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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담/ 권대근 / 원로문인 문한규 선생을 찾아서
기획대담/ 탐방기사(원로작가의 근황)
의창에 밝힌 수필의 등불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현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30개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붕괴’라는 단어다. ‘근대화’를 시점으로 타락된 이성이 현대문명을 이끌면서 중세 이후 근대부터 줄곧 위기가 점쳐지곤 했지만, 오늘날처럼 ‘붕괴’로까지 점화되지는 않았다. 부권의 붕괴에 이은 교권의 붕괴는 우리 사회의 핵심 조직인 가정과 학교를 ‘문제’의 공간으로 명명하고 있다. 적어도 동양사회의 가치와 미덕을 배경으로 천 년 만 년 견고할 것 같았던 전통적 신념들이 서양적 사고와 충동하면서 하나 둘 그 역할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요즘 우리는 확실히 ‘난국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 가장 필요한 논리인 통합과 화합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분열과 대립으로 국민적 갈등만 부추기는 듯한 어설픈 개혁 정책들이 국민의 정신적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개혁을 외치는 것은 썩은 문짝을 차는 것보다 쉽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물방울로 바위에 구멍을 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닌가. 문제는 위정자가 이런 간단한 원리를 잘 모르는 데 있다. 그러니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 삼간을 다 태운다는 비난을 받는다. 한 수 아래의 정치는 분명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러한 때, 문학인은 무엇을 노래해야 하겠는가. 이즈음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왜 자신의 저서 <공화국>에서 문학인을 추방해 버렸는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문인을 추방해 버린 이유는 문인이 대중으로 하여금 진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수필만큼 우리 생활에 밀착되어 진실을 말하는 장르가 어디 있겠는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고 마음의 양식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수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수필가가 많지 않다. 그 원인은 수필문학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개념인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에 숨어 있는 수필 형식의 자유로움과 생활성을 수필가가 잘못 이해한 데에 있다.
격월간지로 바뀐 문학도시가 세 번째로 시도하는 기획 대담의 작가로 선정된 문한규 수필가는 평생을 의사로, 교수로, 수필가로 살아오신 분이다. 1932년 부산에서 출생하였고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독일 베를린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초빙교수, 메트라하종합병원 내과 병동장 및 부산대학교 의과대학학장과 부산대학병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부산 동의의료원 명예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이처럼 평생을 의사로 봉직하며 한편으로는 글을 쓰는 작업에 진력하여 여러 권의 수필집과 칼럼집을 내었다. 각기 독립적이고 상이한 활동 영역을 유기적인 관계로 유지하면서 분명한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디딤돌로 융합시키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그의 문학에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 최초의 수필 동인지 <수필>의 멤버로서 수필계 원로의 반열에 일찍이 올라서 있으면서도 문단 정치와는 거리를 두면서 왕성하게 연구와 저술활동을 펼쳐 보이는 모습은 조로증에 걸린 우리 문학인에게 매서운 회초리가 아닐 수 없다. <동백꽃 피는 마을>이란 시집을 낸 바 있는 시인으로, <간질환>이란 전문서를 낸 의사로, 의사로서 겪은 이야기를 <의창야화>로 엮어 세인들에게 재미있고, 유익한 글로 조명해 준 수필가로, 그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와 펼쳐 보인 문학적 역량은 감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수필은 ‘의창’을 통해 나타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는데다가 의료 분야의 전문 연구 결과를 믹스해서 유려한 문장으로 쉽게 풀어 '붓 가는 대로' 쓰는 수필의 묘미를 느끼게 해 주는 특징이 있다. 수필가로서의 사색과 동의의료원 원장으로서의 기획, 교수로서의 학문연구 그리고 생활인으로서의 체험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의 수필은 무미건조하게 수필을 쓰는 수필가들에게, 수필문학을 가까이하는 독자들에게 수필이 얼마나 진솔하게 깊이 있고 가치가 있는 글인가를 되짚어보게 하는 울림이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문학적 위상은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추방해버린 문학인이 아니라,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지를 받는 ‘모방자’요, ‘창조자’요, ‘있었던 사실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예언자’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데 있다.
