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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61. [역경의 열매] 손봉호 (1-30) 해마다 생일이면 가난과 죽음의 아픈 어린 시절 떠올라
굶주림·전염병에 시달리던 일제강점기
아이들 중 절반이 한돌 전 세상 떠나자
선친께서 1년 기다렸다 늦게 출생신고
일제 강점기 시절 경북 포항 북구 상원동의 거리 풍경. 포항시 제공
내가 태어난 곳은 이원수 시인의 고향처럼 봄이 되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학야리다. 지금은 포항시 북구다. 그러나 나에게 각인된 고향의 풍경화는 그런 ‘꽃 대궐’이 아니라 가난, 배고픔, 아픔, 죽음으로 점철된 잿빛 세상이다.
나는 평생 매년 한 번씩 그 어두운 풍경을 떠올려야 한다. 내 생일에 그 아픔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1937년 5월 14일(음력)에 태어났지만 1938년 8월 18일에 출생 신고가 이뤄져 그날이 나의 공적 생일로 정착되었고 지금까지 그 가짜 생일을 지켜 왔다. 수십 년간 정직 운동을 했는데 80 평생 가짜생일을 지키고 있으니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에 태어난 아이들은 거의 절반이 한 돌 안에 죽었기 때문에 선친께서 1년을 기다리셨다가 그래도 죽지 않으니 출생신고를 하신 것이다. 내 동생들은 넷이나 돌 안에 죽었고, 그 죽음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가슴에 멍이 되었으며 우리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오후반에 등교한 동생이 오전반에서 공부하던 나를 찾아와 “히야(형아), ○○가 죽었다”고 알려줬을 때 어린 가슴에 차올랐던 슬픔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 일찍 죽음의 아픔을 경험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초여름, 학교 수업을 마치고 혼자 가랑비를 맞으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아기를 업은 젊은 부인 하나가 들길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토성동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고 물으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왜 우시느냐고 물었더니 등에 업은 아기가 아파서 병원이 있는 안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아기가 방금 죽었다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정신이 혼미해져서 방향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비가 억수로 내린 그 날 밤이 새도록 흐느껴 우셨다. 그 젊은 어미가 너무 불쌍하고 얼마 전에 죽은 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입도선매(立稻先賣)라 하여 벼 추수가 이뤄지기 전에 면사무소 직원이 논에 바로 와서 공출할 곡식 양을 결정하고 추수가 이뤄지면 즉시 빼앗아 갔으니 주민들이 굶는 것은 당연했다. 어렸기 때문에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소나무 껍질은 질겼고 칡뿌리는 쓰기가 짝이 없었다. 그런 굶주림은 일제 때뿐만 아니라 해방된 후 상당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거기다가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고 말라리아는 주기적으로 유행했다.
주린 데다 병까지 걸려도 병원은커녕 약도 없어서 살아남는 것이 기적이었다. 보릿고개에는 쪽박을 들고 밥 얻으러 오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없지 않았다. 모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을 어느 집에도 대문이나 자물쇠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도둑맞은 집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약력=1938년 출생,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철학박사,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한성학원 이사장,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밀알복지재단 이사장, 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현 푸른아시아 이사장
* [역경의 열매] 손봉호 (1) 해마다 생일이면 가난과 죽음의 아픈 어린 시절 떠올라
* [역경의 열매] 손봉호 (2) 배움 한 맺힌 아버지 덕에 가난했지만 대학까지 진학
* [역경의 열매] 손봉호 (3) 산수 기호를 한문 숫자로 오인… 1+1=14로 풀어 매번 0점
* [역경의 열매] 손봉호 (4) 학교 앞 논둑 총살 장면, 80년이 지났어도 눈에 선해
* [역경의 열매] 손봉호 (5) 대포와 비행기의 사격과 폭격에 잿더미 된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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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손봉호 교수 (30·끝) 교육자로서 학생 가르치며 일생 보낸 것은 큰 축복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역경의 열매] 손봉호 (2) 배움 한 맺힌 아버지 덕에 가난했지만 대학까지 진학
천재라 할 만큼 공부에 소질 있던 아버지
신식 교육 받으려면 상투 잘라야 하는데
유학자 증조부의 극구 반대에 입학 좌절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4년에 치러진 경북 포항 기계초등학교 1회 졸업식 사진. 손 교수는 이 학교 27회 졸업생이다. 기계초등학교 제공
비록 가난했지만 나는 특혜를 받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그 지역에 흔하지 않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가정에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문을, 어머니는 한글을 읽고 쓰실 수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유일했고 주위에도 드문 경우였다. 아버지는 그 동네뿐만 아니라 이웃 동네까지 수많은 가정들의 제문(祭文)을 맡아 지으셨고 어머니는 혼사를 치른 부인들의 사돈지를 모두 대필하시거나 대독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분들이 가끔씩 감사의 표시로 가져 온 떡이나 한과를 먹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선친은 독자였는데 가히 천재라 할 만큼 뛰어난 지적 능력을 소유하셨다. 증조부로부터 기본적인 한문을 배우셨지만 그 후에는 독학으로 소학(小學) 대학(大學) 주역(周易)을 공부하셨고 한시(漢詩)도 쓰셨다. 가끔 한문으로 된 삼국지를 큰 소리로 외우시는 것을 듣곤 했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였다. 우리 동네에서 2㎞정도 떨어져 있는 면사무소 소재지에 기계국민학교가 개교했다. 아버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시고 그 신식 학교에 입학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러나 완고한 유학자였던 증조부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다니지 못하셨다. 학교에 가려면 상투를 잘라야 하는데 증조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은 바뀌었고 상투는 사라졌다. 그렇게 원하셨던 신식 교육 받을 기회를 놓친 아버지의 실망은 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때 학교에 다니시고 계속해서 신식 교육을 받으셨더라면 아버지는 꽤나 유명한 인사가 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고 싶던 공부를 하지 못하신 것이 큰 한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젊었을 때부터 술을 많이 드셨고, 그 때문에 생긴 위장병은 온 식구의 걱정거리였고 아버지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배움에 대한 한은 아버지로서는 크나 큰 아픔이었지만 나와 동생들에게는 큰 복이 되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동생이 그 동네에서 가장 먼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여동생 둘도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모두 선친께서 이루지 못하신 꿈을 자식들이라도 이루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훗날 내가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도 그 지역에 유학자로 알려지신 아버지께서는 별로 반대하지 않으셨는데 이 또한 상투 자르기를 허용하지 않은 유교의 고루함에 불만을 품고 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종가 시제에 제관으로도 참여하셨다. 하지만 내가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꾸짖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죽은 뒤에는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제사에 참석해라”고 딱 한 번 부탁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말씀도 순종하지 못한 것은 두고 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3) 산수 기호를 한문 숫자로 오인… 1+1=14로 풀어 매번 0점
집안 행사 있으면 결석 당연시 될 시기
산수 기호 배우는 날 학교 결석한 탓에
더하기, 빼기, 등호 등 기호 이해 못해
1950년대 한 초등학교의 수업 풍경 모습. 손 교수도 비슷한 시기에 국민학교를 입학해 다녔다.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제공
1945년 4월에 입학시험에 합격해서 기계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해방이 된 8월까지 교실에 앉아 공부한 기억은 없다. 일본군용 목탄차 연료로 쓰이는 솔방울을 줍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해방이 되자 한글을 아는 교사가 한 분도 없어서 교회에 다녔던 4학년 학생(후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된 고 박석규 목사님)이 전교생과 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에서는 한글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불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한글에 능통했다. 얼마 후에는 면사무소 추천으로 우리 어머니도 동네 아낙네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셨다.
어쨌든 우리가 한글을 잘 배웠는데도 읽을 책이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임진록’이라는 필사본 소설 한 권밖에 가지신 책이 없었고, 그 책을 하도 여러 번 읽으셔서 몽땅 외우실 정도였다. 어떤 학생이 어쩌다가 한글로 된 동화책이나 만화책 한 권을 구하면 전교생이 돌려 읽을 정도로 책에 목말라 있었다. 얼마 후 처음으로 교과서가 배부된 날 나는 산수 책을 포함해서 모든 책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날 밤에 다 읽어버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해방으로 학교는 상당기간 갈피를 잡지 못했고 학부모들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몰랐으므로 모심기, 타작 등 집에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결석했다. 그러나 짬짬이 할아버지로부터는 천자문을 배우고, 아버지에게 한문 배우러 오는 동네 청년들 뒤에 앉아서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夢扁),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옛날 서당에서 사용했던 한문 교과서를 같이 배웠다.
그런데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다. 3학년 때까지는 전 학급에서 꼴찌였는데 산수 과목에서 계속 0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성적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셔서 꾸짖지 않으셨고 나도 왜 산수를 그렇게 못하는지에 별로 애달아하지 않았다. 4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 -, = 등이 더하기, 빼기, 등호란 것을 알았다. 한문을 배운 덕으로 3학년때 까지는 +는 10, -는 1, =는 2라고 이해해서 1+1=14란 식으로 이해했으니 0점 받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 산수 기호를 배우는 날에 결석했던 것 같다. 한 학급에 학생이 거의 70명이나 되었으니 담임교사도 나의 산수 0점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 글자가 한문 숫자가 아니라 산수 부호란 것을 알고부터는 산수에도 100점을 받아 4학년 때부터는 학급에서 늘 1, 2등이 되었다. 늘 꼴찌였던 녀석이 갑자기 1등이 되니까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와이로(뇌물)’ 준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부모님은 꼴찌였을 때도 꾸짖지 않으셨지만 1등이 되었을 때도 칭찬하지 않으셨다. 옛날 서당에는 1등, 2등 같은 것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공부하란 말씀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덕으로 공부는 나 자신의 몫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아들, 딸, 손녀들에게 일찍 자라고만 했지 공부하란 소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4) 학교 앞 논둑 총살 장면, 80년이 지났어도 눈에 선해
공산주의 이념에 매료된 빨치산들
한밤중 마을 급습 식량 등 빼앗아
그들 가운데 전향한 보도연맹 사람
6·25전쟁 나자 재전향 우려해 제거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 부역 혐의자들이 연행되고 있다. 국민일보DB
배고픔과 질병 다음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어둡게 했던 것은 공산주의란 이념이었다. 물론 나는 그 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나쁜지는 전혀 몰랐다. 나뿐 아니라 그 시골 주민 대부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깊은 산골에 그 이념에 매료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걸핏하면 빨치산들이 한밤중에 마을에 들이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에는 악독한 지주나 부자가 없었기 때문인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거나 집에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뜩이나 부족했던 식량과 생필품은 많이 빼앗아 갔다.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 아버지만 신문을 구독하셨는데, 그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지 빨치산이 동네에 내려왔을 때마다 예외 없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찾았다. 다행히도 빨치산들 가운데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이 급습할 때마다 미리 귀띔을 해 준 덕으로 아버지는 동네 다른 집으로 피신하실 수 있었다. 파출소가 2㎞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버지를 찾아 온 동네를 뒤질 정도로 시간을 끌지는 못했고 아버지가 그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매번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이 지나 간 다음날에는 반드시 순경이 찾아왔다. 왜 그놈들에게 식량을 주었느냐고 다그쳤지만 어쩔 수 없어 빼앗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파출소로 잡혀가진 않았다. 아버지께서 피신하신 것도 빨치산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오해를 받고 파출소에서 시달리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쨌든 무고한 양민은 이래저래 힘들기만 했다.
