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 올린 <공과 윤리> 제6강 강의영상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각각 답을 하겠습니다.
질문1 - 질문 있습니다. "비가 안온다"의 반대말을 중관학에서 어떻게 말하죠.
질문2 - “비가 내린다.”의 경우, '비'라는 개념 속에 '내린다'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의미가 중복된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가령 '양동이가 굴러간다'의 경우 '양동이'의 개념에는 '굴러간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잖아요. 돌, 바퀴 .... 등등이 아니라 '양동이'가 굴러간다는 뜻인데 모순되나요?.....강의 덕분에 영어에서 '비가 내린다'의 표현에 왜 가주어 it을 썼는지 이해가 되네요 ㅋ
답변입니다.
'질문1 - 질문 있습니다. "비가 안온다"의 반대말을 중관학에서 어떻게 말하죠.'에 대해
중관학에서 “비가 내린다.”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비판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비가 올 때 그냥 “비가 내린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다만 ‘비’가 별도로 존재하고, ‘내린다.’는 현상이 별도로 존재하여 “‘비’가 ‘내린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범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겁니다. 즉, ‘비’와 ‘내림’의 독립적 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이지, “비가 내린다.”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중관학에서든 무슨 학문에서든 “비 안 온다.”의 반대말은 그냥 “비가 온다.”입니다. 우리의 말은 도구일 뿐입니다. 중관학에서는 그런 말에 대응하는 사물이나 사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비가 내린다.”는 등의 판단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질문2 - “비가 내린다.”의 경우, '비'라는 개념 속에 '내린다'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의미가 중복된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가령 '양동이가 굴러간다'의 경우 '양동이'의 개념에는 '굴러간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잖아요. 돌, 바퀴 .... 등등이 아니라 '양동이'가 굴러간다는 뜻인데 모순되나요?.....강의 덕분에 영어에서 '비가 내린다'의 표현에 왜 가주어 it을 썼는지 이해가 되네요 ㅋ"에 대해
답변입니다.
중론 주석서인 월칭(짠드라끼르띠)의 정명구론(淨明句論, 쁘라산나빠다)에도 위에 올리신 질문과 유사한 문제가 논적에 의해서 제기됩니다. 즉 중론 제2장 관거래품에서 “가는 자가 간다.”는 판단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니까, 논적은 “그러면 ‘데와닷따가 간다.’라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박합니다. 이에 대해 답하면서 월칭 스님은 “그때의 데와닷따는 서 있는 데와닷따인가, 앉아 있는 데와닷따인가, 가는 데와닷따인가?”라고 논적에게 되묻습니다. 그러자 논적은 ‘가는 데와닷따’라고 답을 하는데, 그럴 경우 “가는 데와닷따가 간다.”는 말이 되어 ‘감’이 두 번 존재하게 되는 오류(의미중복의 오류, 增益謗)에 빠진다고 지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질문에서 올리신 “양동이가 굴러간다.”는 문장에서 주어로 사용된 양동이는, ‘세워 놓은 양동이’도 아니고, ‘엎어진 양동이’도 아니며, ‘굴러가는 양동이’입니다. 따라서 “양동이가 굴러간다.”고 말할 경우 “굴러가는 양동이가 굴러간다.”는 말이 되어 의미중복의 오류에 빠집니다. 월칭이 예로 든 데와닷따는 인도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의 ‘철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게 무상하기에 데와닷따의 경우도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서 있는 데와닷따’와 ‘앉은 데와닷따’와 ‘가는 데와닷따’가 같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동이’의 경우도 시시각각 변하기에 양동이가 굴러갈 때에는 ‘굴러가는 양동이’가 굴러가는 게 되어 의미중복의 오류에 빠집니다.
그리고 영어를 거론하셨는데, 비가 내릴 때 그냥 ‘비’라고 말해도 논리적 오류에 빠집니다. ‘It rains’라고 말해도 마찬가지로 논리적 오류에 빠집니다. ‘비’, 즉 ‘rain’이라는 언어와 창밖에 내리는 ‘실제의 비’가 같은 건지 다른 건지 물을 경우 답을 할 수 없습니다. 같다고 할 경우 ‘비’ 또는 ‘rain’이라고 말할 때 입술이 축축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용수 저, '광파론'에서 구사되는 논리). 그렇다고 해서 다르다고 한다면, ‘비’ 또는 ‘rain’이라는 말이 실제의 비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비를 가리켰기에, ‘돌멩이’나 ‘꽃’이라고 말을 해도 비가 오는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비’ 또는 ‘rain’과 실제의 비는 같을 수도 없고 다를 수도 없습니다(不一不異).
중관학에서 비판하는 것은 언어에 대응하는 실재가 있다는 착각입니다. 비가 내릴 때, “비가 내린다.”라고 말을 하든, ‘비!’라고 말을 하든, “It rains.”라고 말을 하든, 비가 내린다는 점을 남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즉 언어가 도구라는 점을 중관학에서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언어에 해당하는 사물이나 사태가 실재한다는 착각만 시정해 줄 뿐입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