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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개주 송악을 동경(東京)으로,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다
이게 무슨말인가. 평소에 평양을 서경이라고 부르는것도 의아심이 있었는데 개주 송악을 동경으로 삼았
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대경실색하는 사람도 많을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살아있는 사료를 근거로 신라와 고려가 요동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다가 개뿔도 모르
면서 억지만 쓴다는 핀잔만 들어오고 있는 요즘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욕을 먹어도 다음글을 해석하면 분명 신라는 요동에서 활동한 흔적이 남아있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가 도읍을 정한 개주의 송악도 분명 요동이다.
어디 그뿐인가.《한서》《통전》《송사》<열전>.《문헌통고》《고려도경》《만주원류고》《무경총요》
《독사방여기요》《주해총론》등이 한결같이 삼한.신라.백제.왕건고려등이 요동에 있었다고 하니 수십
년을 그 흔적을 찾아 헤매인 역사학도로서 관심을 갖지않을 수 없는것이다.
과연 이러한 생각이 필자만의 착각일까.다시 다음글을 소개드린다.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려의 3경은 동서관계가 아니라 남북관계다.개경을 중심으로 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서울을 남경이라고 하면서 평양을 서경이라고 하는것은 억지다.북경이라고 불러야 옳지 않겠는가.
《문헌통고》가 주장하는 고려 3경, 이 지도에 표시된 왕경은 3경에 포함되지 않는다.
서경은 이 지도에서 제외되어있다. 그러나 남경의 위치인 대련(금주 금마군)보다는 서쪽에 있다.
이러한 위치 설정은 왕경을 중심으로 한것이 아니라 고려의 최초건국지인 서경을 중심으로 한것이다.
《무경총요》는 봉황성인 개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
[개주는 발해의 고성이다. 노주(遼)가 동쪽으로 신라국을 토벌하고 그성의 요해지에 주도를 세웠다.
곧 개원군이다.서쪽으로 내원성이 120리이고,서남쪽으로 길주가 70리,동남쪽으로 60리 가면 석성에
이른다.내원성 노중(요 성종).경술년(서기 1010)에 신라국을 토벌하고 요해지를 얻어 성을 쌓고 지켰다.
즉 중국 대중상부 3년이다.동쪽으로 신라국 흥화진이 40리 거리에 있고,남쪽으로 30리를 가면 바다에
이른다.서쪽으로 보주까지 40리다.《무경총요》<전집 권지 22>]
讀史方輿紀要 (독사방여기요) 卷三十八 ◎山东九 外国附考 (권38 산동9 외국부고)
오대 후량
용덕2년(922) 고려인 왕건이 해군통수로 병사를 일으켜 궁예를 죽이고 스스로 고려왕이라
칭하다.(2)
후당 청태말 군사를 이끌고 신라 백제를 파하고 그 땅을 아우르니 동이의 여러 나라가 그에 복속하다.
개주땅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동경이라 하였으며 평양을 서경이라 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왕경으로 부르던 경기도의 한성은 어떻게 된것일까.
*경기도는 조선의 왕경인데 한성이라고도 부른다.
명초(1394년)에 고려왕 단(旦)이 개주(開州)로부터 옮겨온곳이다.(3)
왜 이렇게 분명한 기록들을 외면하고 한사코 왜곡된 자료들만 인용하여 고려의 요동 진출설을 부정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요동의 개주성에서 조선땅의 경기도로 왕경을 옮겨간 고려왕 단(旦)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고려말 공양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이어받은 이성계를 말함이다.
혹자는 개주를 한반도 경기도의 개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개성을 어떻게 고려의 동경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수없이 등장하는 사료들을 이성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이미 골수에 밖혀버린 통설에 함몰되어 있으니
그러한 사료들이 올바로 보일리가 없을것이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
조선의 제1대 왕.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수가
없었던 시대 분위기상, 쉬운 이름을 버리고 단(旦;아침)
으로 개명. 동북면(함경도)의 천호(수장, 수령)였던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함주(함흥) 태생.
(함주는 당시 함흥이
아니라 요동의 함주다. 필자 주)
고려말 장군으로 여러 전투에 걸쳐
맹활약을 하였고, 1388년 최고 재상인 수문하시중에 임명.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 획득.(당시 위화도는 요동의 의주 서쪽에 있었다>필자 주)
창왕, 공양왕을 세우고, 영삼사사, 삼군도총제사가 됨. 1392년 7월 왕으로 즉위하여 조선을 세움.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도성 건설, 개혁 조치 단행.
불행하게도 재위 7년 만에 아들 이방원에 의해 실권, 1408년 5월 24일 74세로
사망.
현재 구리시 동구릉 내 건원릉(乾元陵)에
계신다
주(1) 開州 渤海古城也。虜主東討新羅國, 都其城要害, 建爲州, 仍曰開遠軍。西至來遠城百二十里, 西南至
吉州七十里, 東南至石城六十里。來遠城, 虜中。庚戌年討新羅國, 得要害地, 築城以守之, 卽中國大中祥符
三年也。東至新羅興化鎭四十里, 南至海三十里, 西至保州四十里。《무경총요》<전집 권지 22>
주(2)◇朝鲜... (중략)... 五代梁龙德二年,高丽人王建者,起兵为海军统帅,袭杀躬裔,自称高丽王。
唐清泰末,建引兵击破新罗百济,而并其地,于是东夷诸国皆附之,地益拓,建都松岳,即开州也,谓之东
京,而以平壤为西京。(讀史方輿紀要
(독사방여기요) 卷三十八 ◎山东九 外国附考 (권38 산동9 외국부고)
주(3) 京畿道治王京。朝鲜都也,亦曰汉城。明初,高丽王旦自开州徙此,居七道之中,称为四塞,领郡三,
曰杨根、丰德、水城。府三,曰汉城、开城、长湍。州七,曰杨州、广州、润州、骊州、果州、谷州、坡州。
县三,曰交河、三登、土山。
조선의 北界
때는 淸나라가 생기기전 고려말 신흥국 明나라와 고려간에 밀고 땡기는 상황입니다.