빨치산 가운데 상당수는 잡히거나 전향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전향한 사람들은 보도연맹이란 단체에 소속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이 다시 좌익으로 전향해서 북한군을 도울까 남한 정부는 그들을 제거하기로 한 것 같다. 그 상세한 곡절은 잘 모르지만 어떤 재판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보도연맹 사람들을 군인들이 총살하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내가 다녔던 기계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총살하겠다는 것을 교장 선생님이 애걸해서 학교 바로 앞 논둑에서 집행했는데 전교생이 창문을 통해서 보고 말았다. 평생 처음, 그것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총으로 사람을 직접 죽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가? 80년이 지났는데도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친구의 아버지 한 분도 그 시대에는 좀 개명된 분이었는데 보도연맹에 소속되었다가 총살당했다.
돌이켜보면 이념 때문에 우리만큼 고통을 많이 겪은 국민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념 갈등이 다시 심해진 오늘날 성숙한 시민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념에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반성하고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5) 대포와 비행기의 사격과 폭격에 잿더미 된 우리 집
상당기간 동네 앞이 최전방 전선 돼
온가족 흩어져 안전지역 찾아 숨어
내가 폭탄 맞았단 소문 들은 어머니
불타는 집 두고 혼비백산 찾아다녀
대전시가 지난해 공개한 ‘한국전쟁기 대전 기록영상 발굴’ 중 폐허가 된 대전시가 모습. 대전시 제공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난 갈 겨를도 없이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연합군의 저항으로 인민군은 그 이상 진격하지 못해서 상당 기간 우리 동네 앞 어뢰산이 최전방 전선으로 남아 있었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인지 인민군은 주민들에게 매우 친절해서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두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게 됐다. 오히려 주민들의 진짜 공포는 유엔군이 산 넘어서 쏘아대는 대포와 비행기가 가하는 기관포 사격 그리고 폭격이었다. 아무도 어디에 피해야 할지를 몰랐으니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나름대로 판단하는 안전지역에 가서 종일 숨어 지냈다.
그때 우리가 얻었던 유일한 정보는 대포알은 한 번 떨어진 자리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으므로 그 자리가 가장 안전하다는 것, 비행기가 폭격할 때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방향과 정 반대쪽으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직접 목격했지만,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은 얼마 동안 비행기와 같은 방향으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이 선호했던 곳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윗부분이 튀어나온 큰 바위 밑이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이 비행기가 쏘는 기관포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연합군 비행기가 처음으로 마을을 폭격했다. 들판을 걷고 있는데 비행기 한 대가 낮게 날아오면서 새까만 폭탄을 떨어트렸다. 떨어지는 폭탄을 쳐다보면서 나는 비행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힘껏 뛰어가서 가까운 언덕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 비행기가 사라지자 집으로 향해 갔더니 우리 집 안채가 불타고 있었다. 동네에서 우리 집이 최초로 폭격을 당한 것이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온 식구와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불을 끄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가 폭탄을 맞았다고 어머니께 잘못 말해서 어머니가 불타는 집을 그대로 두고 나를 찾으러 정신없이 뛰어다니신 것이다. 얼마 후에 살아있는 나를 발견하시고는 끌어안고 많이 우셨다.
그 지역에 전투가 계속되자 더 버틸 수가 없어서 우리는 길도 없는 산을 넘어 북쪽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연합군과 인민군 군인들이 서로 총을 쏘아대는 데 그 사이로 허리를 굽히고 뛰기도 했다. 전선이 북쪽으로 물러가자 동네로 다시 돌아왔는데, 폭격이나 대포로 죽은 사람보다는 인민군이 묻어놓은 지뢰를 밟아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다시 개학한 학교로 가는 길가에는 온갖 종류의 총, 총알, 수류탄 등이 무수히 깔려 있었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적군, 아군의 시신들이 곳곳에 썩고 있었다. 그리고 불에 탄 우리 집 안채는 그 뒤 다시 짓지 못했고 경주로 이사 갈 때까지 온 식구가 좁은 방 두 개밖에 없는 사랑채에서 살았다.
전쟁은 야만적이고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평화를 위한 마지막 전쟁’이란 주장은 전장 바깥에서나 읊조릴 수 있는 사치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이 당하지만 가능한 한 없었으면 좋겠다. 정말 끔찍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6) 추운 날 수업 들어오신 선생님 “어가 어어서 마도 모아 거다”
좋은 성적으로 명문 경주중학교 입학
학교 건물, 육군병원으로 임시 수용돼
책걸상 없이 바닥에 앉아서 야전 수업
한국 전쟁 당시 피난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 건물이 없어 야외수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합뉴스
전시 상황이라 국가가 주관해서 전국적으로 치른 1961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나는 우리 학교에서 1등, 영일군에서 2등이란 좋은 성적을 얻었다.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칭찬을 받았고 고향에서 가까운 명문 경주중학교에 지원해 4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경주 중·고등학교 건물은 육군병원으로 수용됐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나 입학식뿐만 아니라 모든 수업도 계림(鷄林)에서 이뤄졌다.
계림은 신라 초기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숲으로 많은 전설이 얽힌 유명한 장소였으나 중학교 교실로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돌멩이를 하나씩 깔고 앉아서 무릎 위에 책을 얹고 공부를 했으니 불편한 건 고사하고 여러 학급이 여기저기서 서로 가까이 수업을 했으니 집중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거기다가 비가 오면 집에 가야 했으니 학생들은 좋아했으나 별로 싸지 않은 등록금은 제값을 할 수 없었다.
그해에는 전쟁의 혼란으로 봄이 아닌 가을에 입학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겨울이 왔다. 날씨가 추워지니 숲에서의 수업은 불가능했다. 전교생이 서천을 넘어서 그래도 지붕과 벽이 있는 서악서원이란 곳으로 옮겨 갔는데 내가 속했던 1학년 D반은 C반과 함께 서원 2층 마루를 교실로 쓰게 됐다. 100명이 훨씬 넘는 남자아이들이 사닥다리 못지않게 가파른 좁은 계단 하나로 오르내렸는데 한 번도 사고가 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책걸상은커녕 앉을 자리도 부족해서 앞에 놈 궁둥이에 무릎이 닿도록 붙어 앉았고 책 놓을 자리도 없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국어 교과서가 없어서 ‘시조백수’란 책을 대신 사용했는데 읽고 배워도 시간이 남아 선생님이 무조건 다 외우라고 하셨다. 그 덕에 지금도 수많은 시조를 줄줄 외울 수 있게 됐다.
젊은 영어교사는 걸핏하면 대나무 빗자루로 학생들을 사정없이 때렸고 학생들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반장에게 시켰는데 반장이었던 나는 맞지 않기 위해서 영어만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체벌은 반대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이 공부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경험했다. 대학 영문과에 진학한 것도 그 매질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2학년이 되자 겨우 임시교사가 마련돼 입학 후 처음으로 지붕과 벽 외에 창문도 있는 교실과 책걸상을 갖게 됐다. 그러나 마루에는 아직도 자갈이 깔려 있고 난로 같은 사치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겨울이 오자 얼마나 추웠는지 어느 아침 첫 시간에 교실에 들어오신 물리 선생님이 “어가 어어서 마도 모아 거다(혀가 얼어서 말도 못 하겠다)”는 말씀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모두 같이 웃었다.
그러나 나라가 전쟁 중이라 온 국민이 고생하는 상황이었으니 그 정도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어느 학생이나 선생님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7) “교회 한번 가보자” 친구 권유로 하나님과 첫 만남
그저 호기심으로 갔다 주일학교 등록
삶으로 모범 보이신 윤봉기 목사님의
신실함 닮은 외동 아들 윤종하 선생
롤 모델 삼고 많은 지도와 사랑 받아
1950년 8월 말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열린 통회자복기도회. 목사와 장로 250여명이 모여 절체절명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국민일보DB
나는 유교 가정에서 자랐고 경주는 불교의 도시였으니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같은 학급 친구 신용도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용도도 중학생이었으니 기독교가 무엇인지, 왜 교회에 가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간곡하게 권하지도 않았다. 그저 “와 보라!”식의 전도였다. 나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호기심으로 용도가 다녔던 경주읍교회에 가 봤고 그 때 중학생들까지 다녔던 주일학교에 등록했다.
그 교회는 일제 때 신사참배가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고신교단에 속했는데 주일성수 등 성경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담임 목사였던 윤봉기 목사님은 자상하셨으나 매우 엄격하신 분이었고 자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셨으므로 온 교인들이 존경했다. 거기서 목사님의 외동아들 윤종하 선생을 만났는데 훗날 ‘성서유니온’과 ‘매일성경’을 시작한 분이다. 목사님을 닮아 그도 매우 신실했고 어린 우리들이 따른 롤 모델이었다. 경주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후에 서울대학교 영문과 선배가 되어 나는 일생동안 그로부터 많은 지도와 사랑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나는 교회 집회에 거의 빠지지 않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바에야 아예 영어로 읽으면 영어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영어 성경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중학생이었으니 실력이 모자라 처음에는 하루 한두 절밖에 읽지 못했다. 그러나 매일 꾸준히 읽으니까 실력이 늘어나서 점점 더 많이 읽게 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신구약 성경 전체를 영어로 다 읽을 수 있었다.
내친 김에 고딕체로 인쇄된 독어 성경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다 끝냈다. 물론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겠지만 그렇게 매일 꾸준히 읽은 성경은 나의 신앙과 영어 및 독일어 실력향상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자녀, 손녀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했지만 듣는 것 같지 않다.
비교적 어렸을 때 교회생활을 시작해서 그런지 나의 신앙은 마치 모태신앙과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 갑자기 생겨난 회의감 때문에 심각한 신앙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어느 때라 꼭 찍어서 말 할 수 있는 회심 사건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거듭남’ 체험을 들으면 내가 정말 거듭난 사람인가 자문하기도 하고 두려운 생각까지 들곤 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사랑하시고 나의 일생을 강제로 이끄셔서 그의 고귀한 사랑이 나의 삶을 한 없이 가치 있게 만드신다는 것을 믿고 항상 감사한다. “교회 한 번 가 보자”는 친구 신용도의 권유가 나의 삶 전체를 이렇게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8) 주일성수 지키려고 입학 신체검사 거부했더니…
고교진학 위한 신검이 주일에 잡히자
4계명 어길 수 없다고 판단 후 불응
성적은 2등인데 신앙문제로 떨어지자
학교 배려로 재검사 기회 얻어 구제
1957년 서울대 신입생 합격자 발표 현장에서 수험생들이 건물 상단에 걸린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 서울대 제공
경주교회가 속했던 고신파 교단은 계명 엄수에 철저했다. 내 신앙은 아직 설익었으나, 그래도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월요일에 시험이 있어도 주일에는 절대로 공부하지 않았고 교련시간에 ‘국기에 대하여 받들어 총’ 구령이 내려도 나는 ‘쉬어 총’ 자세로 서 있었다. 키가 작은 덕에 뒤쪽에 서 있다 보니 한 번도 들키지는 않았다.
경주중학교를 마치고 경주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쳤는데 신체검사가 하필 주일에 잡혔다. 나와 경주교회 소속 서너 명 수험생은 4계명을 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신체검사에 불응했다. 합격자 발표 며칠 전에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부르셔서 갔더니 “야 임마, 니 떨어졌다”고 하시며 화를 벌컥 내셨다. 신체검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경주교회 출신 수험생은 모두 낙제한 것이다.
