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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주일
철부지와 꼰대 사이에서
전도서 11장 9-10절, 에베소서 2장 11-22절
한 문 덕 목사
[청년주일을 맞아]
오늘은 청년들의 신앙과 열정을 높이기 위해 우리교단 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1953년 제38차 교단 호헌총회에서 결의되었기 때문에 우리 교단의 역사와 함께 해 왔고, 올해로 벌써 66회를 맞고 있습니다. 청년주일은 특별히 청년들을 교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세워주고, 청년들의 신앙으로 교회와 이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고백하는 날이며, 우리 교단의 모든 성도들이 애정을 가지고 청년 선교에 관심을 갖는 날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따로 청년주일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신도주일, 남신도주일, 어린이주일, 어버이 섬김 주일에는 각 자치회가 예배위원을 담당할 수 있었지만, 청년회는 지난 몇 년간 자치회의 모습을 꾸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청년회가 정확하게 조직의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올해는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고, 이렇게 청년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담임목회자로서 매우 기쁘고 흐뭇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교회가 청년들의 삶에 충분한 관심을 지니지 못했고 청년들의 신앙을 양육하고 성숙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청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 청년들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 볼 뿐만 아니라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즘 청년들의 삶]
제가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도 청년주일에 청년과 함께 목회자가 공동설교를 하고, 특송도 청년들이 했습니다. 한번은 홍대 거리에서 노래 운동을 하던 한 청년이 노래를 만들어 다같이 불렀는데, 노래 가사가 청년들의 삶을 절절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여기 도시의 소음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모든 것,
놓치긴 아쉬워 잠깐 동안 멈추어 서서 머리 위 하늘을 봐!
우리 지친 마음 조금은 쉴 수 있게 할 거야.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은 것은 아냐
밀려드는 과제와 시험공부보다 나를 더 바쁘게 하는 건,
날 부르는 손님의 벨소리!
야심한 시간 홀로 치우는 텅 빈 가게엔
내가 내 뱉는 한숨으로 가득 차,
시원한 바람 속에 담배 한 모금으로
다시 한 번 힘내자고 되뇌어보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비틀비틀 거리는 내 맘
어쩔 줄 모르네! ~ 이하 생략”(임한빈 작사)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지쳐 있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에 대한 괴로움으로 비틀거립니다.
청년들 사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있고, 저마다의 사정과 상황이 모두 다르겠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청년들은 위의 노래와 같이 자본주의적 세계가 강요하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일자리 정책이나, 복지, 주거, 대학교육이나 기타의 사회 시스템은 성실하게 공부하고 일하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제 나름대로 도전해보고 노력해 보지만 간신히 생존만을 이어가는 비참한 삶이 연속될 뿐입니다. 대학생들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지만 그렇게 번 돈은 방세로 비싼 대학등록금으로 전부 소진되고,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면 하루에도 몇 통씩 자기 소개서를 쓰거나 계약직 사원을 전전하며 잡다한 사무보조에 시달리는 것이 일반입니다.
이들은 모두 숙련된 삶의 기술을 쌓을 시간을 지니지 못하고 값싼 노동력으로 이 사회의 밑바닥을 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고, 다행히 안정된 일자리를 찾았다 해도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결혼이나 안정된 주거 공간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에서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는 5포 세대로, ‘인간관계’와 ‘희망’마저 포기하는 7포 세대가 나타났고, 심지어 ‘건강’과 ‘외모관리’까지 포기하는 9포 세대에, 끊임없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N포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이생망”이라 부릅니다. “이번 생애는 망했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 청년의 고민과 교회]
이런 청년들에게 교회는 어떤 곳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2017년에 우리 교단의 청년신앙교재를 만드는데 함께 했는데, 그 때 교회 청년들의 고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성실하고 믿음 좋다고 인정도 받았고, 교회에서 하는 다양한 활동이 좋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가끔은 일상생활과 예배시간이 겹쳐서 일상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요즘 들어 내가 무엇을 위해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친구들과 여행도 못가고 나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과연 이게 맞는 건가요? 저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행복한 삶을 위해 교회에 다녔는데, 어느 샌가 내 생활보다는 교회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교회에 꼭 다녀야 할까요?”
“교회에 오면 너무 일이 많아요! 하나님을 위해서, 또 교회를 위해서 하는 봉사라고 하지만, 청년부 예배 외에도 찬양대원으로, 주일학교 교사로 주일에는 나 또한 여유를 가지며 차분히 나의 일주일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데요! 어떤 때는 회사에 출근할 날보다 더 바쁜 것 같아요!”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는 않아요.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은 반대하지는 않지만 자신은 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닐 생각은 없다고 하네요. 저는 그 이와 결혼하고픈 마음도 있는데, 부모님은 신앙인과 결혼하기를 원하시고, 언젠가 목사님도 믿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는 성경말씀(고후 6:14)을 인용하셨는데, 왠지 저를 두고 하는 말인 것처럼 들렸어요.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겨우겨우 회사에 취직했는데, 이 회사는 주일에도 쉬지 않고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게다가 또 회식도 잦은데, 술을 못하는 저는 매우 괴롭습니다. 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 둘까 생각도 했지만, 또 다시 취업준비를 한다고 생각하면 한숨 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요.”
