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천년고도 경주를 찾아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992년의 세월을 간직한 세계 최고의 장수국가이며
천년의 세월 동안 수도를 경주를 벗어난 적이 없어 경주라 하면 꼭 천년고도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인다.
삼국이 사이좋게? 싸우던 시기 백제 660년, 고구려 668년, 그리고 고려 왕(王)씨와 이(李)씨 조선 각각 500년의 안팎이니
신라 천년은 실로 대단하다.
우리와 가까운 중국의 역사를 살펴봐도 왕조의 교체주기가 200년 안팎이니...
신라는 어떻게 이토록 오랜기간 동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다시 한번 더 생각을 해본다.
이(李)씨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과 낙산이 있었고 하천으로는 한강과 청계천이 있었다면
신라는 동쪽에 낭산, 남쪽에는 남산, 서쪽에는 선도산, 북쪽에는 형산이 자리하였고 앞으로는 형산강이 흐르고
반월성 남쪽으로는 짧지만 맑은 물의 남천(南川)이 가까이 있었기에 천년의 세월을 유지했는지도 모른다.
경주시를 조금 벗어나면 불국사나 석굴암을 갖춘 토함산이야 말할 것도 없고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깃든 단석산이나, 세속오계의 원광법사가 수도했다는 금곡산도 월성과 밀접한 산들이다.
또하나 신라천년을 지탱하는 힘을 찾아보면 신라시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독(瀆 도랑)이었다
신화(神話)에서 시조는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와 인간을 다스리다가 죽어서는 산신(山神)이 되었다. 산을 신성시하고
명산대천에 제사하는 의식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어졌으며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당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전국의 명산대천에 수많은 절과 그 외 직접 제사를 지내는 제도를 마련했는데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4개의 강을 독(瀆)이라
불렀다
동쪽에는 곡강이며, 남쪽에는 경남 양산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황산강), 서쪽에는 공주의 금강,북쪽에는 서울의 한강이다.
이쯤하고 강행으로 갑니다.
이른 아침 첫 버스로 경주에 도착해 택시로 경주시 보불로에 자리하는 블루원 골프장 입구에 도착한다
고갯마루에서 거미줄을 제거하며 묵은 산길로 방향을 잡아 올라간다. 이 길은 경주 천년의 향기 길이며 오래전에 두 번 정도
지난 길이기에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잠시 묵은 길을 오르면 보불로 삼거리에서 토함산으로 오르는 등로와 만나는데 이후에 길이 엄청 좋다.
토함산 정상 4km지점 만호봉 삼거리이며 이곳에서 옛 신라의 왕궁이 자리하던 월성으로 흐르는 물길인 남천의 발원지가
있는 곳이며,백두대간의 뜨거운 기(氣)가 삼수령에서 동해 바다로 이어지는 낙동정맥 삼강봉에서 묵장산-토함산을 거쳐 반월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지나온 하천길과 147번째 누적거리 9.345km
올해안에 1만km 마치면 정맥길을 진행 하고자 하는데 혹시 함께 가실분 계시면 연락 주십시요
계곡으로 내려와 올려다본 능선
내려가는 길에 별다른 특징은 없고
등산로에서 200미터 내려와서 찾은 물길인데 갈수기지만 물이 흘러나오니
엎드려 물 맛부터 보고 진행한다
계곡으로는 푸석한 돌들과 칡덩굴이 가득하고
거미줄은 서비스로 깔아준다
내려온 곳
물은 흐르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계곡으로는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다
흐르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며
물은 누룽지 백숙집 뒤로 흐르는데 수량은 많지 않고
겨우 흐를 정도만 보인다
누룽지 백숙집 마당에는 단풍나무가 있고
주인장의 고운마음을 담은 형형색색의 작은새집이 달려 있다
물은 없고
물은 문점 저수지를 지나
경주시 하동의 하동 저수지
농업용 저수지이며 갈수기임에도 물을 많이 담고 있다.
강태공 몇 분이 여름휴가를 보내시는 모습
울산에서 산이 지부장님과 보라 총무님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같이 걸음 하며 신라 역사를 나눔하며
하천변 옆으로 가을 코스모스가 피어있고
경주시 구정동
이곳은 토함산 서쪽과 감산 저수지에서 흘러온 물이 합류되는 지점이며
두 곳 다 남천이란 이름으로 흐르는데 오늘 내려온 곳이 500미터가량 더 길다.
