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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장~50장까지와 출애굽기 1장~2장의 의미분석 | |
언약자손들의 형통 | 자손의 생육과 시련 |
46장~47장 야곱 가족의 이거 48장~49장 야곱의 축복과 예언 50장 요셉의 위로와 약속 | 1장 자손의 생육과 애굽의 학대 2장 모세의 출생과 광야의 시련 |
46장과 47장 말씀은 언약 자손들의 형통한 내용가운데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이거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을 인하여, 흉년을 만난 야곱의 자손으로 애굽에 내려가 그 땅에서 객이 된 가운데 죽지 아니하고 자손 번창을 하게 하시며 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으로 열 두 아들들에게 축복하게 하시며 요셉과 형제들이 서로 위로하며 살도록 형통하게 하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이러한 내용 가운데 46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내용인데,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립니다(1절).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이름한 지역이며, 가나안 땅의 남부 경계선 부근에 위치해 있고 애굽의 유명한 방어선 부근이기도 합니다. ‘브엘세바’는 전에 아브라함이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며(창21:31~33) 이삭도 제단을 쌓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26:23~25).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가다가 브엘세바에 들려 희생을 드린 것은, 그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간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2절과 3절에서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1절 서두에서 성경 기자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위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는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아 야곱아’라고 하시며 두 번을 반복하십니다. 이는,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이전부터 이미 그를 알았으며 그와 함께하셨고 앞으로도 동일하게 함께 하실 것이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두 번을 연속하여 부르시는 것은 곧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이 한없는 사랑의 관계라는 일방적 은혜의 표현입니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명하시면서 스스로를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라는 뜻을 가진 일인칭 대명사 ‘아노키(אנכי)’는 주어를 강조할 때 쓰이는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먼저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의 히브리어는 ‘하엘 엘로헤 아비카(האל אלהי אביך)’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나는) 그 엘이니 네 아비의 엘로힘(이다)’이 됩니다.
앞의 ‘하엘’은 정관사 ‘하(그)’를 동반한 단수형이며, 뒤의 ‘엘로헤(하나님)’는 복수형입니다. 하나님의 명칭 중 ‘엘’과 그 복수형 ‘엘로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특히 ‘엘’은 ‘능력자’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택한 조상들에게 언약과 지시를 하실 때마다 언제나 먼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을 잊지 않도록 드러내셨습니다(창17:1,35:11).
본문에서도 애굽으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야곱을 찾아와 주셔서, 이전까지 아버지 이삭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 함께 하신 것처럼 너와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예전에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나타내셨던 하나님이(창26:24) 야곱에게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데, 이렇게 동일한 하나님께서 단지 이를 수식하는 사람의 이름만 바뀌어 나타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세대를 거치고 세월이 흘러도 그 언약이 결코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약속을 하시는데,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는 약속이요 이 역시 조건 없고 일방적인 은혜의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계승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도 조건 없이 은혜로 그 언약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약속은 야곱 개인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연합체인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래서 1절 서두에 ‘이스라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야곱과 열두 아들은 곧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약속하신 ‘나라’인데, 이는 신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그의 나라 모든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이 구절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키(כי)’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라는 것은 곧 ‘애굽’입니다. 그리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한다’는 것은 열조에게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업으로 준다는 언약에 대하여 그 증거를 그가 물었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8~14)고 하신 말씀의 연속선상이며, 변함없이 계승되는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열조의 조상들에게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가족들과 모든 것을 ‘이끌고 발행하여’ 이방 땅 애굽으로 가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성의 번성과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그의 언약에 대한 섭리와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약속은,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라는 말씀으로 성취된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하심과 그의 신실하신 속성 때문입니다.
그들 후손들의 행위에 의한 이유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 확인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까지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야곱과 모든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까닭은, 이들의 인간적인 욕망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는 가뭄이나 기근 같은 단순한 자연 재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는 언약의 성취 과정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이상’(2절)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구원 사건을 미리 준비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보증을 하시는데,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고 하십니다(4절). 4절은 앞의 3절을 뒷받침하는 약속입니다. 보통 히브리어 문장에서는 인칭 대명사가 잘 사용되지 않은데도 본문에서는 특별히 ‘내가(아노키)’라는 단어가 문장의 서두에 나와 하나님 바로 자신이 행동의 주체가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와 함께’에 해당하는 ‘임메카(עמך)’는, 행동을 같이하며 운명을 같이하는 데도 사용되는 전치사 ‘임’에 2인칭 대명사 접두어 ‘카’가 결합된 형태로, 하나님께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야곱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즉 야곱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임마누엘’을 말씀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을 뜻합니다.
