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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87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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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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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qZfuOwJq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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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콜베 신부님은 매일 순교를 준비해왔습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매 순간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성모님의 종’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1894~1941)이십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헌신했던 사목터는 큰 본당이나 학교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양떼는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 아니라 지하 감방 속에서 신음하던 동료 수감자들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폴란드 출신의 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인 동시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 창립자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한 동료 수감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한때 저는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이다. 그렇게 훌륭한 수도자이자 탁월한 대 영성가였던 콜베 신부님께서 단 한 명의 동료 수감자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순교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라도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으셨다면 나중에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 내 지척에서 울부짖는 동료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콜베 신부님은 인권이며 신앙이 철저히 유린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계곡 안에도,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생생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1941년 8월 14일 단 한 번에, 혹은 순식간에 또는 엉겁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성모님의 종으로 콜베 신부님은 어린 시절부터 매일 순교를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그가 매일 매일 살아온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후 한참 뒤에 그의 어머니께서 동료 수도자들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년 콜베 앞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는데, 그분의 손에는 두 개의 관이 들려져있었습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붉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정한 음성으로 콜베에게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즉시 둘 다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사라지셨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흰색의 관은 순결을 의미하고 붉은 색 관은 순교를 뜻합니다. 결국 콜베 신부님은 평생토록 한 송이 백합처럼 순결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아사 감방에서 그토록 원하던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장 병약한 수감자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답니다. 자신에게 배당된 말라비틀어진 작은 빵 한조각도 허기로 고생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매일 배당되는 강제노역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선택했답니다.
간수들의 번득이는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동료 수감자들에게 사목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콜베 신부님의 영적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지옥의 도가니 속에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었으며 또한 자살충동을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콜베 신부님은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갔습니다. 폭력과 증오심을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콜베 신부님의 영웅적 덕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한 명 한 명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평온한 얼굴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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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결국 끝까지 해내는 사람의 비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O25wWECP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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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결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유가 합당하다면 아내를 버려도 좋은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이 맺어주셔서 한 몸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러면 어째서 모세는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율법을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는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그것에 맞는 음식을 준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왜 결국엔 끝까지 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결혼은 끝까지 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끝날 때 변한 나의 모습이 목적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한 것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습니다. 분명 그 두 분 어르신들이 살아오면서 많이 다투기도 하고, 많은 실수도 서로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갔기에 많은 분으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비도 죽고, 조조도 죽고 손권도 죽었습니다. 세 나라의 건국 영웅들이 다 죽었지만, 중국은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비의 ‘제갈량’과 조조의 ‘사마천’만이 마지막 두 영웅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항상 제갈량에게 패했습니다. 당대 제갈량을 이길 영웅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제갈량과 겨루어 승리다운 승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마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도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왠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한 가지 길로 끝까지 가면 반드시 어떠한 형태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여기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중도에 실패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일등이 목표가 아니라 끝까지 뛰어 결승점을 통과하면 그것이 이기는 것임을 압니다.
사마의와 제갈량의 전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시간만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갈량이 사마의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 선물을 보냅니다. 그 비단으로 싼 상자 안에는 여인의 장신구와 옷이 들어있었습니다. 여자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당당하게 한 판 붙자는 말이었습니다. 사마의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 상자를 들고 온 군사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군사는 제갈량을 자랑하였습니다. 음식도 반밖에 안 드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며 업무에 집중하고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생각했습니다.
"얼마 못 가겠군!"
