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영 백일장이 끝났다 / 양선례
백일장 총무를 맡아달라는 전화가 지인에게서 온 게 4월 중순쯤이었다. 수년 전 문인협회 사무국장을 2년 맡아서 한 적이 있다. 매화 축제와 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열리는 시화전, 봄과 가을에 작가를 초청하여 두 군데 학교에서 열리는 청소년 문예학교, 매년 12월에 회원의 작품을 모아 문예지 발간을 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문학 기행과 총회 등의 회원의 친목을 겸하여 치르는 소소한 일도 있다.
그 단체의 창립 때부터 활동했으니 거의 27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신입 회원이 많이 들어왔지만 어쩌다 모임에 참석하는 불량 회원이기에 낯선 얼굴을 만날 때도 많았다. 취미가 같다는 한가지 이유로 모였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그 안에서 갈등과 오해가 쌓여 이런저런 소리가 내 귀에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초창기의 열정과 분위기는 아니지만 첫 마음을 준 단체였기에 사는 지역이 달라져도 곁눈질하지 않고 지금껏 활동하고 있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나는 모교에서 4년간 근무했다. 그곳의 현관에는 학교를 빛낸 인물로 두 명의 문학인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정채봉과 이균영이다.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를 낸 샘터사의 주간인 정채봉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그가 광양동교 출신이라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행정구역상 순천왜성이 있는 곳에서 태어났고, 또 순천만이 대대적으로 개발되면서 그를 기리는 문학관도 그 언저리에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할머니를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양으로 이사 와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그곳에서 다녔다. 한번 들으면 잘 잊히지 않는 투박한 광양 사투리를 썼다. 그의 글 속에는 읍내나 사람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종종 내려와서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들이 지금도 그를 이야기한다. 광양에서는 뒤늦게 그가 세 들어 살던 읍내 거리를 ‘정채봉 문학 거리’로 조성하고 도시 재생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뒷북치기다.
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후배인 이균영은 광양중학교에 입학하자, 광양농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정채봉을 만나 문예부에 들어가면서 월간 ‘학원’지의 기자로 활동한다. 당시 광양에는 강호무, 김승옥, 주동후 등 문학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 모임이 있었는데 이들과 어울리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한양대 1학년인 1977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바람과 도시」가 당선되었으며, 1984년에는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1986년 동덕여대 사학과 교수가 되면서부터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연구하였다. 특히 신간회 연구에 힘을 쏟아 그 공로로 그해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에게 주는 ‘단재 학술상’을 1994년에 수상했다. 아쉽게도 그는 1996년 새벽 45세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그는 생전에 단편 28편, 중편 5편, 장편 4편, 동화 10편을 남겼다.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27년이 되는 해이다. 작년에 그를 아끼던 기업인과 광양시청이 힘을 합해 생가 뒤편 공원에 문학비를 세웠다. 그는 돋보기를 놓고 봐도 잘 보이지 않게 깨알같이 글씨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작인 『나뭇잎들은 그리운 불빛을 만든다』는 그가 에이포(A4)용지 열여섯 장에 쓴 원고였는데 이는 200자 원고지 천2백 매 분량이다. 용지 한 장에 원고지 75매를 쓴 셈이니 얼마나 작게 글씨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글씨를 확대하여 옮겨 적는 일을 하며 그를 돕던 지인이 문학비 개막식에서 추모시를 낭송했다. 그 시에 감동받은 기업인이, 늦었지만 그의 이름을 알릴 방법을 궁리해 보라고 했다. 참석한 회원 중 한 명이 백일장을 제안했고, 흔쾌히 수락한 그가 시상금 2천만 원을 내놓으면서 ‘제1회 이균영 백일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런 과정은 하나도 모르는 내게 중책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온 것이다. 물론 거절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묘수를 짜 봐도 마땅히 맡아서 할 사람이 안 보였다. 초중고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다 보니 교육지원청에 협조를 구해야 할 판인데 교단에서 퇴직한 회원은 여럿이나 퇴직한 지 한참 지난 분이 태반이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균영은 초등학교 대선배이기도 하다. 백일장이 열리는 날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아서 ‘그때까지만 고생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추진하려고 보니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백일장 상금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게 그 액수가 컸다. 초등 대상은 2백만 원, 중고등학생은 각 3백만 원이었다. 학생들 참여를 독려하게 입상자 수를 늘리고(초등학생 9명, 중고등학생은 각 6명에 불과) 개인에게 돌아가는 액수를 줄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으나 독지가가 거절했다. 종목도 산문으로 제한했다. 그 아이가 문학 영재로 자라는 데 장학금으로 줘서 격려하고 싶다고 했다.