이번 기획대담에 기꺼이 응해 주심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선생을 찾아뵌 날은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는 때였다. 사진 촬영도 부탁하고 대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며 화제를 다양하게 가져가보려는 의도에서 계간「에세이문예」주간인 송명화 수필가와 함께 동의의료원 찾아 선생을 뵈었다. 일요일이었지만 선생은 환자를 보기 위해 병원에 나와 계셨다. 처음 온 환자들은 의아해 한다지만 의사에게 휴일이 있을 수 있겠냐며 늘 진료에 임하신다는 선생의 말씀에 만남부터 사회의 원로로서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권대근 : 사람들의 몸의 병을 낫게 해 주는 의사로서 또 동의의료원이란 커다란 병원을 이끌어가는 관리인으로서 무척 바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시집과 수필집 또 전문서적 등 많은 저서를 남기셨는데요. 글은 주로 언제 쓰시는지요?
문한규 : 글을 쓰는 시간이나 시기가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전문서는 요청에 의해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낙서는 생활 속에서 느끼는 것들, 비정상적인 것들, 깊은 감명을 받은 것들을 수시로 간단히 메모했다가 틈이 나면 주로 밤 시간에 적어봅니다.
권대근 : 의사가 몸의 병을 낫게 해 준다면 글을 쓰는 작업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작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잡다단한 이 사회에서 작가의 역할을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문한규 : 작가의 역할이란 각자의 사견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경우는 천직이 의사라는 점과 관계 지어 봅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직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치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육체, 정신적 면을 가진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권대근 : 원장님의 수필 ‘슬럼프slump의 참뜻’에서 주어진 여건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보람과 흥미를 느끼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바로 생산적인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장님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문한규 : ‘슬럼프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하는지’ 라는 물음은 그 답이 각양각색일 것입니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슬럼프의 원인 인자를 되새기고 현실을 직시하고 보다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면에서 접근하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없는 쪽 보다는 있는 쪽에 비중을 두고 풀어갑니다.
송명화 :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해방기, 6․25 전쟁의 시기, 군사정권 시절 등 혼란의 세기를 몸소 체험하고 사셨습니다. 나름대로 똑똑한 척 하기도 하지만 방향을 모르고 흘러가는 듯한 오늘의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미래의 세기를 대비할 가르침을 주십시오.
문한규 : 흔히들 말하기를 나의 세대 사람들을 가리켜 혼란기의 주역배우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해방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온갖 격동기를 모두 체험한 세대이이어서겠지요. 물론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얼마나 진실되게, 거짓없이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요는 다음 세 가지 물음에서 정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나는 누구냐, 나는 무엇을 했던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의 과거에서 오늘까지의 좌표가 정확히 설정되었는가, 나의 과거를 솔직히 되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이냐 라는 미래에 대비할 명제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권대근 : 군사정권 시절에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셨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절이었는데요. 지혜롭게 그 물살을 헤쳐 나오신 것 같습니다. 유학시절의 어려움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문한규 : 집을 떠나도 고생길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1958년 처음으로 유학길을 떠난 곳이 바로 동서독이 양분된 서독, 그리고 서베를린이었으니 우선 시작부터가 별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때만 해도 동서베를린을 아무 제한 없이 왕래가 가능했기 때문에 이해할 만도 했습니다. 또 서베를린에는 한국학생이라고는 나 혼자였기에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생활에 어려웠던 것은 독일 사람들의 근검절약생활에 당해 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의식주 할 것 없이 정말 독한 민족이라는 것을 체험하자니 지금 와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추억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연구실 생활도 연중무휴의 고행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언어의 지장이 없어 그것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침 굶고, 점심 참고, 저녁 건너뛰고… 참고 견디고 이를 악물고 생활해 온 것만이 아직도 쓰라린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칙대로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라고는 귀국 후 독종이라는 호칭뿐이었습니다.
