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9월 29일 금요일 맑음
바쁘게 움직여야 잡념이 떨어져 나간다.
일찍 일어나 창고 건축의 부산물 중 쓸모 있는 것들을 주어 모았다.
각종 건축재료를 실어 와 창고를 짓고, 남은 것들 중에 쓸 만한 것들도 많았지만, 모두 쓰레기로 버린단다. ‘이 걸 다 버린다니 아깝다. 낭비다.’ 그 중에서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마음대로 가져가란다. 원래 내 돈으로 산 것들이니 남은 것도 내 것이란 말이지. 주욱 둘러보니 욕심나는 것들이 있었다.
우선 판넬이 온전히 남은 것 세 장을 먼저 치워 놓고, 철재 중에서 가늘고 굵은 각관을 주어 날랐다. 쓸 만한 것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비닐하웃스 옆에 모아 놓으니 제법 많다. 금새 부자가 된 것 같다.
전에 용접기를 사다 놓았는데 아직 사용해 보지 않았다. 저 재료들을 이용해 연습해야지. 이제 곧 용접계의 달인이 출현할 거다.
농촌 생활을 하다 보니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쓸 수 있어야 하겠더라.
다음은 버섯밭을 둘러보고, 반 푸대 정도를 수확해서 건조기를 돌렸다.
제법 바쁘게 움직였더니 밥맛이 그만이다.
아침 식사 후 밤줍기에 나섰다. 이제 막바지 밤 줍기다.
추석이 다가오자 밤 값도 올라 밤농부의 대목이다. 올라봐야 백 원, 이백 원이지만, 올랐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오후에 안사람이 20kg 주문을 받아 주소를 보내왔다. ‘좋은 밥으로 보내드려야 할 텐데.... 어디 가서 주워야 할 까 ? “불당골 꼭대기 옛날 밤이 크고 맛이 있어 거기 가서 주으면 돼” 장모님께서 환하시다. “나도 같이 가” 장모님께서 또 앞장을 서신다. “비탈이라 안 돼요. 저 혼자 갈 게요” “아녀, 아녀. 나 할 일 읎어” 막무가내로 차에 오르신다. ‘하긴 차로 가고, 꼭대기는 평평하니까 거기서 주으시면 되겠다’ 마지못해 함께 출발했다.
밥나무 마다 특성이 다르다. 꼭대기 밤은 밤송이가 작아 겉으로 보기엔 실망스럽지만, 송이마다 밤 한톨씩 들어있어 알이 상당히 크다. 큰 거 한 톨이 작은 거 세 톨보다 훨씬 낫다. 장모님 말씀에 “밤송이보다 밤알이 더 커”하시는 말씀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신기하게 크다. “이 밤이 옛날 밤이라 맛도 좋아. 신식밤은 크기만 하지 맛이 읎어”
주욱 떨어진 빨간 밤들을 열심히 주웠다. 장모님은 말씀도 없이 굽은 허리를 땅에 닿을 듯 숙여가며 쉴 새 없이 주워나가신다. “작아도 빤질빤질해야 좋은 밤이여” 밤농사를 오래 지으셔서 도사가 다 되셨다.
혼자 주을 것 둘이 주으니 지루가 두 배로 빨리 찬다.
한참을 줍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택배 보낼 생각으로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10kg씩 두 자루를 박스에 담아 로젠 택배를 찾았다.
‘택배 접수 끝났습니다. 29일부터 10월 8일까지 영업하지 않습니다’
떡하니 푯말이 붙어있다. ‘허어, 이 거 문제다. 이 걸 어떡하나 ?’
추석 제수로 필요하다면, 추석 후에 보내봐야 의미가 없잖나 ?
‘진작 주문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택배가 끝난다는 것을 몰랐던 나도 잘못이다. 졸지에 신용불량이 되어 버렸다.
안사람이 집으로 가져 오란다. ‘그래, 이 건 좋은 거니까 제사에도 쓰고 마누라 자식들 먹이면 되겠다’ 사과장수 사과 못 먹는다고, 밤농사를 지으니 밤 한톨도 아깝더라.
서둘러 대전으로 출발했다. 운사모 고문이신 이재선 전 의원님께서 부친상을 당하셨단다. 장영란 형제님의 전화를 받고 함께 조문하기로 했다.
붐비는 고속도로를 보니 민족 대이동이란 말이 실감나더라. 부모 형제를 만나러 온 국민이 나선 길, 곳곳에서 막힌다. 그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것은 가족이라는 말 이외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영란형제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고마운 분이다.
혼자 들어가기 서먹서먹함을 면하게 해주시네.
짐으로 돌아와 충희를 만나니 멍하니 얼굴만 쳐다봐진다. 그래도 어쩌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격려해줄 수 밖에.....
우리 큰아들, 충희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