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굶주린 심령에게
창세기 42:1~17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루시는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아래 운행되는 이 외부 세계에서, 각자 유사한 것과 모형 혹은 상징 또는 예증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유사한 것들을 찾아내서 복음을 설명하고 하나님이 하는 일을 전달하는 것이 목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항상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범적인 설교자셨고, 주님의 설교에는 비유들로 가득했었습니다. 큰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외부 세계의 상징들로 아름답게 묘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아주 간단한 진리 하나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적절한 예화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기독교 역사상 한 인간이 죄악된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는 영혼을 설명하는데 요한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상 가는 저술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모든 사람이 알아듣기 쉽고 이해가 빠르도록 돕기 위해 예수님이 비유로 설교하신 것처럼 훌륭한, 그러면서도 아주 적절한 비유를 찾아내려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나 예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만들어 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 때문에 고심할 필요가 없는 주님의 사역자가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끙끙거리면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제 아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여보, 뭘 그렇게 고생스럽게 그러세요. 당신은 강단에 서기만 하면 설교가 그대로 나오는 것 같던데요.” 제가 그 말을 듣는 순간 “30년 동안 같이 산 사람도 내 고충을 모르는구나” 하면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는 하려 해도 안 되고, 부모는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된다고 안달하지, 그래서 자살까지 하는 학생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갔습니다. 설교 준비가 그냥 되는 게 아니거든요.
제 경우는 주일 오후가 마음이 제일 가벼워요. 월요일만 되면 삼일 기도회 성경 강해에 매여 있어야 하고, 사일 기도회가 지나면 금요심야 기도회 준비와 주일 아침 설교 준비가 밀려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설교자를 위해서 좋은 예화가 구약 성경에 이미 마련 되어 있는 일입니다. 제가 믿는 대로 구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어느 면으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위한 예화집이라고 말해도 될 좋은 재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직접으로 배우는 교리들을 구약에서는 비유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오늘 저녁 읽는 창세기 42장의 첫 두절의 말씀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타락한 인간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 영혼의 극심한 기근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절망이 아니라 여기 소망이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야곱의 소망은 그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요셉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1. 범죄한 인간의 비참한 궁경입니다.
야곱의 아들들 위에 극심한 기근이 내려 덮쳤습니다. 세상의 설움 중에 배고픈 설움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말에도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국 동란 때만 하더라도 먹는 문제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에게 그 당시 형편을 말하면 전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가을에 추수한 것 가지고 겨울 동안 살고 보리 추수 때까지 식량이 없어서 죽도 쑤어 먹기 어려워 문자 그대로 나무 껍질, 풀뿌리를 캐서 쌀 몇 알 넣고 멀겋게 죽을 쑤어 배만 부르게 하던 시절, 아무런 영양가가 없으니까 배만 불렀지 맥이 없어 허덕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말을 하면 학생들은 “왜 그렇게 죽을 쑤어 먹으면서 궁상을 떨었어요? 라면 끓여 먹으면 될 것 아니에요?”한다고 합니다.
오늘 이 지구상에 아직도 20억이 넘는 사람이 기근에 허덕이고, 매일 먹지 못해 순전히 굶어 죽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된다는 말을 하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나라만 해도 아직 200만이 넘는 사람이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서울에도 국민학교 학생들 중에 점심을 싸 가지고 오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근이란 지상의 지옥입니다. 역사를 상고하면 전에 사마리아의 기근 때 여인들이 자기가 친히 낳은 자식들을 잡아먹어야 했던 그 비참한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 오늘 본문에 야곱이 겪은 기근은 무려 7년간이란 긴 세월이었으므로 사마리아 기근처럼까지는 아니었어도 결국 그런 형편에 이르게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식량에 대해 극심한 부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식구를 합치면 66명에 달했습니다. 이 많은 식구가 무엇을 먹고 살 수가 있습니까?
이제 식량이 떨어졌으니 그저 상대방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불쌍하다 불쌍하다 해도 굶어 죽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도 물론 안된 일이요,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도 차마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굶어 죽는 사람의 모습, 상상만 해도 보기 어렵습니다. 먹지 못하니 맥이 없어 누워 있습니다. 몸의 모든 영양분이 소비가 되니 살은 점점 빠져서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하여 얼굴엔 눈만 앙상하고 몸은 뼈와 가죽뿐입니다. 눈을 뜰 기운마저 없어 우물거리다가 그만 숨이 지고 맙니다.
기름이 다한 등잔불이 나풀거리다가 심지마저 다 타 버리고 그대로 꺼지고마는 것과도 같습니다. “밥, 밥” 하면서 꺼져가는 그 절규는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줍니다.