철령을 기준으로 高麗와 明과의 국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고려말 우왕은 최영과 함께 이곳에 와서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때 이성계가 반대를 하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후 청나라가 들어설 때 까지 조선의 강역은 아래지도와 같이 1만리 강역으로 되었습니다.
淸나라는 자기들 시조가 나라를 일으킨 옛터(장백산 -장백산 조금 북쪽에 백두산이 있는 것
으로 지도에 나온다-) 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목책을 놓고 봉금령을 내리게
됩니다.
지도출처 : 역사수첩
明史 조선 만주강역 직접사료 발굴: 만주 철령시의 명明 철령위가 곧 조선과의 국경
그림 1. 요녕성 철령시 현재 지도
위키피디아의 철령시 지세地勢로 보면 대체로 동고중저東高中低、북고남저北高南低、서부초고
西部稍高이고 동서양측은 산지와 구릉이 있다.
대체로 봉집현奉集縣추정지 일대인 범하泛河(=汎河)상류일대가 하천이 흘러내려오는 산기슭이 됩니다.
<초고稍高 : 완만히 높아지는 지세>
그림 2. 요계관방도 상의 청나라 당대의 현 철령시 일대 고지도
당 요계관방도는 숙종년간인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를 모본으로
후대에 이를 그린 사본으로 광여도에 포함된 지도입니다. (18세기후반~19세기 사이 제작추정)
[ 의로성懿路城, 범하성范河城, 철령鐵嶺, 요하遼河, 범하泛河등이 명기되어 있다. ]
명사明史 를 찾다보니 드디어 조선왕조가 남만주를 아우른 대국이었음을 직접 명시한 사료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결정적인 사료를 그동안 모르고 지나쳐 이제야 보게 되었는지 안타깝습니다.
늦었지만 이제 조선의 만주지역강역을 밝힌 명나라때의 조선의 북계의 명확한 지명과 위치 하나가
완전히 드러난 것으로 이를 기준으로 고려말과 조선전기의 모든 지명들을 추적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명明 철령위鐵嶺衛에 대한 소개내용입니다.
옛 은주古嚚州인 명明 철령위鐵嶺衛치소와 철령위 산하의 의로성懿路城과 범하성范河城,봉집현奉集
縣등이 언급되면서 그중에 치소 동남의 봉집현奉集縣에 명明이 초기 철령위鐵嶺衛 치소를 설치하였고
이곳이 바로 조선과 국계를 이루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무순撫順 북쪽의 '봉집현奉集縣' 이 위치하는 범하范河(=범하汎河)일대가 조선朝鮮으로
들어가는 국경 관문임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첨언: 명-청때는 범하范河 혹은 범하泛河라 하였고 지금은 범하汎河라 한다>
본문인용
" (철령위鐵嶺衛) 동남으로는 봉집현奉集縣이 있으니 바로 옛 철령성鐵嶺城-철령위鐵嶺衛사건의
무대-으로 고려高麗와 국경을 접한다. 홍무洪武<1368~1398년> 초엽에 현縣을 두었다가 폐지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고려高麗는 조선전기에 쓰이던 조선왕조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대하던 조선의 위정자
들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명을 명으로부터 인가받았지만 주변의 나라들은 고려高麗라는 명칭을
애용하여 조선왕조실록등의 다양한 사서에서 보듯이 임진왜란때까지도 왜국이나 명나라측은 물론
조선에 복속되어있던 려진부족들까지 고려高麗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철령위鐵嶺衛의 옛 치소와 현 치소의 고려말엽에 불리우던 원래 지명들이 언급되어 나오는데
이는 더 충격적인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봉집현奉集縣은 바로 옛 철령위鐵嶺衛치소로 고려말의 우왕의 요동정벌의 요인이 되었던 고려말기의
철령위鐵嶺衛 사건의 무대가 되는 것이고 이는 바로 1388년(우왕 14)-홍무 21년- 3월 당시 문하시중
(門下侍中) 최영장군께서 상소하여 왕명으로 명의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고려땅 철령-
옛 철령인 봉집현奉集縣-을 비롯한 고려의 양계(兩界)에 침입해 위소를 설치하여 주둔하려던 자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그 수장인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은 강계에 구류하도록 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또한, 명明나라때 주원장에 의해 당대에 철령위鐵嶺衛치소로 새로이 지정되어진 후 계속 유지되었던
곳은 원래 고려말의 은주嚚州땅임을 명사明史는 명기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은주嚚州는 어느 사서에서도 더 이상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철령鐵嶺위쪽의 고려지명을 고려해
고려사를 참조하면 바로 은주嚚州의 원래 지명은 고려의 반역도 최탄(崔坦)등에 의해 대원 울루스에
함몰된 서경외 60주중 하나인 은주殷州로 보아야 함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동사강목 제10하 병신년 고종 23년(송 이종 단평 3, 몽고 태종 8, 1236)
○ 6월 몽골이 다시 변경(邊境)을 대거 침입하였다.
○ 5일(경인)에 몽골 군사가 의주강(義州江)을 건너서 8일(계사)에 유병(遊兵)이 가주(嘉州)에 이르
렀고, 10일(을미)에는 안북부(安北府) 운암역(雲巖驛)-지금은 미상-에 둔쳤는데,
가주(嘉州)와 박주(博州) 사이에는 화기(火氣)가 하늘에 닿았었다.
