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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안식과 그리스도(제3장 1절 ∼ 제4장 16절)
1. 그런 고로 같이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시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기를 모세가 그의 온 집에서 한 것같이 하셨다.
3. 집을 세운 자가 그 집보다 높은 것같이 그는 과연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하시다. 4. 집마다 다 지은 자가 있지만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5. 또 모세는 장차말 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으나 그리스도는
6. 그의 집을 차지하시는 아들로 충성하셨다. 우리가 만일 담대함과 소망의 자랑을 끝까지 굳세게 붙들기만 하면, 그의 집은 우리다.
7. 그런 고로 성령이 말씀 하신 것과 같다.
오늘 너희가 만일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의 마음을 강퍅(剛愎)케 하기를 노하심을 격동케 하던 때처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의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證驗)했고 40년 동안 내행(行)한 일을 보았나니라.
10. 그런 고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너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한다 하였다. 그러나 저희가 내 길을 알지 못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서(盟誓)한 것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12. 형제들아 삼가라. 너희 중에 누가 혹 믿지 않는 악한 맘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게 하라. 그보다도 오늘이라 부를 수 있는 동안에 날마다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가 죄의 유혹으로 마음을 강퍅(剛愎)케 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시작할 때의 확신을 끝까지 굳세게 붙들기만 하면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와 같이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15.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너희가 만일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의 마음을 강퍅케 하기를 노하심을 격동케 하던 때처럼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그러면 듣고도 노하심을 격동케 하던 자가 누군가. 모세를 따라 애급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닌가.
17. 또 40년 동안을 누구에 대하여 노하셨나. 죄를 범하고 그리고 그 시체(屍體)가 광야에 엎어진 자에 대하여서가 아닌가.
18. 또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서(盟誓)하신 것이, 그 순종치 아니한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에 대하여 하신 것인가.
19. 그럼 이로써 보면 저희가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지 아니함으로써다.
4장 1. 그런 고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으면서도 혹 너희 중의 누가 믿지 못할까 함이다.
2. 그것은 우리도 저희와 같이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에게 그들은 말이 무익했던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믿은 우리들은 그러기에 안식에 들어간다.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서한 것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그러나 일들은 세상 창조하실 때부터 이루어져 있었다.
4. 그러기 때문에 제7일에 관하여 어디 말씀하시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이 제7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다.
5. 그리고는 여기 또 말씀하여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6. 그러고 보면 거기 들어갈 자가 오히려 남아 있다. 그리고 먼저 복음을 들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7. 다시 어떤 날을 “오늘”이라고 정하여 그렇듯 오랜 후에 다윗에 의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미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하여 “오늘 너희가 만일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의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시었다.
8. 만일 여호수아가 저들에게 이미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10. 과연 그와 안식에 들어간 자는 제 일을 쉬기를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시는 것같이 하였다.
11. 그러기에 우리는 열심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 누구나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을 따라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2. 참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있고 날카롭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하여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꿰뚫어 쪼개고, 가슴 속의 생각이며 뜻을 감찰하신다.
13. 또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의 앞에서 감추인 것이 없고, 만물이 그의 앞에서 벗은 채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이로 더불어 관계가 있다.
14. 그러면 우리에게는 모든 하늘들을 지나올라가신 위대하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있으니 그 신앙을 굳게 잡을 것이다.
15. 그는 즉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약함을 체휼하지 못하시는 이가 아니요, 모든 것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면서 죄만 없으신 이다.
16. 그런 고로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 때에 합(合)한 도움이 되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갈 것이다.
예론의 제3단 즉 최종단이다. 제1단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예수는 우리 구원의 주인 것을 증명하였고, 제2단에서는 그의 역사적 존재의 성격에서 이것을 설명하였고, 이제 이 제3단에서는 다시금 그의 이루신 사업에서 이것을 증언하려 한다.
구약의 사상으로 하면 역사의 목표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데 있었다. 유대인의 역사는 안식추구의 역사였다. 아브라함이 이를 이상으로 했고, 모세 이를 약속했고, 여호수아 이 때문에 싸웠다. 그러나 거기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이것을 예언하고, 이사야가 장려한 문자로써 이것을 선포했고, 예레미야가 비통한 목소리로 이것을 갈구(渴求)했다. 그뿐 아니라 그 외에 다수(多數)한 예언자 허다한 시인들이 이것을 꿈꾸고 애원하고 동경(憧憬)하고 읊조렸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안식은 종내 얻을 수 없었다. 그 실패의 원인은 두 가지로 있다. 하나는 저들의 불신이요 또 하나는 그것을 약속한 율법 그 자체의 불완전이다. 그리하여 그 이상은 보다 완전한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질 것으로 깉어 있었다. 이제 그것을 이룬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그 성소 안에 직접 들어갈 수가 있다. 고로 그는 우리가 절대의 신뢰와 완전한 복종을 드려야 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물론 전단에서 말한 ‘장차 오는 세계’와 다른 것 아니다. 제1단에서 본 “천사들을 바람으로 만드시”는 세계와도 다른 것 아니다. 따라서 아들이 영원한 천상계에 있어서 만유 위에 뛰어나시고 천사의 섬김을 받으시는 왕이시라 하는 것이나, 고난의 예수가 이 세계에 있어서 인류를 장차 오는 세계로 이끄시는 구원의 주장이시라 하는 것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늘 위의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에 직접 나가게 하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서로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나선(螺線)을 올라가는 것같이 같은 것을 반복하는 듯한 중에 진리의 향상이 있다. 이 3단의 설명은 그리스도 생애의 3계단(階段)에 당(當)하는 것이다. 제1단은 영원한 형태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요, 제2단은 수육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요, 제3단은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 각 계단간(階段間)에는 항상 도덕적 향상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가 영원에서 육으로, 육에서 다시 영원한 하늘나라로의 계단을 밟으시는 동안에, 아버지의 얼굴은 한단 더 밝히 보여지는 것이었고, 진리로는 층(層) 일층 높이 드러나는 것이 있었다. 저자의 3단의 설명은 이 때문에 있는 것이다. 고로 이제 우리가 그를 따라 이 마지막 단에 올라설 때 우리는 예수의 대제사장이신 것을 최고의 의미에서 파악(把握)하게 된다.
