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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새로나온 책,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의 인세 중에서 10%는 우리신학연구소에, 10%는 예수살이공동체에, 10%는 필리핀 아이들을 위해 기부할 예정이다.(사진/김용길) |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아빠
모니카는 그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아빠"라고 불렀다. "매일 민들레 국수집에서 VIP손님들을 대접하고 섬기고 배려하고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롭게 산다는 생각이 들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모니카는 '스승이자 친구'인 아빠를 만나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 아빠가 '민들레 수사' 서영남 씨다. 그 딸인 모니카는 민들레 국수집 5주년인 2008년에 세워진 어린이를 위한 '민들레공부방'과 2010년 2월에 오픈한 어린이를 위한 무료식당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에서 일하며, 한 달에 두 차례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엄마 베로니카와 아빠와 함께 전국 교도소의 형제들을 만나러 간다.
그 아빠가 쓴 글이 모여져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도서출판 휴)란 책이 출판되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대접하는 서영남 전직 수사 이야기다. 이 책을 추천하면서 박기호 신부(예수살이공동체 대표)는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행운입니다.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사는 한 성자(聖者)를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염으로 찌든 우리시대에 향기롭고 빛나는 영혼의 사람을, 손만 뻗으면 가까이 손잡을 수 있는 이웃으로 소개받는다는 것은 정말 멋진 행운 아닙니까?"하고 묻는다.
하느님의 동업자, 서영남
여기서 박기호 신부는 '민들레 국수집은 하느님나라의 과방(果房)'이며, 서영남 씨는 '하느님과 내통하는 하느님의 동업자'라고 소개한다. 왜냐하면 서영남 씨와 민들레 국수집은 "세상 가운데 하느님 사랑의 불꽃이 꺼질 수 없음을 믿게 해주는 집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서영남 씨가 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수사였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건축가 이일훈 씨. 그가 '민들레 희망지원센터'와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을 설계했는데, 서영남 씨를 통해 '건축보다 사람이 먼저'임을 배웠다. 그는 최근에 부는 서영남 바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생색 없이 내는 밥 한 그릇이 이리 시절을 흔든단 말인가. 일 년 내내 거짓이 참으로 행세하는 세상, 부끄럽다."
서영남 씨는 1954년 부산 범내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서병률(요한)과 어머니 라봉매(요안나)는 본래 평안도 신의주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해서 서울, 부산, 영천, 안동, 포항으로 떠돌았다. 7남매중 다섯째였던 서영남 씨는 갓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 선목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때로는 점원으로 때로는 주유소에서 일했다. 그의 동생 서영필 신부는 성바오로회에 입회하여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서영남 씨는 22살이 되어서야 꿈을 버리지 못해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입회했다.
그가 수도회에 들어간 1976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으로 많은 수도회들이 성소감소와 퇴회로 곤욕을 치르던 때였다. 그는 1985년에 종신서원을 하고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졸업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단연 수도회 창립자인 방유룡 신부다. 방유룡 신부는 점성에서 침묵, 대월, 면형무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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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남 씨(사진/김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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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뛰어넘어 하느님께로
점성(點性)은 모든 순간을 알뜰하고, 빈틈없이, 규모있게, 정성스럽게 임하는 것이다. 작은 일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침묵이란 말없는 내적 고요뿐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욕(邪慾)을 없애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대월(對越)은 늘 하느님을 대면하며 살면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치열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몰입하는 것이다. 면형무아(麵形無我)는 마침내 나는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되어 면형(성체)이 된 무아라는 뜻이다. 이는 방유룡 신부가 제시한 영성생활의 극치로, 자기중심적인 일체의 이기심과 소유욕, 집착을 끊어버리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방유룡 신부의 영성은 서영남 수사의 수도생활 중에, 그리고 민들레 국수집을 하면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상를 섬세하게 돌볼 줄 알았으며, 제 소유와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하느님의 일에 협조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했으며, 만나는 이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맞이했다. 그렇게 '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뛰어넘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방유룡 신부와 살고 임종을 지켜드릴 수 있었음을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한편 서영남 수사는 수도생활 중에 스스로 '시시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는데,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맹민영 글라라 수녀였다고 말한다. 한때 서영남 수사가 서귀포 수도원에 있을 때 맹 글라라 수녀가 복자성당에 있으면서 그를 교리교사로 초대했다. 당시 제주교구에서 교리경시대회가 있었는데, 서귀포 시골에서 올라온 복자성당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상을 싹쓸이하면서 무척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맹 글라라 수녀는 서영남 수사에게 기회를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수도회 살림을 도맡아 하고..