또 선주(宣州) 형제산(兄弟山)-지금은 미상-의 들에 나누어서 둔친 것이 대개 17군데였다.
11일(병신)에는 드디어 자주(慈州)ㆍ삭주(朔州)ㆍ귀주(龜州)ㆍ곽주(郭州) 등 여러 고을에 둔쳤으며,
13일(무술)에는 선봉이 황주(黃州)에 들어왔으며, 15일(경자)에는 신주(信州)ㆍ안주(安州)에 이르렀다.
모든 도(道)의 산성에 방호별감(防護別監)을 나누어 보냈다.
○ 추7월 몽골 군사가 개주(价州)에 이르니, 중랑장 명준(明俊) 등이 복병하였다가 쳐서 패배시켰다.
○ 8월 몽골이 자주(慈州)를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남경(南京)에 주둔하였다.
자주 부사(慈州副使) 최경후(崔景侯), 판관 김지저(金之佇), 은주 부사(殷州副使) 김경희(金景禧) 등이
모두 피살되고, 몽골 군사의 유기(遊騎)가 사방에서 나와 노략질하여도 막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진군하여 남경(南京)ㆍ평택ㆍ아주(牙州) 등처에 둔(屯)쳤으며, 온수군(溫水郡) 에서 남하하여
차현(車峴)으로 향하였다.
조선은 만주 철령시일대의 옛 철령위 치소인 봉집현奉集縣과 인접하여 개국초부터 바로 명의 철령위
鐵嶺衛와 범하泛河(=汎河)상류일대에서 서로 국계를 마주하고 있었으며 또한 당금의 혼하를 조선의
압록강으로 하여 현 혼하를 따라 국계를 나누어 명나라와 국경을 마주하였던 것입니다.
[사료원문]
명사明史 / 지志 / 第十七 지리地理 二 / 철령위鐵嶺衛
철령위鐵嶺衛는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홍무洪武 21년(1388년) 3월, 옛 철령성鐵嶺城에 치소를
세웠다.
홍무洪武 26년(1393년) 4월, 옛 은주古嚚州 땅으로 치소를 옮기었다. 바로 현재의 치소治所이다.
서쪽으로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으로는 범하泛河가 있으며 다시 남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다 요하遼河로 유입되어 들어간다.
또한, 남쪽으로 의로성懿路城이 있으며 홍무洪武 29년(1396년)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또한,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철령위鐵嶺衛-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범하성泛河城이라고도 말한다.
명明 영종英 주기진宗朱祁鎭 정통正統 4년(1439년)에 범하천호소泛河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으로는 봉집현奉集縣이 있으니 바로 옛 철령성鐵嶺城-철령위鐵嶺衛사건의 무대-으로 고려高麗와
국경을 접한다. 홍무洪武<1368~1398년> 초엽에 현縣을 두었다가 폐지하기에 이른다.
또한, 함평부鹹平府가 있으니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Dai Ön Ulus>때의 직례요동행성直隸遼東行省
이다.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혜종惠宗<이칭 순제順帝> 지정至正 2년(1342년) 정월에 항복하여 현縣이
되었으며 홍무洪武 초엽에 폐지되었고 남南으로 도사都司-치소治所 요양현遼陽縣-와의 거리는
240리 떨어져있다.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南有泛
河,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范河城在衛南,
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
尋廢。又有鹹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裡
★ 참조자료 : 고려高麗-명明 의 철령위 공방 상세일지
1. 철령위공방 - 요동정벌결정까지 고려조정의 대응
○1368년(공민왕 17년) 명明 홍무洪武 초初년 원元 심양로瀋陽路를 폐지廢함(후에 심양중위瀋陽中衛
설치)
○1371년(공민왕 20년) 명明 홍무洪武 4년 정료도호부定遼都護府 설치
○1375년(우왕 1년) 명明 홍무洪武 8년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로 고침.
주현州縣은 폐지되고 25개의 위衛를 설치함.
○1387년(우왕 13) 12월에 명조정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
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결정함.
○1388년(우왕 14) 홍무 21년
1) 1월 : 고려의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의 수장 강계만호(江界萬戶) 김완가(金完哥)의 명明 투항
<관련문헌 : 고려사>
- 1월 고려의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의 수장 강계만호(江界萬戶) 김완가(金完哥)가 고려조정을
배신하고 만호부萬戶府 치소 봉집현奉集縣을 들어 명明에 바치고 투항함.
- 강계만호(江界萬戶)의 투항으로 고무된 주원장이 당대의 요하인 현 난하로부터 고려 강계만호부
(江界萬戶府)치소인 봉집현奉集縣-현 철령시 동남일대-까지 현재의 난하鸞河 ~ 현재의 혼하渾河에
이르는 지역을 명明의 강역으로 빼앗고자 봉집현奉集縣일대에 철령위鐵嶺衛설치를 결정.
2) 2월 : 명의 철령위鐵嶺衛설치 통보
-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요동도사가 이사경(李思敬)을 보내 철령일대와 해당 군민(軍民)를
개원(開原)관할로 한다는 명 황제의 방을 붙임.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
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 고려조정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과 수문하시중 이성계와 판삼사사 이색(李穡)등 여러 재상등이
모여 철령위가 설치되는 강계일대를 내놓으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측의 일방적인 통보에
대해 명明 정료위(定遼衛)를 정벌할 것인지 명과 화친할 것인지를 의논함.