오늘 먹을 것 잔뜩 가지고 오신 보라님
빈 배낭으로 오신 산이 운영자님이 앞에 가시는군요
토함산
우리나라에 살면서 토함산에 자리 잡은 석굴암이나 불국사를 한번 안 가본 사람이 있을까?
경주하면 불국사나 석굴암이 첫 수식어로 붙으니 누구나 가본 곳이다.
토함산은 신라 제4대 왕 탈해왕과 연관이 있으며 어느 날 토함산에 오르며 목이 말랐던 탈해왕이 하인을 시켜 물을 떠 오라 시
켰는데 하인이 물 뜨러 가서 먼저 마시자 표주박이 입에 붙어 버려 탈해가 용서를 해주어 표주박이 떨어졌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신라 5 악의 하나인 토함산이 있다면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에 태백산, 중심에는 팔공산이 있으며
대부분 국립공원이라면 팔공산은 도립공원이다.
하천 주변으로는 대부분 논이 많으며 축사가 곁에 있지만 물은 아주 깨끗하게 흐른다.
경주시에서 관리를 잘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 역시 축사 분뇨가 하천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하는듯 보인다.
멀리 치술 공주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묵장산과 치술령 바로 앞은 마석산인데
신라인들이 마석산 정상에 놓인 커다란 바위에 환하게 웃는 부처의 모습이 그려지는 날을 기대했을텐데
천년을 채우지 못해서 일까 바위는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산꾼이라면 누구나 마석산이 형산강 우측의 마루금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궁금중을 갖게 되는 곳인데
일제강점기때 토성 저수지 수리 시설을 하며 물길을 바꾸어 버렸고 예전에 흐르던 물길이 어딘지 동네의 나이 드신 분들도 모르고 계신다.
마석산에서 경주시 외동읍 죽동리로 가는 마루금은 어디로 가던 물을 건너게 되어있다.
멀리 치술 공주의 전설이 있는 치술령과 정면에 맷돌바위가 있는 마석산
치술령은 신라 제19대 왕 눌지왕의 두 동생을 고구려와 일본으로부터 구해온 박제상 이야기는 다들 아시죠
별도로 첨부하지는 않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천가에 자리하는 축사가 보이고
우리나라에 소는 적정수준은 3백만 마리 정도이나 지금은 대략 350만 마리 이상이다
일 년에 소고기를 얼마나 먹을까 싶지만 전국 71개 도축장에서 하루 약 2,300마리가 도축되며 한 달에 약 6만마리 한해 85만 마리가 도축된다.
맞은편으로는 소 키우는 축사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개사육장이 방치되어 있는 건물이 흉물스럽게 길게 이어진다.
모래 하천이라 물도 깨끗하고 바닥도 깨끗한 편
물이 흐를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기복이 심한 하천이라
물속으로 다슬기나 조개 종류는 없을 듯
마석산에서 이어지는 고위봉 구간
토암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울산으로 이어지는 곳
하천제방 옆으로 무단 경작하는 곳에 어느 주인장이 식물에 물 주기 위해 걸어둔 쪽박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으나
주변의 식물과 잡풀과 어울려 한여름을 이기며 매달려 있다.
농작물 옆에 서있는 옥수수는 먹으려고 하는 것도 있겠지만 농작물의 병충해로부터 천적을 키우기 위해서 옥수수를 심은 것들이다.
그리고 인간과 풀의 인연은 수천 년간 이어져 왔으며 풀에서 시작된 작물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길들여 오늘날의 곡식으로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농부들의 입장에서는 풀은 그저 질긴 악연일 뿐
농가와 축사를 거치며 흘러 왔지만 물은 아직도 깨끗하게 흐른다.
이 물이 언제까지 깨끗하게 지켜질지 알 수 없으나 경주에 사시는 참치님께 가끔이라도 좋으니 이
곳 남천에 다슬기 방류 좀 하라고 말씀드려야겠다.
참고로 다슬기는 물 1 리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서출지
임 씨들의 정자이며 지금 가시면 아주 좋은 곳입니다.
경상북도 산림 환경 연구소 내의 습지
길가에 자리하는 옥룡암으로 가봅니다.