결국, 천하의 제갈량은 54세에 과로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통일의 주인공은 사마의가 되었습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승리하는 것보다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는 것만이 좋다는 것을 안다면 게으를 수 있습니다. 열매는 맺히겠지만 볼품없을 수 있습니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가정생활을 엉망으로 하면서 끝까지 가기만을 고집한다면 그 결혼생활에서는 끝까지 견뎌낸 상대만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서 안 되는 것은 ‘소명’입니다. 이것 역시 믿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결혼의 주체가 자신이라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혼의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맡기신 것이니, 당연히 끝까지 가야 하면서도 ‘잘’ 가야 합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갔다 오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여기고 다른 곳을 헤매다가 다음 날 들어온다면 비록 일은 했으나 칭찬을 듣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을 하거나, 누구와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나에게 맡겨진 ‘소명’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느님 앞에서 그 상대가 주님께서 선택하신 상대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있으면 결혼하고, 일단 결혼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사마의가 관직에 올라도 될 나이가 차자 조조가 그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두려운 나머지 그 벼슬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북한에서 김정은이 내리는 관직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마의는 조조의 성격을 알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 흉내를 냈습니다. 이를 믿지 않은 조조는 사마의를 염탐하게 시켰고 사마의는 몇 년 동안이나 중풍 병자 흉내를 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도 이 정도면 하늘의 뜻이라 여겨 결국 받아들입니다. 사마의는 이후 몇 대의 조조 후손을 임금으로 모시며 통일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끝까지 가려면 하늘의 뜻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결과도 좋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없습니다. 시련을 잘 견뎌냅니다. ‘끝까지 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주님이시다.’ 이 두 믿음만 있다면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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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3-12: 남자는 제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리라.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3절)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은 상대의 결점을 느끼지 못한다.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있다면 혼인을 무효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갈라지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둘의 관계는 멀어진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갑작스럽게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태 5,31-32 참조). 갑자기 질문을 던져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율법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거나, 먼저 말씀하신 것과 다른 말씀을 하시게 하려는 술수였다.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하시면, 전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고, 그전과 같이 말씀하시면 모세의 법을 들어 따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4-5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다는 사실만 말씀하시지 않고, 남자는 안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분부하신 것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혼인으로 하나가 된 부부는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더 큰 결합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6절)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둘을 결합시키셨다. 하느님께서 결합시키신 이 결합은 사람이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7절)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8절)라고 말씀하신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9절) 불륜이라는 것은 자기의 배우자가 아닌 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불륜은 하나이신 하느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포함되며, 우상숭배도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불륜으로 여겼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녀로 표현하는 부분이 성경에 많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제 발로 이교인들이나 이단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10절) 주님은 이 말에 동의를 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11절)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12절) 이들은 온전한 남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자가 된 사람들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12절) 즉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워서 승리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갈림없는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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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조선 시대에는 남성만이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 곧 칠거지악으로 불리는 일곱 가지 항목은 부인을 쫓아낼 수 있는 명분을 뜻하였습니다. 그러나 ‘삼불거’라고 하는 ‘여성 보호’ 조항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칠거지악을 저지른 아내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 경우로, 돌아가서 의지할 데가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가난할 때 같이 고생하다가 뒤에 부귀하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삼불거는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십계명에는 이혼을 허락하는 계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간음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이혼장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24,1-4 참조)에 나옵니다. 사실 신명기의 이 규정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남편이 함부로 이혼할 수 있는 명분이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이유로 부인을 함부로 내쫓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마태 5―7장 참조).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의 처음 의도대로 남녀의 결합이 가지는 존엄성을 회복시키고자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는 수백 겁의 인연이 쌓여야 비로소 부부의 인연이 맺어진다는데, 예수님의 혼인 선언이야말로 부부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큰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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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 자매님이 찾아왔습니다. 프리메이슨, 전자 칩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약속도 있어서 요점만 이야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로는 찾아오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를 듣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기에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상대가 듣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물며 별로 유익하지 않은 말을 기꺼이 시간을 내서 듣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상대방의 마음과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육사는 호랑이에게 살아있는 동물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어 죽이는 버릇이 더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주더라도 조금씩 잘라서 준다고 합니다. 