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피떡 / 설지원 ( 2024. 8.)
떡 가게를 기웃거리다 스쳐 지났다. 친구에게 가면서 떡을 사 갈지 망설였는데 그만두었다. 그렇게 귀하고 맛있던 반달떡이 내 입맛에 예전 같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준비해 가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떡집을 무심한 척 지나쳤지만, 세월이 반백 년을 훌쩍 넘어선 지금도 마음은 추억 가득한 어린 날 풍경 속을 거닌다.
해쑥이 나오는 봄이면 유일하게 만들어 먹던 어머니의 떡이 생각나 울컥 가슴을 친다. 요즈음은 그런 떡을 바람떡, 혹은 반달떡이라고도 하고, 표준어로는 개피떡이라는데 어찌된 연유인지 우리 고향에서는 배피떡이라고 불렀다.
해마다 할아버지 생신 때 만들어 내던 배피떡은 엄마 몫이었다. 엄마는 봄이 오면 봄 쑥을 캐다가 푸릇하게 데쳤다. 데친 쑥은 멥쌀가루를 섞어 시루에 쪄냈다. 잘 익은 떡은 떡메로 쳐서 찰진 반죽을 만들었다. 암반 위에 반죽을 올려 밀대로 민 후 소를 넣었다. 작은 종지 가장자리로 찍어 누르면 반달 모양의 떡이 되었다. 이때 떡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서 소와 함께 더욱 봉긋하게 되었는데 개피떡을 바람떡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속을 채우는 소는 팥이나 동부콩을 삶아 거피를 내고 꿀과 소금을 넣어 맛을 냈다.
부리나케 저녁 식사를 끝낸 어느 봄날의 초저녁, 호롱불 아래 채반에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배피떡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떡을 나무 모반에 옮겨 담으며 언니는 솔잎 붓으로 참기름을 사알짝 발랐다. 그 떡이 다시 바구니에 한가득 채워질 때까지 우리는 떡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어머니의 손놀림은 가히 장인의 솜씨 못지않았다.
바구니에 떡이 어느 정도 채워지면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먹어보라고 나눠 주었다. 이때 한 개 먹어보는 맛이란 잊을 수가 없다. 요즈음 떡처럼 마냥 부드럽지도 않고 조금은 쫀쫀한 쫄깃함이 특징이었다. 단맛은 있지만 달지 않은 동부콩의 은은하고 입담 있는 고소한 맛. 쑥 향과 봄의 빛깔이 어우러지는 담백, 황홀한 맛이었다.
빚은 떡은 할아버지 생신상에 올리려고 정성스레 담겼다. 치자로 물들인 노랑, 향이 살아 있는 쑥색, 순백의 떡을 가지런하게 담으면 예쁜 떡 바구니가 완성되었다. 할아버지 생신날, 큰집 생신상에 오른 떡을 보며 친지들은 이쁘다고 탄성을 질렀다. 엄마의 반응은 그저 수줍은 듯 조용하였다. 이 떡은 팔 남매 가족과 손님들이 나누었다. 그런 모습이 좋으면서도 떡이 하나둘 없어질 때 나는 왠지 주머니가 털리는 것만 같아 ‘이거 우리 엄마 거야.’라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첫 소풍날이었다. 엄마는 나의 첫 소풍에 함께 갈 수 없었다. 부모님은 고심 끝에 언니 담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언니를 내 보호자로 딸려 보냈다. 도시락과 배피떡을 챙겨 손에 들려주면서. 소풍 장소에서였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언니는 밥을 먹자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고집하였다. 옥신각신하다가 화가 난 언니는 엄마가 정성스레 챙겨 준 배피떡을 힘껏 주물러 부숴 버렸다. 나는 너무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드디어 점심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달걀을 찌고 단출하게 김밥을 싸주었는데도 참기름 향이 나는 엄마표 김밥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하지만 언니와의 분위기는 싸했고 배피떡은 먹어보지도 못한 채 소풍이 끝났다. 사실 그 떡은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께도 드리고 싶었다. 예쁜 떡을 자랑도 할 겸 마음속에 자리 잡은 선생님께 드리고도 싶었는데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선생님은 가족 외에 처음 접해 본 관계의 인격체로 조그만 칭찬과 언어에도 귀 기울였던 때였지 싶다.
세월은 마음의 빗장 하나를 짊어지고 가는가 보다. 언니가 떡을 뭉개고 두어 계절이 바뀔 즈음 집안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멀리 떠나셨다. 어둡고 음습한 칠흑 같은 세월이 수습되기도 전에 두 동생마저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엄마에게는 더 이상 봄이 오지 않았고 떡도 만들지 않았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은 어둠은 엄마의 몸을 더욱 가녀리게 만들었다.
다시 못 올 길을 떠난 두 자식의 그림자 속에 갇히면서 떡을 만들며 행복했던 어머니의 일상은 돌아올 줄 몰랐다. 그러는 동안 초등학교 소풍 때 떡을 망가뜨린 언니의 노고는 커졌다. 미움의 앙금 같은 것은 집안에 들이닥친 커다란 슬픔에 비하면 별일도 아니었다. 어둡고, 기억하기조차 싫은 설움을 떨치려고 애를 써도 살아나는 환영 같은 기억들, 그 무겁고 긴 터널은 내게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 우물에 부엉이 한 마리가 빠진 것을 발견했다. 그 부엉이를 구조해 치료해 주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우리의 슬픔을 가져가 달라고, 엄마의 아픔과 고뇌를 묶어 가져가 달라고. 흥부네 집 제비 다리 고쳐 준 일화처럼 우리 집의 슬픔도 부엉이가 가져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기도를 들었는지 부엉이는 대추나무 위에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고향 산천, 그곳엔 추억이 정말 많다. 하지만 집안의 기둥이던 할아버지의 별세와 연이은 동생들의 죽음은 이후 차마 꺼내 볼 수 없는 기억의 저편으로 철저하게 봉인되었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원초적인 입맛은 아픔과 기쁨으로 교차한다. 그중 어렵던 시절, 어머니가 손수 지은 떡을 가족이 모여 나누어 먹던 기억은 애틋하면서도 즐거움이었던 작은 행복으로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다.
논에는 자운영꽃이 흐드러지고 복새풀꽃이 안개처럼 퍼져가던 환절기의 사잇길에서 쑥 향 가득한 배피떡이 아픔과 사랑으로 한곳에 서린다. 어느 날 꺼내어 본 엄마의 속내를 지금은 같이 아프고 이해할 나이인데 엄마는 홀연히 떠나고 없다. 나의 미각과 입맛에는 과거와 추억이 오롯하게 남아 있고 미래로 열려 있다. 언제나 못다 한 배피떡의 사랑처럼.
친구를 만나면 배피떡을 좋아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첫댓글 고향집에서 떡을 만들던 어린 날 기억이 떠오릅니다.
설지원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 부모님도 그런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사시다 가셨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고통은 그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글을 쓴다는것이 고백과 같아서 공개하는것이 주츰 거리게 했습니다.
많은 글을 대하고 보니 새삼 인간의 소중함을 실감합니다.
어느분이 말하더군요.
공감도 능력이라고, 공감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