부모들이 경주교회에 출석한 친구들과는 달리 나의 부모님은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유교 신자라 주일성수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한 것을 용서하실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그 때문에 걱정한 기억이 별로 없다. 막연하게나마 하나님께서 잘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경주고등학교에서는 우리 때문에 교무회의가 따로 열렸다고 한다. 신앙문제로 신체검사에 불응했다고 해서 전체에서 2등 한 녀석을 낙제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를 두고 논의했다고 한다. 그 결과 얄밉지만 ‘그놈’들에게 다시 한번 신체검사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입학시험 성적이 전체에서 2등이었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경주교회 출신 수험생들이 모두 구제를 받은 셈이다.
비슷한 상황이 대학입학 시험에서도 벌어졌다. 1957년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은 월요일에 치러졌는데 수험번호가 적힌 수험표는 그 전날 주일에 배부됐다. 나는 역시 받으러 가지 않았다. 시험 당일 아침 일찍 입학 관계 사무실에 가서 수험표를 달라 했더니 수험표가 들어 있는 서랍 열쇠를 가진 직원이 시험문제 수송차 외출 중이라 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시험 시작하기 한 시간 전쯤 담당 직원이 도착했다. 수험표도 받으러 오지 않는 놈이 무슨 시험이냐고 호통을 쳤지만 그래도 번호표는 주었다. 마치 합격한 것 같이 긴장이 풀려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에 응했고 그 덕인지 무사히 합격했다. 합격자 발표도 주일에 이뤄져서 보러 가지 않았다.
찬송가 542장(통합 340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 가사를 보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찬송가 가사처럼 내가 마주한 여러 사건이 나의 믿음을 받쳐주는 좋은 ‘증거’가 됐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9) 가정교사를 머슴처럼 취급… 자기 아들에게만 고깃국
고 2때부터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 해결
주택 지붕 아래 과외 수업을 홍보하는 광고판이 걸려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필자도 한동안 입주 과외를 하며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다른 집보다 특별히 더 가난하진 않았다. 하지만 우리 집도 역시 빈농이라 중학생이 된 동생과 나의 학비와 하숙비를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좀 넉넉한 집 외동아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가정교사가 되어 그 집에 들어가서 숙식을 해결했다. 아마 우리나라의 최연소 고학생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던가 한다.
부잣집 외동아들과 같이 지냈으니 자취나 하숙보다 더 편하게 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학생도 나중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니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니었고 따라서 가르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가 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매우 가깝게 지낼 정도로 그와 같이 지내는 것에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다만 그 집 주인 부부는 악하지는 않았지만 교양 수준이 좀 낮았다. 식사 때는 나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겸상했는데 음식 내용이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자기 아들에게는 고깃국을 주고 나에게는 나물국을 주는 것이었다. 가정교사를 한 급 낮은 머슴처럼 취급한 것이다.
물론 서러웠다. 지금까지 그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아 그런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분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좀 못 배워서’ 그렇다고 이해하고 용서했다. 그분들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다가 벼락부자가 된 분들이라 평소에도 그들의 언행이 그렇게 존경스럽지는 않았다.
가끔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그때 내가 참은 것은 화를 내 밥상을 뒤엎어버리고 뛰쳐나가 봤자 어디 갈 때도 없었으니 무의식적으로 비겁해졌던 것이 아닌가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그분들과 그 아들에 대해서 한 번도 미운 감정을 가져 본 일이 없고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늘 유지한 것으로 보아서 그런 해석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역시 교회에서 배우고 얻은 그리스도인의 교양과 어렸을 때부터 남을 배려하고 예의와 체면을 중요시하신 부모님의 가정교육, 그리고 그런 교양과 가훈에 대한 나의 자부심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그리스도인은 교만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자존심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경험이 나에게 소중한 교훈이 된 것은 당연하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대우하지 말자.” 나아가서 “어떤 사람도 무시하지 말고 차별대우하지 말자”는 것이다. 가끔 다른 사람에게 큰 고통을 가하거나 좀 지나치게 위선적인 사람을 보면 인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무시하진 말자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차별대우를 받으면 서럽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0) 평소 조용하던 꽁생원 3총사, 독재와 불의 앞엔 선봉
영문과 동기 기독교인 이명섭·서영호 술 담배 멀리하고 항상 서로에게 존대
4·19혁명 일어나자 영문과 남학생 중 우리 셋만 가담, 학과 영웅 대접 받아
1960년 4·19혁명 당시 거리로 나온 시민들. 서울대 영문과에 재학중이던 필자도 시위에 참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된 고학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역시 부잣집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서울대 등록금은 비교적 쌌지만, 동생도 서울대 농대에 다녔기 때문에 시골 빈농으로는 충당하기가 버거웠다. 나는 신입생 때 구입한 교복을 4년간 입었고 겨울에는 미국 사람들이 보내 준 구호품 코트를 입었는데 몸이 왜소해 볼품이 없었다.
대학 강의실에 난방이 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난로가 있는 다방에는 커피나 차를 살 돈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했다. 추운 겨울날에는 강의실 앞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꽝꽝 언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깨어 먹었다. 당시에는 책도 없었거니와 과외공부 시키느라 읽을 시간도 부족했다. 대학 생활의 낭만이란 넉넉한 부모를 둔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같은 영문과 동기생 가운데 기독교인은 이명섭과 서영호가 있었다. 이명섭(37대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친형)은 중·고등학교에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으나 머리가 뛰어났다. 서영호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우리 셋은 그때 대학생이면 거의 다 즐겼던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동기생 여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우리 셋은 서로에게도 존대어를 썼으며 강의실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기도부터 했으니 학과에서는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는 ‘꽁생원’이었다.
그런데 1960년 봄에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우리 셋은 동기생들을 놀라게 했다. 영문과 4학년 남학생 가운데는 우리 셋만 데모에 가담했었기 때문이다.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닌데 한참 뛰다가 보니 사람들이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세례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도 놀랐다. 우리 셋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권위에 순종적이었다. 그러나 독재와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과 정의에 대한 욕구는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나와 이명섭이 가난했던 것도 무의식중에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4·19 혁명이 지나가고 강의가 다시 시작되자 우리 꽁생원 3인방은 학과에서 영웅 대접을 받게 되었다. 학년 모임에서 이명섭은 회장, 서영호는 총무, 나는 회계로 선출되어서 자치활동을 주도했다. 졸업 여행도 우리 셋이 주관했는데 회계였던 내가 회비에서 술값을 한 푼도 지출하지 않아서 엄청난 원망과 함께 “소주 딱 한 병만!” 학생들의 애원을 받기도 했다.
졸업 후 이명섭은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회 등에서 교양강의를 많이 했다. 서영호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유학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부산의 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그 교단의 총회장으로 섬겼다. 20대 젊은 날에 만나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소중한 친구들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1) 사회 무질서와 부패 잡으려 ‘새생활운동’ 발족
밀수로 외국으로 많은 돈 빠져나가자
꽁생원 3인방과 문리대 동기생들 모여
다방·댄스홀 습격, 커피·양담배 빼앗아
손봉호 교수는 4·19 혁명이후 사회의 무질서와 부패를 없애기 위해 서울대 문리대 동기생들과 새생활 운동을 전개했다. 한상복 한수당자연환경연구원 원장 제공
4·19 혁명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의 무질서와 부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것에 용기를 얻은 학생들은 사회도 좀 제대로 바꿔야겠다는 의욕이 넘쳐흘렀다. 우리 영문과 꽁생원 3인방과 종교학과 김상복, 이영기, 역사학과 김명혁 등 문리대 동기생들이 모여서 새생활운동이란 것을 시작하자고 결의했다. 그때 서울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모두 밀수된 커피를 팔았고, 성인 남자 대부분은 담배를 피웠는데 거의 다 밀수된 양담배였다. 실상을 알아보란 임무를 받고 재무부에 가서 조사해 봤더니 일 년간 커피와 양담배 밀수로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대전시 인구의 일 년 치 식량값과 같았다.
새생활운동에 동의한 수백 명 학생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더니 모두 흥분해서 “커피 한 방울, 피 한 방울”이라고 조잡하게 쓴 플래카드를 들고 길거리에 나섰다. 다방에 쳐들어가서 커피를 엎지르고 입에 물고 있는 양담배를 빼앗는 등 온갖 난동을 다 부렸다. 여기저기 생겨난 댄스홀에 무더기로 들이닥쳐 “푹푹 썩은 자들”이라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미군들 전용 댄스홀을 습격한 적도 있는데 한국 공무원들이 공무 차량을 몰고 가서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김상복(할렐루야교회 은퇴 목사) 군이 유창한 영어로 우리 의도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더니 박수갈채로 반응해 주었다.
자유당 정부는 자동차가 늘어나지 못하게 번호를 한정해 놓았다. 허용된 자동차 수가 다 차버렸기 때문에 4·19 이후에 치러진 선거에 당선한 국회의원들은 자동차를 갖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 상당수 의원이 군용 지프차를 불법으로 후송시켜 소위 ‘가’ 번호판을 붙여서 타고 다녔다.
하루는 새생활운동 학생들이 서울 시내 큰길에 흩어져서 기다리다 그런 차가 나타나면 그 앞에 드러누워 차를 정지시키고 강제로 서울시청 뒷마당으로 몰고 가도록 했다. 오후가 되니 그렇게 끌려온 차가 백 대가 넘었는데 해체해 버리자니, 불태우자니 옥신각신하다가 학생 수보다 4배나 되는 경찰이 기사들과 함께 몰려와서 다 몰고 가버렸다. 학생들은 불법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겠다고 경찰 구치소로 몰려갔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시작돼 새생활운동을 마감하는 날 우리는 그동안 빼앗은 양담배를 서울 세종로 한가운데 쌓아놓고 유치하게 애국가를 부르면서 불을 질렀다.
돌이켜 보면 좀 지나치기도 했고 순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4·19 못지않게 나라와 사회를 위한 젊은이들의 순수한 충정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때는 내무부 장관, 국회의장, 언론, 일반 시민들, 심지어 경찰조차도 난동에 가까운 우리 활동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봐 주었다. 그리고 그 활동을 주동한 우리도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2) “썩은 세상에 영어학이 웬 말”… 신학으로 진로 유턴
영어 전공한 덕분에 선임들 폭행 없는
군용 유류창고 경비 소대 차출됐지만
상상 초월하는 심각한 부정부패 목격
이런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꿔보려고…
이응준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전 장관이 1955년 충남 논산에서 열린 신체검사 개소식에 참석해 살펴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대학을 졸업하고 징집 영장을 받았다. 논산 훈련소 입소 전 대기소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47㎏으로 나와 48㎏ 이상이어야 하는 병역기준에 미달했다. 합법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구실이 생겼으나 나는 병역의무는 당연히 이행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하고 당황했다. 기껏해야 1㎏이니 좀 올려 달라고 군의관에게 애걸했다. 병역면제 받은 걸 기뻐해야 할 텐데 기어코 입대하겠다 하니 기특했는지 눈감아 줬다. 부정으로 입대한 셈인데 훈련소에서 규칙적인 운동과 식사를 한 덕에 몸무게가 늘어 결과적으로 그렇게 큰 불법은 아닌 게 됐다.
후방이긴 하지만 모두가 기피하는 경비 중대에 배속돼 하루 12시간 보초를 서야 했다.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 인적이 끊긴 들판에서 혼자 보초를 서며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란 시편 구절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 실감했다. 그보다 더 힘든 건 시도 때도 없이 가해지는 선임병들의 폭행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얻어맞아 절뚝거리면서 화장실 청소 등 험한 일은 다 맡아 해야 했다.
