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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소설가의 일
저- 김연수(264쪽.2017.4.27.)
출- 문학동네
독정-2019.7.18.
소설가는 불타는 다리의 주인공이 무슨 일을 저지르거나 그의 삶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나면 이때다 싶어서 그가 지나온 다리에 불을 지른다. 소설을 계속 쓸 것인가 말 것인가는 다리가 활활 타오른 걸 실컷 구경한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소설에서 주이공이 지나간 다리를 불태우는 데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나오는 스밀라 방식, 이사야라는 소년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자 경찰은 실족사라지만 스밀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스밀라가 자신의 다리를 불태우는 장면은 꽤 멋지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손에 내 집념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맍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다른 하나는 <파이 이야기>에 나오는 피신 몰리토 파텔의 방식이다.
“배가 가라앉았다. 괴물이 내는 금속성 트림 같은 소리가 나?ㅆ다. 물건이 수면 위로 쏟아져나오더니 사라졌다. 모든 게 비명을 질러댔다. 바다며 바람, 내 마음까지, 구명보트에서 보니 물속에 뭔가가 있었다.
둘 다 불타기는 하지만 스밀라는 눈을 읽을 줄 아는 그녀의 캐릭터 설정 때문에 아이의 죽음에 책임감을 가지고 사걵 속으로 뛰어든다. 반면 파이는 자신의 성격과 아무 상관 없이 배가 가라앉았기 때문에 동물원의 아들로서 위태로운 조난생활을 시작한다. 이 차이는 소설의 톤을 결정한다. 주인공 자신의 캐릭터 설정 때문에 다리를 불태우면 캐릭터 중심, 캐릭터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외붕듸 사건 때문에 다리가 불타면 플릇 중심이다. 캐릭터 중심의 소설은 내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느리고, 플릇 중심의 소설은 외면적이고 사건의 진행이 빠르다.
플릇이냐, 캐릭터냐는 서로 상보적 관계다. 플릇이 다리를 불태우면 작가가 캐릭터에는 조금 덜 신경 쓴다는 뜻이니 스테레오타입의 인물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반면 캐릭터가 다리를 불태우면 흥미진진하고 빠른 사건 전개 없이 사유와 심리묘사로 문장을 채운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북회귀선>을 쓰면서 헨리 밀러가 창안한 11계명
새로 뭘 만들지 못할 때도 일은 할 수 있다.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는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늘 인간답게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곳에 다녀라
짐수레 말이 되지 말라. 일할 때는 오직 즐거움만이 느껴져야 한다.
언제나 제일 먼저 할 일은 글을 쓰는 일. 다는 모든 일들은 그 다음에
·소설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을 새 소설을 구상할 때, 소설에 몰입할 때다. 또 교정쇄를 모두 넘기고 책이 나올 때까지의 짧은 순간이다. 책이 나오면 슬슬 새 일을 시작해야겠지만, 나오기 전까지는 괜찮다. 그냥 막 빈둥대도 된다.
· 스물 세상의 콜롬비아 청년 바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릴케의 말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는 말을 놓고 그는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 언젠가 장 콕토은 프라도 박물관에 화제가 나면 어떤 작품을 구하겠느냐는 질문에 “프라도 박물관의 한 부분에라도 불이 붙으면 나는 그 불을 구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어떤 제안을 받자 “그거 재미있겠네요”하면 속뜻은 그거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는 뜻이다.
· 어떤 입양자가 자신의 출생과정에 대해 알려고 고향에 갔다가 수많은 비밀을 접하며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장편 소설의 제목으로 가져왔다. 늘 자기 앞에 두 개의 상자가 있다고 상상하면 하나는 ‘왜’라는 의문사가 가득 든 상자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라는 의문사가 가득 든 상자다. 틈날 때마다 그 상자에서 번갈아 왜와 어떻게를 꺼내서 앞 문장에 갖다 붙여서 질문을 만든다.
