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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상처를 위한 응시와 역설의 노래
----탁경자의 {어초장}의 시세계
이형권(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1. 시의 길을 찾다
이 시집은 시에 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시집을 열자마자 맨 앞자리에 등장하는 「시」는 탁경자 시인이 오랜 세월 시의 길을 걸어온 마음이 어떠한지 드러낸다. 시의 길은 “보일 듯 아니 보일 듯/ 너는 구불구불/ 너무 멀리 있었고/ 불현듯 바람이 불 때마다/ 내 길이 아닌 듯싶어// 돌아오고 싶더라/ 울고 싶더라”(「시」 부분)라고 고백한다. “너무 멀리 있”는 시의 길은 가도 가도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아서, 이 지난한 길가기를 포기하고 “돌아오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간직한 시적 자의식이라 할 수 있을 터, 한 시인으로서 시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시인이 시에 관해 사유하는 것은 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고뇌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아이러니라는 말도 있거니와, 시인은 항상 자신의 시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면서 완전한 시를 향한 열망으로 시를 쓴다. 자신의 시가 불완전하다는 인식은 오히려 더 나은 시를 향한 정신적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탁경자 시인이 이 시집의 첫 작품에서 이러한 인식을 드러낸 것은 그만큼 시를 향한 진심이 깊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시를 읽다/ 시를 쓰다/ 죽어도 좋을”(「시의 물에 빠진 파리」 부분)이라는 시구는 그러한 진심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시적 자의식이 타인을 향할 때는 시(인)에 대한 경외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녀의 첫 시집에서
시 한 작품이 걸어 나와
와인 속으로 들어가던 밤
우리는 마당에서 모닥불을 지폈다
하얀 철문이 건반이 되어 반짝이고
피아노 소리가 고샅길을 따라
가는 걸음으로 길게 걸어갔다
살구나무에 걸려 있는 달
고양이가 올라가
달을 물고 내려왔다
초겨울의 별이 잔물결로 흐르고
고양이가 달을 삼키며 사라졌다
밤은 차고 읽어가는 시집은
절정의 모닥불처럼 뜨거워졌다(「고양이와 달」 전문)
시인은 지금 “그녀의 첫 시집”을 읽고 있다. “모닥불”과 “와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몇몇 지인들과 함께 시집 발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듯하다. 장소는 “하얀 철문”과 “마당”이 있는 전원적인 집이고, 시간은 “초겨울”의 “달”이 떠 있는 밤이다. “모닥불”을 피우고 “와인”을 마시면서 “시집”을 읽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멋진 일이다. 이 아름다운 서정의 시간에 “살구나무에 걸려 있는 달”을 “고양이가 올라가”서 “물고 내려왔다”가 “달을 삼키며 사라졌다”라고 한다. 이때 “고양이”는 실제의 동물로 볼 수도 있지만, “고양이” 모양의 구름이 “달”을 가리어 버렸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달”빛이 가려지면서 어두운 하늘에는 “별이 잔물결로 흐르”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달”과 “별”이 빛나는 “초겨울” 밤에 시의 향연을 통해 “시집은/ 절정의 모닥불처럼 뜨거워졌다”라고 한다. 시에 관한 진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달이 섬진강/ 은어 떼를 몰고 오면/ 강가에서/ 시의 추를 던지며/ 별을 낚는다”(「어초장」 부분)라는 송수권 시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러한 진심과 관련된다. 탁경자 시인은 이러한 마음으로 시의 길을 찾아간다.