그러다 군용 유류창고를 경비하는 2소대에서 영어를 아는 병사가 필요해 그곳으로 차출됐다. 폭행은 없었으나 부정이 심각했다. 중대장부터 이등병까지 훔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내 임무는 배급받아 가는 유류 종류와 양을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특무상사 하나가 커다란 돈 뭉치로 부정 동참을 회유했다. 거절하자 ‘작전’이란 이름으로 군용 휘발유 수십 드럼을 훔쳐갔다.
‘신병 입대 절차도’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거기서 나는 진로를 바꾸기로 했다. 고등학생 때 윤봉기 목사님이 신학 공부를 권하셨으나, 부모님은 법대를 원하셔서 타협점을 찾은 게 영문과 입학이었다. 종교학을 부전공으로 택해 신학에 필요한 희랍어와 라틴어도 배웠다. 그러다 영어학에 관심이 생겨 학사 졸업논문은 가정법에 관해 썼고 영어학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도 입학했다. 영어학을 강의하신 고 김진만 교수의 특별한 관심도 영향을 끼쳤다.
학교와 교회에만 익숙하던 나에게 상상을 초월한 군대의 부정은 큰 충격이었고 이렇게 썩은 세상에 영어학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회의감을 갖게 됐다. 이런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접었던 신학을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유학하던 교회 선배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입학원서를 보내면서 지원해 보라기에 즉시 신학교에 편지를 써서 목회가 아니라 기독교적 교육의 기초로써 신학을 공부하려는데 이런 학생도 허용하는지 문의했다. 우선 지원해 보라기에 원서를 보내고 선교사를 통해서 시험을 보았더니 합격해서 장학금과 여비까지 약속받았다. 유학자격 시험에 합격해서 그때 시행된 유학휴가란 제도 덕에 1년만 복무하고 1962년 8월 미국에 갔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3) 가난한 나라 유학생일지라도 자존심만은 지키려고…
학년 전체 2등으로 장학금 대상이지만
1등 한 친구가 장학금 양보한 걸 알고
몹시 자존심 상해 등록금 면제만 신청
손봉호 교수가 유학했던 미국 펜실베니아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캠퍼스 전경.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제공
입학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뛰어난 교수들로 그때 세계 신학계에서 선두 자리를 유지했다. 강의는 알차고 깊이가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었다. 비록 영어로 강의 듣기가 쉽지 않았지만, 열심히 공부한 결과 1학년이 끝났을 때 전체 2등이란 성적을 받았다. 다음 해에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1등을 한 미국 친구가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스스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으므로 가난한 외국 학생이 하나라도 더 장학금을 받도록 양보한 것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은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상이 아니라 얻어먹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몹시 상했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하려면 장학금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로 고심한 끝에 등록금 면제만 신청하고 생활비는 내가 일해서 충당하기로 했다. 나의 신청서를 본 장학위원들이 서로 눈짓을 하면서 좀 놀라는 것 같았다. 가난한 나라 유학생으로는 좀 별난 경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으로 나는 숱한 고생을 다 했다. 음식, 책과 학용품, 피복 등의 모든 비용을 모두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학기 중에서는 캠퍼스 안에서 화장실, 교실, 도서관을 청소했다. 쓰레기 버리기, 페인트칠, 풀 깎기 등 거의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마침 학교 관리인이 나를 좋게 봐서 무슨 일이든지 생기면 제일 먼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여러 일을 다 해 보았으므로 “나는 미국에서 송장 치우는 일 외에는 다 해 봤다”고 농담한다.
첫 번째 해 여름방학에는 어떤 큰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는데 정말 힘들었다. 100℃에 가까운 물에 씻긴 접시가 기계에서 계속 밀려 나오는데 그 뜨거운 접시들을 맨손으로 집어내고 선반에 옮겨야 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접시들이 밀려서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잠시도 쉬지 못했다.
쉴 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마루에서 걸레질을 해야 했다. 식당은 저녁에 영업하므로 접시 닦는 일은 밤에 했다. 자동차가 없어서 빌린 자전거로 출퇴근했는데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두운 밤에 고속도로로 달려야 했다. 그리고 낮에는 학교 풀밭에서 잔디 깎는 일을 했는데, 펜실베니아의 여름 오후는 유난히도 더웠다.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가 양보한 생활비는 다른 학생의 등록금으로 쓰였을 것이고, 그런 고생으로 나에게는 지구력과 인내력이 생겨서 일생동안 큰 도움이 되었고,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4) 가난한 나라 여권의 설움… 가는 곳마다 비자문제
신학 공부하다 기독교 철학에 관심 커져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들어가 철학 전공
손봉호 교수는 약소국의 여권 소지자라는 이유로 유학시절 곤욕을 치렀다. 사진은 대한항공의 전신인 대한국민항공사(KNA) 서울-홍콩간 노선 탑승 수속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목회가 아니라 교육을 위해서 신학교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목회학 담당 교수가 왜 목회를 하지 않으려느냐고 물었다. 나는 목회자가 될 만큼 성숙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때까지 나는 오직 윤봉기 목사님 한 분 밑에서만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분의 삶이 워낙 엄격해서 나는 도저히 그만큼 될 수 없다고 느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3년간 신학을 공부하면서 군대에서 버렸던 학문에 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다. 특히 조직신학에서는 사람의 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거기에 반틸 교수의 변증학과 현상 논문을 준비하면서 읽은 키르케고르의 철학서들은 기독교 철학에 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신학교 졸업 후 당시 개신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기독교 철학자 도여베르트가 가르쳤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철학부에 가서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지원했더니 입학을 허가했다. 전공을 두 번째 바꾼 셈이고 우물을 세 개나 파게 된 것이다.
비용이 상대적으로 싼 여객선을 타고 8일간 대서양을 건너 도착한 네덜란드에서 가난한 나라의 여권이 당하는 서러움이 시작되었다. 두 줄로 서서 입국 조사를 받는데 나에 대한 심사가 시작되자 그 줄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입학허가서가 있는데도 돈 벌러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유효 기간을 매년 연장해야 하는 단수 여권이었으므로 수많은 도장이 찍혔는데 그 관리는 그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들여다보고 옮겨 적었다. 수백 명 입국자 가운데 꼴찌로 통과하는 나를 보고 승객 하나가 “당신 여권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하자”고 했다.
그런 서러움은 유럽 체류 8년간 반복됐다. 나라들이 가까이 붙어 있는 북유럽에서는 이웃 나라에 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여행국 비자를 받아야 했고 국경에서는 까다로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단체 여행에서도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나 때문에 버스가 기다려야 했다. 스위스에 가기 위해서는 독일을 통과해야 하는데 1967년 동베를린 사건이 터지자 평소에 요구하지 않던 통과 비자를 요구했다. 평소처럼 비자 없이 기차를 탔는데 독일 경찰에게 들켜 돌아갈 때는 비자를 받아 온다는 조건으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제네바 주재 독일 영사는 여행자에게는 비자를 줄 수 없다고 버텼다. 한참 승강이를 벌이다가 그때 프랑스와는 비자협정이 맺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좋소. 지금 당장 제네바 역에 가서 프랑스 통과로 기차표를 바꾸겠소” 하고 나왔다. 영사는 갑자기 비자를 주겠으니 다시 오라 했다. “아니요. 당신의 그 대단한 나라 비자, 난 필요 없소”라고 큰소리치면서 나와 버렸다. 그동안 비자 때문에 쌓인 울분이 터져 나온 것 같다. 요즘 한국 여권이 세계 곳곳에서 우대를 받고 있으니 눈물겹도록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5)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주는 장학금은 사양합니다”
대가 없는 장학금이라며 계속 사양하자
도서관서 일할 수 있는 학생조교로 임명
손봉호 교수가 1970년대 철학 박사 과정을 이수했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캠퍼스의 과거(위)와 현재 모습. 자유대학교 제공
네덜란드어로 강의 듣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들으려고 나는 늘 교수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인식론과 과학철학 담당 반 퍼슨(C. van Peursen) 교수는 내 노트를 내려다보면서 내가 강의 내용을 제대로 적지 못하면 다시 반복해 주셔서 친구들이 “반 퍼슨 교수는 너만 위해 강의한다”고 놀렸다. 그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유명한 철학 교수였다.
어느 날 외국 학생 담당 직원이 불렀다. 돈이 없다는 것을 왜 자기에게는 알리지 않고 반 퍼슨 교수에게 말했느냐고 화를 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고 같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미국 친구 스투더가 반 퍼슨 교수에게 “손봉호가 돈이 없어 고생한다”고 말해 버린 것이다. 등록금은 면제됐지만, 생활비는 부족했으나 나는 아무에게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 직원은 그때부터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반 퍼슨 교수에게 말한 일도 없거니와 장학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계속 사양하니까 그 직원은 마침내 “너처럼 교만한 학생 처음 봤다”고 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장학금을 사양하는 것은 교만해서가 아니라 열등의식 때문입니다. 나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것은 내가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 아닙니까.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장학금은 안 받겠습니다”라고 했다.
얼마 후 철학부에서 나를 학생 조교로 임명한다고 통고했다. ‘손봉호는 자존심이 강해서 일을 시켜야 돈을 받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네덜란드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조교 일을 하겠느냐고 했더니 도서관을 위해서 철학도서 구매를 책임지라고 했다. 여러 나라에서 발간되는 철학 학술지에 게재되는 신간 철학서의 서평을 읽고 구매 가치가 있는 책을 추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된 철학서는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수락했다.
조교에도 급이 있었다. 학생 조교로 시작했는데 2년 후에는 연구조교, 다시 2년 후에는 그 나라에 독특한 ‘학술동조자’란 지위로 승급해서 학부생에게 강의도 하고 자비로 건강보험에 들 정도의 임금도 받았다. 1970년에는 거기서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이듬해 아들도 얻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할 때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33년간 교수와 총장직을 끝내고 은퇴했을 때 네덜란드 연금공단에서 편지가 왔다. 조교로 근무했을 때 세금을 납부했으므로 연금을 주겠다는 것이다. 납세액도 많지 않고 기간도 짧아서 액수는 많지 않으나 20여년간 연금을 받고 있다. 가난한 나라 국민의 자존심을 이용해 유학 생활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감사할 뿐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6) 데이트 한번 없이 8년 만에 만나 치른 ‘소포 결혼’
윤종하 총무의 중매로 결혼 성사 됐지만
한국에서 결혼할 만큼 경제적 여유 없어
신부만 네덜란드로 오게 해서 혼인예배
과거 한국의 전통 혼례식 장면이다. 손봉호 교수는 1970년대 과거 자신이 교회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박성실양과 네덜란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국민일보DB
1970년 초 성서유니온 윤종하 총무님이 편지를 보냈다. 박성실 양과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양은 윤 총무와 내가 다녔던 서울중앙교회 교인으로 연세대학교 재학생이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는 경기여고 1학년이었는데 잘 생기고 조용하며 온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남학생이 모두 은근히 좋아했으나 본인은 초연했다. 나도 관심이 없지 않았으나 중·고등부 지도교사였을 때 가르친 학생이었으니 내색을 할 수 없었고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쑥스러웠다. 그리고는 만나보지도, 소식을 듣지도 않은 채 8년이 흐른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에 둔 다른 여성이 없었고 박 양이 어렸을 때 보여준 성격이나 그 어머니 장옥춘 권사님의 인품과 신앙을 고려해서 “부모님이 동의하시면” 결혼하겠다고 편지했다. 얼마 후 부모님의 동의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 절차에 들어갔다. 그때 나나 양가의 경제적 상황으로는 내가 한국에 나가서 결혼식을 치른 후 둘이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 올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신부를 네덜란드로 오게 해서 식을 올리기로 했다. 마치 신부를 주문해서 결혼하는 것 같다 해서 그런 것을 ‘소포 결혼’이라고 했다.
