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놀란 감독의 작품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쟁영화에서 흔히 기대되는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갖고 있지 않고, 스토리는 단순하며, 그리고 대사가 많지 않아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디지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작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 줄 수 있는 영화다. 오직 영상을 통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적으로 볼 때는 연출이 매우 독창적이며, 특히 아이맥스 필름으로 제작하여 하늘과 바다와 해안가의 광활한 공간에 위치한 인간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볼 수 있게 했는데, 비록 인간이 무엇이고 또 전쟁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생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은 하지 않아도 영상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듯이, <덩케르크>는 생존에 관한 영화다. 단순히 살아 있음을 가리켜 말한다면 생존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생존은 죽음의 위기를 전제한다. 곧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살아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때에 산 자로 발견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자연재해와 같이 살고 죽는 것이 그야말로 운에 달린 경우가 있지만, 보통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생존경쟁이라고 한다. 종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다윈이 발견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적자생존이다. 곧 생존자만이 진화의 가능성을 갖는다는 말인데, 변화하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들만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덩케르크>는 생존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망망대해에서 맹수인 호랑이와 공존하면서 생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또한 생존의 문제에서 왜 언제나 상극적인 것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와 맥을 같이한다. 또한 타자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이기적인 생존 방식을 주장하는 무리들 틈에서 공존을 지향하는 생존의 의미를 탐색한 <레버넌트>를 연상케 한다. 다시 말해서 <덩케르크>는 위기의 상황에서 생존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할 뿐 아니라, 또한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타자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 곧 남을 살리기 위해 생존하는 것의 의미를 탐색한다.
인간사회에서 생존의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는 경우는 자연재해와 치명적인 각종 전염병 그리고 전쟁 상황이다. 특히 적이 없는 자연재해가 발생한 경우와 전염병이 창궐한 시기에는 생존 자체가 의미가 있지만, 전쟁의 경우엔 생존의 의미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승자라고 해서 반드시 생존하는 것이 아니며 패자라고 해서 반드시 죽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패자로서 생존자는 부끄러운 일이며, 승자인 경우는 비록 죽었다 해도 영광스런 일이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에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패자로서 생존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오직 가족에게서 뿐이다. 이에 비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은 소모전에 불과하며 무의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승자든 패자든 결정이 나는 전쟁이어야 의미가 있는 전쟁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전쟁에서는 살아남는 것보다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 작전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표현을 통해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영화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덩케르크>는 비록 패자라 할지라도 생존 자체가 큰 의미와 가치가 있고, 심지어 전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도 단지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해 사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을 전제하고 있고, 실제로 교전이 벌어지긴 하나, 프랑스 해안 지역 덩케르크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은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선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타자의 생존을 위한 것임을 감독은 영화적으로 재현하였다.
놀란 감독이 이런 영화연출을 기획한 이유는 실제 상황이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영국 처칠 수상의 연설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은 아닐지 싶다. 왜냐하면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어 프랑스 해안가에서 고립되어 있던 수많은 영국군을 구축함이 아닌 민간인 배들을 통해 구출해낸 후 처칠 수상은 패전하여 고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그들의 생존은 후일의 승리를 위해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놀란 감독은 처칠 수상이 강조한 전쟁에서 생존의 의미와 가치를 영화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을 보여주기보다 자연재해 상황에서처럼 특별하게 주목하는 인물이 없이 무작위적으로 누구는 살고 또 누구는 죽는 방식을 마치 스케치 하듯이 연출하였다. 무명의 병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영화 이해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어 진퇴양난에 빠진 영국군이 숙명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 반응하는 모습을 매우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책임질 수 없는 고립된 상황에서 생존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뿐 아니라 놀란 감독은 생존과정에서 겪는 시간경험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연출하였다. 그는 과거 <인셉션>에서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현상을 영화적으로 표현해 관객들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덩케르크>에서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을 관객들이 동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해안지역인 덩케르크에 고립되어 있는 군인들이 겪는 1주일 시간경험과 민간인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자신의 배를 이끌고 고립된 군인들을 구출하러 덩케르트로 가는 사람들의 선상에서 하루라는 시간경험 그리고 독일군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해 공중전을 벌이는 파일럿트들의 한 시간 동안의 시간경험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육상에서 1주일과 바다에서 하루 그리고 하늘에서 한 시간이라는 것이 결국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을 구출하기 위해 소요된 시간이지만 육지와 바다 그리고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동시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한 것이다.
놀란 감독이 덩케르크 작전에서 특별히 주목한 건 지옥 같은 전장을 향해 주저 없이 배를 끌고 나아간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 생존을 말한다면, 무엇보다 자신들의 생존을 염려해야 당연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타인의 생존과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으로 가득한 전장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의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 따르면, 사피엔스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이 문제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인류는 생존을 평생의 문제로 삼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생존시대에는, 만일 윤리적으로 특별한 통제가 없다면,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창궐할 수밖에 없다. 생존본능 자체는 극도로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DNA는 자신의 유전정보를 남겨 놓기 위해 생명체를 택한다는 것인데, DNA의 이기성은 일종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러므로 생존을 하나의 문화코드로 삼는 사회는 지극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 역시 생존 전략일 수 있지만, 적어도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선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에 천착하여 살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또 그 대답을 찾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놀란 감독은 타인의 생존을 위한 노력이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영화적으로 잘 표현해 내었다고 생각한다.
생존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그래서 이기적인 삶의 형태가 당연시 되는 시대에 교회는 이타적인 생존과 공존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와 공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갈등하는 생존의 노력들을 조정하고 화해하여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마저 이기적인 생존방식을 추구한다면, 도대체 누가 교회에게 소망의 이유를 물어오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