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서도 1시간 정도 차로 굽이굽이, 바닷길이 아닌 산길을 타고 들어가면 오지 마을 죽장면 상사리에 다다른다. 해가 뜨는 순간부터 지는 순간까지 한 줌의 햇살도 놓치지 않고, 바람이 쉼 없이 오가는 곳에 4천 개의 장독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메주를 띄우고 숨 쉬는 옹기에 장을 담아, 자연과 시간이 함께 ‘맛’을 익히고 있다.
포토그래퍼: 최해성 / 어시스트: 오혜숙 / 에디터: 양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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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우리 조상들은 맛 좋은 장을 담그려면 알맞은 시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장은 입춘 전 아직 추위가 덜 풀린 이른 봄에 담가야 소금이 덜 들어 삼삼한 장맛이 나고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특히 정월에 담근 장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해 ‘정월장’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정월(음력 1월)을 맞아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드는 포항 죽장면에 다녀왔다.
진정한 토종 곡식, 콩
콩은 우리가 먹는 곡식 중 유일하게 한반도가 발상지이다. 작물의 발상지를 추정하는 지표인 야생종이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콩 재배는 약 3천 년 전으로 추정하는데 오래된 만큼 한식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노란색 콩, 대두를 이용하여 장을 담았다. 죽장연에서 사용하는 콩은 죽장면에서 자란 콩만을 사용한다. 죽장면은 경북인데도 지대가 높아 밤과 낮의 기온차가 유난히 크다. 일반적으로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재배하는 농산물은 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사과가 달고 맛 좋다고 알려진 만큼, 콩 또한 알이 굵고 크기가 일정하다. 콩은 깨끗이 일어 여름에는 8시간, 겨울에는 12시간 정도 담가 불려 삶을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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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
신라시대 폐백 품목에 들어 있었던 귀한 메주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왕비의 폐백 품목에 ‘시’를 보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시는 콩을 삶아 어두운 곳에서 발효시켜 소금을 섞은 것으로 오늘날의 메주에 해당된다. 소금이 귀했던 시절이니 값어치가 있었을 뿐 아니라 장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메주를 맛있게 띄우기 위한 첫 단계는 콩을 잘 삶는 것이다. 이곳 죽장원에서는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70kg들이 가마솥에서 삶는다. 콩을 삶는 시간은 모두 다섯 시간이다. 1시간 삶고 나머지 4시간은 뜸을 들인다. 그래야 콩이 누렇게 잘 뜨고 물렁물렁 잘 무르기 때문이다. 참나무 장작불에 올려둔 가마솥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펄펄 끓는다. 콩이 타지 않도록 솥뚜껑 위로 찬물을 일정 간격으로 붓는다. 콩이 타버리면 그 맛이 온전히 장맛에 배기 때문이다. 온도를 낮춘다고 뚜껑은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 뚜껑을 열면 콩의 비린 맛이 퍼져버린다. 시간이 지나 참나무의 향이 배어들면서 옅은 황갈색으로 콩이 익으면 뚜껑을 연다. 고소한 향이 가득 퍼진다. 뜨거울 때 콩을 빻아 네모지게 모양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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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각시
선조의 지혜가 담긴 메주각시
메주를 빚은 뒤 짚을 손으로 꼬아 각시를 만들어 매달아 말린다. 이 과정에서 바실루스 서브틸리스이라는 미생물을 만나 발효되고 번식하게 된다. 이 미생물은 짚을 좋아해 몸에 좋은 균이 많이 생긴다. 이러한 과학적 원리에 대한 지식을 체험으로 터득해 전해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전통 방식을 따르되 장맛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죽장연에서는 매뉴얼대로 메주를 말린다. 메주는 가로 21cm, 세로 14cm, 높이 11cm인 틀에 삶은 콩을 눌러 담아 모양을 만든 뒤 짚이 깔린 나무 건조대에서 하루 건조시킨다. 건조시킨 메주를 각시에 매달아 5~10℃ 온도와 30~40%의 습도에서 말린다. 40일이 지나 잘 굳은 메주는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말랑한 상태가 된다.
