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한옥마을 진도다시래기
내나 지난 9월 14일 금요일 지녁 때 남산한옥마을 민씨 가옥 마당케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 진도다시래기가
항꾼에 펼쳐진 진도 굿판이 열렜었넌데 고날 다시래기 공연이여라.
다시래기란 초상집에서 벌이는 가무극적 연희(歌舞劇的 演戲)로 일종의 코미디극인데(물론 호상의 경우로 한정되나) 새로운 길을 가게 되는 망자를 흥겨움 속에 축복해드리고 남은 자들에게는 위로와 함께 새로운 삶에 희망을 주기위한 - 죽음을 대하는 진도인들의 승화된 장례 형식이라고 볼 수 있겄지라?
한편 의학계서는 이를 상주들의 심리충격까지 치료해 주는 고도의 정신의학적 예술행위로 평가하고 있어람짜.
일단 진도의 상장례에서는 씻김도 그라고 다시래기도 내나 춤과 노래로 이뤄지는데
타 지역의 일부인들은 ‘엄숙한 장례에서 무슨 춤과 노래가 웬말이냐?’ 하면서
이상하게 또는 무식하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고유 민속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지라.
*문헌상으로 『북사열전 - 고(구)려(北史列傳 - 高麗)』에 보자면
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라 했고
『수서열전 - 고(구)려(隋書列傳 - 高麗)』에도 역시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원전(原典)이라 할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도
우리 민족은 춤과 노래를 좋아해서 북쪽 부여에 영고(迎鼓)와 동예의 무천(舞天)은 제사를 지내고 며칠씩 밤낮으로 술과 음식을 먹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남쪽의 마한(馬韓) 역시 5월과 10월에 그러한 제사를 지냈고 진한(辰韓)도 그러하였다고 적혀있다.
삼국사기 43권 째에는 673년 김유신이 79세에 죽어서 금산원에서 장례를 치를 때 문무왕이 군악 고취수 100인을 보내 장사 지내게 하였다.(給軍樂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했고...
이렇듯 우리의 옛 상례(喪禮) 풍습은 고구려 옛 무덤의 벽화나 신라 백제의 역사서에도 나타나며, 이런 상갓집 소극놀이는 오시(娛屍)로도 불리며 근래까지도 황해도 옹진의 생여돋음, 경기·강원도의 손모듬 또는 걸걸이, 경상도 안동 의 대돋음 또는 개도덤, 전라도에서는 상여어르기 또는 밤달애, 대울림 등으로 있어왔음이 확인된다.
이렇게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던 이러한 장례 문화가 조선조 들어서면서 유교를 숭상하다 보니 상층에서는 유교식 예법에 근거해 민간의 장례풍속을 폐풍(弊風)이라 하고, 민중들은 상층의 유교식 장례를 박장(薄葬)이라고 하면서 공방하기도 했다.
진도에서도 소치(小癡-허련)의 변속팔조에 거전타고(擧前打鼓-상여 앞에서는 북을 치지마라)가 들어있음은 오랜 전통을 뿌리로 하는 민중의 시각과에 차이라 보겠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배계층이 주도하는 유교식 예법이 오늘날 널리 퍼지고, 유구한 역사 속 축제식의 장례방식은 축소되었지만
다시래기는 진도에서 아직까지도 전승되는 장례놀이로 살아 남았다.
다시래기라는 말의 어원은 ‘다시나기(다시 낳다)’,‘다시락(多侍樂;여러 사람이 모여서 같이 즐긴다)’ 등으로 풀이하는데 달리는 ‘대시(待時)레기’라는 말은 ‘망자의 영혼이 집에 머물다가 떠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노는 놀이다.’라고도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옛 상례(喪禮) 풍습은 고구려 옛 무덤의 벽화나 신라 백제의 역사서에도 나타나며, 이런 상갓집 소극놀이는 오시(娛屍)로도 불리며 근래까지도 황해도 옹진의 생여돋음, 경기·강원도의 손모듬 또는 걸걸이, 경상도 안동 의 대돋음 또는 개도덤, 전라도에서는 상여어르기 또는 밤달애, 대울림 등으로 있어왔음이 확인된다.
이렇게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던 이러한 장례 문화가 조선조 들어서면서 유교를 숭상하다 보니 상층에서는 유교식 예법에 근거해 민간의 장례풍속을 폐풍(弊風)이라 하고, 민중들은 상층의 유교식 장례를 박장(薄葬)이라고 하면서 공방하기도 했다.
진도에서도 소치(小癡-허련)의 변속팔조에 거전타고(擧前打鼓-상여 앞에서는 북을 치지마라)가 들어있음은 오랜 전통을 뿌리로 하는 민중의 시각과에 차이라 보겠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배계층이 주도하는 유교식 예법이 오늘날 널리 퍼지고, 유구한 역사 속 잔치식의 장례방식은 축소되었지만 다시래기는 진도에서 아직까지도 전승되는 장례놀이로 살아 남았다.
