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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교황 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며 또한 감추어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언굽하기로 한다. 그들은 형상물에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께 아무련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 곧 영광이라는 것이 彫像이나 畵像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련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심고 있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 "예배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련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두움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샘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고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하여 디른 별명을 붙인다고 해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부니 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그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機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순수한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것은 정당하게 아름답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익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건실한 예술가들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재능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물 이외에는 무엇이나 만들거나 그려서는 안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을 흉측한 형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가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요,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전자는 교육에 있어 필요하나 후자는 인간의 쾌락을 위한 것 외에 아무 목적도 발견할 수 없다. 케도릭 교회에서 발견되는 형상물들은 후자에 속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다.
13. 건전한 교리를 가진 교회는 형상물을 예배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기독교의 아주 순수한 교리가 왕성했던 500년 동안은 교회 안에 어떤 형상물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형상물이 없어 던 때 보다 형상물을 가질 때 교회는 타락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형상물은 높고 숭고한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이 없는 것이라 해도 생명이 있는 지체와 감각이 있는 생명체와 비슷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고 결국 그것들이 살아 호흡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우상이 수족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으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을 안할 수 없게 만든다." "우상은 눈과 입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 많은 힘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우상은 말하거나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상을 섬겨서는 안되는 이유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생각을 했지만, 니케아 회의가 우리의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간 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780-802년까지 동방 제국의 여왕. 칼빈은 그 녀를 "Irene"라고 하는 사악한 Proserpine(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여왕)이라고 하였다).의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는 교회 안에 형상물을 설치할 뿐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했다. 이 회의는 우리들의 반대자들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했다. 이런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을 가진 자들의 발광이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말하는 욕망 만큼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는 있다. 오늘 날 형상물 사용을 지지하는 옹호론자들은 형상물 사용을 허용하는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룰마뉴 대제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문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서다. 여기에 당시에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여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창 1: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형상물을 마땅히 제단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두나니"(마 5:15)라는 말씀을 인용하기도 했다. 더욱이 어떤 이들은 형상물을 우러러 보는 일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시 4:6)라는 말씀은 印證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했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8)이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靜觀함으로써 알게된다는 것이다.
데오도루스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시 67: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시 16: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요컨데 그들의 어리석음이야 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誤用
우상 숭배자들은 성경을 오용하여 우상 숭배를 옹호한다. 즉 "야곱이 바로 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 47:10]" "야곱이 그 지팡이에 머리를 의지한 것(창 47:31; 히 11:21). 야곱이 세운 돌 비에 기름을 부은 것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창 28:18]"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 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시 99:9]"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12]" 같은 말씀들을 우상 숭배를 뒷받침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미라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이 마치 하늘에게 내려온 것처럼 신성시하기도 했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물 예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파문했다. 그들은 황제의 상에 분향을 하는 사람들은 성자의 상에는 더욱 분향을 해야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했고 강요했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 감독 콘스탄티누스는 형상물을 경건히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똑 같은 예배와 영예를 그 형상물에 드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나 마르키온파와 동류로 정죄를 했다. 동방 교회의 요한 사절은 "그리스도의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배라는 말인 "라트리아"와 봉사란 말인 '둘리아'를 동일시하고 있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제 12 장 : 하나님은 우상과 달리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 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강의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수반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말할 때 하나님의 어떤 속성도 다른 곳에 귀속시켜서는 안된다. 종교라는 헬라어 '유세베이아'는 예배를 뜻하는 말로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외곡된 예배를 피하기 위해 예배에 대한 확실한 법칙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와 우상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셨는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그리고 율법에 다음 두가지를 첨가하셨다.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하나님이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유일하신 분으로 역사하시고, 둘째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람들이 당연히 영광을 돌리도록 규범을 정하신 것이다. 즉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신성하시고 고유하신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귀속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간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지고적 위취를 지키면서도 다른 신들은 하나님만 못하지만 섬긴다고 한다. 즉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신이시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2. 차이 점이 없는 구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천사를 섬기는 것이나 아무 구별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성자를 섬기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것에게는 봉사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봉사라는 말이 예배라는 말이고 그 말은 어떤 경우에 더 광범위한 섬기는 말로도 쓰이는 말이다.