“왜 한 입양아는 자신의 출생 과정애 대해 알아내려 하나?‘
어느 날, 양부가 보낸 소포 중에 친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기 때문이다.“의 대답이 나오면 또 상자에서 ‘왜’를 꺼내서 거기에다가 붙인다.
‘왜 어느 날 양부는 소포를 보냈는가? 왜 친모와 사지을 찍었는가?
‘어떻게’를 꺼내서 붙여도 된다. ‘어떻게 어느 날 양부는 소포를 보냈는가?’
‘왜 양부는 십 킬로그램짜리 상자 여섯 개를 입양아에게 보냈는가?’
모든 불행은 왜 하필이면 가장 행복해지려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올까? ‘왜 하필이면’과 ‘설마 그럴 줄이야’를 적절하게 사용하면 누구라도 ‘테스’를 만들 수 있다.
현대소설은 주인공의 동기를 파헤치는 장르다.
· 소설을 다 쓰고 난 뒤에 우리는 플릇을 짤 수 있다. 플릇부터 짜고 소설을 쓰는 건 바지 위에다 팬티를 입는 격. 플릇과 관련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일단 팬티부터 입자’는 것. 플릇 같은 건 생각말고 불타는 다리를 건너갈 때까지 일단 토고부터 쓰자.
· “이 중에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살마이 있으면 손 들어보십시오.”
한 할아버지가 손을 번적 들었다.
“옛날에는 저도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요. 걔들이 다 죽었거든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살마이 되는 법은 간단하다. 그들보다 오래 살면 된다. 왜 우리는 그놈을 미워 죽이지 않고 내가 미워 죽을까? 그건 우리는 결코 그놈을 미워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놈이 미워 죽겠어는 나뭇잎으로 주요 부위만 가린 꼴이다. 그걸 옷이라고 할 수 없듯이 밉다고 그놈이 미워 죽겠다는 쓰는 것을 소설의 문장이라 할 수 없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가 멈추자마자 녀는 내렸다. 맨 처음 그녀 눈에 띈 것은 남편 얼굴이었다. ‘세상에! 어째서 저이의 귀는 저렇게 생겼을까?’ 그녀는 그의 싸늘하고 엄 있는 풍채와 무엇보다 지금 그녀를 놀라게 , 둥근 모자 테두리를 받치고 있는 귀의 연골부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남 놈이 미워 죽겠어!‘를 가리기 위해 쓴 문장이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 파리에 와서 너무 멋지더라고, 파리에 살 수 있다면 은행원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거든, 은행원은 기질상 가장 안 맞는 직업인데 결국 사십년 만에 소원을 이뤘어. 은행원을 하지 않고도 꿈을 이뤘어. 소원을 이루려면 사십 년은 한결같이 원해야 해.
“마음에 난 자리가 운동장만해졌다.”
“그 아이의 삶이 어떤 방송도 잡히지 않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변했다.”
·소설이 주인공의 변화를 다룰 때, 결말 부분에는 반드시 그 변화를 확인하는 장면(재확인 장면)이 나온다. 찱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루지 영감은 유령과 함께 밤새 삼차원 입체영상으로 자기 과거, 현재, 미래를 보고 사람이 바뀐다.
“그랬다! 침대 기둥은 스쿠루지의 침대 기둥이었다. 기쁘고 다행스러웠던 점은 저질러온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아직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 세 분 유령님의 듯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재확인 장면을 위해 말고 표정과 몸짓과 행동(3종 세트)을 넣었다.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어이, 여기도! 안녕하시오!”
그 다음에는 표정으로 묘사 -수년 동안 웃는 연습을 하지 않았던 사람치고는 참으로 멋진 웃음이었다.-
그 다음에는 행동. 스쿠루지는 살짝 손잡이를 돌린 뒤 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카 부부는 식탁(그들이 줄 맞춰 길게 놓여 있었다)을 바라보고 있다. 젊은 주부들은 언제나 이런 것에 신경ㅇ르 쓰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프레드”
스쿠루지가 불렀다. 어머나, 간 떨어지겠네! 조카며느리가 얼마나 놀라던지! 스쿠루지는 조카며느리가 방놀라 발판 귀퉁이에 주저앉았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누구신가요?”