- 명明의 수도 남경에서 돌아온 고려사신 설장수(偰長壽)가 황제의 요구사항을 받아옴
그 요지는 고려가 보낸 종마(種馬)가 형편없다고 질책하고 무역하는 상인등을 이용해 대창(大倉)을
염탐하는 것을 경고하면서 철령(鐵嶺) 이북을 원나라때처럼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뜻이었다.
3) 3월 :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옛古 철령성鐵嶺城에 철령위鐵嶺衛설치
-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의 급보 : 강계내에 범월한 명군이 철령위 설치중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요동 도사(都司)가 파견한 지휘(指揮) 두명이 군사 1천을 대동하고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며 요동(遼東)에서 철령위(鐵嶺衛)까지 역참(驛站) 70개소를
설치하고 있다.
- 우왕은 명明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정벌을 결심하고 신하들이 요동을 치려는 그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리 되었음을 책망하고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은 동교(東郊)
에서 군사를 사열함.
- 명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가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어 철령위 설치를 최종 통보
하고 전쟁을 결심한 우왕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해 교외에서 맞이하도록 함.
-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사신 왕득명(王得明)을 맞이해 마지막으로 고려 조정의
입장을 말하고 황제를 설유하기를 사신 득명에게 요청하지만 사신 득명은 불가하다고 함.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 고려 북방의 양계(兩界)에 침범한 명군을 몰아내고 수장등 5인을 제외한 사로잡은 포로들을 척살하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이 사신의 말을 우왕에게 아뢰고, 명의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이른 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고 그 수장인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은 살려서 강계지방에
구류함. (죽은 명군이 모두 21명)
- 우왕이 사냥한다 일컫고 요동정벌을 수행하고자 서해도-현 요령성 혼하이남지역 -로 행차.
경자일에 우왕이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경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해주 백사정(百沙亭)에서 사냥한다고 일컬었는데, 실상은 요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4) 4월 : 사냥을 명분으로 국경인 봉주(鳳州)-고려의 강계만호부-를 살펴보고 문하시중 최영,
수문하시중 이성계에 요동정벌을 명함.
- 여름 4월 1일 을사일에 우왕이 봉주(鳳州)-현 요녕성 개원,철녕등 일대-에 머물면서 문하시중(門下
侍中) 최영과 수문하시중 이성계를 불러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 하며
요동정벌을 명함.
추가로 요령성 지도를 덧붙입니다.
고려의 강계만호부치소였던 현 철령시의 만주지역내에서의 위치를 보면 조선총독부와 해방후에도
조선사 36권만을 떡주무르는 식민사학자들이 얼마나 역사강역을 터무니없게 축소 왜곡하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이 지도상의 거의 대부분이 몽골제국의 침탈전 고려왕조의 강역이었습니다.
실제 분계선은 혼하남쪽으로 동북에서 남서쪽으로 기울어 비스듬하지만 단순히 넓이로만 본다면
지도상의 요령성의 서쪽절반은 충숙왕이 다이원울루스의 대칸의 신임을 받아 봉지로 돌려받았던
빼앗긴 고려땅의 일부입니다.
즉, 대략 혼하를 따라 지도상의 요령성의 서쪽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해산海山(武宗)을 대칸으로
등극시킨 공로로 1308년 심양왕(瀋陽王)으로 처음 봉해진 충숙왕의 통치강역이고 요령성의 동쪽
절반은 고려의 북계 입니다.
이로서, 충숙왕때는 잃어버린 고려땅을 상당부분 되찾았고 충숙왕은 심양왕(瀋陽王)과 고려대왕의
이중의 지위를 누리며 다이원울루스의 조정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지도출처 : 구리넷
고려의 유민들 산동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다
평안도 절도사(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이 치계(馳啓)한 비변 사의(備邊事宜)에, “신이 삼가 내리신
유서(諭書)를 보건대, ‘산동(山東)에 사단이 생겼으니 창졸의 변란을 미리 염려하라.’ 하셨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중국[中原]이 편안치 못하여 산동에 도적이 일어났으나,
산동은 우리 국경과 거리가 매우 가까우므로 창졸의 변을 조석에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듣건대 ‘산동의 온 지역이 도적이 되었으므로 대병(大兵)이 사방에서 친다.’고 하니, 이 말이 사실이
라면, 극도로 궁박(窮迫)해질수록 도적은 반드시 구름이 몰리고 물길이 터지듯이 우리의 지경으로
뛰어들기를 거란과 홍군의 난폭한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외로운 성(城)의 잔약한 군사로써 어찌 죽기로 날뛰는 도적의 돌격(突擊)하는 칼날을
당해내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중종 7년 임신(1512,정덕 7)
또다른 실록의 기록에는 산동의 달자(타타르인혹은 오랑캐 이런뜻)가 반란을 일으켰다라고도 한다.
명나라기록에도 동일하게 산둥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태조가 나라를 세울때 산둥의 고려인들이 어떻게 명나라통치에 들어갔는지는 아직 그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명나라기록에 최영과 태조이성계가 싸울때 고려장수가 투항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아마도 산둥지역의 고려귀족들이 명에 투항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유추해 본다.
조선의 평안도에서는 산동이 우리국경에 매우 가깝다고 했다.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조선의 평안도는 베이징근처였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산둥사람들은 청나라가 세력이 커지자 명을 버리고 제일먼저 투항해 버렷다.
그들이 한족의 통치를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이다.
조선이 고려처럼 고토수복을 기치로 내걸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출처:http://blog.daum.net/manjumongol/
패서도(浿西道)와 서해도(西海道)는 기성과 미성 위치에 있다.
