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류의 차가 꾸준히 나옵니다.
1960년대 양빙호입니다.
색도 거무스름하고 비닐로 싸놓은 것이
꽤 오래되어 보입니다만,
이 차는 1960년대 양빙호는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가 하면,
1960년대에는 양빙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빙호는 석병 사람 양빙삼(楊氷三)이
민국4년에 세웠습니다. 민국4년은 1915년입니다.
처음에는 만전에 세웠습니다.
나중에 사업 규모가 커지자
2년 뒤에 의방으로 진출합니다.
왜 이무로 진출하지 않고 의방으로 갔을까요?
그때만 해도 의방이 차산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의방에서 사모로 통하는 길도 있었습니다.
양빙삼은 만전에 남아서 생엽과 모차를 수매하고
병차도 약간량 가공했습니다.
양빙삼이 병차를 가공했었다는 것은
만전의 옛 집터에서 병차 긴압할 때 쓰이는
맷돌이 나와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동생이 둘 있었는데
둘째 동생 양이(楊二)는 아편중독으로 죽었습니다.
그나저나 둘째라고 이름이 양이인가 봅니다.
부모님이 너무 성의없이 이름 지은 것 아닙니까?
세째 동생 양우육(楊佑陸)이 형과 동업했습니다.
그는 의방으로 온 모차를 긴차로 가공했습니다.
그가 가공한 긴차는 사모, 보이를 거쳐 내지와
티베트로 팔려갔습니다.
중국의 바닷가 지역, 동남아 각국, 태국으로도
팔려갔다고.... 최근 제가 읽고 있는
<고육대차산사고>라는 책에 나와 있네요.
이 책을 쓴 고발창 씨는 이무중학교
수학선생님으로 제가 2007년도에 만났을 때부터
차산의 역사를 수집해서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2007년도에 책이 나왔고,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길래 샀습니다.
육대차산 쪽에서도 긴차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이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아무튼...
양빙삼은 1938년 후에 만전을 떠납니다.
세째 동생과 아편으로 죽은 둘째가
남긴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갔습니다.
이무를 비롯한 의방의 여러 차장들이
1938년 이후에 문을 닫습니다.
왜 그랬는가는 다음 편에 써보겠습니다.
그리고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개인 차장은 전부
국가에 몰수됩니다.
1960년대는 혁명의 열기가 뜨겁던 때입니다.
어디 지주의 개인 차장이 있을 수 있으며
거기서 차를 만들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때 양빙삼을 비롯한 가족들은
과거에 양민의 재산을 착취했다 해서
비판받고 노동하고 굶으면서
괴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 겁니다.
첫댓글 솔바람님의 보이차에 대한 역사소개로 개안(노차에 대해서^^)의 혜택을 많이 봅니다.ㅎ
별말씀입니다.
좋은 내용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