그리스도인 청년 또한 지금 이 사회의 청년들과 같은 문제들을 똑같이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앙인 청년은 이중의 고민을 안게 됩니다. 이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여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신앙인이 지녀야 할 삶의 방식과 태도가 사회생활과 부딪힐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청년은 이제 막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에 첫 발을 디뎌 겨우겨우 그곳에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이들입니다.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풀고,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녹록치 않은 환경에서,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고민은 깊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청년들도 이런 고민들을 안고 교회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꼰대들의 충고]
그런데 청년들이 고민할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선배 세대들이 충고를 하는데, 장년층과 노년층, 386세대, 그리고 소위 X세대라고 불리는 298세대까지 모두 한마디씩 거듭니다. 그리고 이들의 충고 내용은 저마다 다른데,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2014년 개봉한 국제시장의 주인공과 같은 세대인 장노년층들의 경우 오직 정규직 일자리만 바라는 20대의 태도에 특히 문제를 제기합니다. 중소기업 혹은 3D 업종엔 일자리가 많이 남아도는데도 불구하고 20대가 편한 일자리만 바라기 때문에 취업을 못한다는 게 이들 세대의 주요 의견입니다. 더불어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 같은 일도 결코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인생에 있어 ‘좋은 경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386세대는 사회의 부당함에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20대에 불만이 많습니다. 아무리 일자리를 얻기가 어렵더라도 부조리와 불합리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순응하는 요즘의 20대는 그들이 보기에 나약하거나 혹은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칩니다. 단순히 자기 일자리만을 위해 공부하거나 준비하는 삶이 아니라 부당함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데 나서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90년대 초중반, IMF 외환위기 이전에 대학을 다녔던 298세대는 뭔가 늘 주눅 들어 있고 눈치를 보고 열심히 적응하려 애쓰는 20대를 불만스럽게 여깁니다. 열심히 일하든 부당함에 저항하든 아니면 다른 뭘 하든 간에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는데 요즘의 20대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너무 다른 내용의 충고들이지만 이들 세대 모두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태도가 있습니다. 모두 자신들이 20대에 경험했던 것을 기준으로 현재의 20대를 판단하고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20대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현재의 20대에게 주어진 현실이 어떠한지를 차분히 듣고 거기에 근거해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선배 세대들은, 각 세대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은 적어도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낙관’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노년층에겐 ‘경제성장’을 통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리란 희망이 있었고, 386세대에겐 ‘민주화’를 통해 ‘독재’로부터 벗어나리란 희망이 있었고,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과실 모두를 영위한 298세대에겐 그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을 추구하는, 서구 유럽의 선진국 같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란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20대가 경험하는 현실이란 선배세대가 경험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저성장’이란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로 인해 경제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더 나은 내일’은커녕 그저 ‘오늘보다 나쁘지만 않은’ 내일을 바라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단순히 지금 현재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임금이 낮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지어 앞으로는 상황이 더 나빠질 거라는 불안감, 바로 그러한 불안감 속에서 20대를 맞이한 ‘첫 세대’인 셈입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음으로 자신의 부모세대 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속성장 속에서 20대를 보냈던 대부분의 선배세대는 적어도 20대에 이처럼 ‘불안한 미래’ 속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각 세대 나름의 무언가를 이뤄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부분이 각 세대가 지니는 ‘자부심’이자 ‘자존감’이 되었습니다.
반면 현재의 20대에겐 그러한 ‘자존감’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자기 세대 나름의 새로운 무언가를 이뤄내기는커녕 선배세대가 기존에 만들어 놓은 구조에 ‘편입’되기 위해, 그 구조로부터 미끄러져 추락하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상황을 일반화에서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자기계발서’나 쥐어 주면서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꼰대들의 눈에는 젊은 청년들이 모두 철부지로 보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럼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는 젊은이들에게 젊을 때에, 젊은 날을 즐기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르라고 합니다. 지나고 보면 젊음처럼 좋은 것이 없다고 느끼는 어른의 말입니다. 이 말 자체는 틀림이 없습니다. 눈이 침침해지고, 몸이 삐걱거리고,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기조차 버거운 삶을 사는 노인들이 볼 때 젊음이란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그 좋은 시절을 즐기려면 선배 세대들이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새롭게 사회에 적응하고 처음 시도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소 부족하고, 실수가 있더라도 바로 그 실수와 실패, 좌절과 절망을 통해 배움이 되고 숙련된 삶의 기술을 얻을 수 있도록 믿어 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바로 선배 세대가 할 일이고 교회가 할 일입니다.