옥룡암의 탑곡 마애 조성군
부처님의 모습과 황룡사 9층 탑이 새겨져 있는데
황룡사 9층 탑은 진평왕 때 수도 경주에 2만 5천 평 부지 위에 만들어졌으며 고려시대 때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전소하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9층 목탑은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막기 위해 세운 것으로 신라 주변의 9개 나라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각층은 아래로부터 일본(왜), 중국(당나라), 남중국,탐라,응유,말갈, 거란,여진,예맥, 순으로 나라를 상징한다.
백제와 고구려는 싸움은 하지만 그리나쁜적은 아닌듯 9개 나라에서 빠져있다.
갱상도 땅의 신라는 이래저래 두들겨 맞으며 크다 보니 "매에는 장사가 없다"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3층 석탑과 어느 석공이 정성스레 정과 망치로 만들어 놓은 마애불이 금방이라도 "내가 부처라"며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실 것 같은 인자한 모습이다.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옥룡암 절에서 여자보살께서 잠시 내려와 보라고 하신다.
부처님께 사시예불 제(第)를 지내고 남은 것들인데 모두 다 가지고 가서 드시란다.
아이고!~ 이런 감사할 때가 있으신가.
모처럼 배낭이 터지도록 집어넣고 그것도 모자라 양손에 들고 나오며 부처님께 감사인사드린다.
옥룡암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
역시나 쿨하고 마음씨 좋은 부처님
ㅎㅎㅎ
보라님이 이렇게 싸들고 집에 간답니다.
옥룡암 앞에 자리하는 계곡
풍덩하면 좋겠지만 부처님 앞에서 발가벗고 돌아 다닐 수 없는 노릇이라
그리고 양반 체면에
바로 앞은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께서 묻혀있는 낭산인데
아버지 진평왕께서 승하하시고 선덕여왕은 논란 끝에 여왕으로 등극했지만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웠다.
642년에 대야성 전투을 시작으로 약 40여 개의 성을 잃었으며 이후 당나라로부터 자장율사를 불러들여 645년에 황룡사 절터
를 만들어 불법의 힘으로 나라를 안정 시키려했으나 647년에 상대등과 비담이 반란을 일으켜 반란 도중 한겨울에 승하하셨다.
여왕은 생전에 내가 죽은뒤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이 되어 종묘사직을 돌보겠다는 유언을
해서 지금의 수미산과 닮은 낭산에 묻힌 것이다.
또 낭산은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께서 저곳 어딘가에서 태어나셨는데
워낙 가난해서 옷을 백번이나 꿰매어 입었을 정도였으며 백결선생의 아내가 연말 집집마다 곡식을 찧는 절구공 소리에
"우리집만 곡식을 없구나!~ 하며 한탄을 하자 백결선생이 거문고로 절구공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했던 것이 방아타령이다.
요즘 같으면 무능한 남편으로 이혼 사유 감인데 백결선생 부인께서는 무던히도 참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최치원 선생께서도 낭산 서쪽 기슭에 사셨다 했고
신라 향가를 대표하는 "제망매가"와 "도솔가"의 월명 스님께서도 낭산 아래 지금의 사천왕사에 살았다
작아도 당당한 낭산이라 고개가 자꾸만 돌아간다.
물은 시멘트 방수포 따라 흐르며
여러 차례 물이 오염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옛 성터가 자리하는 곳이 코앞 이건만 아직 물은 깨끗하게 흐르고 있으며
몇몇 아이들이 하천에서 놀고 있는지 갈대숲으로부터 환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래 물이라면 아이들이 멱감고 놀고 그래야지!~
아이들이 물놀이하고 밖으로 나와있어 옥룡암에서 얻어온 바나나 하나씩 주고
고운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신 최치원 선생께서 머물렀던 상서장 아래 고운대
남천(南川)이 예전에는 문천(蚊川)이라 불렀다고 하며 최선생께서 경문왕의 딸인 51대왕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時務十餘條) 개혁안을 올리고 이곳에서 기다렸지만 끝내 나라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신라를 떠났다.
상서장
최선생께서 상소문을 올리던 곳이며
마당 모퉁이에 자리 잡은 백일 간 피고 진다는 백년쯤된 백일홍이 한여름을 즐기고 서있고
진정 나라를 위했지만 결국 여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해 어디로 떠났던 최선생은 말년에 합천 해인사 홍류동 계곡에
신발과 갓만 남겨두고 홀연히 가야산 깊은 골로 사라졌다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산이 좋다면 왜 산을 나오는가
먼 훗날 내 종적을 눈여겨 보소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고운 최치원-
사람에 치여 산으로 왔지만 그 그리움의 끝에는 사람이었던 터라
속세를 벗어나 신선이 되셨던 분이다.