잡아 찢는 버릇이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재주와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면 로마가 왜 망했느냐고 묻기 보다는 로마가 어떻게 천 년 동안이나 계속될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당파싸움으로 조선이 망했느냐고 묻기보다는 당론이 있어서 조선이 600년을 존속했느냐고 묻습니다. 염색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젊어 보인다고 하는 후배 신부님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누수로 지붕 공사를 했는데 생각보다 비용이 적게 나왔다는 말을 들으니 역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넘어져 다친 사람에게 잘 보고 다니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말은 하지 않으면 한번 후회하지만 말은 잘못하면 수천 번 후회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선출직인 정치인들에게 한 번의 말실수는 본인은 물론 소속된 당에게도 큰 피해를 주곤 합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도 항상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애정이 애증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돌아온 동생을 보고 형은 잔치를 벌인다고 불평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랑이 없는 말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용기를 주는 말, 위로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로 더위를 식히면 좋겠습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왜 하와를 만들어 주었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죽인 후에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불평했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셨음에도 이방의 신을 섬겼습니다. 아합은 이미 가진 포도밭도 많은데 나봇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밭을 빼앗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뉘우치기만 한다면 진홍같이 붉은 죄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다홍같이 붉은 죄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회개하고 뉘우치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부부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헤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부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기 때문에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셨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이 별이 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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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안 됩니다>
마태오 19,3-12 (혼인과 이혼, 혼인과 독신)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을
사람이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품으신 것을
사람이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살리신 것을
사람이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것을
사람이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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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1939년,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치의 눈을 피해 숨어드는 가운데, 한 신부는 수도원에 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 2년이 지난 뒤, 그 신부는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당시 나치는 폴란드의 유력 인물들, 이를 테면 종교인, 기자, 학자들을 자신들의 점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체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노동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5개월이 지났을 때 수용소에서 탈주자가 발생했습니다. 수용소의 지휘관은 탈주자가 나온 14A동 블록 사람들 중 10명을 무작위로 끌어낸 뒤 그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는 그 지휘관의 고유한 처벌 방식이었는데, 그는 탈주자가 나오면 함께 생활한 동의 사람들을 모두 줄 세운 뒤 그 중 10명을 무작위로 추려 죽였습니다.
동료애를 자극함으로써 다시는 탈주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추려진 10명 가운데, 폴란드군의 중사였던 가요브니체크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끌려 나오며, “내 아내! 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라고 외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10명 안에 뽑히지 않았던 신부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나는 가톨릭 신부이므로 가족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 내가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습니다.”
지휘관은 이를 승락했고 결국 그와 나머지 9명의 죄수가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시 이들의 처형 방식은 총을 쏘거나 교수형을 시키는 것이 아닌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고 아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나 이 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3주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1941년 8월 14일, 지휘관은 결국 그들에게 독약을 주사하여 모두 살해하였습니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부님은 기도하면서 스스로 팔을 뻗었습니다. 나는 보다 못해,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감시병이 나간 뒤 저는 다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신부님은 벽에 기대앉아 눈을 뜨고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분이 계시겠지만 이 사제의 이름이 “막시밀리아노 콜베”, 즉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순교 성인의 이름입니다. 그의 시신은 다음날인 성모승천 대축일 8월 15일에 수용소의 화장장에서 소각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성모승천대축일에 죽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의 소원이 비극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콜베 신부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훗날 연합군에게 해방되어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다행히도 살아 있었고 그는 94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콜베 신부님의 사랑과 영웅적인 행동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시복식과 시성식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울림을 줍니다. 서로를 험담하고 시기 질투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의 모습은 진정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이라고 해서 죽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탈주자가 발생하기 전 날까지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며 언젠가는 감옥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을 희생했고 그는 결국 감옥에서 하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 모든 인간을 소중한 창조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서로를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듯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의해서 맺어진 인연으로 결코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한 몸이 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이와 전혀 다른 모습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기 보다는 험담하고 비난하느라 바쁘고, 부부의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있는 인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몰두하기 보다는 미워하는 것에 몰두하고 타인을 감싸주려 하기 보다는 깎아 내리기 위해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앞설 때, 우리는 오늘 콜베 신부님의 모범을 기억하며 애써 악을 억누르고 사랑을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전쟁 중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선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쟁 중에 악을 자행하는 사람과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절망 속에서 좌절하는 사람과 그 와중에 희망을 찾아 나서는 사람 중 누가 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까?
