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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 의 눈 물
용서할 권리와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오직 피해자에게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책임이 없다는 말은 무책임한 것이다.
무관한 다음 세대가 물려받았다고 해서
과거의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일본에게 충고한다.
글 빈배 虛舟 binbae45@hanmail.net
용산의 기구한 운명, 110년 아픈 歷史를 용산기지에서 본다.
용은 힘이다. 그래서 제왕의 권력을 상징하고 그 기상은 국운의 왕성을 뜻한다. 이런 의미를 가진 용산(龍山)을 옛날에는 둔산屯山)이라고 불렀다. 슬픈 역사를 가진 숙명의 땅이다.
용산 역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성냥갑 같은 가두리에서 ‘오빠 놀다 가’, 핏기 없는 얼굴로 멋쩍게 희죽 웃는 모습에서 치욕스런 과거를 보았다. 용산 집창촌은 병자호란 때 몽고군이 주둔하면서 생겨났다. 그때부터 일본 미국 그리고 지금까지 110년을 이어 가슴 아픈 역사가 계속되었다.
둔산은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란 뜻이다. 병자호란 때 징키스칸 손자가 머물렀던 땅,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른 뒤에 한양에 군대를 집결하여 야망을 키워온 이성계가 진을 쳤고,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가
주둔했던 막사였고, 임오군란이 빌미가 된 청일전쟁 때 원세개가 끌고 온 몽고 군대가 파오를 쳤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조선군사령부를 설치했다. 6.25와 함께 미군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옹기
종기 모여 살던 해방촌, 삼각지에는 육군본부가 있었는데 계룡대로 이사 가고 이제는 국방부만 남아 있다. 이 모두가 군대의 주둔지(駐屯地)로서의 기구한 운명을 가진 땅, 용산이다.
용산은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였다.
한반도의 한 가운데 자리를 잡은 용산.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라는 것은 두 말이 필요가 없다. 왜 방치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한강 유역은 여러 부족들의 각축장이었다. 강폭이 넓고 물이 깊어 유속이 빠른 한강은, 배수진을 치기에 좋고 방어하기에 유리하여 종종 나라들 간의 경계선이 되었다. 그래서 한강 유역이 남과 북으로 갈리어 국경이 되었다. 이러니 용산은 항상 전쟁의 중심지가 되어, 군대의 대치가 많은 곳이다. 청도 소싸움같이 힘이 서로 부딪히는 곳이다. 한강 부근에서 백제는 초기에서 부터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백제
는 마한을 정복하고 나니, 몸집이 커졌고,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남진 정책에 따라 고구려는 용산을 장수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았다. 그때부터 용산은 고구려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백제는 웅진성으로 패퇴하고 중심세력이 남쪽으로 옮겨 갔다.
오래지않아 신라의 삼국통일로 한강 유역은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한때는 후백제 궁예의 태봉으로 편입된 적도 있었으나, 신라의 삼국통일로 평화가 찾아와 용산은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며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
용산은 고려 때 한양부였고 조선조에는 한성부였으며 일제 때에는 조선총독부 개성부였고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말 고종 21년(1884)에는 용산에서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이 가능한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하여 종교 활동(宣敎)과 상업 활동(通商)을 하게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증기기관을 단 조운선(漕運船)이 제물포에 기항하여, 용산일대에 군사기지와 철도기지를 세웠다. 이를 대륙침략 발판 그리고 한반도 통치거점으로 발전시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증기선의 왕래가 용이하도록 철도 등 육상교통도 원활하게 갖추어야만 했다. 용산은 한양에 들어오는 관문이니 항상 시련을 많이 겪어야만 했다. 사가들은 이것을 용의 눈물 또는 용산의 치욕이라고 기술한다. 뉴욕필 하모니오케스트라 아리랑
군대가 주둔하는 둔산은 교통 요충지여야 한다. 진격과 후퇴가 쉬워야 하고 이합집산이 용이해야 한다. 주둔하는 막사는 은폐가 용이해야 하고 들고나는 길이 사통팔달로 막힘이 없어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갖춘 군사요충지가 용산이다.