1. 모세와 예수
제3장 1,2절은 전단의 끝을 맺는말인 동시에 새 단의 시작이다. 위에서 예수에게는 완전한 대제사장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말하였는고로 거기 이어, “그런 고로” 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는 동시에 새로 하려는 말의 실마리를 거기 섞어 끄집어낸다. 독자를 부르는데 특히 “같이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형제"라 하는 것이나, 2절에서 그가 모세와 같이 충성했다는 말을 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원문에는 이 양절(兩節)은 한 문장이어서 직역한다면
“……사도시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자기를 지으신 이에게 충성하기를 모세가 그의 온 집에서 한 것같이 한 그이를 깊이 생각하라.”
이렇게 된다. 즉 생각하라는 것은 그의 하나님에 대하여 충성한 사실을 생각하란 말이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제2장 말(末)에 연락을 시켜 대의를 말한다면 예수는 대제사장의 자격이 완전히 있는 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사실에 있어서 어떻게 충성했나 깊이 생각하여라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성격으로도 완전히 대제사장의 자격이 있지만 사실로도 완전히 그러하시다는 말이다. 저자가 본단에서 말하려는 것은 예수의 이루신 사실에 관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1,2절의 중점은 ‘충성’에 있다. 우리는 왜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또 그의 무엇을 깊이 생각할 것이냐 하면, 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다. 그가 충성했는고로 우리가 그를 믿을 수 있고, 믿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예수의 충성에 있다. 그가 만일 광야의 시험에서 진실하게 싸우신 것이 없었다면, 최후의 기도에서 “그러나 제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신 것이 없었더라면, 저가 눈에 보기에 여하(如何)히 놀랍고 위대한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우리가 저를 중보자(仲保者)로 믿을 수는 없다. 저가 최후까지 완전히 충성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를 신용하고 신뢰한다. 이제 만일 믿지 않으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저가 이미 충성했는데 우리가 저에게 충성치 않으면,이는 저를 저버리는 일이요 따라서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다. 세계와 인류를 위해 저가 하나님에게서 보장을 얻은 것은 이 일점 충성에 있다. 고로 모든 존재가 저에게 충성해야 된다. 충성이 곧 신앙이다. 믿는다 함은 충성을 약속함이다. 여기 충성이라 번역한 원어 피스토스(πιστos)란 말은 신앙, 피스티스(πίστις), 믿는다, 피스튜오(πιστεύω)라는 말들과 다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그처럼 충성하였나. 메시야로서의 직임(職任)을 다하기 위하여서다. 즉 인류에게 안식의 새 나라를 주기 위하여서다. 이 점에서 가장 잘 예수를 예표(豫表)한 인물은 모세다.
모세는 유대인이 잘 안다. 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압박의 고통에서 빼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그 지도자로 세운 자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사명에 충실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였다. 모든 이스라엘인이 다 완악하게 배반하고 믿지 않는 때에도 저만은 충성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내 종 모세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서 충성되니라”(민수기, 제12장 7절)
하시는 칭찬을 들었다. 이제 예수의 충성도 그와 마찬가지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와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진췌(盡瘁)한 것같이 예수는 인류를 장차 오는 참 안식의 나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기까지 충성하였다. 고로 모세를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은 또 예수를 공경(恭敬)할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모세와 예수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모세가 예수와 방불하다는 것은 그 외형에서 하는 말이요, 그 진의에서 저는 도저히 예수와 같을 수 없는 자다. 저를 만일 건축물이라면 예수는 그것을 지은 이다. 모세는 일개(一個) 지음을 입은 존재자로서 위대했거니와 예수는 하나님이 그에 의하여 만물을 지으신 바로, 그 말씀 자체이시다. 저는 충성하기는 했으되 다만 명하는 것을 기계처럼 실행한 종이었고, 이는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아들로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서 유업으로 받아 다스리시는 아들로서 충성한 것이다. 고로 같이 충성이라 하여도 그 가치가 다르다. 과연 모세는 그의 한 예표였다. 저는 저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명하시는 대로 장차 올 복음, 장차 올 안식의 나라를 증거한 것뿐이었다. 고로 그 모세의 말을 믿지 않은 자는 벌(罰)을 면치 못하였다면, 이 아들 더구나도 깊이 생각하여 듣지 않으면 안된다.
2. 하나님의 가족
그 예수의 말을 들을 사람은 누구냐. 그가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였다는 그 “하나님의 집”이란 누구냐. 우리다. 우리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다. 믿는 자는 다 그의 가족이다. 모세 때에 하나님의 집이라 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 말이었다. 그러나 저들이 참 하나님의 가족이 되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다. 저들은 한 개 표징(表徵)이었다. 모세가 예수를 나타낸 것같이 저들은 참 신령한 의미의 이스라엘을 나타낸 한 표징이었다. 믿는 자가 그의 참 가족이다. 다만 담대(膽大)할 것과 소망의 자랑을 가질 것이 그 조건이다.