우리는 나날이 더 행복해져야 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더욱더 굳건한 마음으로 미움과 절망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찾아 나아 갈 수 있기를 주님께 청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신부님이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 통역자의 증언을 읽어드립니다.
“예전에 보았던 사형수들은 거의 항상 절망에 빠진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독일 간수들조차 아연실색할 정도로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형수들이 콜베 신부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성모님께 바치는 폴란드 성가를 부르면서 말이죠. 다른 감방의 사형수들까지 그 합창소리에 동조하곤 했기 때문에 경비병들은 그럴수록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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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혼인 가정의 파탄(별거나 이혼)은 법으로 예방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문제입니다.
가끔 심리적, 감정적 원인에 따라 생기는 개인 문제도 있습니다. 부부의 행복과 일치와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좋은 수단은 혼인 계획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더욱더 사랑으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이혼이나 별거의 원인을 자세히 따져 보면 늘 복잡합니다. 그러나 건강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대로 병은 치료하는 것보다 미리 예방하는 것이 낫습니다.
말하자면 젊은이들은 심혈을 기울여 혼인을 잘 준비해야 하고 기혼자들은 늘 상승 리듬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성숙, 사랑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그리스도교 소명에서 생겨나는 영성을 통하여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토대는 부부와 가정이라는 건물의 필수불가결한 기초입니다. 젊은이와 약혼자들 그리고 이미 혼인한 이들도 혼인을 증명하는 개인적인 성숙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더 어렵습니다. 먼저 주고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서로 각자 안에 책임과 희생이 부족하고 경솔함과 이기주의가 넘쳐흐릅니다.
사랑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은 습관과 평범, 몰인정과 무관심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끝으로 진정한 믿음에서 생겨나는 복음의 영성은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스도교 혼인은 성덕으로 이끄는 신적 소명의 가치를 크게 외칩니다. 모든 혼인이 단순한 계약 이상이라면 그리스도교 혼인은 성사, 곧 은총과 구원의 효과적인 표징입니다.
모든 참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오기에 우리는 사랑의 원천이요 목적이신 그분께 이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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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날 가정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가족이 저마다 바쁜 나날을 지내다 보니, 심지어 가정이 마치 잠만 자는 곳 정도로 전락해 버린 경우도 있지요.
모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도 대화를 깊게 나누기가 힘듭니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들은 듣고 말하며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인격을 형성해 나가지요. 그러기에 가정의 역할과 사명은 더욱 중대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부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보완하여 완전해지도록 협조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각자 혼자로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족과 결점을 언제나 그대로 받아 주시듯이, 우리도 서로를 받아 주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만 하지요. 그럴 때 자녀들이 이를 본받고 배우게 될 것이 아닙니까?