100% 중매 결혼이라 할 수는 없지만 8년이나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 데이트 한 번 하지 않고 결혼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친구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놀랐다. ‘미래 사회’란 유명한 책을 쓰신 판 리슨(H. van Riessen) 교수는 편지까지 따로 보내 “자네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일 것이다. 자네의 그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하시기까지 했다.
어쨌든 ‘소포’는 무사히 도착했고 친구들이 나의 결정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 나라 제도에 따라 시청에서 이뤄진 공식 결혼식에는 주례를 맡은 부시장이 영어로 주례사를 해 줬고, 기숙사 근처 교회에서 드린 혼인예배에는 한국 대사를 비롯해서 교민들 대부분, 반 퍼슨 교수 내외분, 그리고 같이 성경공부를 했던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영국 친구들이 모두 참석해서 별로 외롭지 않았다. 비록 양가 부모님이나 친척들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주례는 그때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하시던 고 차영배 목사님(총신 신대원 교수)이 맡아 주셨는데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한 시간, 네덜란드어로 한 시간 길게 하셔서 하객들이 좀 고생했다. 다행히 그 나라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는 의자에 앉을 수 있었으므로 우리는 잘 견딜 수 있었다. 신부가 입은 한복과 축하연에 내놓은 한과도 인기를 끌었다. 이래저래 우리 결혼식은 친구들 사이에 흥미로운 화젯거리가 됐고 새 살림에 필요한 소품들은 그 나라에 특이한 결혼 축하 방식에 따라 장만 됐다.
어쨌든 연애하지 않고 결혼해도 아들, 딸 잘 낳고 50년이 훨씬 넘도록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크게 감사한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7) 유학 10년간 박사학위·아내·아들 얻어… 모두 주님 ‘은혜’
돈 걱정 하나 없이 마음껏 공부하고
평생 동안 교제하게 될 친구 사귀고
늘 아껴주신 반 퍼슨 교수 가르침은
일생에 가장 중요하고 행복했던 시간
손봉호(단상 위) 교수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박사학위 공개 논문심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자유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은 내 일생에 가장 중요했고 행복했다. 돈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으며, 평생 동안 가까이 교제하게 될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다. 같이 박사과정을 시작한 헬쯔마, 흐리피운, 슈클만은 확실한 개혁주의 신앙인으로 모두 훌륭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슈클만은 상당 기간 그 나라 국회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들과 사귀면서 서양인의 사고방식, 행동방식, 가치관 등을 잘 알 수 있었으며 신앙인의 순수한 경건이 어떤 것인가를 가까이서 보고 배웠다.
그들 못지않게 나를 아껴주신 분은 역시 반 퍼슨 교수였다. 그는 나를 그의 학술동역자(조교)로 만들어 논문 준비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아울러 논문 지도교수로 내가 논문에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못하도록 제어해 주셨다. 유학 생활이 1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나라 친구들처럼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면서 만족스러운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논문을 거의 끝낼 때쯤 우연히 만난 논문 부심 반델후번 교수가 “너 혹시 쓰고 있는 논문을 불에 태워버리고 싶지 않니” 하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내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그랬어”라고 했다. 그의 학위논문은 최우수 성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도 그렇게 느꼈다 하니 좀 위로가 되어 과감하게 논문을 제출했다.
예비심사에 합격한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총장과 대학위원들(Senate)이 참석한 가운데 심사위원 이외의 교수들 질문에 대답해서 그 위원회의 판정을 받아야 한다. 총장이 합격을 공포한 뒤 한국 대사를 비롯한 교민들과 친구들이 가득 모인 자리에서 반 퍼슨 지도교수는 “손 박사님, 축하합니다”로 시작되는 축사를 한국어로 해서 모두가 놀랐다. 네덜란드어로 쓴 축사를 어떤 한국인에게 부탁해서 한국어로 번역하고 그 발음을 화란 글자로 표시하도록 부탁해서 밤새 연습하고 읽으신 것이다. 그분의 추천으로 네덜란드 학술원의 보조를 받아 논문은 학술서적으로 출판되었고 독어와 프랑스어 철학학술지의 서평도 받고 전 세계 대학도서관에 비치될 수도 있었다.
친구들과 지인들을 초청해서 식사 대접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지금 나에게는 딱 한 가지 말만 생각납니다. ‘은혜’란 말입니다” 했다. 100달러를 들고서 한국을 떠나왔는데 10년 뒤 박사학위, 아내, 아들을 얻었으니 은혜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학위를 받자마자 나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대로 머물면 학술동역자로 계속 일할 수 있었고 한국 교수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 대사를 비롯해서 교민들 모두가 귀국을 만류했다. 다만 대사관의 신효헌 서기관만 “귀국하셔야지요” 했다. 그는 후에 호주 대사를 역임한 훌륭한 외교관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역시 신앙인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네덜란드어과에 교수가 필요하다 해서 취임하고 네덜란드어와 철학 부전공 강의를 하게 되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8) 무능한 의사의 섣부른 시한부 선고에 암담했던 3년
정기 검진 결과 심장에서 큰소리 나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둘째 아이
용하다는 의사, 병원 찾아다녔지만
심장수술 불가능했던 국내 실정에…
손봉호(왼쪽) 교수 가족이 1992년 찍은 가족사진. 둘째 딸 정아(오른쪽 두 번째)씨는 어릴 적 의사의 오진으로 오랜 기간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둘째 아이 정아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전세로 살던 집에 퇴근했더니 아내가 울고 있었다. 정기 검진차 병원에 갔는데 아이가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니 슬슬 정을 떼라고 의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심장에 큰 소리가 나는데 심각하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 일생에 가장 암담하고 불행했던 3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죽을 아이를 업고 용하다는 의사,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부산에도 가고 전주에도 갔다. 그러나 어느 의사도 그게 어떤 병인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S병원에 갔더니 간호사는 애가 운다고 뺨을 때렸다. 진단한 의사는 어떤 설명도, 처방도 내리지 않고 아주 근엄하고 낮은 목소리고 딱 한 마디 했다. “다음에 오세요.”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심장 수술에 필수적인 심폐기가 한 대도 없어서 심장수술이 불가능했다. 미국의 한 자선단체가 가난한 나라 어린이 심장 수술을 돕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대리인을 찾아갔더니 아버지가 교수라는 이유로 수혜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석 달이 지난 후에도 아이는 병든 아이 같지 않게 잘 자랐다. 감사했지만 사형선고는 해제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지난 후 어느 날 세브란스 병원에 한 젊은 심장 전문가가 미국에 유학하고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갔다. 정말 오랜만에 의사다운 의사를 만났다. 아이의 병은 심실결격증이란 것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림을 그려가면서 상세히 설명해 줬다. 그리고 소리가 높은 것으로 보아 구멍이 크지 않으므로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해줬다. 그러고 보니 사형선고를 내린 그 의사는 소리가 큰 것으로 보아서 병이 심각하다고 했는데 중학생 수준의 물리학 지식도 갖추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그러다가 1979년 네덜란드 순수학문지원재단의 학술 연구비를 받아 가족과 함께 1년간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레이든 대학 의대 부속병원은 유럽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고 심장 전문 교수도 유명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정아가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결과는 “수술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무능한 의사의 방정맞은 사형선고 때문에 우리 부부는 이유 없이 3년간 지옥에서 헤맨 것이다.
그 후 딸아이는 이화여대 입학 때 받은 신체검사에서 그래도 수술하는 것이 낫겠다는 의사의 권유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잘 활동하고 있다. 비록 불필요한 고통이었으나 사람의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동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모든 고난은 지나간 뒤에 감사 거리가 된다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체험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19) 장애인 복지 불모지 한국에 인식개선의 ‘밀알’이 되다
한국 지성사회가 사회약자 돌아볼 시기
그들보다 더 소외된 장애인 복지에 관심
장애인들의 권익 위해 시간·열정 쏟아
손봉호(왼쪽) 교수가 정형석 밀알복지재단 상임대표와 함께 장애인 복지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밀알복지재단 제공
귀국한 1973년에는 한국 지성사회가 민주화와 인권운동으로 뜨거웠다. 지식인이라면 모두 우리 사회에 가장 소외된 민중들의 권리 회복과 옹호에 앞장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넘쳐흘렀고,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이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라 했다.
나는 1960~70년대 유럽과 미국의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운동(SDS)’이 주도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그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 Marcuse)의 ‘일차원적 인간’을 탐독하고 관련 논문도 한 편 썼다. 그래서인지 한국 지성사회의 움직임이 그렇게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도 한국에서 고통을 가장 많이 겪는 사람들이 과연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인지 의심이 생겼다.
나는 그들보다는 장애인들이 더 많은 고통과 서러움을 당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당시 한국에는 장애인에 대한 어떤 복지도 존재하지 않았고, 국민 인식은 원시적이었다. 가정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가문의 수치로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외국어대 기독 교수들과 함께 장애인들을 돌보는 단체들을 찾아다녔는데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후 강사로 나간 총신대에서 내 강의를 들은 학생 가운데 시각 장애인 유재서(총신대 직전 총장), 그의 동료 정형석(밀알복지재단 상임이사), 강원호, 정택정, 유원식(기아대책 회장) 등 몇 사람이 1979년 장애인 선교와 복지,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밀알’이란 단체를 만들어 나에게 자문위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시작한 밀알 활동은 세계밀알연합회, 밀알복지법인, 밀알선교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이 일은 강의 다음으로 나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은 사역이 되고 말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밀알복지법인 이사장으로 섬기던 1996년 자폐 아동을 위한 밀알학교 설립이었다. 장애아 특수학교를 기피시설로 간주해서 지역 주민들이 건설공사를 심하게 방해했다. 주민대표들이 나의 연구실에 여러 번 쳐들어 와서 회유, 협박, 저주를 반복했다.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바람에 검찰 조사도 받았다.
자원봉사를 해 준 김앤장 소속 김주영 변호사가 제기한 공사방해중지 임시 처분 신청에서 승소하면서 간신히 건축을 마칠 수 있었는데, 그 판결은 주민들의 장애인 시설 반대와 관련된 첫 번째 재판으로 대부분의 일간지가 사설에서 중요하게 취급했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주민들이 밀알학교에 자원봉사를 할 정도로 관계가 회복되었고 밀알학교는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특수학교로 인정받을 만큼 잘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의 장애인들을 위해 밀알복지재단에 11억원을 기부해 ‘장애인 권익기금’을 마련했고, 장애인 활동이 계기가 돼 쓴 철학서 ‘고통받는 인간’은 서울대 출판부에서 올해 13쇄를 찍었다. 장애인 권익 활동은 나의 삶을 좀 더 의미있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0) 예배당은 검소하게… 한국교회 개혁 선도한 서울영동교회
한창 개발 중이던 서울 영동 지역에
지식인들 위한 교회 개척 설교 맡아
기성교회에선 하기 힘든 개혁 시도
손봉호 교수가 1976년 김경래 장로, 이재억 박사 등과 함께 창립한 서울영동교회 현재 예배당 전경. 서울영동교회 제공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김경래 장로님이 1976년 초에 만나자고 하셨다. 한창 개발 중이었던 서울 영동지역에 지식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려는데 신학을 했고 사례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설교를 좀 맡아 달라 하셨다.
