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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깡이 아지매의 등장과 일과] 영도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게 눌려 살던 원주민 외에 해방 후 돌아온 귀환 동포, 특히 6·25 피난 시절 피난민이 몰려 살기 시작한 지역이다. 지금도 당시의 피난민 주택이 남아 있는 영선동과 남항동, 대평동 일대에서는 13.2㎡에서 16.5㎡밖에 안 되는 집의 한 지붕 아래 여러 개의 방이 붙어 있는 주택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방마다 별도의 가구가 살아가는 상황이고, 거주민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최근에야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집이 워낙 작은 터라 부엌이 없어 도로 건너 부엌에서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집을 보수하려면 한 지붕에 살고 있는 다른 가구에서 반대를 하기에 집을 보수하지 못하고 살다가 집을 떠나는 경우마저 있다. 특히 STX조선 사무실 동네[이북 동네]의 경우도 많은 가구가 이사를 갔으며, 지금은 주민[부모]들이 많이 죽고 빈집이 많다. 이렇듯 대평동은 우리나라의 6·25 전쟁과 맞물린 역사의 아픔을 설명해 주는 가옥 형태가 남아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영도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조선소와 철공소들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자연히 주민들의 자랑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선박 수리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라는 자부심이었고, 지금도 많은 선박들이 수리를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1980년대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소련 배들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입항 허가를 받고 들어와 수리를 받고 떠나곤 하였다. 일반적으로 선박은 5월 전후로 수리를 하는데, 이때 고친 배를 가지고 일 년 동안 계속 운항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5월이면 항상 선박들이 배를 고치기 위해서 북새통을 이루곤 하였다. 특히 원양 어선처럼 먼 곳으로 바다를 나가는 배들은 이 기회에 최선을 다해 배를 고쳐 놔야 탈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였다. 선박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남항동에서 선박 수리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남항동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전국 어디를 가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그런 자부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간판도 없는 작은 슈퍼 앞에서 만난 한 노인과의 대화에도 그런 자부가 묻어난다. 80세가 넘었다는 그는 6·25 전쟁기 영도로 피난을 와서 정착한 사람으로 예전 조선소에서 근무하였다. ‘대양조선, 구일조선, 남양조선…….’ 등 그가 옮긴 조선소 이름이 모두 다나카 조선소에서 시작하여 이름만 바뀐 곳이며, 요즘 명함을 내미는 ‘에스엔케이라인’도 결국 그 갈래라 본다. 그들이 이렇게 내력을 꿰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여기서 배 수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좀 더 대우받고, 사회의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받은 대우와 자신들의 뒤를 잇는 후배들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만은 아닌 듯하다. 조선업은 실제로 영도의 정체성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조선소 수리 중에서도 수리를 위해 배가 들어오면 배에 들러붙은 녹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기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찾기 쉬운 일자리였다. 예전에는 요즘처럼 그라인더가 없었기 때문에 녹 부분을 직접 망치로 내려쳐서 없애는 수작업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였다. 무작정 도시로 나와 벌이를 하거나 6·25 전쟁으로 과수댁이 된 젊은 여성들로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마다하기 어려웠다. 영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배와 관련된 일밖에 달리 일거리가 없었다. 특히 여성의 몸으로는 힘든 작업을 시켜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권이란 없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보통 남자라면 절대 응하지 않을 저임금에 중노동을 하는 이른바 ‘깡깡이 아지매’가 탄생하였다. 조선 수리업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 중반에는 영도에 배를 대는 독이 12개였다. 한 독마다 15명이 일했으니, 어림잡아 180여 명의 깡깡이 아지매가 영도에서 일을 했던 셈이다. 몇 년 가지는 못했지만 1965년 무렵에는 ‘깡깡이 아지매 조합’이란 것도 생겼다. 당시 조합 부위원장을 했던 이가 늦게까지 부산 구평의 ‘대평조선소’에서 반장으로 근무하던 서형자 할머니[75세]이다. 조합이 있을 때는 단체로 신체검사도 받고 직장이 보장을 받았으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데모도 하였다. 하지만 망치로 녹을 떨어내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굉장한 소음을 일으키게 되고, 이는 청각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깡깡이 아지매로 오랫동안 일해 온 여성들 중에는 대부분 청각을 잃었거나 난청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선박 수리소가 20여 군데 남아 있는 지금도 이 분들은 활동을 하고는 있으나 작업이 배당됐을 때만 직장에 나오고, 일이 끝나면 바로 귀가하기 때문에 사실상 직접 대면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이곳의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민원까지 넣고 있는 사정이라서 깡깡이 아지매가 “내가 그 일을 합니다.”라고 나서기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