육신이 살아가는데 절대 필요한 것이 밥입니다. 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밥보다는 덜합니다. 옷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입지 않고는 살아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기근처럼 절대적으로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결핍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식량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식량이 좀 남아 있으면 식사량을 줄이고 절약하면서 어느 정도 견디어 나갈 수가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문제는 심각하고 처절할 정도였습니다. 자녀들이 먹지 못해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볼 때 이 괴로움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내들은 점점 야위어 가고 이들의 품에 안긴 아기들은 젖이 안 나온다고 쑤셔 대고 그러다가 쓰러져 죽어가면 묻어줄 힘조차 없는 외롭고 비참한 광경을 내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식 문제를 해결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인의 상태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 심령이 완전히 빈털터리입니다. 그의 영혼이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심령의 배를 채워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굶주림에 허덕일 뿐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식량이 없음을 야곱의 아들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지 알만 합니다. 아마 처음에는 “우리 집에 나눠 줄 식량이 조금 있니? 우리 집에 식량이 떨어진 모양인데 좀 줄 것 있겠니?” 단은 시므온에게 “네게 남은 양식이 있느냐? 지금 우리 애들은 죽어가고 있어. 나를 좀 도와주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형제 유다를 쳐다봅니다. 혹은 사랑 받는 막내동생 베냐민에게는 저장해 둔 곡식이 있지 않나 해서 바라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공포에 아무런 방비 없이 자신들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을 구속할 사람은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2.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야곱은 믿음의 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기근을 당했을 때 야곱은 하나님께 자기 가족들을 구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드렸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 중에서 제일 먼저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야곱의 천막으로 인사 온 자녀들에게 그의 축원에 이어서 좋은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의 자녀들의 마음이 얼마나 흥분했을까 하는 것이 짐작이 갑니다.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야곱은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즉시 자기 자녀들에게 알렸습니다.
“저 애굽에 곡식이 있도다.” 우리는 이제 굶어 죽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멸망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것이 거짓 소문은 아니었을까요? 더구나 기근의 날에 사람들은 자기의 소원과 욕망을 현실로 착각하여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내기 일쑤이므로 야곱에게 소식을 전한 사람이 헛소문을 퍼뜨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주린 사람들은 어디엔가 양식이 있지 않은가 하고 기대하므로 그러다가는 정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양식이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의 이 말씀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는 정말 옛 곡식으로 창고마다 가득해 있었습니다. 야곱의 66명의 대가족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이 가득하게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이상 하늘 창고에는 넘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관리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들어갈 때 그냥 갔습니다. 또 거기 곡식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얻을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미지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초대를 받고 나아온 것입니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종들을 보내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친 사람을 부르십니다. 나아오면 환영받습니다. 주님께로 나아온 사람 치고 배척당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아오기만 하면 죽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야곱의 아들들은 흉년으로 인해서 식량은 없었지만 원래가 부유한 형편이어서 식량을 살만한 돈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려 떠날 때 번쩍이는 금덩어리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허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겨 줍소서”
빈손 들고, 아무것도 없이, 내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탕자는 거지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돈이라도 조금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나아갔습니다.
1.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후렴) 내 모습 그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아멘
2.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3.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날 받으옵소서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4. 내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으옵소서
3. 야곱의 귀한 권고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향하여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귀하고 실제적인 권고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권고를 들은 아들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요. 거기에 양식이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까? 소식을 듣고도 그대로 앉아 굶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가면 곡식을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곳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들음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을 얻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유익을 삼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자비를 체험하기까지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소문을 들은,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가슴 조이며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갈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쫓아가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것이 귀합니다. 그래서 그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길가에서 구걸하던 거지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계속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메오를 부르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지나가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마주앉아 쳐다보고만 있겠습니까? 주님께 어서 나아가 자비를 얻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급히 해야 할 일은 이 약속에 매달려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려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바로 나를 구원하러 오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보세요. 야곱이 그들에게 행할 바를 이야기하자 그들이 먼저 한 것은 가서 빈 자루를 메고 온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빈 자루를 가지고 와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다 끄집어냅시다. 모든 것 다 내놓고 주님 앞에서 회개합시다. 회개 자체에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고백할까요?
저는 여러분의 죄에 대하여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빈 자루를 끄집어내세요.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죄의 회개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이 진리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행복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와 믿음이 결단코 무익한 데로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주님을 의뢰한 사람이 버림받은 일은 만고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에 우리는 구원을 받고 죄 씻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영접하십니다.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정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히 정죄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에 우리를 위해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왜 그의 아들들을 향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생사에 관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냐?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