3. 형상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까지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말했는데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라고 했다. 여기서 '종노릇하다'라는 말은 '둘리아'라는 말로서 우상 숭배자들이 성자 숭배을 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의 예배 해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라 하신 말씀에서 경배라는 말에 '라트리아'라는 말을 쓰셨는데 이 말씀을 하게 된 것은 사단이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단은 '경배'라는 말을 '둘리아'라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천사 앞에 무릅을 끓었다는 이유로 천사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계 22:8]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9]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라고 했다.
사도 요한 이 천사에게 절을 하려 한 것은 그를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대신으로 '절(프로스쿠네인)'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사람에게 절을 받게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 윤리적인, 세속적인 존경을 의하는 것이지 종교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런 행위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종교가 일단 예배와 결합이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넬료에게서 볼 수 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행 10:25]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행 10:26]"
고넬료의 인격과 신앙은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보고 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런 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있는 것을 본다.
바울과 실라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허메라 하고 바나바를 쓰스라 하여 경배하려 했다. 이 때 두 사도는 기겁을 하여 말하기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행 14:11]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행 14:12]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행 14:14]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행 14:15]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 14:18]"라고 하여 그들을 만류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죄가 되는 것인가를 너무 잘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슥 14:9]"라고 분명히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드릴 예배를 다른 것에도 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도 좋으시고 다른 신들이나 사람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한 적극적인 영광의 훼손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미신은 처음에 하나님에게 드리는 영광을 태양, 별, 우상을 위해 고안했다. 그러나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 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썩어질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큰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최고의 신을 섬기는 원리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저급한 신들, 수호신들,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련 차별없이 제물을 바치는 일반적인 행위를 하고 결국 하나님도 그런 신들 중의 하나로 취급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런 행위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가지신 특별한 은총과 영광을 수 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제 13장: 성경은 하나님은 한 본체 시나 본체 안에 3위가 존재함을 가르치신다.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일축하시고 교묘하게 꾸민 이론들을 말살하시기 위해서다. 고대의 세네카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하나님일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염려하시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나타내시지 않았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계시를 하셨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실로 우리들을 두렵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 또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없게 만드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하늘 나라에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셔서 당신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다.
마니교 사람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그러므로 하나님도 인간의 몸과 같은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한다. (이 마니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 졌으며 이 파의 교주는 주후 372년에 사망한 아우디우스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손, 발, 눈이 있는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 유모가 어린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손, 발들의 말들이 신인동성동형적인 표현일 뿐인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 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사 5:25]"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사 30:30]"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사 40:12]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 40:13]"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에게 알리시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의 눈이 있고 팔이 있으되 사람의 그것과 같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2. 하나님 안에는 삼위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상과 구별하시기 위해 아주 독특한 특징을 사람에게 보이셨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그것이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그러나 단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세분이시다 라는 다신 적인 사상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세 분으로 분활 되었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위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은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를 인용 예수 님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시고 밀초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은 파생 체라고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예수 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일하시며 분할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 모든 완전을 포함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본체를 예수 님을 통해 세상에 들어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 님은 하나님의 그림자나 능력을 덧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본체는 예수 님에게 나타나셨으나 예수 님 자신의 본체도 있어서 예수 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성령 님에 대한 것도 결론 지을 수 있다. 성령 님도 본질은 하나님이시나 성령 님의 본체가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본질은 하나이시지만 본체로서는 세 분이시다. 이것은 위라고 말한다. 이 본체를 사람들은 더 알아듣기 쉽게 '실재' 또는 '실체'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3.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준다.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실체 하시는 완전한 분이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은 성경 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삼위 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잘된 표현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성경에 없는 말이라고 해서 쓰지 못할 말로 말하는데, 성경 자체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외래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 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민일 이와 같이 불러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 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자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부패한 교의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광설을 늘여 놓는 불경 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리우스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 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것을 당연한 일이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하였기 때문에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이와 같이 교활함을 그 숨은 장소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아리우스 파가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저주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 신앙을 들어내었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 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했더라면, 저들은 까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잇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 파와의 구별지은 것이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은 구별을 위해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구별하는 데 불과하며, 이런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해서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순서나 구별이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이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함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거절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 때문에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한 이 문제를 다룬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 일괄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그 예로, 힐라리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條文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했던가?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런 문제를 다루었던가? 희랍의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했다.
