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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되리라 / 열왕기상 1:1-10
어느 분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함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촛불을 켜놓고 창문을 여니 바람이 들어와 촛불이 꺼질 듯 꺼질 듯합니다. 그래서 창문을 닫으니 불꽃이 확 살아납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촛불은 결국 타서 없어지고 맙니다. 암이 생긴 사람이 그것을 빨리 발견하여 수술을 해서 회복되었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가 아찔한 순간에 브레이크를 잡아 살았습니다. 1초만 늦었어도 죽었을 텐데 살았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고 결국 죽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 왕도 나이 70이 되니, 늙어서 몸이 따뜻하질 않습니다. 이불을 덮어도 한기를 느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다윗의 신하들이 다윗의 괴로움을 알고, 아비삭이라는 아리따운 젊은 여성으로 하여금, 다윗 왕을 모시게 합니다. 신하들은 다윗에게 아비삭이라는 난로를 넣어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에전에 뉴스에서 이런 내용을 말했습니다. 일부 보험사들이 10억이 없으면, 노후가 비참하게 된다는 공포의 마케팅을 편다는 지적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오천 원짜리 설렁탕만 먹어도 20년 동안 2억 2천만 원이 든다는 것입니다. 밥만 먹고 사나요? 의복, 주택 공과금, 여행 레저, 경조사, 차량유지, 손자 용돈도 줘야 하고, 거기다 건강의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이런 돈은 준비됐느냐는 것입니다. 글쎄요. 10억 준비가 꼭 다 되어야 안심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과연 이런 것이 준비되면 아름다운 노년은 보장된 것일까요?
우리는 인생의 노년기를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지혜로운 노년기를 보낼 수 있을까요? 전 3장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를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갈 날을 생각하며, 더 기도하고 더 찬송하고 더 천국에 쌓으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어떤 일을 주력하고 있습니까? 천국 갈 준비는 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살 궁리로만 가득합니까? 사람이 때를 알아야 합니다.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노년기에는 자기를 위해서 쓰는 때이기도 합니다. 살 동안 저축만 하려고 마시고, 자기를 위해 적당히 쓰셔야 합니다. 곰이 때를 알고 쉴 사이 없이 먹어댑니다. 그래야 겨울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년을 위해 준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노년을 위해 연금 들고 저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평안하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열심히 준비하면 노년에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자신도 만족스럽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받은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나 받지 못한 자나, 삶의 모습이 동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에 의해서 나병이 고침 받은, 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아홉 사람은, 모두 자기 갈 길로 가버리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립니다. 아홉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 진 것만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께 돌아온 그는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신 분의 은혜로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곧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베푸신 분을 바라보게 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은혜를 입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푼 분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것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 베푸신 분을 바라보며, 그 앞에 엎드려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은혜 받은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은총을 베푸신 주님에게로 날마다 나아가는 사람이며,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 받은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은혜를 받지 못한 자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이미 충족된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항상 자신을 채우려고 힘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은 노쇠해진 다윗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다윗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제 다윗은 나이 많아 늙어짐으로써,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정도로, 곧 항상 몸이 차가울 정도로, 기력이 다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시종들이 왕을 위해 젊은 처녀 하나를 선별하여, 기력이 쇠한 왕을 모시게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인들은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입니다. 성경에도 미인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블레셋과 애굽의 왕이 반할 정도의 미인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도 빼어난 미인입니다. 에스더는 수많은 왕후 후보 중에서 아하수에로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후의 자리에 오른 절세가인입니다. 이런 미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여인은, 본문에 나오는 ‘아비삭’입니다. 아비삭은 3절의 말씀처럼, 온 이스라엘 땅에서 고르고 골라서 뽑은 최고의 미녀였습니다. 4절은 아비삭의 미모에 대하여 ‘심히 아름다워’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사용된 ‘심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때에 사용된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열왕기상은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왕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전쟁 기사나 정권 교체 이야기에서 출발하지 않고, 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생애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주로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첫 부분에서는 다윗이 죽고,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애을 마무리하고, 솔로몬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기록하는 데, 아비삭이란 여인이 왜 등장해야만 했을까요?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존경하는 왕 중의 왕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국기의 한 복판에는, 소위 ‘다윗의 별’이라고 불리는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죽이던 그 참혹한 시절에, 유대인들은 가슴에 다윗의 별을 붙이고 다님으로써,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드러내었습니다. 다윗은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경도 다윗을 최고로 평가합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1:1절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단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였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평가를 받는 다윗이지만, 그 생애 모두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눈을 감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둔 채로 눈을 감아서는 안될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눈에 비친 다윗은 크게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베들레헴이란 작은 마을의 일개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는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시시한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 나라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왕이 되자 그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성공’이란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공했다는 것은 원하는 것들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많이 얻었습니다. 권력, 명예, 영광, 재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것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인들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들은 많은 아내들을 얻었습니다. 다윗이 얻은 아내들은 얼마나 될까요? 첫 아내는 사울 왕의 딸인 미갈이었습니다. 그후 사울 왕을 피해 다니는 동안에도 몇 사람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아히노암, 아비가일 등이 그들입니다. 그후 왕이 된 후에도 많은 아내들을 얻었는데, 이름이 등장하는 여인들로서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가 있었고, 그밖에도 예루살렘에서 아내들을 더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많이 얻은 것은, 그의 성공을 반영하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를 많이 얻은 것은, 단순히 성공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내는 게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이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많은 아내를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많은 여인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잘못인가? 다윗은 왕이었고, 당시 문화 속에서 힘있는 왕이 많은 아내를 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욕망이란 반드시 인생을 망가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욕망을 달성하는 데는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조금씩 욕망을 충족시킵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욕망을 채웁니다. 