권대근 : 윤이상 선생님과 교유를 하신 것으로 압니다. 고국을 밟지 못하고 그리워하기만 하다가 돌아가신 그 분을 생각하는 소회가 남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한규 : 베를린 생활 당시 뜻밖에 윤이상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통영 분이고 또 같은 경상도 분이라 정답게 상면했습니다. 독일생활의 어려움, 그외 음악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문제점 등등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고국에 돌아가야 되겠다는 포부 등등, 그러나 고국에서 예술인으로 활동하는 데는 학맥, 인맥이 중요하다는 어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였고 그것을 늘 한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베를린에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용기를 내자고 위로한 후에 그는 서독으로 떠났습니다.
송명화 : 동백림 사건하면 저는 천상병 시인이 떠오르는데요. 얼마 전에 인사동에 들러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를 뵌 적이 있습니다. 삶을 소풍 나온 것으로 여겼던 시인의 맑은 영혼과 그 분의 한 많은 생애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찡합니다. 천 시인에 관해 많은 부분이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그 분과의 사이에 숨은 에피소드가 있으신지요?
문한규 : 천상병 시인과의 각별한 에피소드라고는 없으나 그분의 서울대 상대 입학년도가 저와 같았습니다. 안면이 없던 분이라 친교는 없었으나 소위 동베를린 사건 때 이문동 수사 당시 며칠 함께 있은 적이 있습니다. 생김새나 행위가 무척 눈에 띄어 가끔 대화도 나눈 적이 있었지요. 어느 날 아침 세면실에서 마주쳐 내가 면도하고 난 후 면도기를 빌려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순찰하던 수사관에게 발각되어 억울하게 몰매를 맞는 장면이 지금도 가끔 면도할 때면 생각나기도 합니다.
권대근 :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초빙교수로 근무하셨지요? 프랑크푸르트는 괴테의 고향이기도 한데요. 얼마나 계셨는지요?
문한규 : 예, 1969년 1월1일부터만 1년 2개월 동안 있었지요.
권대근 : 그 때는 독일에 우리나라 간호원과 광부들이 해외취업을 하러 갔던 시기이군요. 그들도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같이 근무를 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들의 생활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문한규 : 그 당시 독일에 재차 건너가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 초빙교수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에 익숙한 처지라 여러 가지 당시 사항을 아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광부들이 독일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한국 간호사들이 와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뒤늦게 들은 말이지만 당시 한국 간호사들이 주로 독일간호사들이 모자라는 시골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즉 순전히 남의 나라에 일하러 온 셈이지요. 무슨 영문인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 왔으면 그들의 앞날과 발전을 위해서도 대학병원 같은 교육기관에서 선진간호를 배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에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의 지데 교수(병원장)에게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 분이 나의 참뜻을 받아들여 한국에서 우수한 간호사 50명을 초청해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왔던 간호사는 우수했으며 그 간호사들의 어려움을 당국에 말하여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사소한 의견 차나 습관상의 문제도 있었으나 좋은 이미지를 심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선생은 독일 생활에 대한 추억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젊은 날을 반추하는 듯하셨다. 세월은 가도 남는 것은 추억과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고난 속에서도 젊은 날의 열정을 불태웠던 청년기의 날들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애국심에 불타고, 고생하는 동족 간호사들이 안타까워 길을 터주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의사를 독일인들도 좋게 보았으리라.
권대근 : 내년이 의사가 된 지 50년이 되십니다. 남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계실 것 같습니다.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문한규 : 남다른 인생관이라면 긴장이 됩니다만 나름대로의 바탕이 있고 목표가 있고 중요한 것은 자란 환경이 있습니다. 술, 담배를 못하시던 아버님과 인자하시기로 소문난 어머님 사이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보니 엄한 가정교육 속에서 탈 없이 무사히 자랐습니다. 변화무쌍하던 세파 속에서 내가 내 스스로 품고 오던 인생관이라는 거창한 목적보다는 소탈하게 보람되게 그리고 열심히 주어진 책무에 열과 성을 다하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이 뭐냐고요? 별말 하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살자. 주어진 일에 열과 성을 다하자. 그리고 가난하게 죽자! 물론 죽어야지요.