우선 교회는 현재 청년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사회에서 시달린 청년들이 쉬고 삶의 활력을 충전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교회 청년들은 사회에서 겪는 일반적 문제들과 신앙의 고민 두 가지를 함께 가지게 됩니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회 초년생으로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면 좋을지 함께 의논할 수 있는 진지한 신앙의 선배들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는 청년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에 함께 해 주겠다는 진실한 마음을 지니면서 동시에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의지하게 되면 누구나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강력한 신앙의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2010년 말에 분당에서 목회를 하던 중대형 교회의 한 목사가 65세에 자원은퇴를 하면서 다섯 가지를 참회했는데 그 중 첫번째 항목의 일부는 “지도하던 젊은이들을 깨어 있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의 마당에 인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의욕이 왕성한 젊은이들이 참되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하여, 역사와 사회에 책임지는 주체적 신앙인이 되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고 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 본문은 청년주일을 맞아 청년회가 정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이어주는 평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로마 못지않은 로마제국의 상징적 도시였고, 로마식 계급질서와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가장 극렬하게 드러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과, 권력을 누리고 부유한 자들 사이의 삶이 극명하게 갈리듯, 에베소 사람들의 삶 또한 양 극단으로 갈려 있었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분열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갈라진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서 이어주신다고 말하면서 예수라는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위에 교회 구성원들 모두가 작은 돌들이 되어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성전을 세워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돌로 짓는 건물에 사용되는 돌들을 서로 끼워 맞추려면, 이 돌들은 때로 정을 맞으면서 자기 몸의 일부를 덜어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으심을 통해 모든 돌을 이어주는 가장 핵심이 되는 모퉁잇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청년들과 장년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삼아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모두 각자 자기의 한 부분을 덜어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남과 맞추지 않고 자기만을 고집하는 돌은 목수에 의해 버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맞출 줄 아는 돌은 하나님의 거룩한 몸을 이루는데 쓰임을 받게 됩니다. 각자 자기 입장에서, 자기 경험만을 가지고 자기주장만 하면 우리는 영원히 철부지와 꼰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철부지였던 젊은이가 바로 꼰대가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꼰대인 사람은 철부지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집인 세계와 교회의 성숙과 온전한 발전을 위해 자신을 깎아내고 다음어서, 다른 사람들 곁에 함께 설 줄 아는 사람만이 진짜 어른이 될 수 있고, 책임지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청년의 우리말인 젊은이를 “저를 묻는 이”라고 풀었다고 합니다. 당면한 과제 앞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들의 물음에 함께 해 주어야 합니다. 젊은 시절 자신에 대해 깊이 묻는 성찰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면, 노년의 시절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넉넉함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유영모 선생은 “늙은이”를 “늘 그러한 이”라고 풀었다는데,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늘 그러한 모습으로 꿋꿋하게 설 수 있으려면, 저를 묻고 사유하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철부지와 꼰대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 쯤 있을까요? 고 노회찬 의원은 어느 방송엔가에 나와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지금 꼰대인 사람과 앞으로 꼰대가 될 사람만 있다고 농담을 했는데, 사실 세상은 철부지와 꼰대를 넘어서는 사람들 찾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교단의 어른이신 문동환 목사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은 어린 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김약연 선생 같은 이가 되고 싶어 자신도 목사가 될 꿈을 꿨다고 합니다. 평생의 사표였던 김약연 선생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기 전에 명동촌 뒷산에 권총 연습을 할 은거지를 제공한 분이었고, 민족 앞에 절망만 놓여 있던 시절 저 이국 땅에서 새로운 희망을 일궜던 분입니다.
오늘 우리 생명사랑교회에도 많은 젊은이들 어린이 청소년들이 존경하고 따를 만한 진정한 어른이 많아지길 빕니다. 또한 믿음직한 청년들과 젊은이들이 가득하길 빕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에서 새로운 빛이 흘러나오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늘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세우신 이 거룩한 곳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언제나 들리게 하시고, 젊은이들의 노랫소리가 점점 더 커지게 하소서. 우리교회에서 서로 발을 씻어주는 물소리,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랑의 속삭임이 메아리치게 하소서. 무엇보다 이 곳에서 세상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복음의 소식이, 예언자의 소리가 드높이 울리게 하소서. 저 문으로 들어올 때 복을 받게 하시고, 저 의자에 앉을 때마다 은혜 충만케 하소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서가 있기를,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말씀의 능력으로 거듭나서 슬픔의 상복을 입고 들어 왔던 이가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무거운 짐에 눌린 자가 독수리의 날개를 얻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온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기적들을 맛보게 하시고, 언제나 넉넉한 삶으로 멋진 사건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게 하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삼위일체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홀로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며 기쁨이 되며 위로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신을 나눠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다름을 간직하면서도 서로 삶을 공유하는, 그렇게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으로 계시는 당신을 본받아,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에, 이 삶을 살게 해 주심에,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그 열정으로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생명사랑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 주소서. 우리가 당신의 구원 활동에 한 몫을 담당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청년의 열정이 불타오르도록, 자유의 정신이 피어나도록 우리 모두 함께 합시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거룩한 성전이 됩시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사귐이 청년주일을 맞아 모두 함께 청년의 기상을 되살리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생명사랑 가족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