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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 자식 지금 뭘 하고 사는 거야?]
한문석의 물음에 박동진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 얘긴 못 들었다.]
한남유통의 기획이사실 안이었다. 오늘은 한문석이 업무차 박동진을 찾아온 것인데 한남유통의 광고
를 따낸 덕분으로 회사에서 대번에 상종가를 쳤다. 이 페이스로 나간다면 한문석이 입사 3년차인 내년
에 팀장으로 진급하는 것은 확실하다.
[대영이한테도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던데.]
그리고는 한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식, 난 찾지도 않는구만 그래.]
[그놈이 온 이유를 알 것 같다.]
박동진이 정색하고 말했다. 한문석은 긴장했다.
[뭐라고 했는데?]
[날더러 끈기가 부족하다는 거야, 희연이를 더 잡았어야 했다는군.]
[그래서?]
[내가 희연이한테 말해 놓았으니 가보라고 하니까 웃더구만.]
[웃어?]
[희연이 화냥기가 발동을 시작했을 거라면서.]
[그게 무슨 말이야?]
[그놈은 희연이가 나하고 저 둘을 저울질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
[……]
[그것의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결국은 앙심을 품고 있다는 말인가?]
[내가 희연이한테 괜히 알렸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 두었다면 더 안정이 되었을 텐데.]
아랫입술을 물었던 박동진이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그놈 페이스에 말려든 것 같다, 또.]
한문석을 보내고 나서 박동진은 컴퓨터를 켰지만 모니터의 화면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5년 전,
윤우일이 칼로 자르는 것처럼 모든 인과관계를 정리했을 때 김희연은 먼저 자신을 찾아왔었다. 그것
은 당연했다. 친구들 중에서 둘이 주도적인 입장인데다 제일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그것마저 윤우일
의 계산에 포함된 것이었을까? 다시 윤우일이 찾아온 지금 상황에서 일어난 의혹이다.
예전의 우리는 기질이 극명하게 달랐지만 상호 보완이 이루어져 절친한 콤비네이션을 형성했다. 윤우
일이 치밀하고 끈기가 강한 반면에 나는 감성이 많았고 즉흥적이었다. 그렇다. 끈기가 부족했다. 윤우
일은 목표를 세우면 흔들리지 않았으나 나는 급할 것이 없다는 여유로 치장하고 수시로 방향전환을
했다. 윤우일은 소규모 건설업자의 자식으로 생활의 굴곡이 심했지만 나는 대규모 유통회사를 거느린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리고 또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윤우일이 우리 4인조를 지배한 원인이 되
겠으나 윤우일의 주먹 실력은 발군이다. 합기도 4단으로 육중한 체격에서 터져 나오는 파워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놈의 후광 덕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잘 나가는 여고생은 모두 후릴 수가 있
었다.
어금니를 문 박동진은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놈의 목표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지금도 놈을 배신했다
고는 생각지 않는다. 김희연도 그렇다. 놈이 관계를 단절한 후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김희연과
함께 두 번이나 면회를 갔고 편지도 여러 통 보냈다. 지독한 놈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정리를 해보
았을 때 윤우일이 관계를 단절한 석 달 후에 집안의 사업이 부도를 맞았고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도주
했으니 그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냈다. 가족들과는 연락이 되었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어려울 텐데 김희연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놈의 성품으로 그 후의
전개상황을 예상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놈은 나 뿐만이 아니라 김희연의 모든 것까지 입력시켜 놓았
을 테니까. 그러면? 머리를 든 박동진이 입술 끝을 비틀고 웃었다. 김희연과 나와의 결혼생활도 짐작
하고 있었을까?
[전화온 데 없지?]
토요일이어서 일찍 수업을 끝낸 김희연이 집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3시였다.
고입 검정고시반 영어를 맡은 지 오늘로 보름째가 되는 날이다. 명혜를 업고 있던 어머니가 눈을 빤히
뜨고 김희연을 보았다.
[어디,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냐?]
[그건 없지만……]
어머니가 김희연에게 가겠다고 발버둥치는 명혜를 내려놓았다.
[네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김희연이 머리만 끄덕였다. 어머니는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이것아, 다 네 생각하고 그러는 거란다. 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
[나도 이젠 스물일곱이고 세 살짜리 애엄마야.]
명혜의 머리를 쓸어 올려 핀을 다시 꽂으면서 김희연이 낮게 말했다.
[하지만 엄마, 미안해. 자꾸 걱정시켜서……]
박동진의 전화는 다행히 김희연이 받았는데 어머니가 받았다면 이야기가 길어질 뻔했다.
[나, 지금 부산에 있어.]