‘도전을 글감으로 초등학교 6학년 여자 아이가 쓴 수준으로 글을 써 줘.’ 명령하면 5분 안에 그럴듯한 답을 내 놓는 쳇지피티(쳇GPT) 시대에 우리는 산다. 표절을 어떻게 가려 내느냐가 문제였다. 추진 위원 일곱 명이 여러 번 만나서 머리를 굴린 끝에 공간을 제한하기로 정했다. 처음에는 날씨에도 구애받지 않고, 표절을 가려내기도 쉬우며, 학생들 통솔하기 편하게 체육관에서 했으면 했다. 그런데 이 역시 이균영 문학비가 있는 곳에서 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며 독지가가 반대했다.
결국 5월 11일에 독지가의 안대로 백일장이 열렸다. 왜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는지가 실감나는 날이었다. 잘 가꿔진 공원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글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글을 쓸 수 있게 책상과 의자를 넉넉하게 준비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인근에서 온 학생이 대부분이었으나 고등학생은 달랐다. 사전 인터넷 접수로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아 걱정했다. 그런데 멀리 수원, 안양, 동탄, 당진, 창원 등에서도 학생이 왔다. 학교를 다니지는 않으나 그 나이 또래인 학교밖 청소년도 보였다. 경기도 모 예술고에서는 문예창작과 학생 열두 명이 학교 버스를 타고 왔다. 오는 데만도 다섯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인솔한 학부모나 교사는 선 밖으로 내보냈다. 휴대폰이 보이면 실격이라는 현수막을 곳곳에 붙였다. 회원 여럿이 손을 보탰다. 2백 명이 넘는 학생이 참석하여 백일장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지명도 있는 작가 셋이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심사했다. 주관은 내가 속한 단체에서 했지만 주최는 광양시청이었다. 교육지원청에 보고서를 만들어 상장을 의뢰하고, 시상식 시나리오를 시청과 공유했다. 당일 참석 인원을 확인하고, 입상 학생에게 통장 사본이나 동의서를 받았다. 학생 개인의 통장이 없으면 보호자의 신분증과 통장 사본, 학생과의 관계를 증명할 가족관계증명서도 필요했다. 일일이 연락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시상식은 광양시청 회의실에서 열렸다. 널찍한 공간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시장과 시의회 의장, 학교지원센터장의 얼굴이 보였다. 멀리서 학생을 인솔하여 온 학부모도 많았다. 입상한 학생과 가족, 시상자가 개별로, 또 단체로 모여서 사진을 찍느라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의 키 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굽히는 시의장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회 보는 거야 그동안 들인 수고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는데 학교 현장에서는 글쓰기를 거의 지도하지 않는다. 일기문, 소개하는 글, 생활문, 기행문, 논설문 등의 특성을 가르치고 그 형식에 맞게 글을 쓰는 시간은 있지만, 국어 시간에 반짝 일회성으로 끝날 때가 많다. 예전처럼 백일장도 거의 열리지 않는다. 인터넷 공모전은 있지만 입상 작품이 진짜로 학생이 쓴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한 달이면 끝나리라 여겼는데 시상식까지 두 달이 꼬박 걸렸다. 일하는 동안에는 몇 번이나 ‘올해만 하고 그만둬야지’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힘들어서,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그 일이 막상 끝나니 변명할 거리가 생긴다. 처음이라서, 모든 서류를 새로 만들어야 해서 벅찼던 거야. 내년에는 조금 더 쉬울 거야. 가치로운 일이잖아.