기언(記言) 제35권 원집(原集) 외편 <미수기언=眉瘦記言><동사東事> 지승(地乘)
미수기언의 동사에 지승이란 제목에는 패서도(평안도)와 서해도(황해도)의 위치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고있는 통설대로라면 구태여 이렇게 어려운 설명이 필요가 없는것입니다.
평안도를 옛날 패서도라고 불렀고, 황해도를 옛날 서해도라고 불렀다고하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항상 찝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의구심이었습니다.
왜 패서라고 불렀을까? 패서라고 하면 패는 갯펄이 끼어있는 물가를 말함으로 갯펄의 서쪽이 됩니다.
즉바다의 서쪽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서해도 역시 황해도나 같은 한반도의 서쪽 바다를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것들을 설명하는 대목에 미수선생은 기성과 미성의 별자리를 불러들였으나 만족한 설명은 없었
습니다.
해서 한진서가 <해동역사>에서 해설한 성야(星野)라는 대목을 빌려왔습니다.
의외로 알아두어야 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기수(箕宿)의 기(箕) 4성은 맥이(貊夷)를 주관한다. 천한(天漢)은 동방(東方)에서 일어나 미수와 기수의
사이를 지나는데, 그것을 일러 한진(漢津)이라 한다. 《이상 모두 진서》
*한진(漢津)이란 은하수를 뜻하는 말입니다. 북두성과 견우성을 두우(斗牛)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북두
성과 견우성으로 부르는 섬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요동반도의 남쪽과 장산군도 해역도 한수지역으로 부르지요.
이에 대해서 <성호사설>의 <천지문>에서는 발해와 동해가 은하수가 되는 이치를 다음과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간미곤(首艮尾坤)
《천문략(天問略)》
에, “은하수라는 것은 작은 별들이 총총히 모여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빛을 발하여 흰 비단처럼 연속
되어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서양에는 망원경이 있기 때문에 관찰한 것인데 꼭 그런지 알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은하가 강물처럼 가로 뻗쳐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위치에서 본다면 그 머리는 동북이요 꼬리는 서남쪽이다. 지금 중국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황하로 들어가서 서북에서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우리나라는 큰 강이 셋이니 압록강ㆍ
대동강ㆍ한강이다.
압록강이 격(湨), 대동강이 산(滻), 한강이 대(帶)다.
이 세 강은 모두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서 하늘과 서로 들어맞는다.
《시경》에, “높은 저 은하수 하늘에 문채를 이루었다.” 했는데, 조그마한 우리나라가 하늘의 은하수와
문채가 일치하니 이상한 일이다.
[주C-001]수간미곤(首艮尾坤) : 《類選》 卷1上 天地篇上 天文門.
[주D-001]《천문략(天問略)》 : 명(明)대에 서양 선교사 양마락(陽瑪諾)이 지은 책.
천문학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서술한 계몽서.
[주D-002]격(湨) :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는 패(浿)로 썼음.
[주D-003]산(滻) :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당서(唐書)》에는 모두 살(薩)로 되었음.
*격(湨) :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는 패(浿)로 썼음.
이 강은 마자수= 압록수=고니하=패하=청하=포하=헌우락=개주하 등을 말하고
<증보청국여지전도=1874>요동반도의 남쪽으로 면한 수암(岫巖)과 봉황(鳳凰)은 현 황해도의 수안군과 봉산군의 본거지가 아닐까?
수암의 남쪽으로 퍼져있는 장산군도는 여기가 황해안에 있기 때문에 본 황해도의 위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그러기에 도의 이름을 서해도라고 하지 않았는지.
조선 구역(九域)의 땅은 연(燕)ㆍ제(齊) 밖에 있는데 동ㆍ남ㆍ서는 대해(大海)에 접하였고
북은 말갈(靺鞨)에 연하였다.
고구려 말기에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의 땅 7백 리를 잃어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으니,
남북으로 3천 리이며 동서로 1천 리이다.
풍기(風氣)가 다르고 성음(聲音)ㆍ복식(服食)ㆍ기욕(嗜欲)이 중국의 풍속과 같지 않으니 대개 방외(方外)
에 있는 별개의 나라이다.
상고 시대 단군(檀君)으로부터 기자(箕子)와 삼한(三韓)ㆍ사군(四郡)ㆍ이부(二府)를 거치면서, 삼국
시대에 이르러 변한(弁韓)ㆍ마한(馬韓)은 백제에 병합되었고, 진번(眞番)에서는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 임둔(臨屯)과 이맥(夷貊)의 땅을 모두 신라에 병합하였으며, 낙랑(樂浪)은 고구려에, 현도는
요동에 각각 병합되었다.
고려가 삼한의 땅을 전부 차지하여 관내(關內)ㆍ중원(中原)ㆍ하남(河南)ㆍ강남(江南)ㆍ영남(嶺南)ㆍ
영동(嶺東)ㆍ산남(山南)ㆍ해양(海陽)ㆍ삭방(朔方)ㆍ패서(浿西)의 10도(道)로 나누었다.
뒤에 이를 고쳐 양광(楊廣)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교주(交州)ㆍ서해(西海)ㆍ동계(東界)ㆍ북계
(北界)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패수(浿水)는 개주하(蓋州河) 즉 고니하(故泥河=대통강=청하=마자수=포하=헌우락
=압록수=신개하)로 봅니다. (필자 주)
우리 태종(太宗) 13년(1413)에 경기(京畿)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충청(忠淸)ㆍ강원(江原)ㆍ함길
(咸吉)ㆍ평안(平安)ㆍ황해(黃海)의 8도로 정하니, 주(州)ㆍ군(郡)ㆍ현(縣)도 이에 의하여 달리 바뀌었
으며, 산천의 경계를 달리하고 읍(邑)ㆍ리(里)를 구분하여 백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천리에 가요가
다르게 되었다.