김희연의 목소리를 들은 박동진이 대뜸 말했다.
[만나고 싶은데, 나올 수 있어?]
[나갈게, 하지만……]
닫혀진 안방 문에다 시선을 준 김희연이 목소리를 낮췄다.
[명혜는 지금 자는데, 데리고 나가지 않아도 되지?]
[할 수 없지, 괜찮아.]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인 오후 5시경에 김희연과 박동진은 광안리 호텔 라운지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
었다. 박동진은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으나 김희연은 면바지에 헐렁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고 긴 머리
는 뒤에서 묶어 올렸다. 박동진이 김희연의 화장기가 없는 얼굴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나하고 떨어지면 살이 오를 것 같았는데 말랐구나.]
[건강해. 밥도 잘 먹고.]
[명혜는 말도 제법 한다면서?]
[슬슬 미운 짓도 해.]
커피가 놓여지자 그들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날씨는 화창했다. 환한 햇살이 바다 위에 덮여져서 파도
끝은 고기 비늘처럼 반짝였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박동진이 김희연을 보았다.
[네 가슴에 아직도 윤우일이 있지?]
[또……]
이맛살을 찌푸린 김희연이 박동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자꾸 그 사람하고 연결시키지 마. 그 사람이 한국에 왔건 떠났건 관심 없으니까.]
[그놈은 나하고 너한테는 운명처럼 얽힌 놈이야. 무시할 수 없어. 잊을 수도 없고.]
그리고는 박동진이 정색했다.
[우리의 우스운 1년 반 동안의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박동진의 시선을 받은 김희연이 이내 머리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결혼한 지 1년 3개월이 되었을 때
갑자기 이혼하자는 제의를 받은 박동진은 예상했던 것처럼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추궁하지도 않았
다. 물론 윤우일의 이름도 그때까지 둘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다시 박동진의 목소리가 김희연의
귀를 울렸다.
[어제 학교로 그놈을 찾아갔었어.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소득은 없었어.]
[……]
[나에 대한 반감쯤이야 내가 당해내겠지만 네 걱정이 되어서.]
[……]
[그놈은 다른 할 일이 있다고 했지만 알 수 없어, 그 속을. 다만……]
박동진이 힐끗 김희연을 보았다.
[또다시 너나 내가 그놈 페이스에 끌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왜?]
머리를 돌린 김희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박동진을 보았다.
[덫에 걸린 건 우일 씨라는 생각 안 들어?]
박동진이 눈만 껌뻑이자 김희연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제가 파놓은 구덩이에 자신도 모르게 빠진 것 같지 않아?]
[그놈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나도 알아.]
어느덧 정색한 김희연이 박동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과는 달라, 우일 씨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던간에 우린 무시하면 돼.]
박동진이 차가운 표정의 김희연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것은 윤우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놈은 입술을 뒤틀면서 말했었다.
[기회가 좋아. 걔 기질이 다시 발동을 시작했을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그리고는 화냥년 기질이라고 결론을 내었던 것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김희연의 부드러운 시선을 받은 박동진이 어금니를 물었다. 하필이면 왜 그놈 말이 떠오른 다음에 저
런 시선이 온단 말인가?
[저기야.]
황준수가 가리킨 곳은 산모퉁이의 바위 투성이 공지였다. 산자락에서 진달래가 어지럽게 피어 있어서
풍광은 그럴 듯 했지만 아래쪽에는 개울까지 흐르고 있다. 윤우일의 눈치를 살핀 황준수가 찌푸리듯
웃었다.
[이 사람아, 저 바위네. 개울은 며칠이면 없앨 수 있다네. 문제는 저 위치라구.]
그들은 자갈밭을 걸어 공지로 더 다가갔다. 그러자 이곳 저곳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가 드러났고 바람
결에 악취까지 풍겨 나왔다. 황준수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쓰레기 더미를 등지고 앞쪽을 가리켰다.
[보게, 저쪽 아파트 단지에서 곧 이쪽으로 10차선 도로가 뚫려. 그러면 이 공지는 도로가의 금싸라기
땅이 된단 말이야.]
[도시계획은 언제 공고됩니까?]
[다음달 초에.]
황준수가 자신 있게 말하고는 다시 몸을 돌리더니 공지를 훑어보았다.
[자네 부친께서는 선견지명이 있으셨어. 나도 작년까지만 해도 이 땅이 평당 만 원도 못 간다고 생각
했으니까.]