2. 삶의 상처의 보듬고 넘어서 가다
시에 관한 진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시집의 시편들에서 유추해 보면, 시는 삶의 상처와 슬픔, 혹은 고달픔을 위로하고, 그것을 역설적으로 극복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서 온다. 이는 시의 가장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일 터, 이 시집은 그러한 기능에 충실한 것으로 읽힌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현실의 그늘에서 상처받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빈도 높게 등장한다. 그 사람이 시인 자신으로 읽히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타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 속악하고 비루한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삶이 상처라는 인식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는 이미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은 그것을 응시하면서 삶을 성찰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달빛이 물 표면을 밤새 훑는다
윤슬에 찔린 연못이
신음을 내며 앓는 달밤
가끔씩 달빛으로 찾아와
연못에 못질을 하고
족적도 없이 사라지는 삽시간만
밤바람에 들통난다
고통의 덩어리가 모이면
연못이 만들어진다
제 상처를 조용히 닦으며
물의 안쪽으로 서서히 파고든다
물무늬의 유전자처럼
파문을 치며 울고 싶은 못
나무의 나이테를 닮은 못의 몸부림
못의 울음이 밤새도록
물 표면에 떠 있다(「못」 전문)
이 시는 시의 화자가 달밤의 “연못”을 배경으로 삶의 “상처”와 “고통”을 성찰하고 있는 상황을 내용으로 한다. “달빛”이 “연못”에 비추는 상황을 “윤슬에 찔린 연못”이라고 하여, “연못”을 “상처”와 “고통”을 표상하는 것으로 본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고 있다. 즉 “윤슬”을 “달빛으로 찾아와/ 연못에 못질을 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하여 “윤슬”이 일렁이는 “연못”을 “고통의 덩어리”, “울고 싶은 못”이라고 한다. 결국 “연못”을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인간의 표상으로 형상화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상처”와 “고통”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상처”와 “고통”은 일단 인간의 실존적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처와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다른 시를 통해 암시받을 수 있다. 가령 “내 몸에도 겨울부터 고것이/ 그렇게 독을 품고/ 이리저리 뒤지고 다닐 줄이야/ 고만고만 뿌리를 내릴 때도 난 몰랐제”(「독감」 부분), “병원에서 알게 된 낯선 병명/ 알약만큼 흐릿한 세월을/ 약봉지에 넣고 걸어오는데/ 뭉클한 소리들 목을 조인다”(「섬유근육통」 부분) 등의 시구를 보면, “상처”와 “고통”의 원인이 육신의 병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병증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맞이하게 되는 시련을 전반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결국 정신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네
거미줄로 감아 놓은 어둔 시간을
어떻게 풀고 왔냐고
심해의 어둔 바닷속을
어떻게 헤엄쳐 왔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네
소금물을 마시고 사는
나는 물고기였다네
비릿한 밤을 유영하듯 붙잡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비늘로 감싸 안은 채
얼룩진 바닷속
그 안에서
밤새,
눈물도 없이 눈을 뜨고 있는(「불면증」 전문)
이 시에서 “불면증”의 원인은 정신적 차원의 “상처”이다. “나”는 “거미줄로 감아 놓은 어둔 시간”, 즉 “상처”로 얼룩진 시간의 주인공이다. “나”는 그동안 “심해의 어둔 바닷속”과 같이 무겁고 어두운 삶을 살아왔던 셈이다. “나는 물고기였다네”라는 고백은 그러한 “바닷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대목이다. “나”는 더구나 “상처”를 간직하고 깊은 바다의 어둠과 압력을 견디는 “물고기”와 같이 살아왔다. 하여 “나”는 “물고기”가 그렇듯이 “밤새,/ 눈물도 없이 눈을 뜨고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제목인 “불면증”은 그러니까 마음의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온 시인의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 상처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령 “너는, 불발탄 같은 첫사랑/ 그 곁에서/ 활활 아프지 않았냐고”(「동백」 부분), “그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던 슬픔이/ 붉게 번진다”(「연서」 부분)와 같은 부분을 보면 사랑의 실패와 관련된다. 사랑의 실패는 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랑이 지닌 근본적인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 시구는 인간의 삶에서 사랑은 매우 소중한 것인데, 그것의 실패나 불완전성은 인간이 마음의 “상처”를 갖게 하는 핵심적 원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상처에 관한 응시와 성찰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가족이나 사회적 소수자 혹은 타자들의 삶과 관련된 고달픔이라든가 고통과도 연관된다.
