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 레지오의 수호 성인들
제7항 : 성 바오로(교본 221-222쪽)
레지오 마리애는 선교 단체이므로 탁월한 선교사인 성 바오로 사도를 수호 성인으로 모시고
단원들이 그의 선교 열성을 본받도록 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기원후 5년경 로마 속령인
길리기아의 타르소에서 베냐민 지파의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해외 거주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 희랍 이름도 가졌는데 그 이름은 바오로였다.
청소년기는 예루살렘에 와서 보냈는데 바리사이파로서 율법학자 후보생이 되었다.
그는 백성의 존경을 받던 율법학자 가믈리엘의 제자였으며 신생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미워하고 그 신봉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는 36년경 그리스도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라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여 개종하였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다마스커스 개종 사건을 세 번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9장, 22장, 26장
참조).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면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신비로운 몸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신비체의
머리이시며 그리스도교인들은 신비체의 지체로서 서로 한 몸을 이루므로 비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바오로는 비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회개는 사도로서의
소명을 의미한다.
그는 39년경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사도들을 만났고 바르나바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가서 선교하였고 거기서 교리 교사
로서도 활약하였다.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선교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불린다.
그는 세 번에 걸쳐 외국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긴 선교 여행을 하였다. 첫 번째 선교
여행은 45-49년, 두 번째는 50-52년, 세 번째는 53-58년 사이에 있었다.
그는 49년경에 개최된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에 참석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모세의 율법
을 지킬 의무가 없음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이 회의에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가 유다교 종파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그리스도교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선교 여행으로 유럽까지 복음을 선포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체포되었
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여 60-61년 사이에 말타 연안을 따라 로마에 끌려가 감금되었
다. 일설에 의하면 에페소,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하고 스페인까지도 갔었고
트로아스에서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67년경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무덤은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전에 있다. 그는 신약성서 13권을 집필하였다. 그의 공식 축일은 베드로 사도와 함께
6월 29일이고 개종 축일은 1월 25일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선교에 몸바친 바오로 사도의 생애를 본받고 "복음 전파는 의무이므로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갈라 2, 8 참조)이라고
한 그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늘 선교 활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고 1주일에 2시간 이상의
활동 의무를 기꺼이 채워야 할 것이다.
최경용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