마을 뒤를 휘감고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산자락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풍수지리에서는 와우혈(臥牛穴)이라고 부른다. 마을은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이처럼 산이 마을을 빙 둘러 싸여있다고 하여 ‘용산을 두른산’이라고 부르다가 ‘둔산’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는, 임진왜란 때 용산은 군사들의 주둔지였기 때문에 군사산이라고 불렀고 후에 둔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이웃 마을인 대율 북쪽에 있는 골짜기가 둠부골, 마을
뒷산이 투구봉, 장수가 있던 곳이라는 장동골 등, 군사들이 주둔했음을 말해 주는 지명이 여러 군데가 있다.
이성계와 건축 토목공사
우리는 남의 땅을 넘볼 수 없는 민족인가? 단 한번 우리가 대륙으로 진출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성계의 철군(撤軍)으로 그 호기가 영영 없어지게 되었다. 그게 바로 압록강을 건너려다 칼을 되돌린 “위화도(威化島) 회군”이었다.
이성계는 혁명을 완수하고 부하들을 용산에 주둔시켰다. 힘이 강해지면 도리어 남아도는 힘 때문에 항상 다른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다. 일본은 도꾸가와 이에야쓰 시절에 각 막부(幕府)마다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사회가 불안해져서 이를 극복하려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켰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지식인이 넘쳐흘러 사회가 온통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불안을 가진 사람들을 한 군데로 흡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성계는 할 일이 없어진 막강(莫强)한 병력을 나라 도읍을 세우는 일에 투입시켰다.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짓고 성을 축조하고, 5대문을 만드는 일을 하게 하여,. 무력(武力)을 동원하여, 한양이라는 수도를 완성하였다. 강원도에서 떠내려 오는 뗏목을 한강의 용산 나루터에서 건져 올려 궁궐(宮闕)을 짓고 안암골 채석장(採石場)에서 석재를 캐내 성곽(築城)을 쌓았다.
환향녀와 찔레꽃
역사학자 함석헌(咸錫憲)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우리나라는 과거 997번의 외침(外侵)을 당했다고 했다. 책 표지에는 생뚱맞게 60살 먹은 늙은 창녀(娼女)의 누드裸像)가 그려져 있다. 수많은 침략자들로부터 갈기갈기 찢긴 늙은 창녀의 벗긴 몸을 표지를 삼은 것이다. 조선의 퇴락한 몰골을 이렇게 표현한 작가의 마음에서 비참함보다는 어떤 숙명을 보았다. 슬프게도 이 민족은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고 보기 힘든 역사이다. 이 땅에 사는 여인들이 겪은 비극적이고 수치스러운 수난사일 것이다.
험한 놈들이 주위에 있으면 수난 당하는 것이 약소국가의 여인네들이다. 고려 때에는 원의 지배를 받았다. 충렬왕 때이니까 징키스칸의 손자가 칸(왕)이었다. 원의 강압으로 금혼령을 내리고 그네들 주문대로 13-25세 대유녀(大乳女)와 대둔녀(大臀女)만을 골라 해마다 수천명을 공녀(貢女)로 바쳤다. 원은 사람을 개돼지보다 못한 노리개 깜으로 조공(租貢) 품목에 포함시켰다. 과거의 슬픈 역사이다.
어린 여자 몸으로 험한 오랑캐들의 노리개가 되어 말 못할 수모를 겪으며 눈물로 지내다가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탈출하여 멀고 먼 고향을 찾아 왔으나 지척에 부모님이 계신 집을 두고도 가지 못하고, 정절이 목숨보다 더한 당시 인습에 억매여 더럽혀진 육신을 가족에게 보일 수 없어, 발길을 돌려 마을 뒤 저수지에 몸을 던진 화냥년(還鄕女)의 시신에서 민족의 비극을 보았다.
공녀로 끌려가 불렀던 노래가 찔레꽃이다. 찔레꽃 줄기는 일부러 심지 않는다. 제 자리를 찾아 홀로 피고 자랄 뿐이다. 찔레꽃은 담장 안에 심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언덕배기에서 옛날에 살던 집을 굽어보는 곳에 자리를 잡아 자란다. 환향녀의 환생 이였다.
노래가사도 세월이 지나면서 바뀐다. 몽고지명이 북간도가 되고, 꾀꼬리는 오랑캐 호, 피리 적, 호적(胡笛)으로, 호랑나비는 호로(胡虜)오랑캐가 되었다.