이보다 더 큰 보증과 위로 그리고 확증은 없습니다. 이는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한결같고 변함없이 하신 약속이셨으며 그리고 행하여 주셨습니다. 주의 백성들의 행위나 형편 따위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야곱 이전에도 언약 백성들에게 동행해 주셨으며 야곱 이후의 자기 백성들과도 동행해 주셨습니다. 이전 아브라함과 이삭과도 행위와는 상관없이 함께 하심으로 보증과 위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이전의, 아담과 셋과 에녹과 노아와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고린도 성에서 복음을 전하며 대적과 비방함을 받고 있던 사도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행18:10)라고 하시며 바울을 강하게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살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인생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항상 ‘꼬일 대로 꼬인다’는 느낌이 들도록 뒤틀면서 끌어가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나의 뜻을 포기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야곱의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야곱의 인생에는 애굽으로 이주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요셉 역시 애굽의 총리가 될 계획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모두 애굽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해 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 생각처럼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믿음이 적어서 그런가’,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성도의 인생은 형통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아들 요셉의 손으로 하여금 야곱의 눈을 감기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두 가지의 약속 모두 훗날 성취됩니다. 야곱은 요셉에 의해 장례가 되고 소원대로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되는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주고 싼 땅입니다(창50:1~5,23:8~23).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백 년의 섬김이 끝나는 기한에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올라가게 됩니다(창15:13,출12:40~41). 출애굽기 12장에서의 ‘사백삼십 년’은, 요셉과 함께 귀족 생활 삼십 년과 종살이 사백 년을 합친 기간입니다.
‘내가...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에 해당하는 원어는 ‘웨아노키 아알르카 감 알로(ואנכי אעלך גם־עלה)’인데, 여기서 ‘웨아노키’는 ‘그리고’라는 뜻의 ‘와우(ו)’ 접속사와 1인칭 공성 단수형에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가 붙은 것으로 ‘내가 너를 올라오게 할 것이다’는 뜻입니다. ‘감’은 ‘또한’이란 뜻을 지닌 부사이며 ‘알로’는 어근 ‘알라’의 부정사 절대형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동사의 히필형(아알르카)과 부정사 절대형(알로)이 연결되어 사용되면 결과의 확정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본문은 ‘내가 너를 확실히 올라오게 하고 올라오게 할 것이다’는 강조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올라옴’에 대한 약속의 절대적 성취를 강조하는 것이 됩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기 전 브엘세바에서 여호와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그 밤에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1,2절)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3,4절), 선택하신 언약 백성을 향한 일방적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찾아오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때를 따라 찾아오시고 다가오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브엘세바에서의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의 말씀과 함께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야곱으로” 떠났습니다(5~7절).
서두의 ‘떠날새’에 해당하는 원어는 ‘야캄(יקם)’인데 반해 1절의 ‘떠나’는 ‘나싸(נסע)’입니다. 한글성경은 같은 뜻으로 번역했으나 원문은 다릅니다. 1절의 ‘떠나다’는 야곱이 두려움 가운데 떠나는 것을 말하지만 5절의 ‘떠나다’는 하나님의 확실하고도 든든한 언약을 받은 상태에서 떠나는 모습을 뜻합니다.
즉 야곱이 이전 상황과 판이하게 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박진감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단호히 가나안 지역의 경계인 브엘세바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어법에서 본문에서와 같이 ‘와우(ו)’가 미완료형(야캄)과 함께 쓰이면 과거에 이미 완료된 동작을 나타내게 됩니다.
8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간 그의 가족들의 명단과 그 숫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야곱의 자손이 빠짐없이 이방 땅 애굽으로 내려간 사실과 그 숫자를 분명히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의 숫자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숫자가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육 명과(26절) 애굽에 있는 요셉 부부와 아들 두 명을 더해서 도합이 칠십 명이라고 하였는데(27절),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행7:14)라고 말한 내용과는 숫자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주경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의 견해들이 있으나 정확한 결론은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성급한 어떤 학자들은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온 자는 야곱의 아내들과 자부들을 제외한 육십육 명이며, 애굽에 이른 자 칠십 명이라는 것은 육십육 명에 야곱과 요셉 그리고 두 아들을 합한 숫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 민족의 대표수로서 칠십 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 백성의 시조라는 것이며 그들의 후손이 사백 년 후에 출애굽하여 장엄한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살아서 애굽으로 내려온 모든 친족 숫자‘를 뜻합니다.