제주 수도원 분원장을 거쳐 필리핀에서 '라디오 베리타스'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돌아와, 그는 5년 여 동안 수도회 본원에서 총장 신부를 대리해서 많은 일을 맡아서 했다. 이운형 총장 신부가 그를 전적으로 믿고 만사를 맡겼기 때문이다. 서영남 수사는 수도회의 재단 사무국장, 총비서, 재정담당자로 일했다. 그 과정에서 가재리수도원과 나루터공동체도 짓고, 복자사랑 피정의 집도 리모델링 했다.
그 과정에서 건축가 이일훈 씨도 만났는데, 그때의 감동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서영남 수사는 누구에게나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이일훈 씨를 보고 '아, 진짜 사람이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여러 건축가를 만나보면서, 건축가는 다 도둑놈만 있는 줄 알았다"면서 자발적 불편을 강조하는 이일훈의 건축철학에 감동했다고 한다. 자발적 불편은 곧 자발적 가난이었던 것이다.
서영남 수사는 가재리 수도원을 지을 때 건축비가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수도원에 돈이 많았으면 가재리 수도원을 지금처럼 짓도록 수도회에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돈이 없으니 적은 돈으로 최대한 불편하게 지어도 군말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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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체장애를 안고 있는 서영남 씨는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앞장선다.(사진/김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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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급 지체장애자 서영남, 재소자에게로
그런데 1995년 수도회 총장이 바뀌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모든 소임이 거부되고, 딱히 일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수도회 운영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다른 곳으로 안배했다. 그는 다투지 않고 가장 낮은 곳으로 갈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재소자들에게 가고 싶었다. 겨우 수도회의 허락을 얻었지만 재정지원은 없고 꼬박꼬박 보고는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당시 수사들은 용돈으로 한 달에 5만원 씩 받았다. 그 5만원으로 의정부교도소 등을 다녀야 했는데, 차비를 아끼기 위해 처음으로 <장애인수첩>도 이때 만들었다.
서영남 수사는 '지체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엄지를 뺀 오른쪽 네 손가락이 휘어져 펼 수가 없다. 척골신경마비라고 한다. 그가 소신학교를 중퇴하고 주유소에서 일할 때 자동차 유리파편에 찔려 불구가 되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영남 수사는 바느질도 하고 밥도 지었다.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는 그는 지금도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지체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는 인천 간석동에 있는 수도원에 머물며 사회교정사목에 열심이었는데, 2000년에는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전국의 교도소를 다니며 재소자들을 만났으며, 한동안 출소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그가 재소자들과 출소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교리신학원에 다닐 때 부터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03위 성인이 모두 교도소 출신이다. 그것도 사형수 등 최고수들이었다. 그러니 순교복자수도회라면 당연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면, 그분들이 교도소 안에서도 멋지게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잡범들도 도와주고, 자기자신을 위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후 서영남 수사에게 어려움이 닥쳤다. 수도회에서 이제 다른 소임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다른 수도원 분원장을 하라고도 하고, 한창 재소자들을 위해 투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갈등하던 서영남 수사는 급기야 25년 동안 입었던 수도복을 벗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리는 예수를 따라 살기 위해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다. 수도생활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수도생활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하면 그건 슬픈 일이다"라고 말한다.
