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의 하루
덕천 염재균/수필가
계절의 시계가 여름이라는 초록물결이 넘실대는 역에 도착하였나 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무더운 여름이 시작부터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절기상으로 ‘망종(芒種)이라 하여 벼나 보리 등 수염이 있는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에 좋은 때라고 한다.
공직생활 37년을 마무리하고 정년퇴직을 한지도 7년이 다 되어간다. 퇴직을 하고나니 규칙적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이자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현직에 있을 때의 일은 머릿속에서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누가 불러주지는 않지만, 나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마자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차가운 물과 혼합하여 입안을 헹구며 상쾌함을 느껴본다. 천천히 창밖의 곱게 핀 붉은 꽃을 보며 오늘을 건강하고 보람되게 보내기 위해 생각의 상자를 열어본다. 하루의 시작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노랗게 핀 금계국의 물결을 눈으로 보며 걷기를 시작한다.
‘와사보생(臥死步生)'을 실천하기 위해 돈도 들지 않고 3대 하천의 하나인 유등천변 길을 벗 삼아 걷는다는 것은 소소한 행복을 필자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다. 걷기를 하는 동안에는 번잡한 생각이 없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길가에 핀 나팔꽃이 수줍게 인사를 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무성하게 자란 갈대들이 초록의 물결을 이루며 바람과 친구처럼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필자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걷기를 하고나니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유등천을 가로 지르는 건너편에는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 있다. 시장에 가면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보는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사려는 사람과 이윤을 남기려는 상인과의 줄다리기도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신선한 과일들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면 운반은 결정권이 없는 필자가 하는 것이 남편의 도리이자 불문율이다.
아내와 시장에서 사온 파를 손질하고 나니 뒤따르는 것은 손발 저림이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일 년 전에 병환으로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옥천의 ‘선화원’으로 가기로 했다. 무더운 날씨라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이웃사촌인 최종국 부부와 함께 시장구경도 하고 식사도 할 겸 출발했다. 옥천군의 공설 납골당인 ‘선화원’으로 가서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생전의 모습인 사진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힘들게 살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정이 많았던 어머니가 특히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봉안당에서 중학교 시절 함께 다녔던 친구를 만났다. 장모님을 뵈러 왔다고 한다. 친구의 얼굴을 보니 우리도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선화원을 나와 점심식사를 하러 구읍의 벚꽃나무 길의 초입에 있는 생선국수를 잘하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대박집’으로 갔다. 주차장은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이열치열’이라고 날씨가 무더울수록 뜨거운 것을 먹으면 속이 편하다고 한다. 얼큰한 생선국수에다 아싹한 맛이 나는 콩나물을 넣어서 먹으니 입맛을 당기게 하는 마력이 있다. 생선국수 한 그릇에 만족한 표정들을 보니 기분이 좋다. 식당의 이름처럼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고 있다.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대박 나기를 바래본다.
향수의 고장인 옥천은 산수가 수려하고 볼거리가 많다. 차 한 잔을 마시러 교동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언덕에 자리한 카페로 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데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승강기가 없어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카페 안은 굉장히 넓었다. 저수지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본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의 물결이 필자의 마음을 젊음으로 이끌고 있다. 여행은 아니지만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구읍에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있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찾아갔다. 육영수 여사는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인 광복절 경축식 행사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돌아가신 분이다. 그분의 생가는‘교동댁’이라고 불리던 옥천 지역의 명가(名家)라고 한다. 그 당시 부친은 자동차를 소유할 만큼 부자였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후 방치되었던 것을 복원 공사를 통하여 2011년 개관하였다고 하는데 돌아보니 조선시대에 와있는 것 같다. 연당사랑에서 보이는 연꽃이 피어있는 작은 연못을 보니 시를 짓고 낭송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우리보다 먼저 와서 생가에 대한 해설을 듣는 분들을 보노라니 노년의 삶을 즐기는 분들처럼 보였다. 해설을 하는 흰머리가 제법 있는 분을 자세히 보니 옥천교육청 근무할 때 같이 근무했던 분이었다. 반가움으로 다가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잘 관리된 건물과 시설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언덕에 있는 잘 익은 앵두가 군침을 돌게 한다. 몇 알을 따서 입안으로 넣으니 달콤함이 퍼진다. 눈부시게 따가운 햇살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생가를 나오니 공터에 심어져 있는 연꽃이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다. 꽃이 만발하면 더욱더 운치가 있을 거라 생각해본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가까이 있는 ‘정지용’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을 찾아갔다. 나뭇가지로 만든 사립문과 초가집의 생가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 시대의 생활용품과 농기구 등이 보존되어 있어 향수를 느끼게 한다. 시인의 동상이 서있는 곳을 지나 문학관으로 들어가 시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하여 돌아가셨지만, 시인의 유명한 시인 ‘향수’는 노랫말로 만들어져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옥천이 낳은 정지용 시인을 알고 싶은 분들은 이곳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을 방문하기를 권한다.
박인수 교수와 이동원이 부른 향수의 노래가 귓전으로 들리는 듯하다. 문학관 주변의 담벼락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자주 오고 싶은 마음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다. 마침 오늘이 옥천읍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장이 서있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눈요기를 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냄새에 이끌러 가다보면 통닭과 순대 그리고 먹거리가 유혹의 눈길로 이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인 것이다. 이대로 집으로 가는 것이 아쉬워 모 TV방송에서 소개되었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금천계곡을 찾아갔다. 첩첩산중으로 가는 착각에 빠질 정도의 깊은 골짜기다. 매표소로 병역명문가 신분증을 보여주니 무료로 입장이란다.
필자는 3대가 현역근무를 마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숲속에 자리한 힐링의 공간에서 30분간 족욕 체험을 했다. 피곤에 찌들어 있는 발이 모처럼만에 호사를 누리는 순간이다. 온몸으로 열기가 전해져 땀이 배어 나온다. 걸음 거리가 편해진 느낌이다. 금계국의 무리가 잘 왔다가 가라고 손짓하고 있다. 대전으로 향하는 곤룡 터널을 지나 6.25 전쟁 때 학살당한 현장을 지나치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이하여 영령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다시는 이런 역사적인 비극이 없기를 마음의 기도를 했다. 저녁식사로 문창시장에서 고소한 맛이 나는 감자전과 쫄깃한 수제비로 하루를 마감한다.
은퇴자는 서두에서 말했지만, 현직에 있을 때처럼 누가 불러주지 않는다. 계급장이 없어진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년의 삶일수록 자기 자신의 건강은 물론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평생 배우고 실천으로 옮기는 삶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다.
두 다리가 성할 때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은퇴자의 하루하루가 소중함을 느끼게 한 하루였다. (2025. 6. 6.)
첫댓글 재균 친구, 빈갑네.
친구의 글에서 퇴직 후의 아름다운. 샮을 들여다 보고 반가운 마음에 현충일 연휴인 오늘, 폰을 보다가 다음카페에 가입하여 친구의 글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 왔다네ᆢ
늘~건강하고 행복한 시간되시게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