저자가 이 두 조건을 말한 것은 시세를 보고 한 것이다. 저들은 환난에 직면하여 겁(怯)하려는 자들이었다. 고로 담대하라 하고 소망을 자랑하라 한다. 그러나 참 의미에서 크리스천에게 환난의 시대 아닌 때 없고 더구나 오늘에는 들어맞는 말이다. ‘담대’ 라 한말은 확신이라고도 역(譯)할 말이다. 이 담대하란 말은 세상에 대하여하란 말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그러하란 말이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담대하게 그를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 몸을 그의 가슴 안에 던져 아들 노릇을 할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 노예의 버릇이다. 그런 것을 버려야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담대한 자가 세상에 대하여 담대할 수 있다. 담대한 고로 자랑한다. 자기가 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욕심으로부터 오는 교만이 아니요 정의인 것을 자신하는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저가 세상에 대하여 소망이 없고 장차 오는 안식의 나라에 적(籍)을 둔 것을 끝까지 자랑하는 자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란 말은 듣기에만 좋은 말이 아니다. 지대한 책임이 있는 말이다. 가족 된 자에게는 집 전체의 책임이 지워진다. 하나님의 집의 화평은 그 가족에 달려 있다. 내가 만일 아들다우면 하나님은 그 거룩하신 안식 속에 계시는 것이요 내가 만일 아들답지 못하면 그의 가슴은 불안을 느끼신다.
“저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이사야, 제 63장 9절) 하고 이사야는 말한다. 우리가 안식을 잃으면 저도 안식을 잃으신다 고로 우리가 믿는 것은 근본에 있어서 저를 위하여 믿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안식을 바라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의 변태여서는 안된다. 하나님 당신의 안식을 깨뜨리지 않기 위하여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모 계심을 알 뿐이요 자기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효(孝)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가족이라면 그를 위하여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고 힘써야 할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 민족이 실패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저들은 가나안을 하나님을 위하여 들어가려 힘쓴 것이 아니요 자기네 향락을 위하여 하였다. 고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시험하는 태도에서 있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주시나, 모세가 참말 우리를 복지(福地)로 인도하는 것인가 이런 심정으로 있었다. 40년 동안 광야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을 시험한 역사였다. 먹은 것도 입은 것도 자식을 낳은 것도 싸움을 한 것도 기타 무엇을 한 것도, 하나님을 시험받아보고 증험해본 일에 지나지 않는다. 불신이다. 마음의 근본이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저들을 자기 백성으로 뽑았건만 저들의 마음은 의연히 이집트에 있던 그대로 노예의 심정이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사욕(私慾)적이고.
저들이 만일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나 광야에 나온 것이나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것이 자기네를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위한 것인 줄을 알았더라면, 즉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를 믿었다면 안식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었다. 광야 그것이 곧 안식의 나라다. 밭 갈지 않고 사냥 하지 않고 전쟁을 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그 생활은 안식의 생활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제도, 시설에서 완전히 떠난 광야는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의 상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에게 그것을 깨닫는 맘이 없었다. 미혹했다. 미혹하는 것은 ‘나’ 때문이다. ‘나’인 고로 무엇이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고기 가마를 생각하고 우물 없는 것을 걱정하고 적국의 강한 것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신뢰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 때문에 드디어 하나님의 노하심을 입어서 광야에서 망하고 말았다.
고로 이스라엘의 실패는 원인이 불신에 있었다. 모세의 지도를 그대로 신종(信從)하지 않은 데 있다. 안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이 저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것은 저들을 완전히 자기 품 안에 두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안식이 오히려 물질에 있고 인간적 노력에 있는 줄 알았다. 하나님의 도를 이해치 못하였다. 만일 정말 그것이 인간적 노력에 있는 것이라면 40년 동안에 저들은 얻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안식은 전적으로 신종하는 영혼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저들이 믿지 않은 고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할 때에는 그것이 전혀 인간적 이 아닌, 지상적이 아닌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모세로 인하여 주셨던 말을 신종치 아니한 것도 그러한 신노(神怒)를 면치 못했다면, 그보다도 더욱 충성하신 아들의 말씀은 더욱 믿어야 할 것이다. 믿지 않는 마음이 악한 마음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를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시험하는 심정을 그대로 두시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생명이 내게 허락되어 있는 동안에 힘써 믿어야 한다. 우리가 처음 시작하던 때를 생각하면 참 신뢰하는 신앙에 불붙었었다. 이집트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인 모양으로 우리 영혼을 혹사(酷使)하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만을 보고 그저 그만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조그마한 시내 광야 같은 약간(若干)한 환난을 보고 의심 하고 다시 이집트의 생활 같은 옛 종교 옛 철학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까지 굳게 잡아, 그리스도와 같이 안식의 새 나라에 참여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나왔던 사람들도 신앙을 버린즉 하나님의 노를 면할 수 없었고 보기 싫은 멸망의 시체를 광야에 드러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앙에는 특권도 없고 저축(貯蓄)도 없다. 마지막까지, 일찰나(刹那) 전에 끊어져도 소용없다.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의 진실과 그리스도의 충성에 절대의 신뢰를 두고.