특히 짧은 시간이라도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자리가 꼭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라고도 부르는 가정이 더욱 화목해지고 사랑의 실천을 나눌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커다란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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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는 질문은 예수님 당대의 혼인 개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혼인하면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 되는 시대에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다면 ‘아내가 남편을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남녀의 혼인은 세상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제도입니다.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꽃피는 장소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는 혼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 주는 거룩한 성사가 됩니다. 혼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맺어지는 부부의 결합이므로 거룩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라는 말씀은 혼인 생활의 기본 지침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성격 차이, 경제 문제, 가족 간의 불화, 배우자의 부정 등으로 이혼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에 부부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부부의 아름다움은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을 덮어 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 눈에 불가능해 보일 때도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부의 사랑을 완성하시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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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요리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식당을 직접 운영하면서, 동시에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이십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채식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나 생선을 전혀 먹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서, “그러면 이 식당에 고기가 들어간 음식은 없겠네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다른 가게처럼 고기가 들어간 음식도 있고, 생선 요리도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본인은 채식주의자로 고기 종류를 전혀 먹지 않지만, 요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생각해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뛰어넘으신 분이 역사 안에 참 많습니다. 베토벤은 난청이었고, 니체는 광인이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또 모네는 말년에 앞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을 현실로 보여줍니다. 또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상황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의 잘못된 판단으로 각종 잘못의 오류에 빠지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다가와서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법에 기초한 질문이었습니다. “버려도 된다.”라고 말하면 이제까지 말한 사랑은 무엇이냐고 따질 것이고, “버리면 안 된다.”라고 하면 왜 모세의 법을 어기냐고 따질 참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을 만든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잘못된 판단이 오류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에 기초해서 설명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이 아내를 내쫓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바라셨다면, 한 남자와 여러 여자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고, 여자를 창조하신 방식과 계명의 형태를 통해, 남자는 계속 한 여자와 살아야 하며 결코 둘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성실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배우자와 그런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바라보십시오.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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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사람으로 보인다.>
종종 무엇 하나 못 하는 것이 없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과연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 친구가 한 명 생각납니다. 지금은 저와 같은 신부로 열심히 사목을 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를 신학생 때 너무나 부러워했습니다.
어떤 것이든 조금만 배우면 전문가처럼 잘하는 이 친구의 능력이 얄미울 정도로 부러웠습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탁구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친구와 탁구를 같이 치게 되었습니다. 탁구는 제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운동 경기였지만, 뭐든 잘하는 친구이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탁구를 못 쳐도 너무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에, 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못 하는 것도 있는 네가 드디어 사람으로 보인다.” 못하는 모습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잘하는 모습이든, 못하는 모습이든, 사랑만 간직하고 있다면 기쁨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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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주님 중심의 홀로와 더불어의 삶-
어제도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점심식사후 즉시 시냇가 물오리를 구경하고 동요를 힘차게 부르고 돌아오던 중, 수도원 성전에서 기도하고 돌아가던 착한 자매를 만나 잠시 함께 걸으며 동요를 부르고 십자로 중앙에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진도 찍고 강복도 드렸습니다. 나이 70을 넘으니 이런 자유로움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너무 예쁘고 멋져요! 늘 이렇게 사세요!”
“신부님! 오늘 저에게 특별한 노래 선물을 주셔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사진도 예쁘게 나왔습니다. ㅎ ㅎ 감사합니다!!”-
마침 오랜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피정온 자매가 있어 9시경이 끝나자마자 형제님을 만나자하여 고백성사와 강복을 드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부부 사진을 찍어 전송해 드렸습니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부부예요! 늘 이렇게 사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신부님이 부르지 않으셨으면 그냥 간다고 했는데,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이웃이 행복할 때 참으로 나도 행복합니다.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삶일 때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동영상 메시지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진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하여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참 아름다운 행복의 법칙입니다. 아마 2000년동안 가톨릭 교회 역사상 전세계 신자들과 다정하게 소통한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유일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할 때 홀로와 더불어 여정중에 있는 도반 형제자매들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참행복도 성취될 것입니다.
공동체와 유리된 혼자만의 행복은 자기도취의 착각이며 환상일 수 있습니다. 탐욕과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참으로 오늘날 유해한 영적 바이러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평생 선교사로 살다가 순교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감동적입니다. 성인에 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명을 처형했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명의 처형 대상자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자원해서 죽겠다고 걸어 나갔다. 나치의 허락을 받고 다른 아홉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아사형에 처해졌다.’
1982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만47세 순교하신 콜베 사제 시성식 때 그에게 ‘자비의 순교자’란 칭호를 부여했고 수감자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본기도 역시 그대로 성인의 삶을 요약하며 참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사제가,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영혼들을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언제나 이웃에게 봉사하며, 죽기까지 성자를 닮게 하소서.”