제롬은 역시 다마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을 독자들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롬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毒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안았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성실히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 였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정성이 결여되었다고 그는 보았는데 이런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제 6권에서 "휘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을 무시한 사람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히 공언했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로운 용어를 제시 한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저들이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람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하여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지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해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 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 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혹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던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가 "성부와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까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다고 주장해 보라. 그리면 그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 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세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해 보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런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잡혀 이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는 그 말이 본체가 하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 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리 간계 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의 숱한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저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더 낳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실재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며 교통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 다른 뜻을 가진다. 만일 '말씀'이 다만 하나님일 뿐 아무 특징도 없다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부당하다. 그는 즉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첨가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킨다. 즉 말씀이 하나님의 본질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실재의 관념이 분명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히 본질과 밀접히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 없지만, 그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삼위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님이 대조될 때 삼위의 두드러진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위는 서로 잘 전달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성부에 대한 독특한 구별의 표시가 성자에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는 없다.
7. 말씀의 신격 (성자의 영원한 신격)
이 장에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발전시킨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쪽에서부터 나온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소리로만 생각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덧없는 소리가 아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영원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 1:10]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벧전 1:11]"과 같이 사도들이나 전대의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이 말씀의 영이라 한다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매개자로 제시하시므로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것이 있으라' '저것이 있으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사도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바로 성자라고 증거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 8:2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괄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시적이며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당신의 계획을 말씀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주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모세가 말한 것보다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세 분의 실제가 함께 일하셨다는 것을 명백히 말씀하시고 게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 대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이라고 선언을 했다.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영원하신 본질을 말씀하시고 특수하신 실재 즉 위를 귀속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가도 보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어야 옳은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게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어야 하며 이 말씀은 불변하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8. 말씀의 영원성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거시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 즉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새롭게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없었던 무엇이 새롭게 생성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외부적인 사역에 대한 명칭들은 창조 사역 이후에 그에게 적용된다. (예: 창조주)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없었던 것이 우발적으로 새롭게 생겨진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부터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역 1:17)"이라고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즉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셨을 때 말씀의 능력이 세상에 뚜렷하게 들어 난 것이지 없던 말씀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오래 전은 시작이 없는 오래 전이다. 주님은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시므로 존재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명백히 하셨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분명히 못을 밖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서 주님의 영원하신 참된 본질, 주님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9.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여기 쓰인 엘로힘이라는 말씀은 천사라는 말도 되지만 하나님이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 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하신 말씀도 하나님의 유일하신 성격이 성자에게만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10.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
구약에 나타난 천사는 자신을 영원한 하나님으로 불렀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느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 도다[삿 6:12]"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삿 6:20]"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삿 6:21]"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 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삿 6:22]"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삿 7:5]"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삿 7:9]"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 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삿 13:16]"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올라 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으리니라[삿 13:20]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삿 13:23]"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18]" 야곱의 경우에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30]"
주님은 창조된 천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하셨고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슥 2:3]"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 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슥 2: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 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 물 속의 초개의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사 25:10]"
말라기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하셨다.
11. 신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증거가 많다. 그 수많은 증거들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추려 말한다.
1)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증거된 신성이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신성이다. 로마서에서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 9:23]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4]"은 이사야의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사 8:14]"의 예언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즉 그리스도는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 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신 것도 주님은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이 영광을 자신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또 바울이 적용한 시편에서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시 68:18]"하신 말씀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를 인용하시므로 그 하나님이 바로 주님이심을 증거했다.
사도 요한은 환상을 통해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 이 말씀에서도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한다.
히브리 서에서 사도들이 성자에게 드린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101:26]"에서 다윗이 하나님에게 돌린 영광이었다. 또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시 96:7]"라고 하신 말씀은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 1:6]"에서 예수 님에게 돌려지고 있다.
주님은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시 102:14]"와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의 은혜를 베푸신 분이심을 스스로 말씀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바울은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이라고 하셨고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
주님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이다 아멘[딤전 1:17]"의 말씀과 같이 영광을 세세히 받으실 분이시다.
또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하시기 위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를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도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라고 하셨다.
