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레시피
악천후를 벗어나 바삭해진 구름들
전 세계에 걸쳐 요리가 필요해
베링해 연안의 조개와 안데스산맥 기슭에서 자란 버섯을 따와서
북극곰이 얼음 밑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의 온기와 감미료 하나 섞지
않은 황제펭귄의 부성애를 곁들이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푸른별의
재료가 되지
사하라 태양으로 불을 지피고 노르웨이 오로라로 간을 맞춘 구름,
북극 유빙으로 튀김옷 입혀 벼락 맞은 바오밥나무 젓가락으로 뒤집으면
갠지스 글썽이는 구름과 티베트 초원의 말발굽 소리는 제례용으로 적당하지
각국의 국경과 펄럭이는 깃발에서 저마다 다른 향신료 맛이 나지
통곡의 벽과 팔레스타인의 높고 높은 장벽과 침몰하는가자에서 코끝 찡한 맛
알프스 들판 한 자락 얇게 펴놓으면 환한 꽃이 만개한 식탁, 시베리아 자작나무
햇살을 살짝 얹고 싶어져
한입 베어 물면 바삭한 지구
세계의 말투들은 모두 구름튀김 같고
감사기도 속에 맛있는 각국의 말들
확신의 구석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고 느낄 때
구석은 얼마나 웅크리기 좋은 곳인가
구석은 모든 난감의 안식
불가항력과 자포자기를 모색하기 좋은
벽을 마주 보고 앉는다는 말은
벽도 앞이 있다는 뜻이겠지
앞을 놓고 보면 깊은 뜻 하나
씩 틔우자는 뜻일 테고
귀를 틀어막고 등지고 앉으면 슬픔 가득한
밀리고 밀린 뒤끝이란 뜻이겠지
닭장 문을 열면 닭들이 구석으로 몰리는 것은
막다른 구석도 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
한밤중 옥상에 나가면 흔들리는
이곳저곳에서 붉게 빛나는
저 퇴로를 자신하는 구석들
어둠이 숨겨놓은 문이 있다고 확신에 찬 구석들
흐릿한 별들의 바탕, 무표정한 하늘
너무 먼 곳을 구석이라 여기지만
한밤에 구석을 차지 못해 우는 사람들
적막과 대치 중인 이 골목은
한 사람의 발등을 막 넘어선 구석
하루치의 지구
초침이 세운 알람 소리에 지구의 정각이 표시되고
마지못해 뜬 눈꺼풀 사이로 지구가 돌죠 우두커니
서있던 공중이 레미콘 차량 속에서 타설을 기다리며
어젯밤의 지평선과 수평선이 섞여 돌아가죠 하루라는
것, 일 년이라는 것, 혹은 평생이라는 것, 알고 보면
붙들지 못하는 계절처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죠
저마다의 그림자를 섞으며 얇은 잠을 열고 나오는 것이죠
지구는 며칠을 한꺼번에 돌리지 않죠 딱, 그날 하루치만
열심히 열고 닫는 일로 바쁘죠 고리도 없이 연속으로
표류하는 하루를 안간힘으로 붙들고 버티는 거죠
가끔 뻔한 일의 반복 학습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한쪽을
늦추거나 당기며 분탕질하기도 하죠 불시착한 햇살은 사막이
되고 너울져 흐르는 물은 굳지 않으려고 23.5도 기울기를 끌어안고
빙빙 섞이죠
우주 끝자락을 잡고 번번이 이탈하려는 지구는
아무 재활도 없이 또 하루를 견뎌야 할까요
사람에 갇힌 지구, 지구를 소비하는 우리
이정희
경북 고령 출생
202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꽃의 그 다음>> <<하루치의 지구>>
*첫 번째 시집에 이어 두번째 시집의 시세계도 여전하다.
그의 한결같은 시세계는 지구의 환경, 혹은 사랑과 평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작품 면면히 우러나는 생태적인 레시피의 냄새는 시의 맛을 깊게 해줄 뿐만아니라
깊은 여운으로 뒷맛을 더 감싸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