죽기까지 성자 예수님을 닮는 것이 참 행복한 삶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독서는 예루살렘의 역사를 부정한 아내의 역사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항구히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배은망덕의 예루살렘 역사입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이웃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한 역사였더라면 이런 불행과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불륜이 상징하는 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당신께 돌아와 당신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살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가 주님을 떠난 불행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 독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물론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어느 경우든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만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 이상적 부부일치의 혼인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로 맺어진 부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혼과 독신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하나만의 성소가 아닙니다. 결혼 성소도 있고 수도 성소도 있고 독신 성소도 있습니다. 옛 신학교 시절 혼인법 마지막 시간 강의를 잊지 못합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해 살 사람은 살게 해주고 도저히 못 살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생 하느님을 찾아가는 각자 고유의 인생 여정중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홀로와 더불어 여정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하느님을 향해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과 조화속에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러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020년 여름호 분도 계간지 표지의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 산다”라는 구상 시인의 글귀와 그림도 이를 요약합니다. 아주 예전 무려 23년전 써놨던 사랑이란 자작시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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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헤어진다는 것>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8.3%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성격 차’'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몰아 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을 하였습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 받고 존경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아니하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됩니다.”(1고린7,10-11)
결국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엮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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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혼인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이유가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집니다. 혼인문제는 인간 삶에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기본적인 단위에서 파생되는 문제지요. 인간의 기본 욕구와 자손 번식, 사회적 관계망 등의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남편이 사회적 약자인 아내를 버리는 행위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율법에 어긋나고, 율법을 고수하면 사랑없는 사람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올가미는 아킬레스건이 될 만한 부위에 놓기 마련이지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예수님은 본질로 응수하십니다. 혼인은 인간의 일이기 이전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고 생각하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성사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마태 19,9)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예외적 상황으로 불륜을 드십니다. 이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간음이라고 하시지요. 혼인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건이 서로에 대한 신의이고 충실성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혼인관계로 서술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다."(에제 16,8)
하느님은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버려진 신생아 처지의 이스라엘을 손수 거두시어 정성껏 보호하고 양육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손을 내밀어 당신의 사람이 되도록 계약을 맺으시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계약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다른 나라와 그 우상들)과 불륜을 맺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에제 16,60)
그런데도 하느님은 다시, 먼저, 관계의 회복과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이번 계약은 "영원"합니다. 하느님의 끝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신부인 이스라엘을, 또 하느님 백성이면서 불충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인간 사이의 혼인 유지 조건을 뛰어넘으시지요. 인간 사이에는 불륜이 걸림돌이 되지만 하느님께는 그마저도 용서하고 포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는 혼인관계처럼 일치와 유대를 향하는 결합이어야 합니다. 또한 인간 사이의 혼인 역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처럼 경외와 존중, 신뢰와 충실성이 전제되어야 하지요. 혼인은 그래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할 성사이고 신비입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 19,11)
오늘의 복음 대목은 혼인 논쟁에 이어 잠시 독신생활에 대해 비춥니다. "허락된 이들"이란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마태 19,12) 육적인 욕망과 쾌락과 미래를 봉헌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혼인생활을 하는 이들이 가족을 통해 관계이신 하느님을 실제적으로 관상한다면, "허락된 이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혼인적 유대와 일치에 머무르지요. 이처럼 모든 삶의 형태가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으니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신랑이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의 어떤 죄악과 불결함에도 우리와의 혼인계약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모두 아름다운 신부로서 그분께 충실한 사랑을 바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이라면 인간과의 사랑에서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그리고 그분께서 맺어주신 짝과 정결한 사랑을 나누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을 자청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사제 축일을 지내며, 다른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배우자 서로를 위해 또 하느님을 위해 내 목숨을 대신 내어 놓을 수 있을까 다시 묵상해 보는 오늘입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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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변덕이란 감정은 왜 생기는 걸까요?(육안肉眼)과 심안心眼)
사람의 눈은 둘입니다. 하나는 육안肉眼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눈心眼입니다. 이 중에 마음의 눈이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육신의 눈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그칩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느라 말썽입니다. 기분이 그럭저럭 좋다가도 갑자기 곤두박질치는 경우, 외적 대상에게서 과거에 나를 불쾌하게 만든 대상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끄집어내서 본 것입니다. 문제는 이 대상이 허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 안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비현실적이던 것이 나중에는 현실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외적 대상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 있을 경우, 허상에 분노하는 마음이 오랫동안 풀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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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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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고, 탈출이 생기면 다른 죄수 열 명이 지하 감방에서 굶어주어야 하는 ‘수용소 규칙’에 따라 지명된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울부짖으며 외칩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죽기 싫어요.”