잘 굳은 메주를 황토로 만든 발효실로 옮겨 켜켜이 짚을 깔아 3~4단으로 메주를 쌓는다. 이때 발효실의 온도는 25℃이고 습도는 60%이다. 3일마다 메주의 아래위 위치를 바꿔주며, 그렇게 40일이 지나면 메주에 흰 곰팡이가 핀다. 이처럼 흰 곰팡이가 겉으로 나온 것이 좋은 메주이다. 검은색을 띤 것은 잡균이 부패를 일으킨 경우로 장을 담갔을 때 쓰고 짜다. 윤정진 셰프는 발효시킨 메주의 냄새를 맡더니 ‘제대로 발효되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메주에는 쿰쿰한 냄새가 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잡균이 생겼을 때 나는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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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발효 과학 용기, 옹기
잘 띄운 메주, 깨끗한 물, 간수를 뺀 천일염, 독소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숨 쉬게 도와주는 옹기, 그리고 깨끗한 자연이 뒷받침해주면 최상의 장이 만들어진다. 죽장연에서는 지하 200m 암반수를 한 번 더 정제한 물과 3년간 간수를 뺀 신안 천일염의 비중을 18보메로 맞춘다. 지역과 계절에 따라 소금의 양이 달라지는데, 보통 18~25보메이며 따뜻할수록 염도를 높인다. 무형문화재 이무남 옹기장이 빚은 항아리에 조각내어 바짝 말린 메주를 채우고 18%의 소금물을 부어 삼베나 모시로 망을 씌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둔다. 아침에는 뚜껑을 열어놓고 밤에는 뚜껑을 덮어 약 40~50일간 익힌다. 항아리에 빗물이 들어가면 장이 상하게 되므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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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가르기
장 가르기
40~50일이 지나면 장 가르기 한다. 간장을 뜰 때는 메주가 부서지지 않게 용수를 박아 맑은 장국을 떠내고 남은 건더기는 따로 걸러 다시 옹기에 담는다. 맑은 장국은 솥에 부어 달여 간장을 만들고, 옹기에 담긴 된장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숙성되면서 제대로 맛이 나기 시작한다. 이때 된장 윗면에 면포를 깐 뒤 고춧가루로 덮어 세균이 못 들어가게 막는 것이 죽장원의 특징이다. 6개월 발효시킨 햇된장은 먹을 수 있지만 1~2년 정도 묵은 된장이 가장 맛이 좋다. 간장은 끓일 때 거품을 걷어내고 어느 정도 졸아들면 항아리에 붓는다. 햇볕이 좋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아침에는 뚜껑을 열고 저녁에는 닫아 발효와 숙성이 잘 이루어지도록 한다. 간장은 된장과 달리 오래 두면 둘수록 더 깊고 풍미가 생긴다. 1~2년 된 묽은 간장은 색이 연하고 주로 국을 끓이는 데 사용하며, 3~4년 정도 된 간장은 찌개나 나물을 무치는 데 넣고, 5년 이상 된 간장은 맛이 달고 색이 진해 약식, 전복초 등을 만드는 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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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장연 장으로 만든 시골 밥상
죽장연 장으로 만든 시골 밥상
죽장연에서 만들어지는 장은 죽장면에서 자란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정월에 마을 주민이 함께 장을 담가,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사방으로 통하는 곳에서 익어간다. 상사리에서 손맛 좋기로 소문난 송춘희 씨가 장으로 만든 시골 밥상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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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된장장아찌,산초고추장장아찌,생버섯간장장아찌
고추된장장아찌
고추는 씻어 물기를 말린 뒤 된장에 박아 6개월 정도 삭히면 아삭하고 곰삭은 장아찌를 만들 수 있다.
산초고추장장아찌
쌉싸름한 어린 산초 잎을 따서 소금에 3개월 정도 재워두었다가 꺼내 하루 정도 물에 담가 소금기를 뺀다. 고추장과 매실청을 동량으로 섞고 참기름과 다진 마늘을 적당히 넣어 섞고 양념장을 만든다. 물기를 꼭 짠 산초 잎을 양념장에 섞어 항아리에서 3개월 동안 숙성시킨다.
야생버섯간장장아찌
산기슭에서 직접 딴 향이 강한 야생버섯으로 만든 간장장아찌. 진간장과 맛술, 소주, 매실청을 동량으로 넣고 달인 뒤 버섯을 넣어 일주일 동안 둔다. 간장물만 걸러내 끓인 뒤 식혀 버섯이 담긴 항아리에 붓는다. 3일 간격으로 2~3번 간장물 조리는 것을 반복하면 상하지 않고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