28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서 총리가 된 요셉을 상봉하는 내용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향하던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28~30)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인도하게 하고’는 ‘레호로트(לחורת)’인데, 이 동사는 ‘야라(ירה)’의 사역형입니다. ‘야라’의 기본적인 뜻은 ‘던지다’인데, 이는 행동의 주체에 의해 조종된다는 의미가 강한 단어입니다. 대게 불가항력의 운명에 처하게 될 때 이 동사가 사용됩니다.
야곱이 애굽을 향해 떠나오기는 했으나 이제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과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가운데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에서 ‘보이고’는 ‘라아(ראה)’라고 하는데 뜻은 ‘증명해 보이다’, ‘인지시키다’, ‘제시하다’ 등입니다. 즉 지금까지 야곱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에 대해 아들들로부터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 자신은 추측만으로 온 가족으로 기둥을 뽑아 애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야곱에게 살아 직접 나타나 보인 것이며 야곱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요셉을 만난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야곱은 바로 요셉에게 가지 아니하고 유다를 먼저 요셉에게 보내어 알리게 하고서 고센 땅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그는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자손 요셉을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 주시는데, 이스라엘은 마음에 두었던 그의 꿈 이야기를(창37:11) 벌써 잊어버리고 이전까지 요셉을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택한 백성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잊어버리게 되면 두려움과 걱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야곱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들 요셉을 애굽에서 만나고서,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하며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아들 요셉으로 인해 그는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보편적인 신자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하실 것이라면 그냥 편안하게 가나안 땅에도 풍년을 주셔서 보호하시지, *왜 이렇게 요셉을 노예로 팔리게 하시고 옥중에서 꿈을 해몽하게 하여 총리로 만드시고, 그리고 온 땅에 흉년을 들게 하여 가나안 땅에서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시면서까지 복잡하게 하시냐며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며 측량치 못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구원 방식은 구원될 조건을 인간에게서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실천과 행위를 보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모든 인간이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그 어떤 요구 조건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 조건을 충족시킬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언약’이며, 그 ‘언약’으로 인한 긍휼과 자비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통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가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에 있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로 인해 그 ‘언약’에 의한 긍휼과 자비를 입었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하는 것이 ‘오직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조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직 자식이 없는 가운데 찾아오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라고 언약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고 언약하셨으며 또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가나안)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러한 언약을, 아브라함의 조건이나 행위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어 성취하십니다. 야곱으로 열두 아들을 주셔서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살게 하시고자 그들 모두를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을 때 충분한 대가를 주고서 구입한 가나안 땅의 매장지에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이삭과 야곱도 들어가며 훗날 결국 약속의 땅 모두를 얻게 됩니다.
요셉은 고센 땅에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 기뻐한 후 형들과 아비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31~34)라고 대답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렇게 대답하시게 되면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34)라고 합니다. 요셉이 형들과 아비의 가족들이 바로에게 할 말을 입에 넣어주는 내용입니다. 고센 땅은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의 땅으로서 좋은 목축지이기에 이스라엘 자손이 목축하며 살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그런데 정작 고센 땅인 이유는, 가나안 땅이 가까워서 돌아가기에 적당한 위치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곳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거처로 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위치보다도 본향이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떠나기에 적합하다는 말이며 출애굽을 위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가증히 여기므로 요셉의 계획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짙게 하여 줍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 지역을 바로에게서 얻을 것이다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놓으신 섭리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목축은 단순한 직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목축을 위한 목적으로 좋은 거처인 고센 땅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고센 땅은 언약 백성들이 잠시 머물 장소였으며 그곳은 출애굽을 위한 자리이며 그래서 요셉과 야곱의 입술이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목축은 선조의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총리 요셉으로 인한 풍요와 배부름을 구하기보다도 목축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고 소유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풍요의 땅인 애굽에 눌러 앉으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땅에서는 나그네 인생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사를 부정하며 애굽 땅에서의 좋은 자리를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곧 언약대로 떠날 것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을 선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세상의 것을 쓰레기처럼 여깁니다.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하늘 양식과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하고자 주어진 삶에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세상은 나의 집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