바울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고전 8:5]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하셨으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하셨다.
그렇게 의심이 많은 도마도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요 20:28]"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겠으며, 하나님의 제 이의 위인 신임을 부인하겠는가?
12. 사역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주님은 태초에 성부와 함께 일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주님의 말씀에 극도로 무관심했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큰 자극을 받아 주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라고 기록을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신성에 대해 이토록 어리석게 판단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주님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적을 통해서도 주님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 9:6]" 또한 그리스도는 만물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을 소유하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4]"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해 증명된다.
선지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이적을 행한바 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적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적은 주님 자신이 행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가끔 기도를 하셨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그러나 대부분 주님 자신이 직접 이적을 행하셨다. 주님은 당신의 권위로 사도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막 3:15. 6:7]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의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나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말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이적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 5:36]""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요 10:37]"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얻을 우리들에게 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구원 그 자체가 되신다.
주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이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 역시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선 그 자체인 것이다. 즉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이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근거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라 하신 말씀을 믿고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 분에게 영원한 소망을 둔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도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구세주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하셨고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 18:32]"라고 하셨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마지막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라고 기도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 하셨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4]"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성자의 이름만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자랑인데 누가 감히 주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 첫머리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영광을 성자에게도 동일하게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등)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 주님이 성부의 모든 일에 동일하게 참여하심으로서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실로 경건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성령 님의 신격도 그의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 모세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계는 성령 님에 의해 보존되고. 이 아름다운 세계가 있기 전에 성령 님은 혼돈 된 세계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 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은밀히 말하지 아니 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의 말씀은 아무도 교묘하게 다른 말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은 파송하실 때 그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님은 온 우주에 편제하셔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을 성장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분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아니하시며 이 우주와 자연을 초월해 계신다. 그러나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대하여 확실히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령 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신다. 이 중생은 어디서 빌려 온 능력이 아니라 성령 님 자신이 영생의 창시자로서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것이다. 또한 성령 님에게는 성자에게 속한 모든 속성들이 있으시다. 피조물들 중에 누구도 성령 님의 모사가 될 수 없으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4]" 성령 님은 스스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이라 하셨다. 또한 성령 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 나니[고전 12:10]"를 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런 일들은 하나님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출 4:11]" 즉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을 성령 님이 하신다는 것은 성령 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고 의롭다 함을 받고 진리, 구원, 사랑, 은혜, 성화가 모두 성령 님의 하시는 구원 사역이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성령 님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 아니라 창시자이시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라고 하셨다.
15. 성령의 신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 님의 명칭에 대해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고전 3:16-17; 6:19; 고후 6:16).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말씀은 성령 님으로 내주 하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만일 우리가 나무나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 님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성령 님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 하시지 않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라 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
사도들은 성도들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이라고 부르셨다.
성령 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하시면서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바울은 그 만군의 주가 성령 님이시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 6:9]"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행 28:26]"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 님이야말로 여호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이사야는 그 백성들의 완고함에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말을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라고 하시므로 성령 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다.
주님은 성령 님에 대한 범죄에 대하여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막 3: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이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므로 성령 님의 신적 위엄에 대해 말씀하셨다.
또 시인은 우주 만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임을 말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이라고 하셨다.
16. 하나님의 하나 되심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더욱 명백히 계시하셨다. 삼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친밀한 하나님을 알리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증거들 중에 탁월한 증거가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주),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을 시켜 놓았다. 그는 믿음이 하나요 주도 하나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삼위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여기 저기를 두루 다녀 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론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만일 참 신앙이 여럿이라면 그 신앙을 위한 신도 여럿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례는 신앙의 성례다. 그것은 유일한 하나님에게 기초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나서는 세례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 님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삼위 하나님을 함께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님이 한 분이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7. 삼위
한편, 성경은 성부의 말씀,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구별이지 분활이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이 말씀들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신다는 뜻이지 말씀이신 성자와 성부가 다른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님은 성부와 자신을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5:32]"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이라고 하셨지만 다른 성경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이라고 하셔서 만물을 함께 창조하셨다고 하셨다.
성부는 이 세상에 죄인을 위해 죽으려 오시지 않으셨다. 성자 되신 예수 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님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셨으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신 분이시다. 그리고 성부와 상자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라 하심으로 삼위 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셨다.