원래는 ‘찔레꽃 곱게 피는’ 이었으나 어감이 노래가사로 쓰기에 임펙트가 부족하여 ‘찔레꽃 붉게 피는’ 이라고 바꿔 붙여 불렀다고 전한다.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산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그리운 시절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일본의 야망
1800년대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섬나라 일본은 이들의 좋은 표적이었다. 일본은 자기들의 약점을 속속들이 내 보이면서까지 영국, 스페인, 포르트갈, 독일, 프랑스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조총 만드는 기술까지도 잽싸게 배웠다. 인도, 필리핀은 식민지가 되어 열강에게 먹혔지만 교활한 일본은 국력을 키워, 문호를 개방한 지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도리어 해외에 자기들의 식민지를 갖게 되었다. 조선이 그 먹이였고 중앙청을 지어 조선총독이 지배하는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1906년 4월 대한제국으로부터, 용산 일대의 부지 300만평을 사들여, 주둔군 기지를 건설하였다. 일제(日帝)가 패망한 후에는 70여 년간을 줄곧 미국이 기지로 사용하였다.
조선 근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용산은 110여년 만에 외국 군대가 떠나고 그 자리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한다.
정부는 용산이 가진 역사 문화적 가치를 최대한 살려, 생태 공원을 만들겠다고 한다. 각 부처에서는 경찰박물관, 여성사박물관 등 8개 시설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역사를 망각한 부처 간 나눠 먹기" 작패다.
둔지미 마을이였던 용산의 근대사
1882년 임오군란을 핑계로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는 당시 막강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이곳 청군사령부에 감금했다가 동작진에서 배에 실어 청으로 압송했다. 용산에는 구한말에 둔지미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청군이 파오를 쳤고 청군이 물러가자 용산은 1906년부터 완전히 일본 군사 기지로 변했다.
용산기지는 과거에 일본군 장교 숙소였으나 1946년 한국의 신탁통치를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숙소로 사용하였다.
용산은 구한말 외국 군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양 도성 바깥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용산에는 둔지산이 있다. 높이 65m의 낮은 언덕이지만 조선 시대 왕실은 이곳에 남단(南壇)을 만들었다. 조선 왕실 제천 행사가 수시로 열리던 곳이었다. 지금도 돌기둥과 주춧돌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용산에는 조선의 아방궁이라는 조선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백합은 껍질이 두꺼워 물고 조이는 힘이 가장 센 조개다. 그래서 백합을 백가지 조개 중에 왕이라고 한다. 배정자의 별명이 백합조개다. 초대 통감 이또 히로부미는 공개석상에서 배정자를 양녀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총독 관저를 수시로 제 집처럼 드나들며 잠자리 시중을 드는 내연녀다. 용산에는 만주사변 전사자 충혼비와 화강암에 조각한 一誠貫之 라는 일본군의 구호 그리고 일본군 '★'표시가 지금도 남아있다.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수감한 '위수 감옥‘이 이곳에 있었다. 용산기지의 육군본부 벙커에서 6·25때 한강다리를 폭파하기로 한 결정도 이곳
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용산은 박정희 장군과 김종필 소령이 최초로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의정부 부대찌개나 용산의 햄 소시지, 스테이크 요리는 주한미군부대에서 나온 것이다.
병자호란 때 둔산에 주둔하던 원나라 군대로부터 육류 음식 조리법이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설렁탕이다. 또한 거친 면발을 묵직한 칼로 뚝뚝 잘라 징키스칸 요리 국물에 데친 칼국수와, 양고기 소를 넣어 만든 만두, 순대도 몽고인들이 가져왔다 원나라 군사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남해 마산포에 주둔할 당시 병사들에게 고량주와 소주를 공급하여 전의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온 독한 술들도 몽고로부터 전래되었다.
용산 가족공원에서
둔처가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병마가 마실 물이 있어야 한다. 마산의 몽고간장은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난 몽고정 우물물을 사용한다. 용산에는 우물들이 여러 개 있었지만 많은 군사가 주둔하니 군마 음용수로는 부족하여 일부를 한강의 빙고(氷庫)부근에서 우마차로 길어왔다.
용산에는 미8군 사령부가 있다는 것을 적도 다 안다. 전쟁이 일어나면 첫째 공격 목표가 사령부이다. 핵무기의 공격은 한순간에 일어나고 한순간에 끝이 난다. 한번 방사능 낙진에 오염되면 지표수는 오랫동안 마실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순간부터 기동력이 마비된다. 미군 병사가 마실 생수는 매일 일본 오끼나와에서 공수해 왔다. 물에 따른 불편한 점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이었다. ‘수돗물 대신 지하수로’ 용수를 변경하라는 사령관의 지시가 내렸다. 미8군 기술공병단으로 부터 지하수 조사를 요청해 왔다. 그래서 영내에 지하수가 나옴직한 자리를 잡아주었다.