4. 구약과 안식
이스라엘인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실패 원인이 불신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위험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나 저희에게나 하나님의 신실(信實)하신 약속이 있는 것이 일반인 이상에는 실패되는 일이 있을 때, 그 책임이 우리의 믿지 않는 데 있는 것은 정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는 두려운 전감(前監)이 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더욱 확신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들의 실패가 분명히 불신으로 인해 된 것이면 우리에게는 믿음으로써 그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 출발에서부터 안식을 목표로 한 것이요, 또 그 안식이 준비되지 못하였던 것도 아니요, “제7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 하신 것같이 태초부터 이루어져 있었던 것인데, 그런데도 불구(不拘)하고 그들이 거기 들어가지 못한 것은 전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우리 경험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다. 우리들 즉 믿는 우리들은 이미 이 생활에서 믿음으로 그 안식을 맛보고 있다. 안식은 장래 일만이 아니요 이미 경험한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안식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있다가 될 일이요 아직은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또 우리 소망은 마르다의 것과 같이 멀리멀리 “마지막 날 부활할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요한복음. 제11장 24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비추어볼 때 먼저 사람들의 실패의 원인은 불신인 것이 틀림없는 것이요, 그것이 틀림없음에 인류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아직 소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의심 없다.
그러나 우리 소망이 확실하다 할 때에, 그것이 우리 신앙이 저의 신앙 보다 낫다는 의미에서는 안된다. “믿는 우리들은 그러기에 안식에 들어간다” 할 때 그 깊은 뜻은, 저희와 우리의 신앙의 비교에 있지 않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종할 때, 믿지 않고 광야에 거꾸러지던 저희 보다 승(勝)한 것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으로 하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이의 신앙은 저의 불신보다 낫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 앞에 설 때, 자랑할 만한 신앙은 한 개도 없다. 하나님 에 대해 설 자로서의 자격으로 하면 우리가 구약시대의 사람보다 승(勝)하다고 할 무엇이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그때나 이제나 마찬가지로 일인의 의인도 없는 마찬가지 인간이다. 그들이 우리보다 보다 악할 것도 없고, 우리가 그보다 구경에 있어서 더 선하다 할 것도 없다. 고로 우리의 승(勝)한 것은 우리 신앙에 있는 것 아니요 우리 신앙의 대상에 있다. 우리가 위대한 것 아니요 우리가 믿는 그이가 위대하므로 우리 신앙이 위대하여졌다. 원인이 예수에 있다. 이스라엘인이 들어가지 못한 것을 우리가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저보다 의로워서가 아니요, 하나님이 그때보다 더 나은 신앙의 길을 열어주심으로써 되는 일이다. 고로 “믿는 우리들은 그러기에 안식에 들어간다” 할 때에는 제1장 첫머리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아들로 말씀하시었다” 하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엄정한 의미에서 보면, 구약 시대인의 불신의 결과를 보고 회개하여서 된 것은 아니다. 회개하기보다는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는고로 위로부터 자기편에서 예수를 보내셨기 때문에 된 일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다. 사람이 요구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은혜로 내리신 것이다. 이스라엘인이 실패할 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에 돌아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경륜의 진도를 쑥 쑥 진전시켜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일에 답보(答報)하고 있게 하시지 않고 최고 구경의 교과에까지 내밀었다. 8,9월이 되면 부지런한 자나 게으른 자나 말할 것 없이 가을의 일이 저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게으른 자라고 하여서 누런 들에 있어 봄의 일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그러하신 교수 밑에서 인류는 고난의 예수라는 과정을 맡은 것이다. 그를 치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못하는 자는 떨어질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 때문에, 그의 완전성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안식에 들어간다. 저자가 제4장에서 말하는 근본 뜻은, 일견 그러한 듯이 보이는, 이스라엘의 불신을 거울삼으라는 데 있는 것 아니요 구약에 대한 신약의 절대 완전성에 있다.
우리가 아니고 예수다, 하나님이다. 오늘날의 위대는 오늘날 사람에 있는 것 아니요 오늘의 복음에 있다. 옛 사람의 실패는 원인이 그 불신에 있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나, 더 깊이 말하면 그들이 받았던 율법 그 자체의 불완전에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인을 갈라놓을 때, 하나는 전한 자요 하나는 믿지 아니하는 자였다. 그러나 통틀어 하나로 볼 때, 저희는 다 같이 ‘옛날’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때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마가복음」, 제10장 5절) 부분적으로, 예비적으로, 비유적(譬喩的)으로밖에 말씀하실 수 없으시던 때이다. 그때 저들에게 보여 주신 것은 모두 참 것 그대로가 아니요 이 세계적으로 번역(翻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 것 그 자체, 완전 그 자체가 왔다.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가. 그러면 구약 그자체가 무엇이라 말하나 들어보라. 모세가 약속했고 여호수아가 그대로 실현하여 이스라엘 후손을 인솔하여 가나안에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그 후에 허구한 세월이 지나간 후 오히려 ‘오늘’이라는 날을 다시 정하여 다윗에 의하여 말씀을 하시었으니, 그러면 여호수아가 준 안식이 참 안식이었으면 그러하실 필요가 어디 있을까. 이것은 그것으로서 참 안식의 약속이 완성되지 않은 것임을 말하는 일이다. 고로 참 안식의 약속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얻게 하는 것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것 그 자체, 최종적인 것 그 자체가 우리 눈앞에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 들어가야 한다.