다시래기라는 말의 어원은 ‘다시나기(다시 낳다)’와 ‘다시락(多侍樂;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같이 즐긴다)’ 등으로 풀이하는데 달리는 ‘대시(待時)레기’라는 말은 ‘망자의 영혼이 집에 머물다가 떠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노는 놀이다.’라고도 풀이하고 있다.
하여튼 다시나기던 다시락이든 대시레기던 존 뜻일 거고 야락잔치라고도 하넌 씻김굿하고 항꾼에
모도 우리 진도에 뿌리 짚운 전통이로 이해허시길 바람시로
인자 고날 다시래기 사진덜이나 보시시쇼~!
인자 시작함시로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생이꾼덜하고 농담 따먹기럴 하고 거사도 껴들고 그랑구만이라.
“아따 옛날 어러신덜 말씀도 안 들어 봤소?
숭년에 논마지기 폴지 말고 입 한나 덜라고 안 했소?
방안에서 맨날 밥만 축내고 있는 당신 아부지가 죽었잉께 을마나 얼씨구절씨구 할 일이요?
여그 삘간 색자에 옷을 입고 휠체어에 앉어 계신 분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 진도다시래기(걸사) 강준섭 예능 보유자 (1985년 2월 1일 인정)로
인자 후학덜이 공연하는 모십얼 직접 보시겄다고 불편하신 몸이로
진도서 여까장 올로세가꼬 참관하고 계시구만이라.
앞을 못 보넌 봉사(사실 봉사넌 앞만 못 보능 거 아니고 뒷도 못 봅디다만 말이 그랑께라)인
거사에 사당(마누래) 그라고 그 샛서방인 파계승하고 모도덜 관중덜이랑 상주까장
한바탕 널부러져가꼬 웃게덜 해 주지라.
간간이 곁들어지넌 노래가락덜언 관중까장 모도가 함께 하기에 연희럴 행결 더 친숙하게 해주고라.
아까 잔 앞에 들어갈 사진덜인데 뒤로 내롸져뿌렀어라만
상두꾼덜이 빈 생이(喪輿, 사실 생이도 멋도 아닌 지푸락 한 뭇입디다만)럴 미고
만가럴 불룸서 둘옵디다.
하여튼 장님 거사에 그 마누래에 샛서방이랑 삼각 관계로 이케저케 놀다가
애기까장 낳고 낭께 관중까장 모도덜 항꾼에 걸쌈내가꼬 노넌 한바탕 여흥이구만이람짜.
이전 진도서 냄비뚜껑이든 쪼빡이든 앙끗이나 뚜둘김시로 노래불루든 '삼다이'란 것이
있었넌데 고 삼다이판 노래덜에 흥이나고 신이 낭구만이라. 덜!
고날 또 막간얼 이용해가꼬 트로트 메들리로 신명나게 해준 이 카수가
그랑께 내나 아까 씻김굿얼 했던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송순단 전수조교의 딸로
본명은 조은심인데 송가인이란 예명이로 활동하넌 카수로 '거기까지만'이란 곡도 불룬 가수랍디다.
노래도 잘 불루고 곡도 종께 많이썩덜 사랑해주시고 곡덜도 신청 잔 해 주시쇼. 덜!
아따~! 여그 즈그 엄매가 졑에서 좋와라고 춤치요~! 안?
얼씨구~! 잘 한다~!!
김오현 진도군립예술단장이랑 김병철 사회자랑 소개동네(소포리) 아그덜(?) 걸쌈 났구만이라? 덜?
하여튼 "葬则鼓舞作乐以送之(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라고 기록했듯 부여 고구려 이전 수천 년 전부텀 있어왔든 우리나라 고유의 소중한 장례풍습이 안직까장 우리의 진도에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등 장례문화로 살아 남어 있는 것잉께
우리 모도 자랑시럽게 여김시로 잘 보존하고 지케 나야야 씨겄구만이람쨔. 덜!
<진도 송현 출신 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조병현>
첫댓글 강준섭씨가 연로하셔서 새로운 예비 주역들도 등장하는군요,
역시 프로작가이신 조병현님의 사진과 편집이 아주 편안합니다. 잘보았습니다.
금메 말씸입니다.
저 분덜 가시먼 으찌케 되꼬? 해도
어찌케든 자꼬 잘 잇어내레가드구만이람짜.
과찬 황송하고 고맙십니다.
즐 감 하 고 갑 니 가 조 선배님 ~ ~ㅋ ㅋ ~
금메
진도가 찰로 보배섬이고 민속에 보고란 말이
맬갑씨 생긴 말이 아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