이천 북쪽의 야산 자락 임야 6천 평을 윤우일의 부친 유정호가 매입했을 때는 10년도 더 전이었으니
그때 시세는 평당 천 원도 안 되었다. 고향이 여주 근처의 산골이었던 윤정호는 묘 자리라도 쓸 요량
으로 여유 있을 때 사 놓았었는데 명의를 윤우일의 앞으로 해놓아서 이 땅만은 온전하게 남은 것이다.
황준수가 은근한 시선으로 윤우일을 보았다.
[이보게, 자네 부친께서는 만사를 자네 뜻에 맡긴다고 하시더구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뭘 말씀입니까?]
윤우일이 시치미를 뗀 얼굴로 황준수를 보았다. 황준수는 윤정호의 고향 친구로 이천에서 20년째 부
동산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에 뉴욕에 있는 윤정호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이 땅을 지금 내놓아도 평당 7만원은 받아. 그러면 4억 2천이야.]
[저는 지금 궁하지 않습니다.]
[자네 부친의 채무가 아직도 40억 가깝게 걸려있어. 채권자들이 알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뜯어 갈 텐
데?]
[이건 제 땅입니다. 지난번에도 채권자들이 샅샅이 뒤져봐서 알아냈을 텐데요. 그래도 손을 못 댄 것
아닙니까?]
[그땐 시세가 3,4천 원이었어. 다 합해야 2천 정도였지. 소송비용하고 맞먹을 계산이라 포기 했겠지만
지금은 다를걸?]
[그럼 소송해 보라지요, 뭘.]
[그저 얼른 팔아 넘기고 입 씻는 것이 나을 텐데. 내가 한 5억까지는 받아 낼 수가 있는데 말이야.]
[제가 자주 들리지요, 아저씨.]
윤우일이 몸을 돌리자 황준수가 서둘러 따라왔다.
[작자가 나타나면 내가 연락을 하지. 만나나 보게.]
강의가 끝나 가방을 챙기는 윤우일의 옆으로 백경원이 다가와 섰다.
[윤 형, 오늘 술 한잔 합시다.]
백경원도 복학생이었지만 학번으로 따지면 윤우일의 2년 후배가 된다.
[왜? 무슨 일 있어?]
[그저 단합대회 하는 거지 뭐.]
비어있는 앞자리에 앉은 백경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복학생만 모이는 거야. 형까지 넷인데 최용섭이가 경인대 디자인학과 4학년 애들을 포섭해놨어. 회
비는 20만원이야.]
[다 늙어서 무슨 미팅이야?]
[그러니 더 절박할 수 밖에. 이번 기회 놓치면 미친놈 소리 듣지 않겠어?]
백경원이 넓은 얼굴을 더 펴고 웃었다.
[회사 말단으로 들어가면 기가 죽어서 여자 앞에서 서지도 않을 텐데 지금 잡아야 된단 말이야.]
[야, 창피하다. 말 낮춰라.]
따라 웃는 윤우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2교시 후에 강의가 없었으므로 강의실에는 7, 8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중 창가에 앉은 한무리의
남녀 사이에 이은강이 끼어 있었다. 지난번 교외로 드라이브 가자는 제의를 사양한 후부터 이은강은
윤우일에게 거리를 두었다. 책상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을 뿐만 아니라 마주쳐도 눈인사만 하고 지
나쳤다.
[형. 나가서 당구나 한 게임 치지.]
백경원이 일어나며 말했다. 마침 옆을 지나던 서미주가 그 말을 들었다.
[형, 나도 같이 가.]
서미주의 목소리가 컸는지 창가의 무리들이 머리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그럼 넌 게임이나 봐.]
선심쓰듯 백경원이 말하자 창가 책상 위에 앉아 있던 손성태가 나섰다.
[어이, 같이 한 게임 칠까? 윤 형하고는 당구 처음인데 한번 붙어봐?]
손성태 역시 복학생인데 차원이 달랐다.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선택받은 몇명중의 하나여서 일
부 복학생은 그를 경원했다. 그리고 일부는 의식적의로 접근했는데 백경원 일파는 경원하는 쪽이었
다.
[좋아, 한번 붙지.]
대신 대답한 백경원이 정색했다.
[점심 내기야.]
그때 윤우일의 시선이 손성태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는 이은강의 시선과 마주쳤다. 백경원이
전해준 말에 의하면 이은강은 손성태가 제대하고 복학한 작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었다. 겉으로는 이은강이 시침을 뚝 떼고 다니지만 둘이 스키장 호텔에서 나오는 것도 누가 보았고 작
년 여름에는 같이 외국에도 갔다는 것이었다.
학교 앞 당구장에 몰려간 머릿수는 모두 여섯이었는데 여자는 이은강과 서미주 둘 뿐이었다.
[쓰리 쿠션으로 하지.]