미국 성도들의 헌금으로 신학을 공부한 나는 빚진 마음으로 전임 목회자를 모실 때까지 6개월만 설교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장로님이 다니시던 흥천교회 연로 성도들 몇 분 그리고 한양대 산부인과 이재억 박사 부부와 함께 시작한 것이 서울영동교회다.
한국교회에 고쳐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기성교회에서는 저항이 크므로 새로 시작할 때가 적기였다. 그래서 예배당은 검소하게, 다른 교회 교인 훔치지 않기, 장로 장립 때 축의금과 선물 금지, 피택장로 거액헌금 요구하지 않기, 헌금의 절반 이상을 외부로 내보내기 등을 표방했다. 교인들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잠자리 체를 헌금 궤로 바꿨으며, 장로들이 주기적으로 재신임을 받도록 했으며, 적어도 내가 설교를 맡은 동안에는 냉방기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약한 교회를 서럽게 하지 않기 위해 전자 오르간을 구입하지 않았다.
교회가 활발하게 성장하던 때였고 개혁 노력이 좋아서인지 교인 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자 나는 300명 이상 수용할 수 없게 짖자고 주장했으나 다수가 반대해 500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게 신축했고, 그 이상이 되면 분립하기로 했다.
그래서 1990년에 교인 100여 명이 분립해서 한영외고 강당에서 한영교회를 시작했는데, 학교 강당을 이용한 첫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배재고등학교로 옮겨서 빛소금교회로 개명했지만, 자체 건물이 없는 교회 정책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82년에 박은조 담임목사가 취임했는데 그 뒤에도 일원동 교회, 샘물교회, 배곧영동교회 등을 분립 개척했고 그 교회들이 또다시 분립 개척해서 10개의 형제교회가 설립됐다. 지도자 양성을 강조해서 박은조 목사, 김낙춘 목사 등 교역자들과 신학생들 상당수를 해외에 유학시켜서 지금 고신대 신대원에는 서울영동교회 그룹 출신 교수가 3명이나 된다.
서울영동교회는 한국 교회 개혁을 어느 정도 선도했고 기독교 시민운동에도 적잖이 공헌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산파, 밀알선교단의 보모, 샘물호스피스의 산모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고 지금도 그들을 열심히 돕고 있다. 정현구 현 담임목사도 희년선교회 이사장과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아담한 병원을 설립하여 자립시켰고, 정유근 장로가 말라위에 세운 대양누가병원을 열심히 돕고 있다.
나는 1990년에 분립할 때 같이 나가서 한영교회에 협동설교자로 돕다가 지금은 그 교회가 다시 분립시킨 다니엘새시대교회에 출석하면서 서울영동교회 그룹 교회들에서 간헐적으로 말씀을 전한다. 서울영동교회는 나의 삶에서 가장 뜻깊은 사역장 가운데 하나였고, 내가 일으킨 여러 공익활동을 뒷받침해 줘서 빚진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1) 기윤실 출범…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삶 이끌어
정부와 사회 불의에 대해 비판하기 전
기독교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고 각성
정직 절제 강조, 대사회 운동으로 확장
손봉호(앞줄 오른쪽 네 번째) 교수는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출범시켰다. 사진은 1990년 8월에 열린 제1회 기윤실 실행위원수련회 기념 사진. 기윤실 제공
1980년대 한국의 대학들은 반 정부시위로 날을 샜다. 그런 상황에서 정의감이 예민한 복음주의 교회 소속 학생들의 처지가 난처해졌다. 시위에 참여해야 하겠는데 대부분 교회가 찬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독 학생 동아리 지도교수들의 입장은 더더욱 난처했다. 서울대 교수 성경공부 모임에서 참석자들이 이 문제를 두고 고심하던 끝에 윤리실천 운동을 시작하자고 결의했다. 정부와 사회 불의에 대해서 비판하려면 비판하는 쪽이 도덕적으로 좀 떳떳해야 하는데 한국 기독교가 그만한 권위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비판하기 전에 우리부터 먼저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선 취지문을 초안해서 기독 교수들과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여러 번 수정하고 장기려, 이세중, 이만열, 김인수 등 도덕적으로 큰 흠이 없는 교계 평신도 지도자들의 동참을 받아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을 출범시켰다. 정직과 절제를 특별히 강조했고, 많은 성도들이 호응해서 한때는 전국에 10여개 지부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정직 외에도 작은 차 타기, 자원과 에너지 절약, 정직 납세, 투명경영 등 개인의 윤리적 삶을 독려했지만 동시에 음란 폭력물 퇴치, 공명선거 운동 등 대사회 운동도 같이 벌였다. 진보 쪽 교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사회문제에 깊이 간여했고 민주화에도 공헌했지만, 복음주의 쪽 NGO는 기윤실이 처음이었다.
한 번 만들어지니 교계 젊은이들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 운동을 제안했다. 교육계를 정화하자는 기독교사모임, 법조계의 기독교 문화를 위한 법률가 모임, 교회 부정을 고치자는 교회개혁모임 등이 조직되었다. 기윤실이 이 모든 운동을 다 수행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분가시켜서 좋은교사운동, 기독변호사 모임(CLF), 교회개혁운동, 성서한국 등이 태동했다. 지금도 이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여러 행사를 같이 하고 있다.
나는 처음 얼마 동안 실무책임자란 이름으로 기윤실을 이끌다가 고 김인수 교수와 같이 공동대표로 섬겼다. 1999년에 우리는 운동의 책임을 다음세대에게 넘기기로 하고 물러나서 지금은 자문에만 응할 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최근 한 모임에서 나는 “기윤실 운동은 실패했다”고 했다. 35년 이상 정직 운동을 했지만 한국교회가 그때보다 더 정직해졌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사회로부터 더 큰 질책을 받고 있다. 기윤실 활동의 부족보다도 개인과 집단이 정직하게 되는 것이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윤실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런 입장을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부른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알았으면서도 열심히 회개를 외쳤다. 기윤실 운동은 실패했고 성공할 가능성도 크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하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2) 시민운동 뛰어들어 부패방지와 공명선거운동에 이바지
경실련 창립 동참 공동대표로 섬기며
부동산·금융 투명화로 사회개혁 공헌
공선협 활동하며 잘못된 선거 바꾸고
대통령 선거유세를 TV토론으로 정착
손봉호 교수가 1992년 공명선거시민운동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선거폭력 규탄대회를 열어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손봉호 교수 제공
6월 항쟁 등으로 1987년 대통령직선제가 결정되자 사회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민주화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바뀌었다. 반정부 항쟁은 불가피하게 준법 문제를 일으켜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인 참여를 주저했는데 시민운동에는 그런 문제가 없으므로 쉽게 동참할 수 있었다. 나의 진로를 바꾸게 했던 군대의 부패와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여야겠다는 그때의 결심이 다시 살아났다. 기윤실이 출범한 지 2년 후에 서경석 목사가 주도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에 동참해서 중앙위원회 회장을 거쳐 제2대 공동대표로 섬겼다.
경실련은 민주화 후 처음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NGO로 시민들의 호응을 많이 받았고 사회개혁에 크게 공헌했다. 부동산투기 억제를 위해 토지공개념을 도입·확산시켰고 금융실명제 실시를 주장해서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이 이뤄졌다. 일본에는 아직도 없는 제도로 공직자 재산공개와 더불어 부패방지를 위한 김 대통령의 큰 공헌이었고 경실련의 중요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시민운동 참여로 얻은 가장 큰 보람은 공명선거운동에서였다. 1991년에 한경직 김준곤 목사 등을 모시고 ‘공명선거기독교대책위원회’(공선기위)를 조직했다. 1992년에 기윤실, 경실련, YMCA, YWCA, 흥사단 등의 NGO들로 구성된 ‘공명선거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를 결성해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상임공동대표가 되어 10년 이상 활동했다.
부정 고발, 투표 참여 등의 캠페인으로 불법을 막으려 노력했고 무엇보다도 잘못된 선거제도를 바꾸는데 이바지했다. 하나는 선거 부정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군부재자 투표를 선관위 감시하에 영외에서 실시하도록 선거법을 바꾼 것이었다. 국방부 장관과 소리를 높여가며 논쟁하고 장군들의 무마를 물리치면서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마침내 선거법이 개정되어 부정 선거의 표본 하나를 제거했다.
또 하나는 대통령 선거유세를 TV 토론으로 대체한 것이다. 당시에는 후보자들이 경쟁적으로 세를 과시하느라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일당을 주고 버스에 태운 뒤 대규모 상경 집회를 열었는데 천문학적 비용이 필요했다. 불법으로 모은 돈이었고 엄청난 낭비였다. 우리는 TV가 많이 보급되었으므로 대중 유세를 TV토론으로 대체하자고 정당들에 제안하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수였던 야당 로비를 맡았는데 당사에 찾아가서 오히려 큰 환영을 받았다. 결국 제도가 바뀌어서 TV 토론이 정착됐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공명선거에 공헌했으니 훈장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 혼자서 한 것이 아니므로 사양하고 공선협에 달라고 했으나 단체는 훈장 수상 대상이 아니라서 대통령 표창으로 바꿨다. 그 뒤에도 몇 가지 개선이 이뤄져서 우리 선거는 세계 어느 선진국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공명하다. 민주주의는 부패방지에 필수적이고 선거가 공명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므로 이에 공헌한 것은 나에게 큰 보람이다. 군에서 진로를 바꾼 목적을 조금이나마 이룩한 셈이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3) 근검절약 몸에 밴 ‘노랑이’… 환경보호로 이웃 사랑 실천
환경보호 실천 위해 작은 차를 타고
태양광 시설 설치해 탄소배출도 줄여
지구온난화로 목초지 사라진 몽골에
80여만 그루 나무 심어 사막화 방지
손봉호 교수는 1998년 푸른아시아(구 한국휴먼네트워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사진은 지난해 몽골 바양척드 지역 현지에서 주민들이 환경 캠페인을 하는 모습. 푸른아시아 제공
내가 기윤실, 경실련, 공선협 등 시민운동 외에 환경운동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1972년 ‘성장의 한계’란 로마클럽 보고서가 나오자 나는 그 심각성을 깨닫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70년대에 귀국해서 어떤 잡지에 환경보호를 주제로 글을 썼더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반응을 받았다.
우선 나부터라도 시작하자 해서 에너지와 물자 절약을 실천하고,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며, 태양열로 요리하는 실험까지 해 봤다. 2004년에는 지금 사는 집 지붕에 태양광 발전판을 설치해 생산된 전기를 조명, 조리와 전기차 충전에 쓰고 겨울 난방의 절반을 충당하는데 지금도 2000㎾ 이상을 저축해 놓았다.
나는 스스로를 한국의 대표적인 노랑이라 자처한다. 절약한 전기료와 난방비가 상당해서 환경운동 하다가 경제적 이익까지 얻고 있다. 앞으로 전기료, 가스값이 오르면 그 이익은 더 커질 것이다. 이웃의 다섯 가정도 태양광발전 시설을 설치하였으니 그만큼 탄소배출도 줄었을 것이므로 나의 운동이 효과를 거둔 셈이다. 서울영동교회에서 냉방기를 설치하지 않으려 한 것도 경제보다는 환경에 관한 관심 때문이었다. 모든 지붕, 특히 모든 교회 건물에 이런 태양광발전 시설을 설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처럼 여름에는 냉방기 사용을 삼가고 겨울에는 방 온도를 18도 이하로 유지했으면 한다.
