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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포)진성은 한국사 맥락에서 보면 별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순신의 3도수군통제사 취임식과 배12척 의미에서 살펴보면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은 것 이라고 생각되어 「회령포진성과 정유재란(이해준, 1986년)」의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 머리 말
회령(포)진성은 장흥지방으로서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사에서
그 의미가 전혀 인식되지 않은 채2017년에 회령포 축제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회령(포)진성 의미를 홍보하고 알려서 회령(포)진성의 참다운
가치를 인식하려고 한다.
■ 회령(포)진성 연혁
회진면 회진리에 있는 회령(포)진성은 조선시대의 수군 만호진으로서 당시의 명칭은「회령(포)진성」이었다.
회령(포)진은 남해연안 주요
수군기지 하나로서, 동쪽으로 사도진-발포진-녹도진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마량진-이진진- 어란진으로 이어졌으며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고금도진-
가리포진과 연결된 진성이었다.
한편 조선시대 수군편제는 맨 밑에 회령(포)진과 같은 만호진이 있고, 이들 만호진 위에는 겸사(겸절제사)라
불리는 상급지휘관이 있어 몇 개 만호진을 관할하였으며, 겸사위에는 전라좌수사와 전라우수사가 있었다.
그런데 회령(포)진 위치는 바로
우수영과 좌수영의 중간에 있어서 시대에 따라 좌수영, 우수영에 이속(移屬)되기도 하였다. 한편 회령(포)진은 조선시대 전기만 하여도 현재 위치에
있지 않았고,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군학리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회령(포)진과 마도진 사이, 이진과 어란진 사이에 보(堡)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이러한 논의에 더하여 1545년~1567년(명종)에 왜구가 출몰하자 현재 위치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로
회령(포)진을 옮긴 시기는 「장흥지(長興誌)」 하(下) 요처(要處) 회령진조(會寧鎭條), 에 1554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회령(포)진성과 정유재란
보성지역에서 현재 위치로 회령진이 옮겨진 이듬해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을묘왜변(달량진사변)은 한반도 서남해안 강진, 장흥, 영암 등이
왜구에게 함몰된 치욕적인 사변이었다.
을묘왜변 때 병마절도사는 왜적에게 항복하고, 영암군수는 생포되었으며 장흥부사는 살해당하였으니 그
치욕적인 수모는 너무나도 컸다. 그래서 회령진성 입지적인 조건을 장흥지역과 관련하여 살펴본다.
만약 회령(포)진성이 을묘왜변이 있기
직전에 회진면으로 옮겨오지 않았다면 왜구들은 어디로 상륙했을까?
해로를 따라 출몰하던 왜구들은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목이 2개소였다. 하나는
달량진-이진을 통과하는 강진만 쪽이고, 다른 하나는 장흥 쪽으로 연결되는 득량만이었다.
그런데 득량만 길목은 마도진-회령(포)진-
고금도진으로 연결된 만호들이 봉쇄할 수 있었으므로 왜구들은 달량진 쪽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회령(포)진이 갖는 또 하나의 커다란 의미는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과 연관되어 크게 부각된다.
첫째, 그것이 조정의 해전불가론을 뒤엎고 서둔 승리였다.
둘째,
일본수군의 기를 완전히 껶어 결정적인 승리를 확보하였다.
셋째,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출로를 완전 봉쇄하여 해로를 통한 보급선을
차단하고 호남 곡창지대를 왜적 수중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충무공 명량대첩이 성공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회령(포)진성에서
전열정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충무공의「난중일기」에 이순신 장군이 회령(포)진성에 도착한 1597년 8월 18일까지 경상도
운곡-하동-구례-옥과-낙안-보성을 거쳐 오면서 별다른 군기나 군량? 병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충무공은 이 회령진성에
머무르게 되면서 비로소 병선과 군량과군기를 마련하여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으며 복직된 후 권위를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충무공
이순신장군 군대 전열정비에는 장흥도호부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가 있었다.
마성용ㆍ마위용형제, 백진남, 정명렬, 문영개, 문홍개와
같은 장흥지방 출신의 충절인물들은 충무공과 함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국난을 극복하게 한 장본인들이다.
■ 회령(포)진성 복원
회령(포)진성의 연혁과 정유재란의 역사적인 의미를 살펴보았다.
물론 이러한 의미는 크게 전체 한국사 맥락에서 보면 별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장흥이라는 한지방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원래는 이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완비된 성이었으나 현재 성벽은 폭 1.5m~2m, 높이 2.3m~2.5m의 석축성 150m와 토석으로 쌓인 잡축성 220m가 북벽 쪽으로
남아 있으며, 북문과 서벽 쪽으로 130m 남아있다.
그 외 동헌 터(하연준씨 집 )와 객사 터(교회자리) 그리고 북문지(이정우씨 집
담장)와 동문지(윤필중씨 집 담장) 등이 남아 있어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44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회령(포)진성은 마을의 뒷산을
이용하여 쌓은 부정형 성으로 현재는 연륙되어 있는 덕도와 노력도. 대마도 등의 섬들이 둘러있어 먼 바다에서 바라보면 산 능선을 따라
삼태기(소쿠리)모양의 성벽이 보인다.
원래는 동문ㆍ북문ㆍ남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객사ㆍ동헌ㆍ사령청ㆍ장사청ㆍ군기고가 있었으며, 성밖에는 선소와
주변 섬에는 간이 봉화대의 연대ㆍ전망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의 둘레는 총 1,860尺(동~북 440척, 북~서 480척,
서~남 490척, 남~동 450척), 높이 8尺이었다.
회령진은 방어와 수색을 위하여 수군첨절제사나 수군만호(水軍萬戶)들이 수시로 병선을
이끌고 왕래하였으나 여기에는 군량과 군기를 쌓아두고 유사시에 하번선군(下番船軍)이 집결하는 곳으로 이용되어 전선(戰船) 1척, 방선(防船)
1척, 사후선(伺侯船) 2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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