어머니 끙, 소리를 자주 내셨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편치 않아
타박을 하였다
오뉴월 논밭에서 뒤란까지
허리 펴실 때마다 붙들고 다녔던
끙,
아버지가 장미다방 아가씨 가시 꽃향기로
심장을 꾹꾹 찔러대는 늦은 밤에는 더
끙,
쑤신 팔다리 부여잡고
끙 소리 삼키며 얼마나 많은 밤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로 들었던가
아내의 무거운 짐
헐거운 무릎으로 받치고 있다가
괜찮타 괜찮타 일어나게 힘이 되어 주었던
지상에서 가장 짧은 지팡이
끙,
그 무게 다 내려놓고 가신
어머니의 하늘에도
끙 허리 펴는 소리
가볍게 들린다(「끙」 전문)
이 시에서 “끙”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의성어이다. 이 음성상징어는 사실 “어머니”의 상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원인은 고된 농사일과 “아버지”의 바람기이다. “어머니”는 “오뉴월 논밭에서 뒤란까지” 오가는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살아온 분이다. 그 결과로 인생의 노년에는 육신의 병을 얻어 움직일 때마다 “끙” 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또한 “장미다방 아가씨”에게 눈길을 주었던 “아버지”의 바람기로 인한 상처도 크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한 여자로서 “어머니”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부 관계는 더 확대하여 해석하면 이 땅의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주인공인 아버지들의 횡포에 의해 형성된 비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함의한다. 그래서 이 시의 “어머니”는 특정한 어머니를 넘어서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가부장제의 희생양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타자로서의 여성이 지니고 사는 상처를 고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타자의 삶에 드리운 상처에 관한 관심은 이 시집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가령 “바다를 밀었다 끌어 올리는 손으로/ 만선의 집을 지었다가/ 파도가 다시 허물어 버리고 가도/ 상처에는 최고의 약이 바닷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바다의 노인」 부분)에는 늙은 어부의 고단한 삶의 상처를, “구겨진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남자가/ 한 가마의 독을 망치로 깨고 있다”, “깨져 있는 도자기들의 파편 속에는/ 추락하는 수천 개의 날개가 숨어 있다”(「독을 깨다」 부분)에서는 고달픈 노동자의 상처를 응시한다. 또한 “사과 농사가 적자라고 투덜거리던 주인이/ 포크레인으로 거대한 굉음을 내고 간 뒤/ 휘둥그레 놀란흙과/ 사과나무 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진다”(사과나무 귀」 부분)에서는 가난한 농부의 상처를, “철들의 골절을 붙이는 용접공인 그가/ 고층 외줄에 앉아 있다/ 부화 되지 않는 거대한 알이/ 불 안에 갇혀 있다”(「불새」 부분)에서는 용접 노동자의 상처를 응시한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때로 노숙자라는 극단의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떠다니는 것은 모두 그림자다
눈물에서 소금기를 뺀 물방울이다
꽃들이 기침을 하지만 처방이 없어
허공의 벽을 닦을 수 없는 봄
대전역 모퉁이
고비 고비를 넘지 못한
한 사내의 구부린 등에서
낙타 울음소리가
불안한 주문으로 날리고
엎드러져 있는 손바닥이
파리하다
어제는 술병 안으로 천 개의 슬픔을
밀어 넣었을 입
천근의 무게만큼 뱉어내는 기침 사이로
기억의 탑은 무너져 내린다
한때 도시의 빌딩을 움켜쥐고
중심이 되고 싶었던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진 이팝꽃이
통증 같은 문신으로 피어 있다(「수요일의 이팝나무」 전문)
이 시는 “이팝꽃”이 피어 있는 계절에 “대전역 모퉁이”에 쭈그리고 있는 노숙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한 고비를 넘지 못한/ 한 사내”로서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시련이 다가왔을 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탓에 거리로 내몰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낙타 울음소리”처럼 “불안한 주문”을 하는 그는 경쟁이 치열한 사회의 희생자일 터이다. 