남방에는 조류(鳥類)가 많고 북방에는 짐승이 많은데 이는 풍기 때문이며, 산협(山峽)은 습속이 순박
하고, 이득을 노리는 백성들이 약삭빠른 것은 습성이 그러하여서인 것이다.
동방은 기(氣)가 편박(偏薄)하여 조급하고 경솔하니 변치 않는 마음이 없음도 대체가 모두 그러한
풍기 때문이다.
왕성(王城)은 기내(畿內) 땅으로 본래 마한의 지역이다. 동북은 옛 맥(貊) 땅이며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에 닿아 있다. 남양(南陽 지금의 화성(華城) 수원(水原) 지방)에서는 경석(磬石)이 나왔고 해변으로는
염분이 많은 땅이며, 토질(土質)은 벼를 심기에 적당하다.
맥서(貊西 강원도 서북 지방)에서는 콩과 조가 3할이나 산출된다. 왕성이 임금의 손으로 세워졌는데
실제 백제 때에는 남평양(南平壤)이었고, 고려 때에는 남경(南京)이었으며, 왕이 번갈아 살기를 다섯 번
하면서 백성들이 모여든 곳이다.
백성들의 습속은 꼼꼼하고 인색하며 여자들의 길쌈 솜씨가 훌륭하여 옷ㆍ신발ㆍ관디를 잘 만들었다.
사방에서 몰려와 만융(蠻戎)들이 복종하였다.
나라의 제도로 유술(儒術)과 시서(詩書)를 존중하여 선비를 가르치니, 예악(禮樂)의 풍이 있었다.
개경(開京)은 선비와 여자들이 흰옷을 입었으며 성률(聲律)을 숭상하니, 이는 고국(古國)의 풍이었다.
태조가 도읍을 한양(漢陽)에 정하고 호걸(豪傑)과 대족(大族)들을 이사시켰다.
따르지 않아 금고된 자들이 상공업에 종사하여 세공(世工)과 세상(世商)이 있어, 중개인이 교역을
하였다.
예부터 풍속이 부처를 섬겨 성품이 인유(仁柔)하고 살생을 싫어하였다.
오강(烏江) 서쪽 앙암(仰碞 장단(長湍) 부근에 있음)에 고려 왕의 사당이 있다.
덕진(德津)은 신라의 북독(北瀆)이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삼각산(三角山)은 화산(華山)이라 하고 중악(中嶽)의 제사를 지냈다.
인조(仁祖) 14년(1636) 남한산(南漢山)에 온조(溫祚)의 사당을 세웠다.
패서(浿西 평안도의 옛 이름)는 조선의 고지(古地)로 그 별[星]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분야(分野)
이며 그 자리[次]는 석목(析木)이다.
예맥(獩貊)과 고구려와 현도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북쪽의 여연(閭延 평북 구성(龜城))과 우예(虞芮 평북 강계(江界))는 말갈에
연하였다.
산출되는 곡물(穀物)로는 굵은 기장과 잔 기장이 있으며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삼(蔘)ㆍ
칠(潻)ㆍ동(銅)ㆍ철(鐵)ㆍ피혁(皮革) 등이 있다. 바닷가에서는 벼를 식량으로 하였고 생선과 소금을
팔았다. 용만(龍灣 평북 의주(義州))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며 물화(物貨)가 많이 유통되는 곳이다.
평양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주(周) 나라 때에 기자를 봉한 곳이다.
기자의 가르침이 예속(禮俗)을 중히 여겨 귀신을 공경하고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
부인들은 정신(貞信)하고 음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모두 자기가 종사하는 업에 안락하였다.
고구려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여 풍속이 굳세고 날래게 되니, 힘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궁시(弓矢)
와 도모(刀矛)를 익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평양에는 단군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이 있고 기자의
사당이 있는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토산(兔山)에는 기자총이 있으며 강동(江東)에는 단군총이 있다.
패강(浿江 대동강)은 나라의 서독(西瀆)이어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영변(寧邊)은 우발수(優渤水) 가의 가섭원(迦葉原)에 있으니, 북부여(北扶餘) 해부루(解夫婁)의 땅이
었다. 성천(成川)은 옛 비류(沸流)의 나라로 동부여라고도 하였다. 단군세가에 보인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지역은 어디를 지칭하는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해동역사>의 성야론(星野論)을 빌려왔습니다.
학자들이 구체적인 지명을 거론하기를 회피하고 애매한 별자리등을 인용하는 이유는 검열과 후환을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패서도(浿西道) 즉 평안도의 위치는 요동.요서.낙랑.현도지역에 해당함으로 요동에 있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서해도 즉 황해도의 위치 또한 석목(析木)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동방구이(東方九夷)의
나라가 해당된다고 하니 요동의 서남쪽을 지칭하는 서한만과 발해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특히나 평양은 기자의 가르침을 받아 예속을 중히 여겨 귀신을 공경한다고 하였습니다.
< 규원사화>에는 동해안에 귀주(鬼洲)가 있었는데 이를 평정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곳이 곧 사문도(샤먼도) 지요.
이곳은 삼신산이 있고, 하늘에 제사하는 천후궁 즉 소도(蘇塗)와 탱글렁도등이 있습니다.
<해동역사>성야(星野)에서 말하는 미수(尾宿)와 기수(箕宿)
창룡(蒼龍) 7수(宿)에는 미수(尾宿)ㆍ기수(箕宿)가 있으며, 저수(底宿)가 가슴이고 방수(房宿)가 배인데,
이는 기수(箕宿)가 똥을 눈 것이다. 기수 4성은 현도(玄菟)가 그에 응한다. 《성경(星經)》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지분(地分)에 있어서 연지(燕地)는 미수와 기수의 분야이다.