천마용역 뭐든 수거를 하지만 아줌마와 아제는 수거 안 한다고
반월성과 하천길
월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동서 길이 900m, 남북 길이 260m로써 신라의 중심지였으며
월성을 호위하는 산으로는 동쪽에는 명활산, 서쪽에 형산강 넘어 선도산, 남쪽으로는 남천 넘어 남산, 북쪽에는 형산강 아래 부분에 항산 산이 반월성을 보호하도록 성을 만들어 놓았다.
월성 터는 월래 충신 회공(瓠公)의 거주지였으나 박혁거세 때 석탈해가 금성의 지리를 살펴본 뒤 이곳이 천년을 이어갈
명당터임을 알고 집을 빼앗아 후에 월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라가 천년을 이어오는 동안 천년의 향기라 여겨지는 금관의 금(金)은 어디서 나온것일까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전 세계 금관 14개 정도라고 보면 그중에 6개(황남대총,금령총,금관총,서봉총,천마총,그외 1점)가 신라 금관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곳 남천에서 금이 나왔을 수도 있는데 일제 강점기 무렵 35년 동안 우리나라 전국에서 케간 금은 약 250톤이다.
지금 우리나라 한해 금 체굴은 약 190kg라고 보면 일제가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금은 모두 케간 상태라 보면 될것 같다.
선주들께서 남천에서 사금을 발견하였다면 지금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경주 월성은? 읽어 보시고
멀리 서쪽을 지키는 선도산이 보이고 앞은 복원한 월정교 모습
월성과 남산을 잇는 월정교 모습
통일신라 경문왕때 지어진 것이나 조선시대 때 유실되어 2018년에 복원한 목조 건물
새것이 좋다고 하지만 오래된 것들 중 천년을 지켜온 목조 건물과 한 분뿐인 늙은 어머니의 품이 더 좋은 법
향이 나지 않은 건물은 남천위에 떠있어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월정교
문루 남쪽의 현판 글씨체는 신라시대 때의 명필이셨던 김생의 글씨체이며
북쪽의 글씨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 선생의(진감선사 대공탑비) 글씨체에서 가지고 온 글씨체
지나온 하천길
김유신의 전설이 있는 단석산과 가운데 선도산 그 뒤로 구미산 방향
하천가로 시멘트 포장 대신에 키 작은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고 그 가운데 쉽게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야자 융단으로 깔아 두었고 젊은 남녀분들이 엄청 많이 찾아오셨다.
경주 오릉
대릉원에는 천마총과 함께 23기의 왕릉이 있으나 오릉에는 신라 초기의 왕릉 5기만 모여있으니
제1대 박혁거세와 왕비,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5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으로 전한다.
오릉은 지난날 걸었던 경주 투어 글로 대신한다.
부처님이 사실 것 같은 신라 천년의 시작과 끝인 남산이 보이고
삼국시대 법흥왕 때인가 이차돈의 목을 치니 흰 피가 솟구치고"꽃비가 흩날렸다"이후에 왕이 곧 부처다는 심정으로 고개만 돌리면 남천(南川) 넘어 아른거리는 남산에 올라 정과 망치를 들고 부처의 형상을 새기거나 깎아 내었다
남산 금오봉과 고위봉 두 곳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에 150곳의 절터와 이름 모를 석공들의 흔적인 120개의 저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갖가지의 형상의 석불을 미소와 빛으로 만들어 내셨고, 100여 개 정도의 석탑을 40개의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으나
자신의 이름이나 왕의 이름을 별도로 새겨 넣는 일은 하지 않았으니 신라인들은 실로 대단하다 느껴진다.
마침 경주에 왔으니 이곳 인근에 사시는 참치님께 전화를 드려보고
경주 천마총 인근 황리단길에서 유명한 맛집 식당을 운영하시는 참치님
만나서 반가웠고요 언제나 대박 기원드립니다.
남천의 물은 아주 깨끗하여 다슬기 잡는 몇몇 분 보인다.