권대근 : 내과 전문의로서 특히 간 분야에서 명의로 알려져 계십니다. 작가들은 술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을 지키며 음주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문한규 : 불행히도 간 전문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유학 시 나의 은사가 간 전문이었습니다. 또 간에 대한 흥미도 있었고 유명한 겔마 교수의 지시로 간을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간을 전공한다면 묻는 말이 획일적입니다. 술과 간에 대한 질문입니다. 술체질이라고 해서 술을 잘 이겨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알콜이 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논문은 기지부수 입니다.
어느 분은 심각하게 질문합니다. 술은 폭음이 좋습니까? 연음이 좋습니까? 답은 ‘다 안 좋습니다’ 입니다. 그러나 폭음보다는 연음이 더 안 좋습니다. 문제는 중독현상에 이른 경우 거론의 여지가 없으나 간은 우리 몸의 장기 중 재생력이 제일 좋은 장기입니다. 흔히들 간을 7전 8기의 장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8전 9기는 절대 없다는 점도 함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의 핵은 부담 있는 술을 멀리하는 것이 개인의 건강이나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부담 없는 술, 이해관계 없는 술, 기분 좋은 술… 이것이 술이 가지는 매력이 아닐까요.
권대근 : 신문에 건강 칼럼을 오랫동안 쓰셨습니다. 건강칼럼집 <의창야화>를 재미있게 읽으면서 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양주 ‘올드 파’를 탄생시킨 장본인인 ‘<파> 할아버지의 교훈’이 매우 흥미로웠는데요. 한 세기 반이나 생존했던 <파> 할아버지가 국왕이 축하의 의미로 하사한 산해진미를 마음껏 먹고 갑자기 신체에 이상을 일으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강한 메시지가 느껴졌습니다. 그 글에서 현대판 <파> 할아버지가 되어보자고 하셨는데 현대판 파 할아버지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요?
문한규 : 현대판 파 할아버지? 상도를 벗어나면 결국 화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도록 규칙적으로 순리적으로 삶을 즐기는 것이지요. 호사다마가 아니라 호식다병이라고나 할까요. 과욕은 언제나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호사다마라는 말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송명화 : 원장님의 전화 목소리와 장년 같은 모습과 실제 연세와는 너무도 차이가 있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젊음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있으신지요?
문한규 :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환자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면 제 자신에게는 무관하게 됩니다. 소위 1무2소3다 [1無, 2小, 3多]를 지켜갈 뿐입니다. 금연, 소식, 소음, 다동, 다휴, 다접 이것이 건강요령이라고나 할까요? 문제는 나이를 잊고 사는 것이지요.
권대근 : 환자를 돌보는 일은 보람도 많고 반면에 스트레스도 많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원장님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나 취미생활을 소개해 주십시오.
문한규 : 스트레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현대인은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오히려 빨리 늙습니다. 내 자신으로 돌아갈 때 스트레스는 접근하지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고맙게 생각합니다. 내 건강을 보호해주니 생명의 지킴이지요. 스트레스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항상 감사 생활을 삶의 제일로 생각합니다. 원망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권대근 : 독서를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끼는 장서나 후학들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문한규 : 독서는 살아가는 기본행위지요. 책은 무척 좋아합니다. 의예과시절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일본판 세계문학전집 [38권]을 하숙비를 [두달치] 주고 구입한 사건이 생각납니다. 그 외 사상전집 등을 애독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흔히들 권하고 싶은 책들이 판을 치는데 문제는 본인의 취향에 따라 읽는 것이 독서의 흥을 겹게 하지 않을까요.