페일링이라는 착정 장비가 투입되었다. 시추(試錐)결과는 이렇다. 8인치 구경으로 암반을 지하 250m까지 파내려갔다. 그 지점에서 수맥을 찾았다. 하루 가채수량(可採水量)은 2천 톤이었다. 수질분석(水質分析)을 미국 지질조사소에 의뢰하였던바 화강암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최상급의 수질이었다. 탄소 동위원소 년대 측정결과, 이 물은 2만 년 전에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었다. 어떤 신선이 이만 년 전의 물을 맛볼 것인가. 미8군이 평택으로 이사를 갔으니 혼자 남아있는 이 관정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샘은 어머니 젖과 같다. 자꾸 퍼내야 땅 속에 물길이 터져 물이 풍성한 샘이 된다. 서울시는 한강물인 아리수를 안전한 물이라고 홍보하고 있으나 글쎄다. 용산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보통의 약수터처럼 누구나 떠 가게하고 병에 넣어 나누어 주면 목마른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積善)은 없을 것이다.
가제
용산 가족공원에는 조그마한 물웅덩이 여러 개가 있었다. 물가에는 난초나 붓꽃도 종종 눈에 띠었다. 웅덩이에 움직이는 물체들이 보였다. 가만히 보니 가제다. 우리나라의 산 계곡에서 본 가제보다 배는 커 보였다. 미군병사가 애완용으로 기르던 미국 가제를, 본국으로 발령이 나자 이곳에 방생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호기심에 잡아보기로 했다. 구운 오징어를 잘게 찢었다. 페트병에 구멍을 내어 자갈과 함께 오징어채를 넣고 반나절 물속에 던져두었다. 꺼내보니 가제가 가득 차 있었다. 생물학 교수로 있는 친구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내 집 부근, 백사실공원 계곡에는 가제가 살고 있는데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곳에 방사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은 의외였다. 미국 가제는 천적이 없다. 다른 물고기의 알이나 양서류의 치어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베스나 부루 길처럼 자제 때문에 생태계가 훼손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술안주나 하면 좋을 것입니다.
기모노 차림의 백합 조개
용산을 지나는 운하계획과 KTX
조선시대에는 용산을 중심으로 뚝섬, 마포, 양화진 등 한강나루는 물자가 들고 나는 터미널이었다. 그래서 한강을 서울 도심까지 주운(舟運)으로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태종 때 좌의정 하륜은 노량진 마포에서 남대문까지 운하로 물길을 연결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학자들을 시켜 타당성을 조사한 결과 남대문에서 한강까지는 남산을 이루고 있는 딱딱하고 조밀한 화강암이 지하에 묻혀 있어 이 바위를 뚫고 운하를 만드는 것은 불가하다하여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목멱산 마른내와 북악산물이 합수하는 두물머리 광교는 남대문과 지척이다. 청계천을 지나 종로 부근까지 커다란 배들이 드나든다고 생각하니, 아깝다.
문이란 왕래(往來)가 있어야 하고 소통(疏通)이 되어야 한다.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일 때에도, 민간인의 통행과 문물의 왕래를 막지 않고 문을 항상 열어두어 통행을 보장한 곳이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통하면 안 아프고 안 통하면 아프다. 병이 들었다는 것은 기가 막혀 통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통즉불통(通卽不痛), 불통즉통(不通卽痛)이다. 기가 원활하게 흐르면 아픈 데가 없다. 흐름이 막히면 제때 풀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옆으로 터지거나 넘쳐흐른다. 마치 홍수와 같다. 막혀서 안 통하면 마비가 온다. 이것이 혼돈이다.
문 임경림
오래 닫아만 둔다면
그건 문이 아니다.
벽이지
열기위해
잠시 닫아 두는 게 문이다.
벌서는 아이처럼
너무 오래
나를 세워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본래 하나였던 세상
나로 인해 나누어 진 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안과 밖이 강물처럼 만나
서로 껴안을 수 있게
마음과 마음이
햇살 되어 따뜻이 녹여줄 수 있게
이제 그만 나를
활짝 열어 주지 않겠니?
