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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20년 ~1921년)
1920년,
1월 4일 용정의 승지촌 동량어구에서 윤준희를 비롯한 6명의 청년들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의 은행으로 가는 돈 15만원을 탈취하였다. 15만원은 4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청년들은 캐나다장로회 소속 교회 청년들로 창동학교와 명동학교에서 독립운동에 불타는 청년들로 성장하였고 철혈광복단에 가입하여 용정 3.13 만세시위에서 경호대원으로 활약한 성원들이었다. 그들은 무기구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엄인섭을 만난 후 일경의 급습을 받아 체포를 당하였다.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은 그 자리에서 잡혔고 최봉설은 뒷문을 박차고 나가 체포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는 훗날에 고려공산당의 전위대❰적기단❱을 창설하고 적기단 단장이 되었다.
1920년, 2월 5일에 이승만은 대통령 직 수행을 위해 상해에 도착하였다.
간도국민회는 간도대학살을 대비하여 5월에 명월구의 의민단(방우룡)과 정재면을 통하여 이청배에 사관훈련소 기지를 준비하고 장흥일대와 돈화 사하연에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6월 1일 훈춘한민회 군사부장인 황병길 투사가 일경에 쫒기다 얻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6월 4일, 5일, 6일에 대한독립단, 간도국민회, 군무도독부, 신민단, 훈춘한민회가 연합하여 북로독군부로 군사 통일을 이루고 일본 정규군과 봉오동에서 싸워 이긴 봉오동전투가 있었다.
6월 8일 북경주재 일본공사 오하다는 북경정부 외교총장대리를 회견하고 조선인 불령선인들의 활동을 봉천 길림 지방장관으로 하여금 당지 일본 영사와 시급히 협력해서 처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7월 16일 조선 주재 일본군 참모장 오노, 관동군 참모장 대리 기시, 군사고문 사이또, 조선주둔군 참모 히라마쯔 등이 봉천총영사관에서 회의를 열고 아까쯔까 총영사로 하여금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군대의 불령선인 토벌에 길림독군고문으로 사이또 대좌가 동행하며 만약 중국 군대가 토벌 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대도 참가할 수 있도록 약속 받을 것”을 합의하였다. 동시에 토벌기한을 2개월로 하고 출동 병력을 1개 연대로 하며 토벌지역은 간도와 훈춘, 동녕 일대로 할 것을 주문하였다. 길림당국은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독립군들을 토벌할 것을 주장하고 일본군의 출병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본군은 7월에서 9월에 걸쳐 ❰간도지방불령선인토벌계획서❱를 작성하였다.
용정에 대흥전등주식회사가 설립되어 1921년에 영국으로부터 발전기 한 대를 구입하였다.
일본군은 9월 20일 마적 왕사해와 만순을 종용하여 훈춘현 소재지를 습격하여 약탈, 방화하게 만드는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10월 2일 마적 진동과 만순을 다시 종용하여 훈춘현 소재지를 공격하여 살인, 약탈, 방화를 감행하게 만들어 제2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10월 3일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의 75연대가 훈춘에 도착하였다. 19사단 76연대는 왕청으로 진격하였다. 19사단 37연대는 용정으로 진출하였다. 관동군 제53연대의 일부가 해림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철도연선에, 연해주에 출병하였던 제 11사단의 일부는 훈춘 동부 중로국경 부근에 배치되고 13사단의 일부가 동녕현 동부의 중로국경 부근에 배치되었다. 연해주에서 철수하는 제14사단의 일부는 훈춘과 용정의 지원 부대가 되었다. 그리고 20사단의 일부는 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화룡으로 들어왔다. 일본은 위의 2만 여명 외에도 두만강 변에 주둔하고 있는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의 헌병대와 수비대와 경찰들을 출동시켰다.
10월 21~26일까지 홍범도연합군 (간도국민회, 대한독립군, 한민회, 의민단, 신민단, )과 북로군정서군의 청산리전투가 일어났고 청산리 전투 이후로 일본군은 무장독립단체들을 지지하는 조선인 마을에 들어가 학교와 교회와 민가를 불사르고 사람들을 죽이며 체포하였다. 민간인 대량학살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어 조선독립군의 근거지가 되는 마을과 교회와 학교를 초토화시켰다.
대학살 당시 돈화현에 피난한 국민회 성원은 사하연에 구춘선, 강백규, 허동규, 허영권, 김희영, 리규희 대교하에는 김하평, 정인식, 리종수, 황성칠 3도량자에는 박춘산 돈화현성에는 방진성. 염태익, 남세극, 상수하자에는 김세화. 배성수, 액목현 관지에는 마진, 배영진, 김덕현, 화전현 대전자에는 유찬희, 최원일이 은신하고 있었으며 국민회 회장 구춘선은 돈화와 액목지구를 거점으로 하여 국민회를 제기하려고 하였다. 그는 사하연 동구를 거점으로 삼아 국민회 군사부를 건립하고 안도의 장백현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한군비단 특무대 이철과 연계하여 흩어진 무장부대를 수습하였다. 당시 구춘선은 러시아와 연계하여 국제부대를 만들려고 하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따라 흩어진 독립군을 수습하여 러시아로 보냈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으로 국제부대에 대한 구상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일제의 간도대학살은 연변 4개현과 동녕현 등 5개현에서 6천여 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 학살하고 체포하였으며 민가 1,320호를 방화하였으며 수십여 개의 교회와 학교를 불태웠다. 현규환은 동아일보가 전수 조사하여 1965년 3월 1일자에 발표한 자료를 이용하여 3만8천여 명이 죽고 가옥 4천8백여 호가 불에 탔다고 한다.