그러나 그 욕망은 점점 자라서, 그의 판단력과 의지를 마비시킵니다. 결국 자신이 그 욕망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이제는 욕망이 그를 움직이게 됩니다. 나중에는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도, 욕망의 이름으로 자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내놓고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불법도, 죄악도 마구 저지르게 됩니다. 망가진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다윗이 노쇠하여 힘이 없어졌을 때, 압살롬의 때처럼 아도니야의 반역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후궁인 학깃의 아들이며,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입니다. 아도니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주’라는 의미입니다. 다윗과 학깃 사이에서 태어난 다윗의 넷째 아들이며, 헤브론 태생입니다. 이 아도니야가 스스로를 높여서,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합니다. 호위병이란 ‘앞서 달리는 자’와 같은 군사를 뜻합니다. 이처럼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세밀한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을, 솔로몬으로 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다윗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범죄와 함께 등장한 아들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치심으로 죽게 합니다. 범죄한 자는 다윗인데 다윗이 아닌 아들을 죽게 한 것은, 그 아들처럼 다윗이 죽어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이지 않으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많았기에 봐주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기회로 삼아,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 약속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으로 성취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택하신 것도, 솔로몬이 정치력이 있거나 지도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다움은 정치력이나 지도력에 있지 않습니다. 왕이 정치를 잘하고, 이스라엘을 잘 지도하여, 이스라엘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유지되는 것은 왕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택하신 것도, 다윗의 범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솔로몬을 세워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중에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아도니야는 압살롬 다음에 난 자고, 용모가 아주 준수한 사람이었으며, 다윗으로부터 한번도 꾸중을 들은 일이 없을 정도로, 다윗의 마음에 들게 행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도니야였기에 그는 아마 자신을, 왕이 될 만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압살롬처럼, 왕이 어떤 역할의 사람인가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한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의 자리로만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왕이라는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서 반역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중심으로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 한 채, 자신의 이득을 따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자신의 이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7-8절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도니야가 요압과 아비아달과 모의를 하자, 그들이 아도니야를 돕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8절을 보면,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않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도이냐의 계략에 동조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뜻대로 순종하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아도니야는 이미 병거와 기병을 준비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군대장관인 요압마저 아도니야에게 동조를 한 입장에서, 이미 대세는 아도니야에게 기울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형편에서 유리한 것은, 아도니야에게 동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에게 동조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유리함을 바라보며 행동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여호와께 속한 성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유 불리를 따져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기쁨인가를 살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불리하게 되는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뜻을 여호와께 두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속한 자라면,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살아있으면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여호와께 두었을 때, 비로소 순종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럼 다윗은 어떨까요? 다윗도 하나님이 세운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왕의 권력에 취해서 범죄합니다. 그러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자,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운 것은, 죽어야 할 자를 죽이지 않으시고 살리시는,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기 위함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왕의 역할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왕이 되리라’는 교만이 돌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목사가 될 만한 사람이 없고, 장로가 될 만한 사람이 없고, 집사가 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장로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읽어보시면, 왜 제가 목사, 장로, 집사 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지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목사로 있고, 여러분이 장로 집사로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될 만한 사람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될 수 없는 사람을 세우셔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할을 잘 아는 성도라면, ‘나같은 자가’라는 고백과 함께,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긍휼과 자비가 증거 되는 것에 있음을 알기에, 모든 일의 뜻을 여기에 두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였을 때에도, 한결같이 갈보리교회가 잘되고, 유리하게 되는 것을 꿈꾸며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마음껏 증거하고 나타내는 교회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집착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집착하게 하지도 않고, 나에게 집착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하실 뿐입니다.
‘내가 왕이 되리라’는 아도니야의 욕망에서,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라면, 그러한 욕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입니다. 곧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바라보기를, 게을리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자기 착각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긍휼과 자비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와 족함 대신에, 불평과 원망과 부족함만 있는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유리함을 따라 힘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삶을 날마다 배워야 합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전부라는 것을, 힘써 배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힘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이 소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소망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언제나 그리스도께 끌림을 받는 성도로서, 왜 예수님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라고 말하는지를 깨달아 아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어떤 상황이든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백성도 순종하지 않을 때는,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직시하게 하옵소서. 끝까지 신앙적 방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악을 생각하고 도모하는, 악한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세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교만하고 성급한 자는, 스스로 망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계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책망과 징계를 감사히 받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은 마지막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끝까지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때를 알고, 때에 맞추어 살게 하옵소서. 성령 충만하여 날로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더욱 말씀에 서고, 더욱 용기를 내어 신앙생활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노년이 가장 행복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성공적이고 아름답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