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
세계 여러 나라에는 고유의 음식 문화가 있습니다. 요리의 재료와 조리 방법, 그리고 먹는 방법까지 민족 정서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음식만으로도 민족을 이해하는 의미있는 수단이 됩니다. 한국의 음식에는 기본적으로 마늘 특유의 냄새를 담고 있는 것처럼 동남아 역시 그들만의 냄새를 담고 있습니다. 민족마다 사용하는 기본적 향신료의 차이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규모만큼 다양한 문제를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위하여 몸부림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14절)했습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교회의 사명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낯설고 생소한 이들에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도록 거룩(구별)함이 필요했습니다.
방송 프로그램 ‘흑백 요리사’에서 심사 위원의 특별한 재능이 부각되었습니다. 요리에 숨겨진 식재료의 특성뿐만 아니라 식재료의 맛을 향상시키는 조미료를 분별하며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처럼 특유의 냄새를 분별하는 능력은 아니어도 우리도 요리의 냄새를 통해서 단순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냄새의 특성은 감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리 안에 담겨진 향신료처럼 어쩔 수 없이 향기를 발하는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15절)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냄새(향기)가 나고 있습니까? 사망으로부터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나고, 생명으로부터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납니다(16절). 사망에 이르는 냄새는 거짓과 죄악과 불순종의 삶입니다.
직장(학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악을 지르고 화를 내는 이에게 힘의 추가 기울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접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처세술에서도 화를 내는 것이 성공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라고 안내하는 불편함에 부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힘의 논리에 노출되어 있는 불편한 진실을 이용하는 교회의 현실이 세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좌절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순종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종교 지도자들의 오만과 불손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진 고문과 죽음의 고통 앞에서 무릎 꿇는 패자처럼 비추어지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쉽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죽은 시체에서 나는 썩은 죽음의 냄새가 세상과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는 희생과 헌신, 용서와 긍휼의 삶입니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듯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이윽고 자신의 당당한 힘을 자랑하던 종교 지도자들, 로마 황실의 더럽고 추한 민낯을 드러내었습니다. 희생과 헌신, 용서와 긍휼하시며 잠잠히 인내하시는 예수님이 패자처럼 보였지만 마침내 부정과 죄악을 이기시고 생명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일천 년 넘게 이어온 교회의 역사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공존했습니다. 그럼에도 힘의 논리를 끌어와 권력을 집중하던 로마 교회에는 사망에 이르는 죽음의 냄새가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힘의 논리를 따르는 권력은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교란하고 탄압하고 착취하고 죽이는 필연적인 사망의 냄새를 발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교회가 힘의 논리로 빌어오는 사망의 냄새를 스멀스멀 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거나 묻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종교 개혁은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죽음의 냄새를 참지 못하고 터져버린 생명을 갈망하는 이들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서 구교와 구별된 신교(프로테스탄트)는 하나님 말씀과 믿음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죽음의 냄새를 내는 죄악으로부터 떠나 희생과 헌신, 사랑과 화평의 삶으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삶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어져야 합니다(빌 2:15). 썩어가는 교회의 죽음의 냄새로부터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참믿음으로 빛과 소금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