5. 하나님의 안식
여호수아는 과연 이스라엘에 안식을 주지 못하였다. 저희가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거기는 젖과 끌이 흐르는 땅이요, 거기서 즐거이 하나님을 길이 섬길 줄 알았으나, 들어간 후는 결코 그런 것은 아니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정치로 경제로 환난이 쉬지 않았다. 기대했던 대로 가나안에서 이족(異族)을 다 몰아내지도 못하였고, 다윗, 솔로몬의 영화도 일시요 미구(未久)에 일족이 남북으로 분립하여 반목질시(反目嫉視)하며, 적국의 강압과 침입에 구차(苟且)한 생활을 더듬기에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저자가 여호수아가 참 안식을 주지 못했다 할 때는 그것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설혹 이스라엘인이 가나안에서 태평한 제정일치의 이상적 국가생활을 하였다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안식일 수는 없었다. 안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참 안식은 사람의 영혼 상(上)에 있다. 이스라엘인이 안식을 얻기에 실패한 것은 여호수아의 재능의 부족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기타 누구의 부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안식은 지상에는 있지 않다는 것, 물질에는 있지 않다는 것, 이 세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하는 말이다. 안식이 이 세계의 생활에 투영되는 것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식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 것은 이 안식의 이 세계적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고로 그들은 참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림자 그것조차도 얻지 못하였다.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제일을 쉬기를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는 것 같이 하였다.” 우선 ‘그의 안식’이다. 하나님의 안식이다. 참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이다. 인간의 연구 노력으로 인간끼리 만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있는 안식이다. 하나님이 만일 신령한 하나님이요 진리의 하나님이라면, 안식도 영에 있을 것이요 진리에 있을 것이다. 재능에 있고 힘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자기 일을 쉬는’ 것이 안식이다. 인간이 자기 일을 쉬어야 한다. 인생고를 면하여야 한다. 국가생활이 아무리 향상이 되어도, 문화가 아무리 발달이 되어도, 종교가 왕성하여도 인생에게는 인생고를 빼주지 못하는 한 그것이 안식은 아니다. 알렉산더의 나라가 없어지고 로마 대제국이 없어져도 인생은 깉었다. 인생의 사실과 그 고통은 생활 자료의 향상(變更)과 그를 위한 기술의 발달이나, 거기 대한 해석의 여하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향락에 취함으로, 혹은 사업에 열중함으로, 혹은 학문으로 해설함으로, 혹은 의지로써 단련함으로, 혹은 종교 속에 피함으로 이것을 면해보려 하나 그것으로써 결코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다 된 줄 알고 좋아하는 때에, 칼로 찍은 그림자 모양으로 의연히 살아 있어 힘 있는 목소리로 “아니, 거짓말이다” 하고 일어난다. 내 목을 찍지 않는 한, 그림자의 목은 찍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인생고도 근본적인 어떤 것을 행하기 전까지는 아니 없어진다.
인생은 일하는 자다. 일하는 것이 인생이다. 짐을 진 것이 인생이다. 천지간에 일을 하는 존재는 저만이다. 개미는 제 몸보다 몇 배 되는 것을 입으로 물어 옮겨도 그것을 노고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기러기는 먹을 것을 찾아 남양에서 북양으로 날아도 그것을 원정이라고는 아니한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노동이 있고 고통이 있다. 일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곧 일이다. 몸은 상하의 인력 안에 있고 마음은 좌우의 선악 속에 있다. 먹을 것을 지고, 입을 것을 지고, 가정을 지고, 국가를 졌을 뿐 아니라, 우주보다도 무거운 제 자신을 지고 있다. 코끼리나 하마도 제 몸이 짐이라는 말은 없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 인간은, 제 자아를 짐이라 하여 벗기를 애쓰고 있다. 그리고 자아가 이미 짐이 되었는고로 저는 모든 것을 일로 보고, 짐으로 해석한다. 나비가 제멋대로 날고 새가 제멋대로 소리하건만, 혹 춤을 춘다 하고 혹 운다 하며, 개구리 제대로 푸르고 자벌레 제대로 뻗쳤건만, 혹 보호색이니 혹 의태니 한다. 왈 생존경쟁 왈 상호부조, 저의 눈에 노동은 세계의 핵심에까지 먹어 들어갔다. 저의 아는 생명은 짐 진 생명이요 저의 아는 세계는 탄식하는 세계다. 저는 여기서 빠져나오려 애쓴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안식이다. 안식은 꾸미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설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실이어야 한다. 실재여야 한다.