18. 성자, 성령의 차이점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민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 님께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존재하실 수 없으시고, 또한 영원에 있어서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성은 동일한 영원성이다. 그러나 구태여 순서를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모든 인간은 먼저 하나님을 그 다음은 지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계획을 수행하는 능력을 생각하는 것이 편해 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성자는 성부에게 발생되고 성령 님은 성부와 상자에게서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의 말씀에 나타나 있고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 말씀하셨다.
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이 구별은 하나님의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영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성부와 상자와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입증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제 안에서 이해되고 각자가 자신의 독특한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님이 전적으로 피차의 안에 거하신다. 이 사실을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이라 하셨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라 불린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는 성부라 불린다.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부가 아니며,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자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 불리우신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 불리우신 그분은 한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
20, 삼위 일체 하나님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고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이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이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을 구별해 내는 거이다.
그러나 각 위의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또는 상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특별히 성부에게 적용된다. 이와 같이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신해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 갈 필요가 잇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르쳐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떤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도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 말에도 밝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인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랍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런 신들메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욜 2: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를 했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했다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말하고 잇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全 本質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된다.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반 삼위 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사탄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부터 뒤집어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부분적으로는 위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했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음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의 그 왜곡된 광란을 반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 냉정하고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들의 사상과 우리들의 언어 그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작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 자신에게 아끼기로 하자.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하신 충분한 증거 자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에게 마끼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이 아노모에오스파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다섯 편이나 있다. 그러나 이 설교들이 그 건방진 쾌변론 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보다 더 신중히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그런 경솔한 행동의 불행한 결과로, 우리가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이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아니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도 하지 아니할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의 이해력에 대한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들어 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한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天來 神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 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하는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들은 야수와 같이 광란하며,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훼손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신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하던 분파가 많은 분파로 갈라졌으며,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찟어 놓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위의 구별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참으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미 성경에서 입증이 되었듯이,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아니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 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하여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령도 성자와 구별되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견지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들을 주장한 자들에 대해서도 문은 굳게 닫쳐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세르베투스나 그의 동료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저들의 허위를 논하는 게 필요하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기 때문에 모든 삼위일체론 자들을 향하여 보통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상치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組)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위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도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심에 따라 그로 인하여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자기의 불합리한 주장을 비유로 말했는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들 안에와 나무와 돌 가운데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에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그는 실로 "위"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설에 대하여 장황히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였기 때문이다.(요 1: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였다고 하면(요 17: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관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제이시다 는 결론이 나온다.
23.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떤 자들은 세르베투스의 불 경건한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와 비슷한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가공스러운 말을 삼가지 않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하신 "본질의 수여자"이시며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된다고 했다.
저들의 그 가시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 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저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때때로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저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를 한 位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참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7,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증보 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리고, 더욱이 명료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데 ,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일 성부 이외에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할 바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한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 되여서는 안된다. 분명히 이사야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1), 이 하나님을 가르쳐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전하였기 때문이다(요 12: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라고 증거하신 분도(사 8: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롬 9:38).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을 끓겠고-----"(사 45:23)라고 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14: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했다. 곧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위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시 102: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 시 97: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므로(히 1: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에게 옮겨진다고 하는 쾌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것은, 여호와라는 명칭이 언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예레미아의 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즉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로다"(렘 10: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이후에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만물을 존귀케 하신 창조주가 자존하지 아니하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他者로부터 빌려 올 수 있다는 말인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상부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만일 전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던가 아니면 성자에게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Rlelfr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던가 또는 전체에서 인출된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저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고(롬 8:9)고 바울의 증거에 의해서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저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 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는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상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면 저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한다면 성부가 이 본질을 상자와 공유하였는가 아니면 공유하지 않았는가를 우리들에게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실로 이 대답은 부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자가 절반만 신이라고 하는 말이 되는 것이고 이런 말은 가증스러운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저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고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 같이 전적으로 완전히 공통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한다면, 본질에 관한 한 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저들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성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조건이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저들은 말한다.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반박할 수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인용한 여러 구절들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을 들어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相關的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位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한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라고 저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이런 반대는 한마디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칼뱅) 다른 곳에서 더욱 자세히 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 였다는 이유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증보 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저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19: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저들이 반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저들의 불 경건은 저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말씀이 선하다고 한다면, 저들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시지 않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들의 주장을 한층 더 확실하게 해 준다.