권대근 : <수필>동인으로 활동하시는 것으로 볼 때, 「수필시대」 발행인으로 부산 수필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던 허천 선생님과 교유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저에게 수필연구회를 만들라는 유지를 내리시고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안타까움이 큽니다. 허천 선생님을 추억해 주시겠습니까?
문한규 : 허천 선생! 내가 친히 지내던 분 중의 한 분이 바로 허천 선생입니다. 혹자는 평하기를 괴벽한 사람, 올바른 사람, 불의를 보고 견디지 못할 사람… 수많은 익명이 있습니다. 내가 독일서 돌아왔을 때 자주 만나 좋은 충고와 삶의 진의를 일깨워주신 분입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불날 같은 성미, 옳고 그릇됨이 명확한 사람, 바로 그분이 허천 선생입니다. 몸이 좋지 않아 내가 담당하고 투병하던 중 임종에 이르러 평소에 마음먹고 있던 말을 빠짐 없이 하던 생각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수필시대사를 만들어 열과 성을 바치던 그분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허천 선생님을 생각하면 나도 늘 가슴이 뜨거워진다. 나 어린 후배 수필가인 나를 믿고 아껴주시던 선생님 생각을 하며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한참 동안 화제로 올렸다. 같은 인물을 그리워하고 그 분을 함께 추억해보는 일로 우리 세 명이 둘러앉은 원장실 안이 참으로 훈훈하였다.
권대근 : 사회 전반에서 예전보다 문학인들의 목소리가 낮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의식을 갖고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일반인들의 기대가 다분히 섞인 말이라 생각되는데 사회 속에서 문학하는 이들의 역할은 무엇이고 그 역할을 해내는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문한규 : 왜 예전보다 문학인들의 목소리가 낮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문학인들의 목소리가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회의 흐름이 문학을 외면하는 풍토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학이 외면당하는 사회는 이미 사회정의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됩니다. 문제는 참된 문학의 주소를 재정립 하고 문학인들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즉, 문학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권대근 : 교수님도 결국 많은 장르 중에서 수필을 택하였습니다. 수필과 가까이 하게 된 계기와 교수님이 걸어오신 문학인생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문한규 : 수필을 택한 동기나 뚜렷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글쓰기가 좋아서 어릴 때부터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작문 시간에 자주 뽑혀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은 것이 조그마한 계기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인간은 칭찬밖에 없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그 외에 유학시절 여러 신문사와의 관계로 각종 기사를 쓰다 보니 흥미를 갖고 습관화 한 것뿐입니다.
권대근 : 인생의 대선배님이십니다. 긴 인생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든다면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문한규 : 앞에도 말씀했습니다만 올바르게 산다는 것, 주어진 일에 전력투구한다는 것, 그리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얼마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는 산 내용이 더 중시되어야 하겠지요.
권대근 : 칼럼집 <사람이 그립다>, 산문집 <고독을 대화로서> 등에서 사람 사이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 정을 나누고 사는 것 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문학도시 독자들을 위해 교수님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피력해 주시겠습니까?
문한규 :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누군가? 간단히 말하면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입니다.
송명화 :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몸이 아픈 환자들은 자기 입장에서만 모든 일을 생각하기 쉽다고 보는데요. 50년 동안 환자와 같이 생활하다보면 기억에 남는 환자가 많으리라 봅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문한규 : 50년 동안의 의료인 생활을 통해서 수많은 환자들이 뇌리를 스쳐가니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겠으나 많은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또 그 후의 가족들의 사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보편적인 면에서 추적해보면 생시에 가난하게 살다가 유명을 달리한 후손들은 형제 친척 할 것 없이 화합된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 반면 호화롭게 부를 누리며 살다가 어른이 사망한 경우 형제 사이의 우애에 금이 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임종의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송명화 : 요즘 개인병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겠다 싶어 반길 일이다 싶기도 하고 또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실력과 명성 그리고 열정을 갖춘 탁월한 의사이시면서도 개원을 하지 않으신 까닭은 무엇인지요?