KTX가 용산역을 기점으로 한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용산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남쪽으로 호남선을 경유하여 해남까지 연장하고 해저 터널을 지어 보길도를 거쳐 제주를 잊는 제주노선, 원산, 함흥,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노선과 개성, 신의주, 단동을 거쳐 산동, 페이징으로 가는 페이징노선과, 군산, 바다 밑 해저터널을 지나 상하이로 가는 상하이노선, 부산 바다 밑 해저터널을 거쳐 도쿄까지 가는 도쿄노선으로 연장 될 것이다. 항공노선을 대체하는 터미널이 용산역이다. 그러니 국제 업무권과 그 주변은 마천루로 가득 찬 랜드 마크가 될 것이며 상전벽해(桑田碧海)같은 개벽(開闢)이 일어날 것이다.
한국전사관이 적당한 명칭이다.
각국의 역사박물관은 그 나라의 정신이 녹아있다.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 해골 박물관에 가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아우슈비츠 박물관에는 유태인들의 애환이 담겨있고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는 전쟁의 상흔과 함께 “폴란드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
박물관 터로는 전쟁의 상흔이 시대별로 골고루 남아있는 용산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육군본부가 계룡대로 옮겨 가고 이 자리 삼각지에 전쟁기념관을 세웠는데 아주 적절한 위치이지만 명칭이 문제다.
우리나라의 전쟁역사는 오로지 외세에 의한 수탈의 역사였다. 침략자들과의 전쟁은 수비와 방어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승전이라고 하는 것은 침략자들을 잘 막아내고 희생이 작은 전투인데, 내 땅에서 침략자들과 싸움하는 것을 어찌 전투를 기념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쟁의 참혹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아픔이다.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흉터이다. 기념관이라니? 국립중앙박물관 용산전시관 부설 전사관(戰史館)이 적합한 명칭이다. 전사관은 화려하지 않게 다소곳이 구석 한 편에 물러나 있는 것이 전몰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이다.
돌아가는 삼각지 배 호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도는 이발길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젖어 불러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미군은 주둔했던 땅을 반환한다니, 정부에서는 이 땅을 국가 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한다. 용산은 치욕으로 얼룩진 땅이었다. 공원 설계의 주안점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려 ‘치유(治癒)’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오랜 시간 외국군대의 점유로 인한 훼손과 오염도 외과수술을 받아야한다.
그 다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역사성과 생태적 가치, 문화적 잠재력이다. 남산공원과 한강을 잇는 생태 축을 연결하려는 의도 또한 중요하다. 어찌 보면 정승 하륜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산, 골짜기, 연못, 오작교 같은 한국적인 이미지와 멋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식 정원’을 표현하는 공원을 권하고 싶다. 미국의 센트럴 파크와는 달리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우리 공원이어야 한다. 이것이 국립공원이 아닌 국가 공원의 자격이다.
레반드라나쓰 타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큰 나라 인도의 지성들은 암울한 시절을 시 문학을 통해 한탄을 했다.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절망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착취와 수탈이 끝없이 이어졌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였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 시인 타골은 소월 춘원 만해 등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 성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방의 등불은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는, 육당에게 써준, 우리 국민에게 바치는 헌정 시였다.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타골 -
아, 용산 찬란한 미래가 보인다.
미래의 용산은 서울시 안에 있는 일개 구 이름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용산을 벗어나서 동북아의 용산이 되어야 하고 세계의 용산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용의 눈물은 이제 그만, 치욕의 용산은 이제 끝났다. 용산은 비좁은 한국을 박차고 나가 세계를 향해 찬란한 빛을 밝히는 동방의 등불(Illumination in the east.)이 될 것이다. 타골의 시는 용산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찬가(讚歌)가 되리라. 용산이 걸어가는 길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고 뿌려주는 진달래꽃 같은 것이다. 미래 용산의 눈부신 비상(飛翔)이 눈에 보인다.