1998년에는 한국휴먼네트워크란 단체(2008년에 ‘푸른아시아’로 개명)의 이사장으로 취임해서 2000년부터 몽골의 사막화 방지를 위해 조림사업을 시작했고 그 때문에 여러 번 몽골을 방문했다. 지구온난화로 기후에 변화가 생겨서 탄소배출이 거의 없는 몽골에 강과 호수 수백 개가 사라졌다. 우리나라를 덮치는 황사의 절반이 몽골에서 발원하는데 사막화가 진행되면 그 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목초지가 많이 사라져서 양과 염소를 키우던 유목민들이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에 모여들어 난민촌을 이뤘는데, 추운 겨울에는 폐타이어를 태워 난방하므로 그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곳이 되고 말았다. 몽골의 사막화와 황사의 양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대한항공, 산림청, 수원시, 인천시, 숙명여대 등의 협조를 받아 지금까지 약 80여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그 80% 정도를 생존시켰다. 1998년에는 그 성취로 푸른 아시아가 유엔의 사막화방지협약이 수여하는 ‘생명의 토지’(Land for Life) 최우수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CBS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 교회들과 함께 조림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환경오염과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는 폭우, 가뭄, 폭염과 혹한을 일으키고 미세먼지는 무수한 사람을 병들게 한다.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범죄라면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줄이지 않는 것은 무책임의 정도를 넘은 범죄에 가깝다. 지금의 상황을 고치지 못하면 인류의 생존은 끝날 것인데 고칠 기미가 확실하지 않다. 한국은 탄소배출 증가량에서 세계 1위인데도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둔감하다. 특히 이웃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환경보호가 매우 중요한 이웃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4) “환자를 위해 기부한 돈은 한 푼도 허투루 쓰면 안 돼”
여러 교회와 성도 헌금으로 건물 짓고
말기 암 환자 통증 완화위해 사역 감당
60병상 둔 국내 최대 호스피스로 성장
손봉호 교수가 30년간 이사장으로 섬겼던 샘물 호스피스 병원의 내부 전경. 샘물호스피스선교회 제공
1980년도 초반에 서울영동교회에 부임한 원주희 전도사가 자신은 호스피스 사역에 부름 받았다면서 그 사역에 무지했던 나에게 호스피스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듣자마자 나는 꼭 필요한 사역이란 것을 느꼈고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호스피스에는 영국이 모범적이라기에 원 전도사가 신학교를 졸업하면 영국 유학도 추진하겠다 했다. 신학교를 졸업하자 당시 나와 함께 한영교회에서 시무하던 원 전도사가 영국에 갈 것 없이 바로 호스피스를 시작하겠다 했다.
1993년 경기도 용인 청록원의 한 건물에서 샘물호스피스선교회 사역을 시작했는데 나는 이사장으로 30년간 원 목사를 도왔다. 주민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다가 민가가 없는 수원 백씨 문중묘지 근방에 서울영동교회, 영락교회 등 여러 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으로 건물을 짓고 지금까지 말기 암 환자 통증 완화 사역을 꾸준히 감당하고 있다. 60병상을 둔 국내 최대 호스피스가 되었고 철저하게 신실하고 신앙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호스피스에 관한 한 전 세계에서 모범적이라고 자부한다. 독일의 호스피스 몇 곳을 시찰했지만 샘물처럼 분위기가 밝은 곳은 없었다.
호스피스를 위해 내가 한 것이라고는 투명성과 순수성을 강조한 것 뿐이다. 법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시작한 첫 해부터 공인 회계사의 감사를 받도록 했고 모든 기부자와 기부액을 소식지를 통해 매월 보고하도록 했다.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라고 기부한 돈은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환자를 돌본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는 생활 수단, 명예, 보람 등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불순하다 했다.
원주희 목사는 보험회사 등 외부 강의에서 받은 강사료를 전액 호스피스에 바쳐서 직원들의 위기 대처에 사용한다. 그리고 지난 30년간 쌓아놓은 공인회계사 감사보고서는 샘물이 환우 돌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이익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줘 큰 방패 역할을 하고 있고 많은 문제를 해결해줬다.
나는 밀알복지재단, 최근에 이사장으로 섬겼던 기아대책에도 동일하게 투명성과 순수성을 강조했다. 감사하게도 밀알의 정형석 목사, 샘물의 원주희 목사, 기아대책의 유원식 회장 등 책임자들과 직원들이 모두 신실한 신앙인으로 투명성과 순수성의 중요성에 적극 동의하고 실천해줬다. 그동안 코로나로 많은 복지단체가 기부 감소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 세 기관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부가 늘어나고 있다. 기아대책은 한때 어려움을 겪었지만 투명하고 순수하게 사역한 결과 그것을 말끔히 극복하고 역사상 가장 효과적으로 운영되는 모범적인 복지기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동안 이들 기관에서 대표 혹은 이사장으로 섬기면서 얻은 확신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국처럼 불신과 부조리가 심한 사회에서라도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고 순수하면 반드시 신임을 얻을 수 있으며 정직하면 절대로 손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잔재주 부리지 않고 원칙에 충실하면 된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5) 작은 능력으로 가능한 많은 사람의 고통부터 구제해야…
고칠 수 있는데 병원이나 돈이 없어
당하는 장애인들 참혹한 현실 경험
같은 액수 돈이나 같은 능력이라도
이들부터 먼저 도와야 함을 깨달아
손봉호 교수가 기부한 2000만원으로 말라위에 세워진 장애인 시설인 ‘손봉호 홀(SON BONG HO HALL)’ 전경. 손봉호 교수 제공
내가 누린 특권들 가운데 하나는 세계 많은 지역을 방문한 것이다. 주로 학회 참석, 강의와 특강, 집회, 방송 등을 위해서였지만 선교와 구제를 위한 것들도 더러 있다. 선교와 구제를 위해 간 곳들은 우간다, 말라위, 탄자니아, 캄보디아 같은 가난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
말라위는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나라다. 거기에 내 이름이 붙은 건물이 하나 있다. 1990년대 이화여대 간호대 학장과 서울 사이버대학 총장을 역임하신 고 김수지 박사가 그 나라에서 간호사 양성 봉사를 하고 있을 때 구호 활동에 쓰라고 기아대책을 통해 2000만원을 원조한 적이 있다. 그 돈으로 김 박사는 장애인들을 위한 건물을 하나 짓고 나의 허락도 없이 ‘SON BONG HO HALL’이란 이름을 붙였다. 큰 방이 너 댓개나 되는 꽤 큰 건물로 장애인 작업, 주간 보호, 성경공부 등 30여개의 활동이 밀알복지법인 선교사의 관리 아래 이뤄지고 있다. 지붕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해서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장애인들이 재봉틀을 이용하여 마스크를 만들어서 전국에 판매했는데 한국 돈 1억 원의 소득을 올렸다 한다.
2016년에 받은 민세상 2000만원 가운데 500만 원은 그 장애인 건물 부엌 설치를 위해 보내고 나머지 1500만 원은 기아대책을 통해 말라위의 한 초등학교에 보냈다. 그것으로 맨땅에 앉아 공부하던 학생 570명이 처음으로 책걸상을 갖게 되었다.
2013년에 말라위에 가서 준공식에 참석하고 가난한 나라의 장애인들이 당하는 참혹한 고통을 보고 왔다. 치료만 받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는데도 병원이 없거나 돈이 없어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무수했고 장애가 있기 때문에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모든 나라의 장애인이 다 불편하지만 가난한 지역의 장애인은 정말 비참했다.
말라위의 경험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고통에도 정도가 있으므로 고통을 가장 많이 당하는 사람부터 도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액수의 돈이나 같은 능력이라도 가난한 나라에서 그 효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0만원으로 땅 한 평 사기도 어렵지만, 말라위에서는 큰 건물을 지어 수많은 장애인을 돌볼 수 있다. 단돈 1500만 원으로 땅바닥에 앉아 공부하던 아이들 570명이 책걸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구제하되 작은 능력으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많은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넉넉한 지역, 부유한 사람이 조금 절약하면 가난한 나라 약한 사람에게 큰 이익을 줄 수 있으므로 한국인의 절약은 도덕적 의무이며 모든 사치는 범죄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 11억원을 밀알복지재단에 기부해서 ‘장애인권익기금’을 조성했다. 더 많은 분이 이 기금에 동참하도록 기금 이름에 나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6) 한국교회, 교육 선교 중심으로 복음화 뜻 모으길
세계 어떤 지역이든 지도층에
기독인 많아야 선교 속도·효과 높아져
한국교계엔 최고 수준의 고급 인력 풍부
인적자원 잘 활용해 복음화 앞당겨야
손봉호(오른쪽 일곱 번째) 교수가 2018년 열린 ‘제3회 교육선교포럼’에서 PAUA교육협력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AUA교육협력재단 제공
선교사를 볼 때마다 죄송한 생각이 든다. 그분들의 고생과 희생에 비해 나는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을 위로하러 선교지를 방문했고, 잠시 귀국 선교사들을 위해 오피스텔 한 채를 교단 선교부에 헌납했다.
20여년 전 우간다 부통령 초청으로 가나안농군학교 김범일 장로와 함께 우간다에 갔다. 그곳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들을 만나 선교사 부부 30여명에게 저녁 식사 한 끼를 대접하기로 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대통령을 예방하기로 정해놓은 시간을 대통령 궁에서 갑자기 바꿔서 내가 선교사들을 만나기로 한 그 시간에 오라는 통고를 받았다. 나는 선교사 쪽을 택했고 지금도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17년부터 PAUA교육협력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세운 대학들의 연합체로 2009년에 창립해 12개 정회원 대학과 4개의 준회원 대학이 가입되어 있다. 1년에 두 번씩 교육 선교 세미나를 열어 교육 선교에 대한 교계 관심을 일으키고, 선교대학에서 봉사할 교수나 직원을 모집하며 선교대학 학생 장학금을 마련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양대 김영수 교수를 중심으로 40명의 전·현직 그리스도인 교수들이 자원해서 온라인 또는 현지에서 강의 봉사를 하고 있다. 한동대 교수들의 협조로 강의를 녹화해서 필요한 대학들에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우수 학생들을 위해 2억원의 장학기금도 마련했다.
우리는 앞으로 한국 선교는 교육 선교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지역이든지 지도층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야 복음화가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복음화가 빨랐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이 연희·숭실·이화·배재 등 학교를 세웠고 그들이 대학으로 발전해서 한국 사회에 유능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것이다. 만약 그런 고등교육 기관들이 없었더라면 한국 교회가 이만큼 자라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국도 이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는 2000년에 가까운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복음화가 이뤄지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도급 인물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지식기반 사회라 한다. 좋은 자연조건이나 풍부한 자원보다는 인적자원이 더 중요하고 개발도상국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거기다가 한국은 자연자원이 부족한데도 세계가 인정할 만큼 발전한 것은 교육 때문이란 것을 후진국들이 다 알기 때문에 한국으로부터는 교육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 교계에는 최고 수준의 교육받은 고급자원이 풍부하므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훌륭한 교육 선교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육 선교는 한국교회가 매우 잘 할 수 있고 선교지의 가장 중요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이런 상황과 기회를 가능한 한 잘 이용해 총체적인 복음 선교에 한국 교회가 뜻을 모으기를 기대하고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7) ‘신앙과 학문’, 수준 높은 학술논문 등재지 된 것 감사
통합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독 지식인 성숙한 협력 보여줘
초대이사장으로 섬기게 돼 큰 보람
기독교철학회도 출범 때부터 참여
손봉호(앞줄 왼쪽 다섯째) 교수가 2017년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정기총회를 마친 뒤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제공
한국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학문 활동이었다. 신학을 공부한 다음 네덜란드로 간 것은 그때 자유대학교가 본거지였던 기독교 철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지만 귀국 후에는 일반대학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기독교 철학은 시간강사로 나갔던 총신대학교와 고신대학교에서만 가르칠 수 있었다.