사실은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17), 지혜로우시며(롬 16:27), 참되시다고(롬 3: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 되는가 묻고 싶다.
태초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 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운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다는 말인가?
저들은 그리스도를 당연히 예배를 받으실 분으로 todrr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자기에게 끓기를 요구하셨다고 한다면(빌 2: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0:3).
만일 저들이,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고 말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 저들의 잘못된 이론을 반박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이라는 묘한 구별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나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중보자의 전 인격에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히 마무리 지어 놓았다(빌 2:6-7).
실로 그는 여호와로 불리시고, 구릅들을 타시며(참조, 시 18:10, 80:1, 99:1), 온 땅의 왕이시며(시 47: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 성을 부인할 수 있는가?
이사야는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될 수가 없는 말이다. 이사야의 이 말씀은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에까지 회복시키시는 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 이였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동작 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다양하게 되던가 아니면 저들이 다만 그리스도를 이름뿐인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도리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다음 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 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으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 자들이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한 하나님 안에 여럿의 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모세의 이 말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이 세상에 창조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적으로 속하다 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 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기지 반론을 쉬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라는 명칭이 성부에게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정용 된다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23).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은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25.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성을 소유한다.
그러나 저들은 이 문제에 있어 속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 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라는 점에서는 발생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저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삼위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들은 저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들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히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아마 저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가 아니라 諸神의 삼위일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했는가 안했는가를 묻는 그들의 무익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 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저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곳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질의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이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하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그가 성부로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옛날의 전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위에만 적용시켰다. 그것은 본질을 그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 아니라 가장 큰 불 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와 성령의 본질을 변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돈 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한다면, 성부는 어떤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이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된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격하시키는 것이 불과한 결론을 낳게 될 것이다.
26. 성육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자들은 반대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적인 근원이신 상부에게 한정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물른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인격으로 말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증간 위치를 취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었다고는 하지만(빌 2:7) 성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추어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 보다 못한 자 였다고 하였으나(히 2: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인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하나님께로 가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참조 16:7, 20: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 빛나는 그 광채의 완전함이, 육신을 입은 자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하여 훨씬 더 뛰어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고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니라(고잔 15:24, 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시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1; 요일 5: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2- 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 새 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은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다른 참되신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도한 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에게서 많은 구절들을 수집했다. 이것은 저들의 수치스러운 미지를 들어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 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저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 할 경우, 옛날 종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로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사실상 성부였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이 종식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 3권 6장을 일고 보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이 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한다. "성경에는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이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 2권 제 46장에서 밝힌대도,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외에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자와 성부를 다 같이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제 3권 제 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시며 왕이시오 하나님이시며 심판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 제 3권 제 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 주시며 모세의 손을 통해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분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 였다고 터부니 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 에서부터 오시며(합 3: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 3권 제 18장, 제23장). 제 4권 제 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잇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동권 제 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 자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28. 터툴리안을 인용한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저들이 터툴리안을 저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의 표현 방법이 거칠고 모호 한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에메하게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사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라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 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만 위를 적응할 때만 이라고 했다. 그는 어디선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는 바로 말씀이 되신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저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가 성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일괄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런 구별에 대하여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된다고는 한,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도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위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이외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서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 일체의 교리를 인정했다.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다. 순교자 져스틴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불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들을 지지한다. 져스틴과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를 할 것이다. 힐라리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예리하게 역설했다.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아니 그와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연결이 안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저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들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 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저들의 파렴치함에는 더 참을 수가 없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희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의 이전 학자들이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는 않았다. 이 악한 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 들었던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생기면 그 달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에메하거나 모호한 점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異論도 없이 받아 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쳤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 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라는 저서 제 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어거스틴이 그 때 자신을 망각했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을 해병하며,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갖 쾌변으로 오늘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이제까지의 고찰로 인해 사탄의 일체의 쾌변을 물리쳤다고 생각이 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으로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한 내용들은 무분별한 사변들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교회의 건덕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별로 유익 되지 않는 일이나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 실로 성부의 발생이 계속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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