프레드가 외쳤다.
“나다. 삼촌, 저녁 먹으러 왔다. 들어가도 되겠니?”
·총을 들고 있으면 군인, 공을 차고 있다면 축구선수다. 소설가는 원고를 교정? 편집자들을 소설가로 오인받을 태고 소설가를 증명하기에는 무척 어렵다.
·TV에 나오는 괴짜 노인들 이야기는 그 기행 뒤에 기나긴 백스토리가 있다. 그들은 제작진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는 게 그 사진 속엔ㄴ 가족들과 살던 시절의 행복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다 노인은 모종의 사건으로 가족과 헤어지거나 사별하게 되고 참회의 ㄸ듯으로 여생을 혼자 지내며 화엄경을 필사하거나 돌을 쌓거나 아내 무덤 팡에 몇 년째 곷을 꽂아놓는다. 노인들의 이런 행동은 한때 그 삶에 큰 좌절, 절망이 지나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말로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을 것만 같아”하면 종이인간에 불과하다. 타자마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건 황제라도 인간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심학세 꺾인다. 좌절, 전략, 어쨌든 눈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안다. 여기가지가 전략이다. 끝을 아루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받을 수 있지만 진자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모든 사람은 각자 방식으로 그 밑바닥에서 빠져나온다. 그런데 소설은 감동수기가 아니니까 빠져나오는 방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그에게 타자마힐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다.
‘어쩌다 우연히 텔레비전으로 그의 오래된 영화로 클립한 것을 봤는데 나를 웃겼다. 뜻밖에도내 가슴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허파가 ㄷㄹ먹거리고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바닥을 보지 않았다는 것. 나의 일부가 여전히 계속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해서 데이비드 짐머는 모두들 죽었다고 생각한 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언 헥터 만의 영화를 모두 찾아보고 <헥터 만의 무성세계>라는 책을 펴냈다. 데이비드 짐머에게느 바로 이 책이 타자마할이다. 타자마할이 만들어지면 전략의 이야기는 모두 끝난다. 이제 주인공은 삶을 향해 다시 올라가는데 이 회복의 이야기는 그들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진부하지 않은 독특한 이야기를 쓰겠다면 전략의 이야기보다 회복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더 좋다.
세이쇼나곤이라는 일본 고위 궁녀의 수필집 <마쿠라노소시>에서 아름다운 묘사 장면 모음
1.‘또한 겨울밤 아주 추울 때 사랑하는 사람과 이불 속에 파묻혀서, 저 멀리서 그윽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는 것도 정취가 있다 그런 때면 닭이 처음에는 부리를 날개 속에 처박고 울어서 그 울음소리가 아주 멀리 들리다가 날이 밝아옴에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이는 밤에 이불을 덮고 누워 종소리를 듣고 닭소리를 듣는 걸 묘사했을 뿐인데 이 여자가 어떤 남자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밤을 꼬박 새우고 깨어 있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2.벌레는 방울벌레, 쓰르라미, 나비, 청귀뚜라미, 귀뚜라미, 여치, 해초벌래, 하루살이, 반딧불이가 좋다. 도롱이 벌레는 정말 딱한 벌레다. 귀신이 낳았으니 제 부모가 ’부모를 닮아 이것의 성질이 무서울 것이다.‘생각하고 넝마를 입혀 ’곧 겨울바람이 불면 데리러 올 테니 기다려라‘하고 도망친 것도 모르고, 바람소리가 들리면 ’아빠, 아빠‘하고 청승맞게 우는 것이다.