그때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 가운데는 오덕교, 고 이정석, 이승구, 유호준 등 신학 교수와 강경민, 박은조, 이문식, 정형석, 조봉희, 최삼경 등 목사들이 있는데 모두 한국 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외대 제자며 조교였던 강영안과 총신대에서 학사 논문을 지도했던 신국원은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귀국해서 기독교 철학계에 크게 공헌하므로 교계와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좋은 제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큰 기쁨이며 보람이다.
1998년에는 ‘기독교철학회’가 출범해 2004년까지 회장으로 섬겼다. 2009년에는 ‘기독교학문연구회’와 ‘기독교학술교육동역회’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로 통합되어서 초대 이사장으로 섬기다가 2020년에 물러나서 명예이사장으로 돕고 있다. 이 동역회는 1만명에 가까운 학자들과 700명에 가까운 대학교수들이 가입되어 한국 최대 학술단체들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 학술단체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각각 2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두 단체가 합쳐졌지만 지금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한 몸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인 지식인들의 성숙한 교양 수준에 큰 인상을 받는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동역회가 발간하는 ‘신앙과 학문’이란 학술지가 공공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 인정하는 ‘등재지’의 자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학자가 아무리 좋은 논문을 써도 등재지 자격이 없는 학술지에 발표하면 학술논문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교수 진급 등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 학자가 훌륭한 논문을 써도 기독교 관점에서 쓰면 ‘종교 편향적’이란 이유로 그 분야 학술지에 게재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신앙과 학문’이 정식 등재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인 학자가 마음 놓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학술논문을 쓸 수 있고 ‘신앙과 학문’ 심사위원회 심사에서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으면 게재되어 모든 대학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용기를 얻고 기독교 학문 연구가 활발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점점 더 많은 논문이 제출되고 탈락률이 높아져서 지금은 아주 확고한 학술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과 세계 학계에 기독교 학자들의 공헌을 가능하게 하고 학계와 사회에 기독교의 위상을 제고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부족했지만 이런 발전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8) 날 닮아 자존심 강하고 신세 지기 싫어하는 아들 화철
부모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유학 생활 박사학위 받아 귀국했는데 일자리 없어
아들 교수 공모에 지인 찬스 쓰려하자 펄쩍 뛰며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손봉호 교수의 아들인 손화철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한동대 유튜브 캡쳐
선친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아들 화철에게 잔정을 보이지 않았다. 초·중·고·대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같은 캠퍼스에 다녔으면서도 4년간 한 번도 내 차에 함께 탄 적이 없다. 군에 입대할 때도 나의 경우처럼 대문 앞까지만 나왔고 면회는 물론 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 중증 장애인들이 우리 집에 민박한 적이 있는데 그 영향인지 자신은 특혜를 너무 받았다고 느끼고 어떤 편의도 요구하지 않아 키우기가 편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장애인 친구를 사귀었고 그들의 우정이 수십 년 동안 이어져 보기에 좋았다.
아들은 철학과를 졸업하고 특별한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벨기에의 역사 깊은 르벤대학에 입학했다. 그 나라에는 등록금이 없고 생활비는 그 나라에 파견된 한국 상사 직원들의 자녀 과외수업과 그 나라 방문 한국 기업인들 통역으로 충당했기에 따로 송금하지 않아도 되었다. IMF 외환위기 때는 한국 상사직원들이 대거 귀국해 마른 빵을 얻어먹는 등 고생을 좀 한 모양인데 전혀 알려주지 않아 돕지 못했다. 가능한 한 부모의 신세를 안 지려 한 것이다.
공짜로 공부하고 기술철학에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했는데 일자리가 없어 시간강사로 돌아다녔다. 그때 계속 실직자로 남지 않을까 걱정을 좀 했다. 그러다가 한동대학교의 철학 교수 공모에 응모했는데 유혹이 생겼다. 당시 총장 고 김영길 박사가 억울하게 구치소에 갇혔을때 구명 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아들을 위해서 전화 한 통 해보고 싶은 유혹이었다. 아들과 의논했더니 펄쩍 뛰면서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며칠 동안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러다가 ‘총장을 아는 아비가 없는 다른 지원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전화할 용기가 없어졌다.
아들은 예비 심사에 합격해서 마지막으로 총장의 면접시험을 받았다. 지원 서류를 뒤적이던 김 총장이 어느 구석에 내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는 “당신이 손봉호 교수 아들이요?”하고 물었다 한다. 아들이 그렇다고 했더니 “당신 아버지는 어떻게 나한테 전화 한 번 안 걸어?” 했다고 한다. 김 총장은 다른 모임에서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쨌든 아들은 합격해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혹시 내 아들이기 때문에 김 총장이 합격시킨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래서 아들이 학교 덕을 보는지 아니면 학교에 이익을 끼치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감사하게도 학교와 학생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학생들의 사랑과 동료 교수들의 인정도 받는 것 같아 안심하고 있다.
나의 신세를 안 지려는 그의 자존심과 약자에 대한 그의 관심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그가 사는 집값의 5배나 되는 금액을 장애인을 위해 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억제된 사랑에도 불구하고 부산외대 교수로 있는 며느리 변수연과 함께 효도를 잘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한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29) 돈과 권력의 유혹 있었지만 하나님 은혜로 고비 잘 넘겨
명예나 돈이 아닌 공적 임무 수행하며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
손봉호(앞줄 오른쪽) 교수가 2004년 동덕여대 총장 재임 시절 산타클로스 모자를 착용하고 학생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 연합뉴스
1980년대 후반부터 시민운동에 많이 관계하게 되자 신문 칼럼, 방송 출연 등으로 언론에 많이 알려졌다. 26년간 KBS 객원 해설위원으로 뉴스 해설을 했으며 한때는 KBS에 ‘손 교수의 인간 가족’이란 프로그램까지 생겨났다. 지인들은 혹시 내가 정치계나 공직에 뜻을 둔 게 아닌가 의심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청와대에서 국회의원 공천을 약속했고 총리직 의향을 타진한 적이 있으며 새마을 회장직을 제의한 적이 있다. 신문에도 여러 번 고위직 후보로 이름이 올랐다.
나도 한국 남자라 왜 명예욕, 권력욕이 없었겠는가. 유혹에 거의 넘어갈 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그 고비를 잘 넘겼다. 가족도 모두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보다도 나의 능력과 한계를 내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앉으면 나도, 그 자리도 망합니다”하고 사양했다. 돈과 권력이 생기는 곳에는 서지 않기로 했다.
그 원칙을 딱 한 번 어긴 것이 2004년에 동덕여대 총장이 된 것이었다. 큰 실수였고 일생에서 가장 큰 흠이었다. 그전에도 대학 세 군데에서 총장 제안이 있었고 그 뒤에도 두 대학이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동덕여대의 요청도 사양은 했지만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마키아벨리의 세상 지혜를 너무 무시했고 어떤 교수가 지적한 ‘편협한 도덕주의’에 충실한 것이 화근이었다. 돈과 권한이 생기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도 지킬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계기였다.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돈이나 권력이 생기지 않는 공적 임무는 많이 수행했다. 초대 정부 공직자 윤리위원을 맡아 차관들과 입씨름을 해가며 공직자재산신고 항목에 주식을 포함시킨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지금도 뿌듯한 일이다. 어쨌든 그 위원을 맡았다고 해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2년간 대검 감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장, 세종문화관 이사장도 해 봤다. 지금도 6년째 국방부 중앙전공상심사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한때는 시민단체, 복지기관, 기독교 단체들의 이사장 자리를 20개나 가졌고, 지금도 명예 이사장 자리가 4개나 된다. 선의를 가지고 공익을 위해 활동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내 이름을 좀 이용하자고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해 수락하다가 그렇게 많아진 것이다. 수당이나 회의비는커녕 모두 회비를 내야 해서 한때는 그렇게 바친 돈이 한 달에 100만 원이 훨씬 넘었다. 그리고 지금도 부담이 될 정도로 내고 있다.
그러나 명예나 돈이 아니라 공익, 특히 약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므로 후회하지 않는다.
***[역경의 열매] 손봉호 교수 (30·끝) 교육자로서 학생 가르치며 일생 보낸 것은 큰 축복
교육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학생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가르치는 것
잘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공부하는 것과 기본적 도덕성
손봉호 교수가 지난달 서울 강남구 밀알복지재단 사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시민운동 학문 선교 교회 윤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역시 나의 주업은 가르치는 것이었고 모든 다른 활동도 교육자의 신분으로 수행했다. 내가 받은 달란트는 역시 가르치는 것이었고 거기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교육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학생이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을 쉽게 가르치려고 노력한 결과 한국에서는 철학을 가장 쉽게 가르치는 사람이란 평을 받는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지껄이는 거짓은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잘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이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학원 강의는 방학에도 계속했고 학부 학생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숙제를 요구해서 원망을 듣기도 했다. 유학 시절에 옥스퍼드에 가서 그 대학 철학 조교였던 렉스 앰불러로부터 그가 학생들의 철학 숙제를 평가하는 방법을 들었는데 처음에 제출한 논문은 무조건 낙제시킨다 했다.
거기서 암시를 받아 나도 내가 지도하는 박사과정 학생의 학위 논문은 우수하더라도 이런저런 구실을 만들어 반드시 다시 쓰게 했다. 물론 능력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고쳐 온 논문은 월등하게 개선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대학교수가 되어 잘 가르치고 있다. 은퇴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매년 정초와 스승의 날에 빠지지 않고 모여서 식사를 대접해 준다. “학생과 찰떡은 치면 칠수록 맛이 난다”가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준 농담이었다.
기본적인 도덕성이 부족하면 공부를 잘해도 지도자가 될 수 없기에 시험을 무감독으로 치렀다. 강사로 나간 총신대와 고신대에서 시작했고 그 뒤 서울대 사회교육과에서도 시행했다. 학교 시험 같은 것에서 부정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간단하게 잔소리를 한 다음 시험 문제만 제시하고 교실에서 나와 버렸다. 놀랍게도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부정행위가 있으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보면 시험장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오히려 답안지에 “우리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은 “우리가 무감독 시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합니다” 등의 소감을 표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나도 뿌듯했다. 한동대학교는 모든 시험이 무감독으로 시행되는데, 그런 훈련이 그 학교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한다.
어쨌든 모든 자원 가운데 인적 자원이 가장 중요한 오늘날 그런 자원을 개발하는 데 일생을 보낸 것은 큰 축복이었다. 아울러 군대에서 진로를 바꾼 목적을 조금이라도 이룰 수 있었으니 감사할 뿐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여든 다섯 살을 먹었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하늘나라에 갈 수 있기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부족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삶의 여정을 읽어주신 분들과 이런 기회를 주신 국민일보 종교국에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