문한규 : 독일서 처음 왔을 때 시내 유수 재벌들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병원을 차려줄 테니 개업하는 것이 어떠냐고. 저는 생각해보겠노라고 미루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평생 개업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나는 돈에 대한 개념에 있어 영 이하입니다. 또 의료인이 너무 금전에 밝게 되면 의료본연의 자세에서 어긋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의료인으로서 의료본연의 입장에서 어떤 형태의 의료 행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나는 개업체질이 못 된다는 것뿐입니다.
권대근 : 세대차가 난다는 말을 어디서건 쉽게 듣습니다. 어찌 보면 세대 간의 소통에 문제가 많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지혜롭게 조화되기 위해서 우리 젊은 세대들이 할 일은 무엇이며 또 기성세대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어떠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문한규 : 세대차도 세대차 나름입니다. 옛것을 배우고 새것을 익힌다. 좋은 말입니다. 옛것을 배척하고 새것만 얻는다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항상 상대방에게서 배우는 자세로 임한다면 지혜로운 조화가 이룩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 사는 일에 있어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등산을 하더라도 어느 산을 오르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를 더 비중있게 여긴다. 문한규 원장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두세 시간이 훌쩍 흘렀다.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이어지는 말씀과 격의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선배와 후배 작가라는 경계는 없어지고 다만 같은 화제를 두고 도란도란 정답게 이야기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웃기도 하는 사랑방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함께 택시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택시기사가 원장님께 ‘텔레비전에 나온 분 아니냐’고 물었다. 가끔씩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며 허허 웃으시는 모습이 편안하다. 길가에서 못마땅한 작태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휴대폰을 귀에 대고 행동 바로 하라고 호통을 치시기도 하고 마음 맞는 이를 만나면 목청 높여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사람, 시간을 아껴 책읽기에 몰입하고 오디오를 갖춰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 삶의 가치를 돈보다 더 귀한 것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 깊은 밤 달빛 벗 삼아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사람, 한 철 예의를 지킬 단벌의 옷으로도 만족하는 사람 등등 살아온 연륜 만큼이나 문한규 원장님 한 사람을 나타낼 수 있는 말들이 많다.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분야가 무엇이든간에 한 길로 매진한 사람의 말은 자신감이 있으며 진솔하여 남을 감동시킨다. 글로 또 가끔 매스컴을 통해 간간히 뵙기는 하였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원장님의 삶과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내 삶을 돌아보는 또 다른 계기가 된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그와 만났기에 더욱 진솔하게 다가와 더 소중해진 글귀들을 한 번 더 챙겨보았다.
우리들은 지금 살고 있기 때문에 삶의 고마움과 존귀함을 모르고 있는 것은 마치 공기나 태양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과 같다.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알기 위해서는 역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보는 마음을 가짐으로서 비로소 삶의 희열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지 모른다.
- 문한규, <죽음을 보는 마음> 중에서-
인간은 인간이란 점에서 동등하다. 다만 그 직책의 차이에서 부서적인 차별이 생긴다. 그러나 거기에 본질적인 우월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생활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주체와 주체의 관계이다. 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기의 주체성이 짓밟히는 때처럼 불쾌한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 문한규, <민주화와 인간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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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한규/ 1932년 부산 출생, 경남고 졸업, 서울대 의과대 졸업, 독일 베를린대학교 박사,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초빙교수, 부산대학병원장, 동의의료원 원장 역임, 부산수필 동인, 시집: 「동백꽃 피는 마을」, 칼럼집: 「의창야화」, 「사람이 그립다」. 「고독을 대화로서」현재 동의의료원 명예원장
/권대근/ 경남 남해 출신, 문학평론가, 영남대 영문과 졸업, 동아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수료, 문학박사, 1988년 월간 「동양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외, 학술서: 「현대수필창작론」외, 제2회 한국바다문학상 본상 수상, 현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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