그에게 다가온 정신적인 상처의 결과가 바로 “불안”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낙타”와 마찬가지로 그는 현대 사회에서 노예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자본의 노예, 욕망의 노예로 살아오면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다. “술병”과 “기침”으로 상징되는 그의 비정상적이고 고통스러운 생활은, 지나간 정상적인 삶과 관련된 “기억의 탑”마저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는 “한때 도시의 빌딩”에서 “중심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팝꽃” 나무 아래 갈 곳 없는 노숙자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여 그의 몸에 “떨어진 이팝꽃이/ 통증 같은 문신으로 피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는 승자 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상처받은 패자는 지독한 “통증”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고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시집에서 상처를 응시하는 일은 개인적, 사회적인 차원뿐 아니라 역사적인 영역으로까지 나아간다. 가령 “피아골 정찰 떠난 지아비”를 기다리다 “열꽃으로 핀 한 살 박이 아들을/ 산기슭에 묻고/ 달빛이 출렁이도록 우는 울음이/ 새색시”(「도라지꽃」 부분)에는 이념 대결의 역사에서 타자에 속하는 빨치산의 아내가 지닌 상처를 응시한다.이처럼 나와 타자의 삶에 드리운 상처를 응시하는 일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일차적 행위이다.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집의 많은 시편에서 시인 자신의 상처는 물론 타자들의 상처를 응시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탁경자 시인이 상처를 극복하는 방식은 주로 상처에 관한 역설적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그 토대를 튼실히 해 주는 것이 상처의 응시를 통한 삶의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늘진 곳간에서
해묵은 박달나무 도마를 찾았다
잊혀진 시간 밖으로
밀려 나버린 낡은 도마
후미진 그늘에 영정사진처럼
조용한 미소로 누워 있다
오래된 몸 쓰다듬어 보니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도마
쇠잔한 촉 낮은 전깃불 아래서
싹둑싹둑 썰었을 김치 국물 밴 안쪽과
괜한 푸념을 내리쳤을 뒤쪽에서
어머니 깊이 파인 칼자국이 보인다
무성한 생채기 속으로
땀 냄새 섞인 거룩한 밥상도 보인다
도마 따라 걸어간 어머니
맨몸으로 견디어낸 무늬처럼
작고도 견고하다(「도마」 전문)
이 시는 “해묵은 박달나무 도마”를 통해 삶의 상처를 오히려 정신적 에너지로 승화하는 “어머니”의 위대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인 “어머니”는 한 개인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온갖 희생을 무릎 쓰고 가족을 돌보는 모성애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의 화자는 “해묵은 박달나무 도마”에서 그러한 그것을 일평생 사용하면서 살아온 “어머니”를 연상하고 있다. “도마”의 본질은 끊임없이 칼을 받아내는 일일 터, 온몸에 “무성한 생채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 “깊이 파인 칼자국”은 “어머니”의 삶에 드리운 무수한 “생채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속이 상할 땐 “도마”를 내리치며 “괜한 푸념”을 하기도 했으니 “도마”는 한때 “어머니”의 삶에서 소중한 동반자였다. 그런데 그 “생채기”의 진정한 의미는 그 “생채기 속으로/ 땀 냄새 섞인 거룩한 밥상도 보인다”라는 점이다. “어머니”는 마치 “도마”가 받은 “깊이 파인 칼자국”이 생명의 “밥상”을 만드는 것처럼, “어머니”는 삶의 상처를 오히려 가족을 위한 사랑으로 승화하고 있는 셈이다. 하여 “어머니”는 삶의 상처를 극복, 승화하는 능력에서 “박달나무 도마”처럼 “작고도 견고하다”는 것이다.
삶의 상처를 극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심미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다. 시는 곧 역설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는 일이며 폐허에서 새 생명의 숨결을 찾아내는 일이다.
허공을 붙들고 있는 위태로운 그림자와
우편함에 꽂혀 있는 빛바랜 고지서들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이 어둠으로 왔다 가며
무수하게 긁어댄 상처가
낡은 담 사이를 넘어간다
등 맞대고 함께 산다는 것은
거미줄처럼 벌어진 틈 사이를 붙잡고
서로 바라보는 것일까
늦은 햇살이 틈으로 스며드는
재건축 아파트의 오후
틈에서 고개를 내민 민들레가
가난을 꽃 피우고 있다
갈라진 상처를 다독이고 있다(「틈」 부분)
아가야 미안해
피워보지 못한 꽃
너의 눈물 한 방울의 기도가
바다가 되었구나
녹슨 철제가 올라오고
분노는 훨훨 노랑나비가 되었다
세월호 속에 갇힌 세월 멀리 보내 버리자
이제 파란 하늘로 가
춥지 않고 햇살만 있는
그곳에서
영원한 물꽃으로 피어 있는 거야(「물꽃」 전문)