일 욕심 많은 것도 병이다. 집안일을 이리 열심히 했더라면 남편한테서 상 받을 텐데.
첫댓글 고생했어요. 그래도 추진력 있는 양교장이 들고 하니 일이 그 정도로 진척됐지요?
한 번 해 봤으니 내년에는 좀더 쉽게 하겠네요. 덕분에 우리 학교 애들도 좋은 경험 했습니다.
하하. 내년에는 조금 더 쉽겠지요.
제게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몹시 바빴지만요.
누가 그 일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역량이 크신 선생님 멋지십니다. 바람과 도시, 어두운 기억의 저편 기억해 놓겠습니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은 지금 읽어도 괜찮은 소설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 곳에서 중요한 일을 많이 하시네요. 큰 행사 치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고향 언저리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런저런 일에 관여하게 되네요.
거절을 잘 못 하는 것도 병이라서요.
선생님은 정말.
뒷이야기가 칭찬일까, 욕일까 혼자 궁리하며 미소지어 봅니다.
선생님은 진짜 대단하시네요. 전국의 문학 소년 소녀들을 꿈꾸게 하는 큰일을 하시다니요.
상금이 욕심나서, 요행을 바라며 가고 싶었는데 하필 안전 체험하러 가는 날과 겹쳐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선생님이 오셨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중학생이 참여도 저조하고 작품 수준이 별로라서 결국 대상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초등학생 장려가 여섯 명이나 늘었지요.
선생님 학교 아이들이 왔더라면 조금 나았을 텐데요.
'정채봉'선생님의 모교에서 근무하시는군요. '정채봉'이라는 글자만 봐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이라는 시 때문일까요? 시를 읽으며 가슴아프게 울었었답니다. 엄마생각에. 정채봉님은 법정스님을 알고서 요리저리 꼬리를 물어 그 분의 책을 읽으며 남다르게 생각합니다. 물론 얼굴도 뵌 적은 없지만. 영혼이 맑은 그 분이 간 암으로 가셨다는 소식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 분 따님이 작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맑고 고운 글을 쓰시리라 믿지요. 양선생님의 글은 전국의 작가분들이 모두 자양분이었네요. 하하
법정 스님과 정채봉 님은 교우가 깊었지요.
두 분 다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셔서 자도 아쉽답니다.
문화적으로 척박한 광양이라는 도시에 등불 역할을 조금 더 해 주셔도 되는데...
저는 그저 흠모할 뿐이고요.
도대체 선생님의 한계는 어디인가요? 고향의 일에, 오래 몸 담아온 문단에 선생님의 몫을 해내는 모습이 멋집니다.
누가 여기 들어와 봐.
하면 거절을 잘 못해서 이런저런 단체에 걸쳐 있답니다.
한번 담근 발을 빼지도 못해서 점점 마당발이 되어 가고 있고요. 하하하.
우와. 선생님은 역시 팔방미인이십니다. 대단하세요.
저와 남편의 중매쟁이이신 이균영선생님을 그동안에는 잘 몰랐다가, 광양으로 이사와서야 조금씩 알게 됐답니다.
아무튼 이번 백일장은 상금 규모만으로도 대단했는데,
뒷이야기를 알고나니 더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화려한 잔치를 준비하는 수많은 손길들, 그들의 수고가 잔치를 빛나게 했지요.
그 중에 선생님이 계셔서 잘 마무리된 줄 믿습니다.
글에는 쓰지 않았지만 독지가가 상금만 주고, 운영비는 하나도 안 주셔서 어려움이 많았답니다.
원고지 인쇄, 심사위원 위촉, 협의회, 탁자 의자 대여, 현수막 설치 등 할 일은 태산인데
운영비가 없어서 쩔쩔맸지요.
"이런 대회를 왜 우리가 맡아서 해야 하느냐"고 많이 투덜거렸네요.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에 끝나고 나니 더 보람은 있었습니다.
중매쟁이셨군요.
또 새로운 사실을 압니다.
언뜻 김 선생님께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만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