캐나다선교부의 선교사들은 학살지역을 방문하여 피해상황을 조사, 파악하여 국제사회에 알렸으며 참변을 당한 자들을 구호하며 치료하였다. 현장을 방문한 제창병원의 민산해(마틴) 의사와 배의도(페르소프)간호부장, 서고도(스코트) 선교사, 박걸 (바커) 선교사, 부두일 (푸트) 선교사, 기애시(카스) 선교사는 영자 신문, 영사관 보고, 선교 신문, 총회, 노회, 교회 보고를 통하여 일본의 살인 만행을 알리며 조선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7월에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을 건립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기 위하여 마르크스 서적과 간행물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연변에 친일 단체인❰보민회❱가 설립되어 시천교 신도들이 연변으로 들어와 보민회에 가입하였다.
❰배초구조선인민회❱가 배초구분관 산하에 세워졌다.(2,703명 )
일본은 10만원의 기금을 지불하여 ❰조선인민회❱ 부속기구 개발경비로 사용하게 하였다.
1920년에 세워진 학교는 ❰삼명여학교❱, ❰명신여중학교❱, ❰은진중학교❱, ❰동명학교❱, ❰신흥학교❱, 안식교의❰간명학교❱, ❰일광학교❱, 남감리회의❰동성학교❱, 대종교의❰구룡학교❱, 원종교의❰쟈피구학원❱, ❰동경현학교❱,❰의선학교❱, 촌민들이 세운❰삼가자촌소학교❱,
❰신흥학교❱ 등이다.
❰연길도립사범학교❱가 ❰길림성립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1920년에 세워진 교회는 ❰토성보교회❱,❰용정동산교회❱,❰용정 룡강동교회❱, 명신교회에서 분립된❰노두동교회(명신교회❱, ❰남양동교회❱,❰합성리교회❱,❰창신동교회❱,❰흥신동교회❱, ❰북구교회❱,❰청수동교회❱,❰동강자교회❱,❰마가점교회❱,❰형납자교회❱,❰은동자교회❱,❰동구교회❱등이다.
1921년,
이동휘, 김립 등이❰한인사회당❱대표자회를 열고 ❰고려공산당❱을 창건하고 5월에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강령과 선언을 발표하였다.
5월,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 하와이로 돌아갔다.
6월에 러시아 자유시에서 같은 만주 조선독립군과 연해주 독립군의 주도권 문제로 이르쿠츠크공산당과 상하이공산당의 갈등 끝에 서로를 죽이는 참변을 일으켰다.
자유시참변 이후, 북경에서 신채호, 박용만, 신숙 등이 발기자가 되어 ❰북경군사통일회❱를 결성하고 상해 임정을 부인하며 조선독립군사단체를 총괄하는 최고의 기관을 만들 것을 제안하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소련과 상해 등지에서 조선인 조기공산주의 단체들이 발행하는 조선문 간행물인❰신세계❱,❰노동세계❱,❰공산❱등이 북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 거주 지역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5개의 중학교가 있는 용정에 집중되었다.
이동휘, 이한영, 여운형 등이 코민테른 극동부의 원조를 받아 상해에 유신인쇄소를 만들고 ❰공산당선언❱을 비롯하여 많은 공산당 서적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간행물들 또한 연변 특히 용정의 5개 학교에 집중적으로 전하여졌다.
7월 1일에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11월 영국, 일본,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9개국 대표들이 미국 워싱턴에 모여 각국 해군 군비축소, 태평양과 동아시아 전후 질서 마련, 영일동맹 폐기 문제 등 주로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이권에 대해 논의하였다. 조선 독립운동가들도 대표단을 구성하고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열강들은 한국 독립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워싱턴 체제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동아시아의 질서를 규정하였다.
1921년 일본은 연변에 경찰서 14개를 증설하고 남만과 동만에❰조선인민회❱를 설립하여 ❰조선인을 조선인으로 제압하게❱하게 함과 동시에 ❰간도참변❱의 피해자를 위로하고 도와준다는 핑계로❰조선인민회❱에❰금융부❱를 설치하고 고리대를 대대적으로 놓게 하여 조선인을 착취하였다.