고로 그것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듯이 하는 것이어야 한다. 절대 안식이다. 다른 사람보다 좀더 부(富)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보다 좀더 편의(便宜)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안심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국제간에 평화조약을 맺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고 교회사업을 진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영혼이 아버지 품 안에 아버지와 한가지로 평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고로 모든 인간적 노력은 면직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아무런 일을 하더라도 자기를 안식의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이 세계의 어디서도 안식의 나라는 발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생이 지는 그 짐은 인생 자기가 집어서 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은 이마에 땀을 홀려야 먹는 그 운명을 자기 스스로 만든 것 아니다. 고통하는 양심을 제 스스로 지어 가진 것 아니다. 자기를 죽은 자로 만든 것이 자기 힘으로써 한 것이 아니다. 저는 짐 지움을 받은 자다. 인생고를 지움 당한 자다. 그러면, 이미 제 힘으로 진 것 아니요 남에게 지움을 당했다면 그것을 벗을 능력이 제게 없는 것도 정한 일일 것이다. 스스로 제 머리털을 검게 한 것이 아니어든 또 그것을 희게 할 수가 있을리 없다. 창세기는 가르친다. 인생이 짐을 지게 된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저의 육신이 땅의 법칙에 매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소위(所爲)시요, 저의 혼이 사탄의 세력에 속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시다. 고로 저에게 안식이 오는 것은 오직 한길밖에 없다. 사람에게서 평안을 빼앗았던 하나님 자신이, 노동을 주시고 짐을 지워주셨던 바로 그이가, 몸소 이를 벗기고 다시 주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 안식 외에 다른 안식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열심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 순종치 아니 하는 본을 따라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인생에게 노고를 주고 안식을 빼앗은 권능은 하나님께 있을지라도 그 원인은 인간에 있다. 인간이 죄를 범한 고로 하나님은 그 양심 위에 부끄럼을 일으키시고 공포를 일으키시고 의혹을 일으키시고 증오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인간이 짐을 지게 되었는고로 세계는 고(苦)의 세계가 되게 되었다. 러스킨은 말하기를 “노동이란 생명이 그 반대물에 대하여 항쟁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나중자에게도』) 생명이 반대물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인간을 대표자로 삼는 세계의 이야기다. 죄가 곧 반항이다.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다. 인간이 반항을 일으켰는고로 하나님이 저에게 대하여 반대물을 일으키셨다. 고로 안식을 위하여 인간의 할 일은 하나님에게로 붙어 이를 얻기 위해 스스로 순종에 돌아가는 한 가지 일 외에 없다. 즉 죄의 자아에 대하여 죽는 일이다. 무덤 밑에 들어간 육체가 평안에 있는 것같이 사(死)의 휘장을 통과한 저쪽의 인간만이 안식을 얻는다.
그리고 ‘열심으로’ 하라고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열심으로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에게는 깊이 배울 말씀이다. 현대문명에 가장 결핍(缺乏)된 것은 안식이다. 어디를 가든지 불안과 초조와 의혹이다. 세계 전쟁이 일어나서가 아니다. 이것이 있어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세계 전쟁 같은 것은 화산구 밖에 나온 연기와 음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 밑에 보이지 않는 열과 와사(瓦斯)에 있다. 금일의 세계를 위하여 열과 와사가 된 것은 안식의 이상을 잃은 근세 인심이다. 세계의 일을 위하여 큰 말을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참 안식의 의미를 알고 안식을 이상으로 하는 인생관에 돌아온다면 세계는 얼마나 나아질는지 모른다. 고통을 긍정하는 사상은 일견 매우 장한 듯하면서 무서운 해독을 가지는 사설(邪說)이다. 인간은 활동해야 한다. 안식이란 것은 없다. 고통과 싸우면서 일하다가 일터에 거꾸러지는 것이 인류의 이상이다. 완전에 도달되어 평안히 쉰다는 세계는 올 수도 없고, 온다 하여도 가치가 없다. 인류의 생활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오직 일이요 고통이다.一이런 따위 말들을 들을 때 대단히 장쾌(壯快)하게 들리고 젊은 맘을 정복하려는 매력(魅力)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니다. 현대인을 몰아 기계와 모험의 종으로 만들고 희생으로 만든 것은 이 사상이다. 억만의 생령(生靈)을 몰아 야수(野獸)로 만든 것도 이 사상이다. 이것은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고역이 습성으로 된 이스라엘인 모양으로 사탄에게 잡힌 현대인의 심리(心裡)에 변태적(變態的)으로 일어난 사상이다. 끝없는 활동, 끝없는 고역에 가치가 있다는 사상은 노예의 심정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요. 아버지를 아는 아들의 심정에서 나올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 제대로 있게 하라, 그럴 때 저의 이상은 저의 평생의 소원은 안식에 있다. 서는 때보다 앉는 때가 좋고, 일하는 것보다 쉬는 것이 쾌(快)하고,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즐거우며 근심 있는 때보다 없는 때가 좋은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일을 면하고 평안히 쉬기를 요구하는 것은 본능인데, 하나님이 이 본능을 사람의 생명에 넣어주신 것은 저에게 안식의 나라를 과제로 주신 증거다. 일을 싫어하는 것이 옳다는 것 아니다. 쉬는 자리에 가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일을 회피하여서 안식은 오지 않는다. 진짐은 충실히 지는 것이 그 벗는 방법이다. 우리는 안식을 얻기 위해 용감히 짐을 질 것이다. 최후까지 질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지지는 않는다. 벗기 위해 진다. 벗기 원하는 고로 충실히 일한다. 끝없는 고통을 긍정하는 자는 도리어 그 때문에 회피하고 속인다. 세계 인류간의 일체 불합리한 일은 이 짐을 속이려는 불합리를 범(犯)한데서 나온다. 사탄이 인류를 유혹하여 낙원을 내놓고 나오게 할 때에 그 앞에 세운 깃발에 쓴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간사(奸詐)한 노력이었다. 고로 하나님이 이 안식의 가치를 모르는 자를 가르쳐 깨닫게 하기 위해 노동의 짐을 지우셨다. 저가 만일 그 짐을 충실히 진다면 노동의 의미를 깨달을 터이요, 노동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 안식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다. 그날에 저는 신앙에 돌아올 것이다. 노동문제는 지극히 깊은 문제다. 노동문제의 변형된 것이 경제문제요, 식민지문제요, 외교문제요, 전쟁이다.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세계 인류문제를 해결하는 자다. 그리고 그것은 안식의 이상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6. 하나님의 사신 말씀