두 시는 모두 역설의 꽃을 피우고 있지만, 그 성격은 조금 다르다. 앞의 시는 “재건축 아파트”의 낡은 풍경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민들레”를 발견하고 있다. 낡은 아파트의 “우편함에 꽂혀 있는 빛바랜 고지서들”과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은 인적없는 폐허의 풍경일 터, 그곳은 “무수하게 긁어댄 상처가/ 낡은 담 사이”를 채우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늦은 햇살이 틈으로 스며드는” 그 공간의 “틈”에서 “민들레”를 발견하고 있다.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낡은 아파트의 “담” 사이 “틈”에서 “가난을 꽃 피우고 있”는 “민들레”를 본 것이다. 이 꽃은 가난하고 낡은 생활의 흔적을 지우면서 “갈라진 상처를 다독이고 있”다. 폐허의 틈에 핀 “민들레”가 그 폐허의 주인공이 지니고 살아온 삶의 상처는 위로하는 것이다. 뒤의 시는 2014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304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이다. “피워보지 못한 꽃”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어린 학생들을 의미한다. 세월호 인양작업으로 “녹슨 철제가 올라오”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어린 학생들에게 “파란 하늘”과 “햇살”이 따뜻한 나라에서 “영원한 물꽃”이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 비록 잔혹한 세상 때문에 극한적인 고통을 당했지만, “영원한 물꽃”으로 다시 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이간의 탐욕으로 인해 어이없이 희생된 이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다시 살아나게 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3. 자연의 고요에 들다
이렇듯 이 시집은 삶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그 상처를 응시, 성찰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역설의 세계로 나가는 시편들로 구성되었다. 이 시집에서 상처의 응시는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 역사적, 이념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시인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생명 혹은 심미의 세계를 상상하는데, 그 결과로 폐허 속에 핀 꽃이나 물속에 피어나는 꽃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한편, 시인이 상처를 극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세상 너머의 고요한 자연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다. 자연은 고요한 장소로서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대비되는 세계로서, 인간마저도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고요의 풍경 속에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새벽 강가에서/ 꽃을 깨우고 있는 것은 새떼다/ 새떼가 어둠에 키를 꽂고/ 햇살을 사방으로 풀어 놓고 있는 거다/ 수런수런 번지며/ 새벽을 수선하고 있는 수선화/ 꽃이 세상을 피우고 있는 거다”(「수선화」 부분)라는 자연처럼, “새떼”와 “햇살”과 “수선화”가 하나로 화합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탄생시키는 장소이다. 자연은 항상 “새벽”처럼 상처의 “어둠”을 물리치고 밝은 세상을 꽃 피우는 세계인 것이다. 그곳에서는 인간도 자연과 하나가 된다.
저쯤
2월의 잔설을 끌고
산길을 내려오는 스님을 보았네
적막을 밀치고 오는 고랑 깊은
맑은 눈빛 속에서
동백이 피는지
동백이 지는지
숲이 후드득 흔들리는데
얼굴 붉어져
외면하는 옆으로
젊은 스님 합장하고 가네
선운사 숲 통째로
고요의 탑을 쌓아 놓고
선운사 꽃 피기도 전
툭툭 꽃 지는 소리로 울리고(「선운사에서」 전문)
이 시는 “고요의 탑”을 노래하고 있다. “산길을 내려오는 스님”은 아마도 토굴이나 암자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듯하다. 인적이 드문 깊은 자연 속에서 도량을 닦던 “스님”의 “맑은 눈빛에서”는 “동백”의 “숲이 후드득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님”과 “숲”이 하나가 된 모습이다. 그 곁으로 “젊은 스님 합장을 하고 가”고 있다. 이러한 “선운사”의 풍경은 속세의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하나로 살아가는 “스님”들이 “고요의 탑을 쌓아 놓”은 모습이다. 그곳은 꽃이 피고지는 지상의 법칙도 넘어서는 탈속의 공간으로서 “꽃 피기도 전에/ 툭툭 꽃 지는 소리로 울리고” 있는 곳이다. 이렇듯 자연과 함께 삶의 상처를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은 “바람에 길이 들은 오랜 상처 자국에/ 밤새 달빛이 손을 얹고 있다// 신화로 물든 밤은 짧아지고/ 적요가 천혜향처럼 서서히 번지는 애월”(「애월에서」 부분)과 같은 시구에도 드러난다. “오랜 상처 자국”을 “애월”의 “달빛”으로 위무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낮은 별이 들어와 보이는 저녁에는/ 슬픔이 뼈를 베고 누워 있던 어둠이 일어나/ 뒤우뚱 걸음으로 별빛 속 산책도 다니다/ 고요와 더불어 숲속에서 절뚝거린다”(밥그릇 무덤」 부분)라는 경지의 발견과도 무관하지 않다. 삶의 상처를 초극하기 위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넘어서는 “고요”의 경지를 발견하고 있다. 이것 역시 탁경자 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상처의 역설, 시의 역설을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