국가정원 1호로 지정한다면
국토교통부는 용산공원에 경찰박물관, 여성사박물관 같은 황당한 시설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 기가 찬다. 용산 미군 기지는 곧 평택으로 이전한다. 서울에 235만㎡(약 71만평)의 비어 있는 공원 부지가 생긴다는 것은 정말 다시없는 기회다. 그 땅에 많은 국민이 기대하는 멋진 공원을 조성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 빈 땅이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하니 부처들이 너도나도 숟가락 들고 덤벼든 꼴이다. 아니 이제 겨우 돋아나는 새싹에 진드기 떼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공원을 건물로 채워 넣겠다는 발상부터가 치졸하다. 고층 빌딩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서울 도심에, 모처럼 생긴 공간을 콘크리트 숲으로 채우겠다는 생각이 한심스럽다. 정부의 발상이 그 수준이라면 아예 용산공원에서 손을 떼야 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전문적 식견을 모아 서울의 이미지를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많은 전문가와 국민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여 이용계획을 새로 짜야 할 것이다. 국토부는 뒤늦게 여론 수렴을 더 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공무원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움직이는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국민 의견인 것처럼 속여 정책을 자기들 원하는 방향으로 오도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국민이 ‘그게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숭례문은 국보 1호, 동대문은 보물 1호, 설악산은 국립공원 1호인데, 역사성 상징성과 입지를 감안할 때 용산공원을 국내 최초로 ‘국가 정원 1호’로 지정한다면 반대할 국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국가정원 2호는 경주 황남동 고분군, 국가정원 3호는 순천만 갯벌을 추천한다. .
용산을 반환 받는다니 부처 간에 나눠 먹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립과학문화관(미래창조과학부)
국립여성사박물관(여성부)
아리랑무형유산센터(문화재청)
국립경찰박물관(경찰청)
국립어린이아트센터(문화체육관광부)
용산공원 스포테인먼트센터(문체부)
호국보훈 상징 조형광장(국가보훈처)
아지타트 나무 상상 놀이터(산림청)
. 중국인 관광객의 치맥 파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민중은 개 돼지처럼 밥만 주면 된다.
국민의 99%가 개나 돼지 새끼들이라면 개나 돼지 새끼들이 낸 세금을 받아먹고 살아온 그는 누구일까요. 그는 기생충이거나 진딧물 같은 존재요. 개·돼지에 기생하는 기생충.
교육부를 개 돼지 사육부로 바꾸자.
나와 내 자식들이 개·돼지라는 걸 알게 되니 비참하구나.
그래, 나 개·돼지다. 어쩔래?".'꿀꿀·왈왈' 확 물어버릴라.
그래 우리는 개 고생하는 개 새끼들이다.
그대들 고관대작에게는 으ㅡ르렁 대는 맹견이지만
백성은 하늘, 민중에게는 삽살개다. 미친놈에게는 몽둥이가 약이지.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집 나가면 개고생인데 복날 개 패듯 하니.
집 잘 지키는 누렁이도 재수 없으면 보신탕집에 팔려가는 신세. 차라리 애완견이나 되어 주인에게 아양을 떠는 것이 상팔자라지.
개의 이빨은 사람을 물고 사람의 이빨은 마음을 문다.
서양에서 개를 먹으면 야만인이고 한국에서 개를 드시면 마누라에게 귀여움을 받는다.
한 획이 다르면 번견(番犬 집 지키는 개)이 변견(便犬 똥개)이 되어 개장수에게 팔려간다.
개와 경주 진 사람 - 개 보다 못한 놈 이긴 사람 - 개보다 더한 놈
비긴 사람 – 개 같읕 놈
개 팔자 상팔자. 개 달 보듯 한다.
개가 웃을 일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
똥마려운 개 나대듯
발정한 암캐 동네 쏘다니듯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f다.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 (堂狗三年 吟風月)
개가 사람을 물면 미친개고 사람이 개를 물면 신문에 난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
화목한 가정을 위해서라면 눈을 내려 깔고 살렵니다.
전에는 부인이 남편의 사랑스러운 푸들이었지만 이제는
부인의 분부를 잘 따르고, 부르면 달려오고, 주는 대로 받아먹고,
손 달라면 발 내미는 부인을 위한 사랑스러운 말티즈가 되겠습니다.
가끔은 능청스럽게 애교를 떨어야 되겠지요.
그래야 부인이 행복하고 온 동네에 평화가 옵니다.
그래야 ‘주여! 내 마음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할 것이 아닙니까?
개
여기에 개가 묻혀있다.
그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나
허영심이 없었고
힘을 가졌으나
거만하지 않았다.
용기를 가졌으나
잔인하지 않았고
덕목을 가졌으나 48/16/07/15
악덕은 갖지 않았다.
이러한 칭찬이
인간의 유해 위에
새겨진다면
의미 없는 아부가 되겠지만
죽은 개의 영전에
바치는 말로는
정당한 찬사이리라.
시인 바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