미수 4도(度)에서부터 두수(斗宿) 6도까지를 석목(析木)의 성차(星次)라고 하며, 연(燕)의 분야이다.
어양(漁陽)ㆍ우북평(右北平)ㆍ요동(遼東)ㆍ요서(遼西) 등의 지역이 여기에 해당되며,
낙랑(樂浪)ㆍ현도(玄菟)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한서》
위(魏)나라 태사 영(太史令) 진탁(陳卓)이 말하기를,“미수(尾宿) 10도에서부터 남두(南斗) 11도에 이르
기까지는 석목(析木)의 성차가 되는데, 간지(干支)에 있어서는 인(寅)에 해당되며, 연(燕)의 분야이다.
살펴보건대, 비직(費直)은 석목의 성차가 미수(尾宿) 9도에서 시작된다고 하였고, 채옹(蔡邕)은 미수
4도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요동ㆍ요서는 미수 10도에 들어가고, 발해는 기수 1도에 들어가고, 낙랑은 기수 3도에 들어가고,
현도는 기수 6도에 들어간다.”하였다.
《신당서》에는, “석목(析木)은 운한(雲漢)의 말파(末派)로, 산하(山河)가 다한 곳이다.
그러므로 그 분야가 북하(北河)의 말파(末派)에서부터 북기(北紀)의 구석이 다한 곳으로 동북(東北)
으로 바다를 등지고 있는 곳이 석목(析木)이 된다.
바다를 등지고 있다는 것은 운한(雲漢)의 남쪽이기 때문이다.
기수(箕宿)는 남두(南斗)와 서로 가까워서 요수(遼水)의 북쪽에 해당되며, 조선(朝鮮)ㆍ삼한(三韓)의
지역을 다 포함한다.” 하였다.
서해(西海 황해도의 옛 이름)는 고조선의 남쪽 경계였다.
지금은 왕기(王畿) 밖의 무(武)를 숭상하는 땅으로, 동쪽은 맥 땅에 연하였고 서쪽은 대해에 접하였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염(鹽)ㆍ철(鐵)과 해산물이 있고 곡물로는 벼 2종과 숙속(菽粟)
5종이 난다.
우리 세종(世宗) 때 해주(海州)에서 기장[秬黍]이 나왔는데, 한 알의 크기가 1푼(分)이었다. 9촌(寸)이
황종(黃鍾)의 길이여서 3푼씩을 덜고 더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
고려 때에는 태사(太師) 최충(崔冲)이 구재(九齋)를 두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었는데 그 구재는,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
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이다.
염주(鹽州)ㆍ남지(南池)ㆍ장연(長淵)ㆍ사정(沙汀)ㆍ장산(長山) 등의 고을이 있는데 장산은 나라에
소용되는 목재가 산출되는 곳이다. 도서(島嶼)로는 백령(白翎)ㆍ대청(大靑)ㆍ소청(小靑)이 있다.
유주(儒州)와 아사달(阿斯達 구월산 부근)에서는 환인씨(桓因氏)와 신시(神市)와 단군에 제사를 지냈다.
당장경(唐藏京)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사》에 단군씨의 국도라 하였다.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평양이었던 귀주(鬼洲)에 무슨 신들이 있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귀주란 신들을 섬기는 섬을 말합니다.
高麗.仁宗九年, 因妖僧妙淸之說, 置八聖堂于西京.林原宮中. 淸平爲之說曰:
[第一曰護國白頭嶽太白仙人, 有大(彗)[慧]大德, 助主神, 造大界, 卽桓雄天王之謂也.
第二曰龍圍嶽六通尊者, 有 化萬理之能, 掌人間禍福.
第三曰月城嶽天仙, 掌風雨之神.
第四曰駒麗平壤仙人, 掌光明之神.
第五曰句麗木覓仙人, 掌人間壽命之神.
第六曰松嶽震主, 有大勇大力, 掌神兵, 恒鎭守國都, 以驅外敵, 卽古蚩尤氏之神.
第七曰甑城嶽神人, 掌四時穀蔬草木之事, 卽古高矢氏之神.
第八曰頭嶽天女, 掌地上善惡, 卽神市氏之后 桓儉神人之母. 皆在主神調度之下, 掌治天下諸事之神……]
云云. 盖仁宗之於妙淸, 信惑太甚, 卒致西京之變, 使金富軾討平.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寵傾宗
戚,權壓內外, 漸致驕傲, 敢謀不軌, 其罪固不可誅. 然而, 當時猶有, 恨國力之不振, 憤外侮之 至, 採古來
之神明於殘散傳說之中, 欲以激當時之人心, 其行雖乖, 其志則猶有可采者矣. 古之說史者, 只以妖僧荒誕
之說, 唾棄而不采, 則猶有一分迂 之責[八聖矣](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僧侶之筆, 安不得如
斯耶? 此不可深怪也.
고려 인종(仁宗) 9년에 요승 묘청(妙淸)의 말로 말미암아 서경의 임원궁에 팔성당(八聖堂)이 설치되
었다.
청평이 그 예기를 보충하여 이르기를 [그 첫번째를 호국백두악(護國白頭嶽)의 태백선인(太白仙人)
이라 하는데, 큰 지혜와 큰 덕을 지니고 주신을 도와 큰 세상을 만드니 곧 환웅천왕을 일컫는 것이다.
그 두번째를 용위악(龍圍嶽)의 육통존자(六通尊者)라 하는데, 1만 가지의 이치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길융화복을 관장하고 있다.