큐대를 쥔 손성태가 윤우일을 보며 말했다.
[우리 둘이서 어때?]
윤우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경원과 다른 하나는 옆쪽 당구대로 갔고 서미주가 불평을 터뜨
리더니 이은강과 벽에 붙은 의자에 앉았다. 손성태는 해사한 용모에 키도 컸다.옷도 잘 입는 편이어서
옅은색 캐주얼 재킷에 바지를 입었는데 팔에는 순금 사슬 팔찌를 차고 있었다.
먼저 게임을 시작한 손성태는 잘 쳤다. 단숨에 일곱개를 치더니 여덟개째에는 볼을 좌우로 어렵게 벌
려놓고 물러섰다.
[윤 형, 저 친구 프로야. 집에서 당구대 놓고 연습한다구.]
옆 당구대에서 치던 백경원이 응원 겸 주의를 주었다. 윤우일은 가죽 재킷을 벗었다. 반팔 티셔츠 차
림이 된 그는 큐대를 쥐고 신중하게 공을 겨누었다. 손성태가 은연중에 내비치는 경쟁 심리는 이은강
의 영향 때문일 것이었다. 같이 외국까지 다녀온 사이라면 이은강의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윤우일이 힘있게 친 공이 쿠션을 네 번 맞고 미끄러지더니 정확하게 공을 맞고 멈췄다. 서미주가 탄성
을 질렀지만 이은강은 무표정했고 그것을 곁눈으로 본 손성태는 어금니를 물었다. 공이 모이면서 윤
우일은 단숨에 아홉 개를 치고 물러섰다. 그러나 벌려진 공은 프로도 치기 어려운 배열이었다.
[윤 형, 잘 치는데? 오늘 손성태가 임자 만났구만.]
게임을 하다 말고 옆에 선 백경원이 감탄했다. 약이 오른 손성태가 연속해서 실수를 했다. 그래서 윤
우일은 게임을 가볍게 끝낼 수 있었다. 본래 손성태는 윤우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윤우일은 박동진
무리와 어울렸을 때도 김희연을 옆에 앉혀놓고는 밤을 여러번 세울 정도였다.
[다시 한 게임 해.]
손성태가 얼굴을 굳히고는 다시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큐대는 두 번만 잡았을 뿐 윤우
일의 기세에 밀려 맥없이 무너졌다.
[손성태, 넌 안 되겠다.]
아예 게임을 그치고 이쪽을 구경하던 백경원이 놀리듯 말하자 손성태가 큐대를 내려놓았다.
[졌어. 내가 점심 사지.]
손성태는 근처 경양식집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자리를 잡고 둘러앉을 때 서미주는 잽싸게 윤우일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여섯 명이어서 셋씩 마주보고 앉은 좌석 배열이라 이은강은 앞쪽 가운데
에 앉은 손성태의 오른쪽 자리가 되었다. 주문이 끝났을 때 손성태가 안경알 너머로 윤우일을 보았다.
[윤 형, 제대하고 2년 반 동안 뭘 한 거야?]
모두의 시선이 윤우일에게로 쏠렸다. 주영기 교수가 물었을 때 윤우일은 그냥 쉬었다고만 했었다. 윤
우일이 쓴 웃음을 지었다.
[외국에 나가 있었어. 가족이 지금 미국에 있거든.]
[그렇군.]
손성태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윤우일은 그가 내막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영
학과가 속해 있는 상대에 과 동기가 둘이나 조교로 있는 터라 여기 앉은 다섯이 모두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형 혼자만 귀국한 거야?]
옆자리의 서미주가 물었다. 윤우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개학한 지 한 달째여서 학과 분위기에는 이제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었고 과에 있는 여학생 여섯 명의 신상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는데 서미주는
이은강과 단짝으로 애인이 군에 있다고 했다. 이것도 백경원이 들려준 정보로써 과에는 그런 소식통
이 한두 명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럼 형은 지금 혼자 살아?]
다시 서미주가 묻자 손성태가 풀썩 웃었다.
[서미주가 드디어 고무신을 바꿔 신을 때가 됐군.]
[시끄러!]
서미주가 손성태에게 눈을 치켜 떠 보였지만 당당했다. 윤우일이 웃음 띈 얼굴로 서미주를 보았다.
[내가 다음에 포켓볼 가르쳐줄게. 너 혼자만.]
[글세--, 그것이 잘 되려나 모르겠네.]
손성태가 정색하고 말하더니 윤우일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그렸다.
[지금 노땅들이 급하거든. 그래서 오늘 저녁 최후의 발악적인 미팅에서 한 건을 건지려고 치밀한 계획
중이란 말씀이야.]
[이런 개자식.]