안식은 인류의 이상이다. 이상인 고로 우리가 거기 들어가는 것은 의무다. 이상이란 것은 거기 갈 사람은 가고 아니 갈 사람은 아니 가고, 자유선택으로 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요, 사람인 담에는 누구나 다 가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안식은 인생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사람에게 명하셨다. 명하신 것만 아니라 약속하셨다. 약속이란 묶는 일이다. 붙들어 매는 일이다. 그로 인하여 그것을 지은 두 사람은 의무로 붙들어 매이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그의 안식을 약속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는 안식에 붙들어 매어졌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인류에서 그것을 성취하실 일에, 우리는 거기 순종하여 들어갈 일에. 고로 그 약속을 어기는 날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은 내 자유라고 인간은 말하나,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말이요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믿기를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듣지 않는 자를 멸하여 버리신다. 무한의 은총(恩寵)을 내리신다. 그러나 그 대신, 받지 않는 자는 그의 진노(震怒)로써 소멸하여버리신다. 저의 앞에는 아들이냐, 그렇지 않으면 원수가 있을 뿐이요, 중성적인 타인이란 것은 없다. 고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할 때에 즐거운 상급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또 무서운 의무가 남아 있다. 저자가 열심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라고 권하는 말에 뒤이어 “순종치 아니하는 본(本)을 따라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 경고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2,3절은 거기 대한이유를 설명하는 말이다. 왜 하나님의 안식의 약속에 순종치 아니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능력이 있고 날카롭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하여 혼과 영, 관절과 골수(骨髓)를 꿰뚫어 쪼개고, 가슴 속의 생각이며 뜻을 감찰하신다. 또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의 앞에서 감추인 것이 없고, 만물이 그의 앞에서 벗은 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 죽은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말은 생명이 말라 죽어버린 껍질에 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히 사신 말씀이다. 예수는 단(單)히 역사상의 인물만이 아니요, 성서는 단(單)히 역사적 문서만이 아니다. 항상 살아 있는 인격이다. 고로 그 말씀은 사물(死物)로, 일편의 교훈으로 일개의 사상으로 취급할 수 없다. 사물(死物)은 용이(容易) 무시 할 수가 있고 속일 수 있다. 그리한다하여도 하등의 반항을 하는 것이 없다마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렇게 대접할 수는 없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인간의 말로 알아 무시하고 속였던 이스라엘인은 광야에 엎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일 아무 생명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안식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있고 혹은 형식적 종교로 응대(應對)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간 것으로 안식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수도원에 잠복(潛伏)하는 것 혹 설교를 하고, 태연자약(泰然自若)하는 의지를 단련하는 것으로 안식에 들어간 것이라고 속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기 때문에 생명이외의 아무런 가장물을 가지고도 속일 수 없다. 아나니야와 마찬가지로 다된 줄로 아는 때에 대갈일성(大喝一聲), 영혼의 근저에서부터 가루를 만들어버리고 만다. 개인의 양심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다.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취급하고 도덕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그리하여 끝없는 분투경쟁으로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죽은 것으로 대접하는 20세기 인류에 대하여 하나님의 하신 대답은 폭격기와 수뢰(水雷)와 전차의 “음성과 번개와 우뢰와 우박(雨雹)과 기근(飢饉)”이었다.
살았기 때문에 능력이 있다. 권능이 있고 운동력이 있다. 아무런 것을 가지고도 양심 안에 부르짖는 하나님의 안식의 요구의 말씀을 부정하고 억눌러버릴 수는 없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양심 위에, 너와 나 사이에 안식이 있게 하라고 약속의 이행(履行)을 요구하신다. 어떤 자는 이것을 연석(宴席)에서 하는 가무의 소리로 눌러버리려 하고, 어떤 자는 사업의 폭풍 속에 날려버리려 하고, 혹 어떤 자는 연구의 시험관 속에 유폐(幽閉)해 버리려 하나 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한한 능력이 있다. 불능을 모르노라고 억만의 민중을 채찍 끝으로 몰아내던 프랑스의 대황제 나폴레옹으로도 이 양심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종내 항거할 수는 없어서 고도(孤島) 속에 비명(悲鳴)을 발하면서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 힘이 강하면 외계의 모든 것을 내게 억지(臆志)로 복종시킬 수 있고, 변설(辯說)이 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내 주장을 설득시킬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잘하면 일세를 속일 수 있고, 썩 잘하면 영원히 위선자로 깉을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의 심판은 막아낼 수가 없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목 베었으나 죽은 것은 요한이 아니요 헤롯이었다.