3. 사계절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성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좋고, 칠흑같이 어둔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작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은 보기 좋다. 반딧불이가 달랑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른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가을은 해질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갑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데지어 날아가는 광경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 지어 저 멀리 날아가는 풍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겨울은 새벽녘, 눈이 내리면 더없이 좋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도 멋있다. 아주 추운 날 급하게 운 숯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때 숯을 뜨겁게 피우지 않으면 화로 속이 금방 휜 재로 변해버려 좋지 않다.
<저스트 키즈>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어머니는 프레리 강변 훕볼트 공원에 나를 데려갔다. 낡은 보트하우스 가제보, 아치형 돌다리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유리판 너머를 보듯 희미하다. 좁은 수로를 흐르던 강물이 커다란 석호로 흘러들었다. 나는 호수 위에 기적 같은 존재가 떠다니는 걸 목격했다. 새하얀 깃털을 입은 긴 목이 굽은 생명체였다.
“백조야.” 내 놀란 눈을 보고 엄마가 말했다.
평범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무나 특별한 일이라서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하면 그게 소설의 미문이자.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가에게 단어란 화가에게는 색채와 같은 거다. 사전을 편집했다면 다른 소설가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가졌다는 뜻이다.
소설가가 말을 잘한다는 건 말을 훌륭하게 한다거나 능수능란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본인이 만족할 정도로 충분하게 많이 한다는 뜻이다.
한국 정치가 타협할 수 없는 이유도 공포를 대면하면 그저 죽이거나 도망치거나 둘 자하나지. 타협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 공포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공포는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하니까.
-냉기가 그의 발가락 끝으로 튀오올라 마침ㄴ재 이가 덜거덕거리며 부딪히고 무릎이 비틀거려, 그 자신이 풀려가낙는 것을 막으려고 스스로 몸을 끌어 안아야먄 했다. 이것이 전조였다. 완전한 발작이 일어나기 직전 그를 감싸는 화학적 전기의 차가운 후광이었다. 하워드에게는 간질이 있었다.-폴 하딩의 <팅커스>작품에서 묘사
-머리는 낡은 열쇠와 녹슨 나사가 가득한 유리단지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소설가의 일에서 생각한다. 감각한다는 생각하는 공히 단어와 펴현을 찾기 위해 모을 사용한다에 해당하는 동사다. 감각하다는 원고를 쓸 때 사용하고, 생각하다는 교정할 때 사용한다. 순서는 감각해서 알아낸 단어와 표현으로 원고를 쓰고, 그 원고에 대해생각하면서 새 단어와 표현으로 교정한다. 구체로 감각할 때는 본다. 듣는다. 만진다 등의 동사를 생각할 때는 비유한다. 추론한다. 대조한다 등 동사를 쓴다.
·일본 만화 <좋은 사람>에서 좋은 문장은 “이번 시합에서 최선을 다하지는 마세요.”였다. 그 조언을 듣고 선수들은 “좋았어, 자 , 모두 최선을 다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가자!‘였디ㅏ. 첫 주자는 기시타. 오 초를 센 뒤에 출발하라는 유지의 조언 탓에 출발부터 늦는데, 달리는 동안 최선을 다하지 마라는 말 때문에 긴장이 풀려 뜻밖에도 줄곧 1등을 하다가 마지막 스퍼트에서조차 최선을 다하지 않아 결국 4등으로 들어온다. 주 번째 주자가 화를 낸다 ”용서 못해. 기시타 놈, 감독님 지시를 어기고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야겠다. 나는 절대로 열심히 안 할 거니까.“ 그런데 역시 1등 ”그 자식까지 최선을 다하다니“ 팀원들은 좌절한다. 그러다 마 지막 주자가 계략에 빠져 최선을 다하는 바람에 침이 3위에 그치고 만다는 참으로 만화 같은 만화다.
