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壽敦女學校.
호수돈 여학교. 쌍소나무집(二松屋)에서 탄생.
初代 校長은 캐롤(1899.12.19~1921.5)이었고.
校服은 다홍치마에 흰저고리를 입었으며 신은 미투리와 쌍총박을 신었다..나중에는 수박색조거리에 까만치마도 입었다.
캐롤 여사는 1898年 9月 27日 서울에 오자 곧 開城駐在 女宣敎師로 派送되어 같은 해 10월 10일 開城에 도착하여 먼저 이곳에 있던 콜엘(Rev.C.T.Collyer)牧使의 집에 들어왔다.
한적한 郊外에 學校敷地를 마련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쌍소나무 집이라고 부르는 草家집을 사들였다.
開城府 滿月洞 537번지에 소재한 이 草家집은 人蔘을 貯藏하는 倉庫였는데 캐롤은 이 倉庫를 改造하여 온돌방 둘과 마루를 놓아 敎室, 寢室, 食堂으로 겸하여 사용하면서 12名의 學生들 데리고 1899년 12월 19일에 主日學校(Sunday School)로
서 松都 女性敎育의 嚆矢가 되었고 開校이후 校名을 開城女學校라 하였다.

Arrena Caroll 女史. 호수돈기틀닦은 collyerqnqn.
好壽敦 校歌.
李殷相 作詞 玄濟明 作曲
一 松嶽山 솟은 아래 이 좋은 터전.
高麗의 오랜 歷史 빛나는 松都.
거룩한 山水속에 자라는 딸들.
한곳에 뫃으시니 우리 明德(好壽敦).
(後念)
우리明德 高女는 (大韓)朝鮮의 자랑.
그生命 길고 길어 萬世 또 萬世.
二 半島의 어린 딸들 여기 뫃으고.
精誠껏 길러주신 그뜻이 무엇.
배우고 잘 뛰놀아 이몸 길러서.
나라의 빛이 되니 우리明德(好壽敦).
(後念) .
우리明德 高女는 (大韓)朝鮮의 자랑
. 그生命 길고길어 萬世 또 萬世.
好壽敦 初期에는 시집안가기.
동아리가 생겨 그 이름은 不婚同盟..
정말 實踐하였는지는 疑問이다.



沿革
1899.12.19 .
ㆍ美國인 갈월 宣敎師가 開城에서 主日學..校(Sunday School)로 시작하여.
그후 開城女學校라 칭하고 初代校長에 취임.
1904.12.19
ㆍ왕래 2대 校長 취임.
1910.05.01.
ㆍ石造 4층 新築校舍 定礎式을 擧行하고 구 韓國學部 大臣의 認可를 얻어.
校名을 好壽敦 女塾이라 칭하고 이후 5월 15日을 開校紀念日로 정함.
1921.02.. .
ㆍ예길수 3대 校長 就任..
1938.02.17 .
ㆍ왕래 4대 校長 취임.
1938.04.01.
ㆍ敎育令 改定으로 好壽敦 高等女學校라 칭함.
1940.11.02 .
ㆍ강기순 5대 校長 취임.
1941.04.08 .
ㆍ日帝의 彈壓으로 好壽敦 校名을 박탈당하고 황명규 진홍섭 두분이 50만원(당시).
寄附金 으로 財團 法人 明德學院을 조직,校名을 明德女學校라 변경함.
1910年5月1日 好壽敦 석조 4층건물 신축교사 定礎式(모퉁이에 머릿돌을 놓고 공사 착수를 기념식) 때 學部大臣 李載昆과 學務局長 尹致好가 初度巡視겸 참석하였다. 당시 초가집웅의 교사밖에 없어 당시로서는 가장 큰 석조 건물이었다.
好壽敦 女學校에는 開化期였음에도 많은 모임 클럽이 있었는대,
눈에 띠는 것은 不婚同盟 21세기에도 놀랄 女學生들의 發想
開城女學校. 好壽敦女學校의 創立當時校名.
둘래學堂. 好壽敦의 初創期別稱.
好壽敦學園. 幼稚園 國民學校 高等女學校 經營. 經營難일 때 黃冕圭씨 巨額 喜捨. 안먹고 안입고 미투리 신고 번 돈.
好壽敦高等女學校. 1904년開城女學校로 發足暫時 明德이라 불렀다. 秦弘燮씨 巨額喜捨.
好壽敦女塾. 好壽敦高等女學校의 前身.
明德女學校. 好壽敦女學校의 日帝末이름 幼稚園 國民學校 高等女學校가있었다.
사변후에는 개성여자사범대학이 됬다는 소문.
라이락 언덕 위에 校長宅 1940年.
마지막 체풀응 마치고.
1931年 11月 梨花女專 主催 全國 女子 籠球 大會에서 優勝한 好壽敦 選手들.
호수돈18회 金壽姙女史가 생생히 기어하시는
柳達永 선생님의 호수동 卒業式노래 歌詞
1. のぞみの綠燃ゆる丘に
同じ思ひに集ひし我等
海山隔てて柚分つつとも
母校の歸星を世に輝やかさん
2. のぞみの綠燃ゆる丘に
四年細か金蘭のちぎり
あっふつかしや我が支桓よ
潤む瞳に名殘は盡きじ
3 のぞみの綠燃ゆる丘に
脚惠深き師のみおしへを
あっとこしへにに銘ぜんさらば
師の君御 榮よあれ
柳達永, 1911.4.8~2004.10.27
출생지 경기도 이천
농촌운동가이자. 교육자. 서울대학교 원예학 교.
국민훈장 동백장, 덴마크 문화훈장, 대산농촌문화상
주요저서 《인생노우트》 《새역사를 위하여》 《소중한 만남》
호는 성천(星泉)
1936년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를 졸업.
1956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
1936년 개성 호수돈여고 교사로 재직
1959∼1979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원예학 교수.
1972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총재
1974년 국토통일원(지금의 통일부) 고문.
1978년 한국유기자연농업연구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맡았고 1980년대에는 대한민국 국정자문위원,
인간교육원 회장, 대한적십자봉사회 중앙협의회 의장으로 일하였다. 이어 성천문화재단을 창립,
이사장을 지냈고 건국대학교 상허문화재단 이사장, 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 한국NGO지도자총연합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대에는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최용신이 세상을 떠난 뒤
《농촌계몽의 선구 최용신의 소전》을 썼다. 1942년에는 ‘성서조선사건’에 연루,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또한 수많은 수필과 저서를 발표하였는데, 대표적인 저서로 《새역사를 위하여》(1950년),《인생노우트》(1957), 《유토피아의 원시림》(1958), 《흙과 사랑》(1965), 《류달영 인생논집(전7권)》,
자서전 《소중한 만남》(1998), 《만남의 인생》(2003) 등이 있다. 2004년 10월 27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