다슬기는 하루에 1리터 정도의 물을 정화시키는데 어지간하면 잡지 말고 그냥 두었으면...
주민들이 잡은 다슬기를 다시 물에 놓아 주려고 팔라고 하면 대부분 자기를 끓여 먹는다고 팔지 않는다.
다슬기 잡는 주민분이 보이고 멀리 송화산과 어림산 방향
이곳은 낙동정맥( 경주시 서면 도리마을 ) 남사봉(대천)이나 삼강봉 동쪽 계곡에서 흘러온 형산강 본류의 물이
남천과 합류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신라 천년을 이어온 맑은 남천의 물 따라 이어와 하루를 정리하고
산이 운영자님과 보라님 그리고 참치님과 헤어져 집으로 왔으며 다음날은 경주시 북천을 진행하기로 한다.
첫댓글 초지일관 하천 및 강줄기...
저도 초지일관 폭포, 하늘다리, 절벽 레펠...ㅎㅎㅎ
추석지나고 계약되면 인사올리로 가겠습니다
이제 500km만 더이어가면 하천길은 끝이납니다.
장장 5년이상을 그렇게 걸었네요
@배병만 난 내년되어야
레펠 5년째인데
대단하십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군요 ㅋㅋ
산이지부장님,보라님과 오붓한 걸음 보기 좋습니다.
참치님 오랫만에 보니 반갑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두분과 함께 재미난 걸음이되었구요
다음달 영알에서 뵙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시간이 되어 남이 정성껏 쓴 산행기에 끈적끈적 해 봅니다
모든 분들은 문디같은 코나와 경제침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우주로 다니는데
짜치서 산에도 못가고 남들 산행기만 기웃 거리고 있네요
산행기는 사진 보는 재미도 있지만
감미로운 글에다 입담이 곁들어 지면 산에 가는 것 보다 더 재미가 납니다
잘 계시죠 얼마전 깽이님과 해안길을 걸으며
장군님을 이야기했는데 잘 계시죠
다음달 영알에 한번 오시기 바라겠구요 가을산행 맑게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다니던 익숙한 길
익숙한 강의 이름이 남천 이었네요.
산은 높아야 제맛이고
강은 깊고 깨끗해야 제 맛인것 같습니다.
가을에 경주에 가면 익숙한 그길 시간 나는 대로
다시 한번 거닐어 볼 듯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국토을 배우는 견습생으로써 이제 하천길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내년초부터 정맥을 다시 이어가며 산수경(山水經)을 다시 볼것 같습니다.
지맥길 무탈하게 이어가시고 안전한 발걸음 되기기 기원드립니다.
서출지 연꽃도 보기좋고 주차장에서 옥룡암 가는길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날 참 좋은데....잘 보고갑니다
지부장님 한번 따라오세요 밥사드릴
께요.
아셨죠
천마용역 아주 멋진 문구임니다
ㅎㅎㅎ 시골이라 벌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실듯 합니다.
잘 지내시구요
신라 천년고도 경주... 역사책 한권 읽는 느낌이
듭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강길 걸으면 눈으로
보는것만 보는게 아니라 지역의 역사 전해저
오는 이야기등등 어찌그리 많이 알고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모처럼 산길이 아닌 물줄기따라 걷는 평지길
오랜만에 걸어보니 역시 평지길이 산길보다
더 피곤한것 같습니다 남천도 물이 그런대로
깨끗해 보여서 옛시절 시골하천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산을 다니고 물을 다니면서 역사 공부를 많이 한 보람이 느껴지는 경주 투어였습니다.
두분께 감사드리고 다음달에 뵙겠습니다.
천년도시로서 위상과 체면이 있지.
그곳은 지천이 문화재와 명승지뿐인데
오염이 않되도록 길이 보존해야 할 유산
경주양반들이 잘 지켜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산이운영자님,보라님과 함께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경주하천길 입니다.
(은퇴하시면 의성마늘한우 대박한번 내이소ㅎ)
ㅎㅎㅎ 경주는 문화재도 많은 반면 물도 나름 깨끗해서 좋았습니다.
남쪽의 하천은 대충 마무리 되었고 경기도에 몇 개 남은 것 하러 올라 가야 하는데...거리가 조금씩 멀어져 하루에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경주에 다녀가셨는데
이제야 확인했네요..
더운 날 수고 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