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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30. 주일 큐티
이사야 6:1 ~ 8
그 때에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뵙는 이사야
관찰 :
1)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본 환상
- 1절a.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 이다(B.C. 740 ~ 680년경).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웃시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했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하스왕은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워야 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했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선포되어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으로부터 다시금 소명을 받는다.
- 1절b.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이사야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를 보게 되었다. 그 보좌는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였다. 하나님의 보좌는 성전에 있었고, 성전은 하나님의 옷자락으로 가득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이 옷자락과 같이 가득하게 덮여있는 모양으로 형상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이시기에 그 거룩하심이 가득하게 충만한 상황이었다.
- 2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의 위에 섰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스랍들”(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이다.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에 노출되는 것이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스랍 천사의 마땅한 태도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를 날아다니는 존재로서 그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서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존재들이었다.
-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스랍 천사들의 찬양의 주제는 거룩이었다. 하나님의 거룩을 삼중찬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본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극존칭의 표현이자, 하나님의 거룩 그 자체의 존귀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함을 찬미하고 있다.
- 4절.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스랍 천사들이 날개를 저어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의 거룩을 찬미하는 소리가 거대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흔들거릴 정도의 요동함이 있었다. 이 진동은 건물이 무너질 징조로서의 진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피조물의 마땅한 반응으로서의 진동이었다. 그리고 연기가 가득하게 되었다. 이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였다. 스랍들의 찬양으로 말미암는 이 성전의 연기는 하나님의 거룩으로 인하여서 죽어야 하는 존재들에게는 소망이 되는 은혜의 연기라 할 것이다. 그 연기가 죄를 가리워주는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2) 환상을 보는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
-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 이사야 선지자는 “때”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이 환상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을 절감하게 되는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죄인이라는 각성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반드시 망해야만 하는 죄인 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선지자가 입술이 부정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선지자가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부정하다는 자기인식이다. 부정한 존재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죽음임을 이사야는 자백하고 있다. 숨길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자기인식이 이사야를 살리고 있다. 이사야가 이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비록 선지자일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소멸하시는 불에 의해 타올라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 죄인된 자신의 본성을 발견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그렇기 때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 죽음에 직면하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3) 하나님의 솔루션
- 6절.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 “그 때” 이 때는 이사야의 절망으로 경험하게 된 때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으로서의 실재를 고백하며 살 길이 없어져 망하게 된 자신의 존재론적 본질을 깨달은 이사야는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도리어 화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 하나님은 이사야가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해 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거룩을 찬미하는 스랍의 하나를 명하여 제단에 피운 숯을 가지고 이사야에게 날아가게 명하셨다.
- 7절.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그 숯을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에 대게 하신다. 그 입술에 핀 숯이 닿게 되자 이사야의 입술이 타들어가고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이 제하여지고, 죄가 사해지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사야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죄된 속성으로서의 입술을 통하여 나오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그렇게 죄인 된 존재임을 고백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죄를 씻음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룩으로 바르게 인식하는 자에게 깨끗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죄악을 불로 살라버리신 이후에 비로소 이사야를 부르신다. 다시 부르시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누가 갈 것인가를 물으셨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 순종함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을 했다. 이사야는 진심과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반응하게 되었다. 이 전에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셨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사야의 죄악 때문이다. 그러나 제단 숯불로 그 입을 태우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지자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음성을 비로소 듣게 되고, 하나님 앞에 반응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다.
-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바르게 알게 된 이사야는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은혜를 얻게 되었다.
가르침 :
1) 하늘 보좌에서 발생하는 진짜 예배를 목도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반응은 “화로다 나여 죽게되었도다”였다.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나아갔다. 그곳에서 스랍들의 찬양을 보았고, 또 들었다. 하나님 보좌의 지존무상하심과 그 거룩하심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그 놀라움에 흠뻑 취해 자신의 죄악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는 소멸하는 불에 타 죽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죄악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죄악으로 말미암는 고통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부르짖게 된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은 스랍을 사용하셔서 선지자 이사야의 죄악의 근원이 되는 그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지져버리신다. 그것은 고통이 수반하지만 이사야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길이었고, 그로 인하여 이사야의 근본적인 죄악이 사라지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의 깊은 죄의식은 그 의식이 각성되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 죄가 불타 소멸하게 되는 일을 체험하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하여 의식하는 것은 그렇기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2)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미쳐 날뛰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세상이 죄악으로 만연하고 아무리 더럽고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모두 다 씻으시고 회복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인된 인간에게는 저주와 같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이사야 같은 대선지자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이 드러남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가 화이고, 또 망하게 되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사야의 죄악을 소멸케 하셨다. 이사야를 소멸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죄악을 소멸하신 것이다. 그것이 은혜이고, 소망이고, 영광이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이루실 속죄에 대한 그림자이다.
3)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하게 된다. 이 말은 내가 준비되었다는 말이다. 주님의 죄사함을 진정으로 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은 이미 죽었다가 산 존재가 되었기에 주님의 뜻에 쓰임 받고자 하는 자의 갈망이 된다. 소명에 대한 참다운 반응이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마땅한 반응이다.
4) 이사야 선지자는 때를 몹시 중요하게 인식했다.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 5절 “그 때”, 6절 “그 때”, 8절 “그 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읽고 깨닫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수종들 수 있다.
적용 :
1) 하나님의 거룩을 더욱 깊이 인식하자.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을 그 어떤 존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 그 하나님의 거룩을 알아야 진짜 나 자신의 깊은 죄성을 알게 된다. 그 죄인 된 자아인식의 깊이가 참다운 통회를 가져오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깊고 처절한 속울음이 터져나와야 참다운 속죄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이사야가 이방인도 아니었고, 일반 성도도 아닌 선지자로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존재가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사모하는 격한 열정이 없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기억하고 나의 삶 속에 있는 불경건함에서 벗어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고 또 나아가기를 열심 내어야 할 것이다.
2) 주님의 참다운 속죄를 경험한 이사야가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여 자신을 보내주실 것을 요청하듯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곳에 내가 가길 전심으로 갈망한다. 그것이 현재의 자리이든지, 아니면 또 다른 곳이든지 주님의 이끄시는 그 자리에 내가 나아가는 것을 나의 소망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 북경에서의 시간을 정리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려는 나에게 주님의 부으심에 다시금 반응하는 중심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필요하다.
3)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깨닫고 순종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자. 그리고 그 은혜를 얻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자. 2018년 한 해 동안 바로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 왔고, 아직도 기도하고 있다. 주님의 때를 소망하는 것은 더딘 것 같지만 가장 지혜로운 행위가 됨을 잊지 말자. 서두르는 것은 하나님의 때를 놓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 2018년의 마지막 주일 예배이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사모한다. 북경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북경비전교회 출신의 몇몇 성도들을 만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