그렇습니다. 결혼과 가정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독일 병사가 그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순간,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수인번호 16670번, 마리아 꼴베 신부(1894-1941)였습니다. 꼴베 신부님은 다른 아홉 사람과 함께 아사 감방에 갇혔고, 그가 2주 이상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하자 독약을 주사하여 죽였습니다. 1941년 8월 14일,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이튿날인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꼴베 신부님은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그 가정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가정’은 그토록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결혼의 근본정신을 창조의 원리를 통해 대답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혼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창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태 19,5)
교부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이는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서>에서 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예레 32,3)
그러니,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는 예수님의 아내가 되는 혼인성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이 깊은 관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사는 것, 그분과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서로를 위하고, 서로에게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서로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부족하기에, 서로를 껴안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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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태 19,4)
주님!
제 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이 밀치고 들어올 틈새를 열게 하소서!
제 안에 자리를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이 들어와 머물게 하소서.
찔려 상처 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기에, 깊이 찔리어 피 흘리게 하소서!
상처 입고서야 자신을 떼어낼 수 있기에, 깊이 상처 입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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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마태19,12)
<나는 누구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가?>
오늘은 콘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사제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콜베 신부님은 1894년 폴란드에서 태어나셨고, '성모기사회' 성모신심단체를 설립하셨으며, 무엇보다도 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무수한 고통을 당하시다가, 1941년 8월14일 자진하여 다른 죄수를 대신해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다른 죄수를 위해 자진해서 대신 받은 신부님의 형벌은 아사(餓死), 곧 굶겨 사망하게 하는 형벌이었는데, 콜베 신부님께서는 이 빨마를 기쁘게 받아들이심으로써, 너를 위한 사랑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희생 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콜베 신부님은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답게 '너를 위해 대신 죽는 형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부 성 프란치스코처럼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참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참수도자'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참사제'셨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참프란치스칸'이셨습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가?'
어제 어떤 형제님께서 자원봉사단을 이끌고 이번 수해로 폐허로 변해버린 하동 화개장터에 가서 수해복구를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어제 예비자교리와 첫 영성체(8.15) 준비 등으로 바쁜 하루를 보냈지만, 많은 시간을 시원한 사제관에서 보냈습니다. 봉사자들은 엄청난 땀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너를 위한 이런 희생과 봉사야 말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너를 대신해 죽는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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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sYjf-Nu_U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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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태 19, 6)
인간에게 던져진
본질적 물음은
분명 생명과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낯선 죽음이
두려운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곧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목숨을
내놓았기에
고통과 함께하는
참된 사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한줄기
빛이 되어준
콜베 사제입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콜베 사제를 통해
삶의 본질적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아픈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절망을
치유하는 것은
오직 진실어린
사랑입니다.
어둡고 쓰라린
역사에서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의 가치에
있습니다.
사랑이 무너진
우리 시대를
진실어린 사랑이
일으켜세웁니다.
생명의 참된
의미또한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영원한 가치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보다는
실천을 원하십니다.
행동과 실천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생명을 살려내는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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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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