백경원이 입맛을 다셨지만 손성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잘들 되면 서초동 로간 나이트로 데리고들 와. 내가 한잔 살 테니까.]
손성태는 일신전자 사주의 아들이다. 한 달 동안 윤우일이 살펴본 결과로는 사고와 행동이 이기적이
고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는데 그것은 가정교육도 원인 중의 하나겠지만 주변 친구들의 영향도 컸
다. 그 예로 손성태의 옆에 앉은 홍영무는 그와 고등학교 때부터 동기로 군대생활도 같은 내무반에서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홍영무 본인이 작정을 하고 또한 일신전자 사주가 밀어줘야 가능한 일로써 손
성태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종을 거느리고 다닌 셈이다. 마침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왔다. 윤우일은 나
이프를 들었다.
[오랜만에 스테이크를 먹는군.]
고기를 썰던 윤우일은 문득 박동진의 모습을 떠 올렸다. 만일 박동진이 손성태처럼 행동했다면 맞았
을 것이다. 따돌림을 당해서 아예 친구가 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얽혀져 있을 리도 없다.
박동진 가문의 한남유통에 비교하면 일신전자는 코딱지만 할 것이다. 그런데도 놈은 겸손하고 검소해
서 고등학교 때 지하철이나 버스만 탔고 용돈도 늘 쪼들렸다.
어금니를 문 윤우일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그리고 이해시킬 생각도
없다. 포크로 고기를 찍은 윤우일은 입에 넣고 씹었다. 너희들은 모두 내가 지금 덤으로 얻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장래 희망이 뭐예요?]
앞쪽 끝에 앉은 여자가 물었다. 윤우일이 시선을 돌렸다. 네 명 중에서 이 여자만 캐주얼 차림이었고
화장도 안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두드러졌다. 콧날이 선데다 입술이 야무진 용모 또한 눈에 띄어서 그
한마디에 세 명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모여졌다. 나머지 여자 셋도 말을 멈추었으므로 윤우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들도 이 여자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없어요.]
정색하고 말한 윤우일이 머리까지 저었다.
[난 지금도 오래 살았다는 기분이 들어서.]
[나이가 몇이신데요?]
[스물일곱.]
그제야 세 쌍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분위기는 아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 근처
의 카페 안이었다. 백경원의 주선으로 손성태의 표현대로라면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적인 미팅에 참석
한 윤우일은 지금 선택당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여자들이 파트너를 고르기로 했기 때문
이다. 최용섭이 주선한 경인대 디자인과 4학년 여자들은 예상 외로 수준급이어서 분위기는 고조되었
다.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질문부터 던져놓고 이쪽 심중을 보이려고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했
다. 윤우일도 여자들에게 차례로 뭔가를 물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유일하게 캐주얼이
그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20분쯤 후에 윤우일은 캐주얼과 둘이서 카페의 구석자리로 옮겨 앉아 있었다. 나머지 세 쌍은 모두 밖
으로 나갔다. 윤우일은 캐주얼과 짝이 된 것이다. 종업원에게 다시 차 주문을 하려고 윤우일이 손을
들었을 때 캐주얼이 말했다.
[저, 지금 전 가야 되요.]
윤우일의 시선을 받은 캐주얼이 미안한 듯이 웃었다.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미안해서 어떡하죠?]
[그럼 한 가지만 묻겠는데--]
눈에 생기를 띈 윤우일이 캐주얼을 보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날 선택한 이유가 내가 제일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인가?]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처음에는 건성인 질문이 제스처인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더군요.]
[---]
[저도 비슷한 기분이라 쉽게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윤우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미안한데, 괜히 내가 만만하게 보였느니 어쩌느니 하고 물은 것도 부끄럽고, 그럼 가봐요.]
[먼저 일어날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캐주얼이 카운터를 지나 문 밖으로 사라졌다. 시간은 아직 7시도 안 되었다.
빌라의 전화 응답 메시지에는 부동산 사장 황준수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윤우일은 광화문 카
페에서 곧장 빌라로 돌아온 것이다.
[윤 군, 작자가 나타났는데 4억 9천까지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네. 내일 오전까지 가부간에 연락을 해주
게. 다시 말하지만 이번에 넘기는 것이 나을 것 같네. 더 이상 값도 오르지 않을 것 같고--]
정지 버튼을 누른 윤우일은 소파에 몸을 묻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급할 것이 없는 것이다. 황준수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말을 입에다 달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평가는 달랐다. 제 부모한테도 수
수료를 받고 땅을 판 위인이라는 것이다. 땅은 묵힐수록 기름진다. 그것이 아버지의 조언이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감사 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