그 세번째를 월성악(月城嶽)의 천선(天仙)이라 하는데, 바람과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그 네번째를 구려(駒麗)의 평양선인(平壤仙人)이라 하는데, 광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다섯번째를 구려(句麗)의 목멱선인(木覓仙人)이라 하는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여섯번째를 송악(松嶽)의 진주(震主)라 하는데, 큰 용기와 큰 힘을 지니고서 신의 군사를 관장하고
항시 나라의 도읍을 지키며 외적을 몰아내니 곧 예전의 치우씨 신이다.
그 일곱번째를 증성악(甑城嶽)의 선인(神人)이라 하는데, 사시(四時)와 곡식 채소 및 초목의 일을 관장
하니 곧 예전의 고시씨 신이다.
그 여덟번째를 두악(頭嶽)의 천녀(天女)라 하는데, 땅위의 선악을 관장하니 곧 예전 신시씨의 황후이며
환검신인의 어머니이다.
이들 모두가 주신의 영도 아래 있으면서 천하의 모든 일을 관장하여 다스리는 신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인종이 묘청에 대하여 믿고서 현혹됨이 너무 심하여 결국에는 서경의 변란이 일어나기에 이르자
김부식으로 하여금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은 불문(佛門)에서 몸을 일으켜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종친과 외척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권력으로 안팎을 누르고는 점차로 교만해져 감히 모반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진실로 주살
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도 여전히 국력이 위세를 일으키지 못함을 한탄하고 외적들의 업신여김이 거듭됨을
분개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에 헤지고 흩어져 전해 내려온 얘기 가운데에서나마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명(神明)을 골라내어 이로서 당시의 인심을 격앙시키고자 하였으니, 그 행위는 비록 어그러졌다
하지만 그 뜻은 오히려 가려서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적에 역사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단지 요승의 황당무계한 말만을 들어 침을 내뱉듯이 버리고는
가려서 취하지 않았으니,
이는 오히려 조금은 그 일에 어둡고 소흘한 책임이 있다 하겠다.
여덟 성인의 이름을 반드시 불가(沙門)의 이름으로 나타낸 것은 승려의 글이기에 어찌 그와 같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음글은 <규원사화>의 저자가 삼신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소개하면서도 기술하는 방법을 묘하게
혼돈시킴으로서 검열과 후환을 피하고자 했던것으로 보입니다.
소개하는 내용들이 진실이 아니라면 애시당초 거론하지 말면 되는것을 일일이 거론해놓고 끝에는
부정하는듯한 수법을 쓰고있습니다.
대저 신시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 세월에 따라 더욱더 깊어 감에,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성한 풍속이
멀리 한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한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로지 삼신을 추앙하여 동북 지방에는 '신명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단의 폐해에 이르러 곧 점차 허무맹랑함에 빠지고 더욱 기괴해지더니 괴이하고 허망한
말들이 꼬리를 물고 갈마들어 나왔는데, 심지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바다 위에 신선의 술법을 닦는
괴이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지기까지 하였다.
무릇 그 땅은 우리의 진방(震邦)과 더불어 서로 접해 있어 백성과 사물의 교류가 특히 왕성한데,
직접 그 풍문을 듣고는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또한 생각을 미루어 넓히고 억지로 이치에 맞춰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 증거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결국에는 능히 다다르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주목을 미혹케 하였다.
《신선전(神仙傳)》에서는 또 '海中'이라는 글자만으로 추측하고 단정지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삼신
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산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삼도(三島)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상(海上)'이나 '육오(六鰲)' 등의 황당무계한 말들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붓 끝에서 연이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다시 그것을 억지로 흉내만 내어 [금강산이 봉래산이며, 지리산이
방장산이고,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선비가 뱉은 침을 도리어 받아
곱씹는 격이다.《사기》의 <봉선서>에 말하기를 [삼신산이란 발해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두 있으며, 그 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으며……] 하였고, 또한 선가(仙家)의 서책에서 혹은 말하기를
[삼신산에는 넋을 부를 수 있거나 먹으면 늙지 않는 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震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다음은 두밀임금 원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상을 치고 숙신후인 다홀을 시켜 동해에 있는 귀주(鬼洲)를
쳐서 평정시켰다고 한 기록입니다. 귀주는 이미 낙랑골로서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정변이 있었던것
으로 추정됩니다.
丁卯歲, (王)[壬]儉豆密元年. 使人記桓儉以來列聖之詞, 掛於宮門內側, 使出入朝覲者閱之. 遣兵伐商.
숙신侯.多忽遣兵入東海伐鬼洲, 平其地. 在位四十五歲, 崩. 子, 奚牟立.
정묘년은 두밀 임금의 원년이다. 사람을 시켜 단검이래 열성조(列聖祖)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궁문의
안쪽에 걸어 두고는 출입하는 신하들에게 이를 읽도록 하였다.
병사를 보내 상나라를 정벌하였다. 숙신후 다홀(多忽)이 병사를 보내 동해(東海)로 들어가 귀주(鬼洲)
를 쳐서 그 땅을 평정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4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해모(奚牟)가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 <규원사화>가 조선왕조를 대륙으로 옮기는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이 만주벌판이 조선땅
이었노라고 왜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扶桑】 フサウ
○東海の中にありといふ大いなる神木。山海經「湯谷之上、有──、十日所浴」=扶木。
○轉じて、其の神木の在る國。十洲三島記「──在碧海之中、地多林木、葉皆如桑、又有椹樹、
長者數千丈、大二千餘圍、樹兩兩同根、偶生更相依倚、是以名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