간도대학살과 자유시참변을 기점으로 간도국민회에 분열이 일어났다. 구춘선을 비롯한 마진, 강구우는 고려공산당을 지지하여 돈화현성 강동에 고려공산당 중앙총감부를 두었고 돈화현의 군회를 조직하였다. 군회(郡會)의 서기는 김하석, 간부는 방진성, 리흥수, 김창순, 남세극, 염태익, 총영도는 구춘선과 마진이었다.
당시 고려공산당은 중국 동북지방에 3개의 지방회를 두었다.
북간도지방회는 돈화현에 본부를 두고 각 현(縣)에 있는 9개 군회를 관장하였는데 처음 당원 수는 1만 명 정도였으나 11월 심사로 1,300명을 정당원으로 하고 나머지는 출당시켰다. 1922년에는 정당원 1,712명, 후보당원 829명이었다.
서간도지방회(안도, 무송, 임강, 장백, 통화, 환인, 집안, 간전, 안동, 류하, 해룡, 흥경현)는 본부를 길림에 두고 6개의 군회를 두었는데 정당원수 153며, 호보 당원수 65명이었다.
요하지방회는 요하에 본부를 두고 5개의 구역회를 운영하였는데 정당원 275명, 후보당원이 87명이었다. 고려공산당은 1921년 4월 20일 현재의 조직공작 비용으로 위의 세지방회에 9,000원씩 계속 지급하였다.
고려공산당 중앙총감부 회장 구춘선은 안무와 최량을 길림성 대표로 이르쿠츠크 공산당대회에 파견하면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원(原) 국민회 전부를 공산당원으로 가입 신청을 하게 하였다.
전로한인공산당은 김철훈 등을 돈화, 연변 일대에 파견하여 지방조직을 설립케 하였다. 윤복송과 정치운 등은 연변에서 간도공산당을 설립하였다.
러시아 한족(韓族)공산당도 영고탑에 총리부를 설치하고 남공선, 서상용을 책임자로 임명하였으며 돈화 등지에 지방조직과 연락소를 설립하였다.
경신대학살 이후 중국인들이 일본군이 중국 출병이 조선인 때문이라며 조선인에 대한 증오를 조선인 사살로 드러냈다. 용정에서 허병섭이 중국 군인의 총에 맞아 죽고 12세의 최동이와 김동환이 중국 경찰에게 피살되었다. 팔도구에서 김씨 성을 가진 농민이 중국 군인에게 총에게 맞아 죽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들의 귀화입적에 대한 관심이 대폭 감소하고 자치에 대한 욕구가 분출되었다.
히다카 헤이지로가 용정에 광명회를 설치하고 간도에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고 역설하였다.
연변지역 사립학교 운동대회가 달라자에서 개최되었다.
❰로투구조선인민회❱가 용정총영사관 산하에 세워졌다.(1,950명 )
❰남평조선인민회❱가 투도구분관 산하에 세워졌다.(2,690명 )
❰이도구조선인민회❱가 투도구분관 산하에 세워졌다.(2,821명 )
❰의란구조선인민회❱가 연길분관 산하에 세워졌다.(665명 )
❰도문조선인민회❱가 도문분관 산하에 세워졌다.(3,684명 )
❰가야하조선인민회❱가 도문분관 산하에 세워졌다.(961명 )
❰양수천자조선인민회❱가 도문분관 산하에 세워졌다.(922명 )
❰석건평조선인민회❱가 도문분관 산하에 세워졌다.(1,800명 )
❰하다문조선인민회❱가 훈춘분관 산하에 세워졌다.(2,439명 )
1921년에 설립된 학교는 유교공교회의 ❰대성중학교❱, 천도교의❰동흥중학교❱,❰정신여학교❱, 천주교의❰교향여학교)❱,캐나다장로회의❰청호학교❱,천주교의❰덕흥학교❱,캐나다장로회의❰대흥학교❱,천주교의❰해성학교❱,캐나다장로회의❰흥동학교❱,천주교의❰조양여학교❱,원종교의❰입포학원❱,원종교의❰이도구학원❱,대종교의❰문영학교❱,캐나다장로회의❰길성학교❱,캐나다장로회의❰신흥학교❱,시천교의❰동아학교❱,천도교의❰연길제1학교❱,기독교의❰광동학교❱,대종교의❰학성학교❱,❰덕흥숙❱,❰서산학교❱,❰의란구 북부학교❱,❰동성학교❱,❰영동학교❱,❰신흥학교❱,❰북신소학교❱,민회의❰공진학교❱,민회의❰팔도구보통학교❱,촌민의❰구산학교❱,❰동진학교❱,왕청현의❰중평학교❱,왕청현 촌민의❰대전학교❱,❰연길현제10소학교❱,조선민회의❰의란구소학교❱, 춘화촌 조선민회의 석현❰조선인소학교❱등이다.
이상의 학교 명단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권⌟과 동북조선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조선족학교지 ⌟에서 확인한 것이다.
1921년 12월 캐나다장로교회 총회는 함북노회에서 간도노회를 분립시켰다.
1921년에 세워진 교회로는 훈춘 경신향의❰서가산교회❱가 있다.
8부로 계속
2026년 3월 11일 수요일 묘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