”좋아.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리가가 무엇인지 보여주겠어?“
집을 나서자마자 스톱을 누르고 달려간다. 최선을 다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조금 힘들어도 걷는다. 줄곧 힘들면 줄곧 걷는다. 그렇게 절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십오 분이 지나면 다시 돌아서서 집으로 온다. 돌아올 때는 걷든 뛰든 내 마음대로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달렸다. 처음에는 거의 걸었으니까. 처음으로 들어가 본 골목길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펼쳐진 풍경, 눈만 새로 뜬 게 아니라 귀와 코도 열렸다. 새소리도 들렸고, 흙냄새도 났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과 흙바닥을 디디는 느낌은 제각각 달랐다. 우산을 들고 하릴없이 걸으며 빗방울을 머금은 꽃잎을 들여다보거나 두터운 외투를 입고 막 내린 눈에 발자국을 찍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리기는 그 어떤 날에도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매일 달리는 사람이 됐다.
일인칭 주인공이라면 자신만의 고유 시각에서 세상을 볼 것이라 생각하지만 자페아가 아닌 이상 현실의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독립된 사이란 없다. 실제 살아가는 동아, 우리는 늘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의식한다. 누군가에겐 보이는 ‘너로서의 나’와 ‘내가 보는 ’나’를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중요 인물(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가 바라보는 이인칭시점의 나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너로서의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에 괴리감이 있다면 당연히 메꾸고자 행동으로 옮긴다 이렇게 소설에서 주인공에게 이인칭 시점을 주는 인물을 나는 섭동자라 한다. 섭동은 행성의 궤도가 다른 천체의 힘으로 정상 타원을 벗어나는 현상,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즉 인생에는 나의 생각과 간섭현상을 일으키면서 내 인생 행로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반드시 있다. 대개 좋아하는 친구, 부모처럼 주인공인 내게 우호적 사람인데 서사적 역할은 정해져 있다. 섭동자는 주인공으 일인칭적 시각을 제공한다. 때로 섭동자의 시각은 주인공의 시각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주인공의 모든 욕망을 저지하는 반동인물과 헷갈릴 수도 있지만 섭동자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비록 그가 주인공의 삶에 결과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쳐도 본질적으로 그의 의도는 중립적이다 .다만 주인공과 다른 시각을 가졌다는 게 문제인데 이 때문에 소설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의 내면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그때 아버지 말에 좀 더 귀 기울였으면’하다가 결국 한강 다리까지 나가는 중년 남자를 떠올리면 섭동자(이 경우에는 아버지가)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쉽게 이해하게 된다. 직접 강요받았든, 뉴스로 보았던 섭동자의 견ㅁ해가 간섬을 일으킨 결과 주인공의 세계관이나 태도가 바뀐다면 그 소설은 변화의 이야기다. 이런 변화의 이야기를 담는 게 소설이다. 그 이유는 실제 현실의 인간들은 주위 사람들 견해에 강하게 영향 받기 때문이다. 이때 섭동자는 주인공보다 더 중요해진다. 헤세의 소설 제목이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이 도는 거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강한 캐릭터일 경우, 즉 주인공이 영웅이라면 아무래도 어떤 자들에게도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 시련을 이겨내는 영웅담은 대개 주인공의 태도나 세계관에 변화가 없다. 그러므로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시리즈이 개별적 제목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임스 본드만은 영 잊지 못한다. 자신의 일인칭적 이야기와 섭동자의 이인칭적 이야기를 종함한 뒤, 주인공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거나 해결을 포기하게 되는 점에서 이 관계의 이야기는 중요하다.
신과 소설가의 공통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셰계를 창조하되 자신을 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 신은 우주의 바깥에 소설가는 소설의 바깥에. 어떻게 하면 소설의 신이 될 수 있는지 그간 궁금했다면 소설의 바깥에 있으면 된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말기를.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꿈에 대해 한 번 더 말할 때, 우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뭔가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미소 지을 때 바로 그때 이 우주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도스토엡스키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맨 앞장에 인용한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활화산처럼 질투가 솟아올라 완벽한 그 녀석엑 털어놓았더니 그 녀석을 윗셔츠를 들어올리는데 흉터가 커다랗게 나있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