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제청은 특별전 '새 보물 납시었네' 정시를 기획하였다. 전시는 1부는 우리 오랜 역사의 오래된 기억을 품은 기록 유산인, 역사를 지키다 . 2부는 옛사람들이 몰아일체의 경지로 빚어낸 예술품, 예술을 펼치다. 3부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염원을 담다. 라는 주제로 다채로운 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1부 역사를 지키다.
역사는 지나온 시간의 기록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다양한 기록물을 남겼다.
기사계첩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행사를 그림으로 엮은 책으로 기로소는 2품 이상 현직 문관 가운데 70세가 넘은 원로를 예우하는 기관이다. 숙종은 60세를 일년 앞 둔 1719년 당시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엮은 것이다.
이 작품은 18세기 궁중회화의 새로운 볌모를 잘 보여준다. 연회 장면은 섬세한 필치와 선명한 채색이 돋보이며, 초상화에는 서양화의 음영법도 적용되었다. 이 화첩은 기로소 보관 원본으로 추정되며 보존상태가 가장 뛰어나다.
기사계첩
기사계첩은 숙종은 왕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의식을 국가적인 행사로 처음 시행하였고, 기로소에 들어간 대신들이 이러한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초상화뿐만 아니라 여러 기록화도 제작하였다고 하여 큰 의의가있다. 2018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실록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제작한 궤다. 재질은 주로 오동나무나 소나무였으며, 한 궤마다 적게는 7권, 많게는 20권의 실록을 보관하였다.
실록을 보관한 궤는 자물쇠로 잠그고 두꺼운 종이로 봉인하여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하였다.
박동형 초상화
얼굴의 입체감, 관복의 운문단 무늬와 표범 가죽의 털 표현에 18세기 초상화가 점차 사실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잘 나타난다.
최석정 초상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전형적인 신라의 굵은 고리 귀걸이로 뛰어난 금세공 기술과 조형미를 보여준다. 펜촉모양 장식물의 창의적인 형태와 볼륨감이 돋보여서 신라 고분 출토 금속 공예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인의 미소를 담은 수막새는 일제강점기 경주 사정리(現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마와 두 눈, 오똑한 코, 잔잔한 미소, 두 빰과 턱선이 조화로우며 신라인의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냈다.
도기 연유 인화문 항아리 일괄
통일신라시대 연유 도기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형태와 기술면에서도 단연 뛰어난 작품이다. 뼈를 담앗던 항아리로 여겨지며, 당시 최고위층을 위해 만든 최고급 공예품이다.
청자 '순화 4년'명 항아리
명문이 있는 가장 오래된 청자로, 청자 발생기의 제작 양상을 살펴볼 수 잇는 중요한 편년 자료로, 항아리의 용도와 사용처, 제작자, 순화 4년(993년)이라는 제작 연도를 확인 할 수 있다. 또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 발굴로 제작 가마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져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청자 음각 환문병
양옆에 고리무늬가 자익된 청자 병으로 단아한 형태와 은은한 비색이 시선을 사로잡는 정자병으로 의례기로 추정되지만, 꽃병이나 감상을 위한 장식용 병으로 사용되엇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시대 공예문화 중 옛것을 모방하여 만드는 '방고(倣古)'의 대표적인 예로 금속기 조형을 청자로 바꾼 고려전기 청자로, 뛰어난 조형성과 희소성의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자 양각 도철문 정형 향로
중국 고대 청동기를 본떠 만든 고려청자로, 몸체는 틀로 찍어냈고 표면에 뇌문(雷文)과 도철문(饕餮文)을 튀어나오게 장식했다. 도철은 고대 신화에 나오는 동물로 의례와 관련된 각종 공예품의 무늬로 등장한다.
국가지정문화재 중 청자 향로 사례는 있지만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세 발 달린 '정형향로'를 대표할 만큼 형태가 완벽하며, 유약 색과 장식기법 등이 매우 뛰어나다.
청자 투각 연당초문 붓꽂이
붓을 꽂는 데 시용한 청자 붓꽂이로 영머리 장식과 화려한 연꽃 넝쿨무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상형(象形)과 투각(透刻) 기법이 어우러져 밀도 있게 표현되었으며, 특히 푸른 빛 유색이 아름다워 마치 옥을 깎아 만든 듯 하다.