또 그 말씀은 능력 있을 뿐 아니라 날카롭다. 좌우에 날선 예리(銳利)한 칼이 관절과 골수의 얼크러지고 복잡한 것과 깊고 세미(細微)한 것을 일일이 쪼개는 것보다도 더 날카롭게 사람의 혼과 영의 깊고 깊은 데, 생각의 미묘 세미한 것을 쪼갠다. 강한 전류같이 세포에서 세포까지 통치 않는 데가 없고, X광선처럼 구석에서 구석까지 비치지 않는 곳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꾸밀 아무 것이 없고 감출 아무 것이 없다. 속사람 그대로가 사실 그대로가 백일하에 폭로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여서 경험하는 것은 자기의 자아가 쪼개어진 것이다. 제단 위에 놓은 희생같이 그 인격의 복판이 쭉 쪼개어져서 어찌할 수 없이 그 면전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여실하게 보신다. 내 아버지에게 아니 보였던 것, 내 아내 내 친구에게도 아니 보였던 것, 내교회 교우에게도 아니 보였던 것이 그의 눈앞에는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날카로운 그 말씀은 우리 생각의 지극히 사소(些小)한 일편이라도 그대로 두시는 것이 없다. 그 근본이 무엇인지 그 결국이 어떠한지를 그대로 폭로하시고 해부하시고 분석하시고 판단하신다. 거기는 일호의 어물쩍함이 있을 수 없고, 일분의 가차(假借)가 있을 수 없고, 일언의 변명이 있을 여지없다. 예의와 학문과 지위와 재조(才操)의 일체 꾸밈, 일체 외의(外衣)가 아무 효능을 발하지 못한다. 인간의 눈은 그렇게 잘 가렸고 내 자신의 눈까지도 그럴 듯이 속였던 모든 가장수식(假裝修飾)이 다 떨어지고 만다. 과연 우리는 벗은 채로 드러난다. 두려운 일이다. 인간에게 무서운 것 중에 벗는 것만큼 심한 것이 어디 있을까. 사람의 하는 온갖 일이 결국 나란 것을 잘 뵈도록 옷 입히자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을 벗겨버린다는 것은 저에게 죽는 것보다 더한 일이다.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심판은 이 벗은 채로 드러남이다. 낙원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깨친 아담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은 것은 자기의 벗은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묵시록의 기자(記者)는 최후의 심판도 이 벗은 채로 드러난 일이라고 한다. 그만 아니라 사람이 그 중간에 사는 동안 날마다 경험 하는 것도 벌거벗기우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범할 때마다 그는 우리를 벌거벗겨 자기 앞에 내세우신다. 그 무서운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한 그의 안광을 피하려 하여도 무용이다. 내가 산에 가면 산에도 그것이 있고 바다 밑에 들어가면 바다 밑에도 있고 골방에 숨으면 골방에도 있다. 뜬 눈이나 감은 눈이나 내 벗은 꼴을 보시는 하나님의 안광에 마주 치지 않을 눈은 없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으로 더불어 관계가 있다. 우리가 더불어 약속한 하나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인조(人造)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사상으로 인조하여 놓은 하나님이라면, 그이와 약속은 우리 편의에 따라 조처(措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신 하나님이요 쪼개시는 하나님이요 폭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고로 우리는 저와 방편의 종교를 가지고는 거래할 수가 없다. 의식 종교를 가지고 그를 섬길 수 없다. 오직 진실로만, 지성으로만 가능하다. 저의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하여서만 안식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있다.
7. 굳게 잡으라
그러나 그런 하나님에 우리는 과연 견딜 수 있을까. 하나님이 그러하신 하나님인 것을 알 때 누구나 느껴지는 것은 자기의 철저적 무력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 앞에 어떤 인간도 나설 수 없다. 저가 완전하신 것같이 누가 완전해낼까. 저가 지성이신 것같이 누가 지성일 수 있을까. 여기 큰 비애가 있다. 인간은 벌써 생명의 본상(本相)을 잃어버렸다. 저는 진실하려 해도 진실할 수가 없고 하나님에게 직진하자 해도 다리가 무력하여진 자다. 폭풍우의 대하를 격(隔)하고 부르짖는 늙은 아버지같이 하나님은 창조 이래 인간을 향해 그 품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짖으셨다마는 인간에게 그리 출발하여 일어설 힘이 없어졌다. 그런 고로 이제 구원의 길은 저쪽에서 오는 것 외에 있을 수 없다. 14절에 “그러면”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철저히 무력한 것이라면, 그러면 이제 저쪽에서 보내신 예수를 믿는 일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격이 어떤 모양으로 대하의 저쪽에서 건너왔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눈이 뜨여 본 것은 우리에게서는 나을 수 없는 듯한 한 인격이 우리에게서 떠나서 탁류(濁流)를 뚫고 건너가는 것이요, 그리고 모든 인간에 향하여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모든 하늘들을 지나 올라가신 위대하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이때까지 시험해오던 모든 기계를 다 집어던지고 이대로, 이 벗은 채로, 이 파산당한 인격 이대로 저를 따라나서라는 것이다. 저를 따라나서면 저가 힘을 주고 부끄럼을 가릴 옷을 주신다는 것이다. 고로 위대하신 대제사장이다.
그런 고로 우리 할일은 “그 신앙을 굳게 잡는” 것이다. 제1단에서 우리는 그의 말씀을 주의하여 들을 필요가 있었고, 제2단에서 그의 인격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이 제3 최종단에서는 우리는 그의 이루신 일을 굳게 잡을 필요가 있다. 굳게 잡는 것은 전신을 맡기는 일이다. 듣는 것이나 생각하는 데 멈출 것이 아니라 전신전력으로 거기 매여달리지 않으면 안된다. 신앙은 생애다. 산사람 외에 또다시 사람이 없고 믿어 사는 생애 외에 또다시 생애가 있을 수 없다.
저는 약한 인간이 되어 그 하잘것없는 모양을 하나님의 날카로운 안광 하(下)에 폭로하여 본이다. 고로 인간의 어디 약점이 있고, 어디 아픔이 있고 어디가 부끄럽고 어떻게 떨리는지를 낱낱이 경험하여 얻은 이다. 고로 저는 인간을 개조할 수 있는 이다. 고로 우리는 저를 따라 담대히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직진한다! 이 수천 년 더러운 역사를 가지는 조선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에 직진한다. 그 더러운 피의 결정으로 나온 이 내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서 그를 직시할 수가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진실하신 저가 약속하시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어찌하여 가능하냐. 은혜로써다. 한량없는 은혜로써다. 우리가 그를 의심하고 받지 않으면 저는 우리를 미진(微塵)으로 부수신다마는 신수(信受)하는 자는 그의 광명의 대(大) 해변(海邊)에 거문고를 들고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