕조의 최전성기를 맞이한 자야바르만 7세가 건설에 착수했다. 힌두교를 대신해 대승불교를 받아들이고 「커다란 도성」이란 뜻의 앙코로 톰을 지었으며, 그 앙코로 톰의 중심사원이 바이욘이다.
사원 중앙에는 중앙사당이 우뚝 서 있고, 중앙사당을 둘러싸듯이 소당이 서 있으며, 각각의 상부에는 관음보살의 얼굴이 동서남북 사면에 새겨져 있다. 사면불탑은 어디에 있어도 보살이 자애넘치는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중앙사당을 둘러싼 소당은 16개가 있으며, 이들을 순례하듯 따라 이동하면 된다. 바이욘 중앙사당을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회랑에서는 훌륭한 부조를 볼수 있다. 왕코르왓의 부조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반면, 바이욘에는 당시 서민이나 귀족의 생활모습 등을 그린 부조가 많다.
앙코르유적군중 네 번째 방문한 사원은 따 프롬(Ta Prohm) 사원이다.
왕코르왓을 만든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불교사원으로 일명 밀림사원이라고 불린다. 현재는 거대한 스포안(뽕나무과 상목교목) 의 뿌리 때문에 유적이 침식해, 자연에 의한 파괴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유적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독특한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어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으며 사진 촬영하는 명소로 되어 있다.
현재 유적의 바깥쪽 뿐 아니라 내부로도 침투하려고 해 무너져 버릴 것 같은데도 나무를 제거하거나 벽을 다시 쌓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자연과 공존시키려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붕괴될것 같은 벽을 지탱하고 있는것도 나무들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이 외에 앙코르 유적군중 문둥이왕 테라스, 앙코로 톰의 무지개 다리 등을 관람하였다.
앙코르 유적군 이외에 관광한 곳은 톤레샵 호수 및 수상촌이다.
톤레샵 호수는 직사각형으로 가로 8km, 세로 2.2k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호수라고 한다. 메콩강이 황토흙을 실어나르는 까닭에 탁한 황토색을 띄지만 해질녁에는 황금색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나 오후 2시경에 보니 호수는 크지만 여늬호수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6개월 동안 비가 안오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지역특성상 가옥도 이에 맞게 독특한 형태로 지어져 있다.
수상촌은 배로 관광하였는데 물 위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며, 학교도 있어 마침 수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보면 이런데서 무슨 재미로 살까 하는 생각이 들어, guide에게 물어보니, 이곳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보다 더 높다는 대답이다.
관광 도중에 들린 곳은 농촌의 노상시장이다. 우리나라의 시골 장을 연상케 하나, 시장 상인들은 진열된 농산물을 우리에게 판매하려는 의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노상 판매물 중에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등이 있었는데, 이 고기들이 더위에도 상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 지역에는 원적외선이 있기 때문이란다. 캄보디아에는 전기값이 엄청 비싼 점을 감안할 때 자연의 또 다른 축복이라고 생각된다.
베트남, 캄보디아를 여행한면서 느낀 점은 국가가 좋은 자연 관광자원을 관리, 개발하였으면 더 많은 광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특히 관광버스, 배 등에서 역한 기름냄새가 나와 모처럼의 즐거운 기분을 사라지게 하곤했다.
첫댓글 베트남과 캄보디아 여행기 넘 잘 읽었습니다, 마치 내가 직접 가본 느낌으로 영행기 감명 받았습니다.
담엔 또 존 여행지 소개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꼬옥 가보고 싶네요. 아니 담에 저두 가려고요 ㅋㅋㅋㅋㅋ
사랑하는 선배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매이지 않은 자유스런 기분으로 홀가분히 여행 다녀온 그 맛이라니~~차분하게 쓴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여행후기도 꼭 올려주세요.
여행후기를 자세하게 기록하여 주신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난 2005년 12월 12일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캄보디아를 4박5일간 다녀왔습니다. 글을 읽는 동안 그때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그당시와 비교해 지금도 많이 변하지 않은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리고 베트남과 호지면에 대한 글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