청자 죽순모양 주전자
대나무 새싹인 죽순모양으로 만든 상형청자(象形靑磁)로 다양한 식물모양 청자 중 조형과 장식, 유색(釉色)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죽순이라는 소재를 형상화하면서도 우아한 조형미를 갖추었고, 은은한 비취빛 유색 등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 준다. 고려시대에 활짝 꽃 피었던 화려한 청자 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청자 퇴화 초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및 승반
주전자의 몸체는 공처럼 둥근 모양이며, 승반은 바닥 안쪽을 넓고 편평하게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이 주전자에서 가장 빼어난 부분은 풀꽃을 표현한 퇴화 무늬이다. 백토(白土)와 자토(瓷土)로 대담하게 장식하여 흑백대비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정선 필 경교명승첩
1747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제작한 서화집
정선은 금강산을 몇 차례 방문하고 금강산과 주변 명승을 그렸고, 같은 주제를 여러 번 그리며 자신만의 구성과 화풍을 이루었다. 정선이 72세 때 그린 이 작품들은 35년 전에 제작한 <해악전신첩>을 바탕으로 한다. 1747년에 제작한 화첩에는 금강산과 인근의 명승명소를 그린 총 21점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당시 강원도 관찰사였던 홍봉조가 쓴 김창흡의 시가 실려 있다.
정선 필 풍악내산총람도
화면 오른쪽에 '풍악내산총람(楓嶽內山總覽)'이라는 작품 제목이 친절하게 적혀 있다. 절대 한눈에 다 볼 수 없는 내금강 가을 풍경을 한 폭에 담은 대작이다. 화면 왼쪽에 내금강 최고의 전망대 정양사를, 오른쪽에 일만이천봉을 배치하고 그 위로 가장 높은 비로봉을 두어 금강산 전체를 한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이 작품은 금강산 그림으로 명성을 얻은 정선의 기량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다.
무동
활달한 필선으로 인물들의 움직임과 흥겨운 펴정을 묘사하고 무동의 옷과 신발을 녹생과 붉은 색으로 각각 칠하여 역동적인 몸짓을 강조하였다.
이광사 필 서결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
이광사가 쓴 『서결ㆍ전편』의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한 글
김정희 필 대팽고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해에 쓴 대련(한쌍으로 이루어진 족자)이다.
평범한 일상이 가장 높은 경지라는 노년의 깨달음이 소박하면서도 노련한 필법과 혼연일체를 이룹니다. 진아라 전서와 한나라 예서를 탐구하되 독창적으로 재구성한 글씨는 추사체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
김정희의 개성적인 서체, 추사체
김정희는 글자를 쓰는 데 점과 획을 굵기를 달리하는 등 변화와 조화를 중시 했다. 나이에 따라 무르익은 추사체!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
김정희가 이광사의 서결 서문을 비판하며 자신의 서예관을 밝힌 글이다. 김정희는 법첩 중에 진위가 의심스럽거나 여러 차례 옮겨 새긴 원본과 멀어진 것이 많음을 지적했다. 글씨는 날카로운 느낌의 해서체로 썼다.
김정희 필 난맹첩
상,하 두 첩에 묵란화와 글을 실은 김정희의 서화첩이다. 난초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라 하여 서예적 법식을 따른 김정희의 신념이 담겨 있다. 붓을 누르고 떼기를 서너번 반복하면서 난초 옆의 굵기를 조절한 삼전법, 그림과 글씨에 인장이 어우러진 조화로운 배치에서 세련된 조형 감각이 느껴진다.
고사소요 - 전형필
3부 염원을 담다
불교는 오랜 세월 한국인과 함께 하면서 어려운 현실을 이겨내도록 도와준 정신적 토대이자 풍요로운 문화의 산실이었다.
나전 경함
불교경전을 보관하던 함으로, 나전으로 무늬를 장식했다. 고려 나전칠기는 고려를 대표하는 공예품으로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경전 함에는 작은 모란 무늬가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모란무늬에는 끝이 바깥으로 갈라진 8개의 꽃잎과 그 가운데 끝부분이 세 갈래로 갈라진 보주 모양을 배치하였는데 마치 꽃술처럼 보인다.
묘법연화경 목판
법화연화경은 법화사상을 담은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었던 대승불교 경전이다. 이번에 지정된 목판은 1450년(문종1년)에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이 발원하여 금속활자 초주갑인자로 찍어 낸 것을 1561년 장흥 천관사에서 목판으로 다시 새긴 것이다.
끊임없이 환생하는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주문, 몸마니반메훔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무염 스님이 조각한 관음보살좌상으로 원만한 얼굴 표정과 힘 있게 흐르는 옷주름, 아담하면서도 내면에 힘이 충만한 보살상의 조형미에서 종교미뿐 아니라 예술 면에서의 성취가 두루 느껴진다. 원래 대둔산 묘련암에 봉안되었다가 1900년 남양주 불암사가 만일회를 열면서 옮겨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문화재 수집에 기여하신 분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