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이승만대통령 화진포기념관[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이승만별장길 33]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등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친필휘호, 의복과 소품,
관련도서 등이 현대적으로 전시되어 있고, 침실과 거실, 집무실, 평소에 끼던 안경과
여권, 편지 등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양연조옹라(梁鷰嘲翁懶) 집제비는 게으른 늙은 새를 조롱하고
정화소객망(庭花笑客忙) 뜰앞 꽃은 바쁜 나그네를 비웃누나
연조화소리(鷰嘲花笑裏) 제비의 조롱이나 꽃의 비웃음도
각자농춘광(各自弄春光) 각기 다 봄빛을 희롱하는 거라네
언교화여월(焉敎花與月) 봄과 달이
무회우무추(無晦又無秋) 그믐되고 또 가을이 없을 수 있다면
화월장춘국(花月長春國) 영원한 꽃피고 달밝은 봄나라
인무백발수춘일희제(人無白髮愁春日戱題) 사람은 백발의 걱정 없으리라
위대한 생애의 마감
1920년 일본이 현상수배 중임에도 임시대통령으로서 상해를 방문하라는 친구 이승만에게 밀항을 주선해 주었던 보스윅 씨. 관 앞에 다가선 그는 고인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젖히고 이승만의
이마를 짚고는 울부짖었다. "I know you! I know you!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이승만의 하와이 영결식에서
해방 후 70 노구를 이끌고 좌우 이념으로 갈라진 민심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로 단결시키며, 한반도 공산화 음모인 신탁통치와 좌우합작을 극복한 건국위업, 외세를 등에 업은
북한의 6•25남침을 막아내어 자유를 수호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국토재건에 온 힘을 다했던
이승 만 박사는 하와이 체류 중 벌써 90을 바라보며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1962년 3월 17일, 평생을 바쳐 사랑한 이 민족과 강토를 다시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더 있으면 비행기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귀국길에 나섰다. 그러나
당일 아침 총영사가 찾아와 정부의 귀국만류 의사를 전하자, 충격을 받은 이박사는 그날 이후로
휠체어 에서 두 번 다시 일어설 수가 없게 되었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프란체스카 여사와 아들 이인수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박사는 하와이의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만 90세, 봉건시대인 조선조 말에 태어나 자유롭고 근대화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지켜낸 거목 이승만. 구한말에는 개혁가,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가,
해방 후에는 자유와 민주의 투사였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이땅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위대한 생을 마감했다.
7월 21일, 자신이 설립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사랑하는 제자였으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교민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한국 민족의 위인 우남 이승만 박사의 유해는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향해 청명한 하와이의 밤하늘을 힘차게 날아 올랐다.
진정한 한국인, 프란체스카 영부인
가끔 지사관저 뒷마당 빨래줄에 때국물이 덜 빠진 남방셔츠가 널려있어도 물이 귀해 손봐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를 깁거나 올이 다 낡아 구멍이 나기 직전의 빨래들이었다. 너무나 딱한 건
팬츠였다. 헤지기 직전의 천 조각에 불과했다. 나는 「노블」참사관이 갖다 준 침대시트를 침모와 함께 밤새껏 말라 팬츠를 여러 장 만들었다. 이 팬츠를 조 지사 부인에게 주어 직원들 숙소에 갖 다 놓도록 했다. -영부인의 6•25 비망록, 1950년 8월 8일 일기 중에서,,,,
오스트리아의 유복한 사업가의 딸인 프란체스카는 33세 때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도중
국제연맹회의가 열리는 제네바에서 58세의 저명한 동양인 이승만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날계란 하나로 때로는 사과 한 개로 식사를 대신하며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었다. 독어•영어•불어와 속기•타자에 능숙했던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박사의 비서로, 독립운동 동지로 그리고 아내의 일인삼역을 훌륭히 감당했다. 하야 후 하와이
체류기간에는 남편의 병상을 지킨 여느 한국 여인처럼 헌신적인 아내였다.
이승만 박사의 별세 후, 5년간 오스트리아에 머물다 영구 귀국한 프란체스카 여사는 틀니를
하기 위해 3천 달러를 가지고 왔다. 기술이 더 좋은 외국에서 틀니를 하고 오시지 않았느냐는
며느리 조혜자씨의 물음에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는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 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묻는 프란체스카여사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남편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고 관뚜껑에는
남편의 친필휘호인 “남북통일”을 덮으라고 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한 것이
아니니까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며,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 하던 프란체스카 여사
이 박사 말년의 외로움과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들을 미워하던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몸소
실천했던 그녀는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용서하라! 잊어버려라!
Forgive and Forget!"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 과정을 알고있는 세대이나 기억의 끈을 다시한번 잡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다음에 이어서 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