25년 수도생활을 청산하며.. 민들레 국수집에서 새로 시작
수도회를 나온 수도자는 천더기였다. 예전처럼 보호막이 버티어주지 못했다. 나와서 예전부터 친분을 나누고 있던 인천 만석동 기찻길옆 공부방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출소한 친구 밥해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그들과 같이 살았다"는 서영남 씨는 두칸짜리 월세방을 얻어 살며 출소자들을 위한 '겨자씨의 집'을 꾸려갔다. 그 와중에도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청송감호소에 면회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출소자들이 나중엔 10여 명까지 늘어나자 고민이 생겼다. 주로 잡역부로 일하는 출소자들 중에 쓰러지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출소자들끼리 모여 일해 보자고 사무실을 얻어 '집수리' 간판을 달았다. 그 간판이 지금 민들레 국수집 간판이다. 글자만 뜯어내고 다시 붙였다. IMF로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나는 시절이라, 일도 없었지만, 무료급식소에서 노숙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해 제대로 된 '무료식당'을 열기로 해서 시작한 게 2003년 만우절에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이다. 그동안 노숙인들이 잠시 쉴 수 있는 '민들레 쉼터'를 만들고, 이를 발전시켜 노숙인의 문화센터인 '민들레희망지원센터'를 2009년에 만들었다. 2008년부터는 '민들레 꿈 공부방'도 열고, 2010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무료식당도 시작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대사, VIP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도로시 데이의 '환대의 집'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도로시 데이 평전인 <잣대는 사랑>(분도출판사), 한상봉의 <연민>(울림출판사)과 한현 씨가 발행하던 <참사람되어>를 탐독했다. 그러면서 마더 데레사의 방식보다는 도로시 데이의 방식이 옳다고 느꼈다. 도로시 데이가 창립한 가톨릭일꾼운동처럼 자비와 정의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었다. "자비만 강조하면 나쁜 놈들의 밥이 되기 쉽다"고 말하는 서영남 씨는 명동성당 앞에서 데모에 참여해 보기도 했지만,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는 게 영 어색해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어려운 이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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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 국수집이 지난 4월 1일 7주년이 되었다.(사진/김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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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국수집 홈페이지(http://mindlele.com)에는 친절한 말을 노숙인들에게 남기고 있다.
민들레 국수집은 배고픈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열 사람이 앉으면 꽉 차버리는 작은 식당이지만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곱 시간 동안에는 찾아오신 분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실 수 있는 곳 입니다.
매주 토,일,월,화,수 닷새 동안 문을 열고 목, 금요일에는 쉽니다. 매일 150-300여명분의 식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두세 번 오셔서 식사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뷔페식입니다.
비록 민들레 국수집에 십자가가 벽에 걸려 있지만 찾아 오신 분이 마음에도 없는 기도는 하지 않아도 좋고, 잘 살아라, 일 해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곳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의 작은 쉼터!
민들레 국수집은 재소자들과 노숙인들을 모두 '하느님의 대사'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습으로 오셨으니, 그분을 대접하듯이 모셔야 한다는 정신이다.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피터 모린의 <쉬운 에세이> 한 토막을 더불어 올려 놓았다.
곤궁에 빠져있으면서 구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곤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단순히 좋은 일을 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현대 사회는 거지를 게으름뱅이나 비렁뱅이라고 부르며 발가락의 때처럼 여긴다.
그러나 예전에 그리스의 사람들은 곤궁한 사람을 하느님의 대사라고 불렀다.
당신들이 게으름뱅이나 비렁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사실은 하느님의 대사들이다.
하느님의 대사로서 당신들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음식과 옷과 안식처를 받아야 한다.
회교의 선생들은 하느님께서 환대할 것을 명령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환대는 회교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환대의 의무를 가르치지도 않고 실행하고 있지도 않다.
서영남 씨는 민들레 국수집을 열면서 '예수살이 공동체' 회원으로서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기쁨, 현실에 도전하는 투신"이라는 민들레 서원을 했다. 그렇게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서영남 씨는 밥집을 찾아오는 VIP(노숙인을 그렇게 부른다)들의 얼굴 속에서 하늘을 본다고 말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