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감 상 문
(작성자 : 박소은)
청소를 마치고 베란다에 둔 간이의자에 책을 들고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비 내린 후 절반쯤 마른 땅이 쾌청하고 나뭇잎은 푸르다. 백발의 노인이, 나이든 희고 자그마한 강아지를 산책 시키고 있다. 느릿느릿 걸어 벤치에 앉았다가 기지개를 쭈욱 한번 펴고는 저 편으로 사라진다. 한결 느긋해진 기분으로 가져온 책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
근미래 통일이 된 한반도. 평양 근처의 AI 연구소가 위치한 어느 섬에서 이 책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동안 인간인 줄 알고 살아온 인간을 닮은 로봇 소년(휴머노이드) 철이가, 클론 인간으로 태어난 친구 선이와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성장하는 스토리이다.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선이와 달마가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살면서 기쁜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잠깐의 기쁜 순간을 한없이 갈망하며 보냅니다.
갈망, 그것도 고통입니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보내게 되고요.”
오래 전 나의 아버지가 앓았을 때. 지독한 암세포가 몸속 곳곳을 지렁이처럼 파고들어 고통에 몸부림치면 신속히 모르핀이 추가로 투여되었다. 이윽고 동공이 풀리며 몽롱한 채로 깊은 잠에 빠져들고, 한참 후 잠깐 정신이 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통증. 통증으로 찡그린 채 뼈만 남은 손목을 들썩이며 아버지는 말했다. “살고 싶다.” 고…….
지금보다 어렸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세상 밖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힘든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본성을 시험해보려 잠시 보낸 시험장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선하게 살아온 사람은 그토록 오래 시험에 들지 않아도 되기에 나의 아버지 같은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육체에서 빠져나간 영혼은 흩어져 다시 우주 속의 분자가 되어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혹은 내 아버지가 믿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세계가 있어 그곳에서 서로의 영혼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답다. 그치?”
선이는 호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냥 얼음과 물일 뿐 인데, 왜 이게 이렇게 가슴 시리게 예쁜 걸까?
물이란 게 수소와 산소 분자가 결합한 물질에 불과하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진 걸까?”
시작도 끝도 그 이후도 알 수 없는 삶이고, 이미 나의 이야기는 시작되었기에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온전하게 느끼며 하루를 마땅히 보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느릿느릿 걸으며 바라보는 비온 뒤 푸른 나뭇잎과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말간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짚어가며 주어진 시간을 보내다 언젠가 이야기의 끝을 맺어야 하는 날이 온다면 그 또한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편을 택하고 싶다.
인간을 닮은 로봇 철이는 영생을 얻을 기회가 있었고 위기의 순간이 오면 삶을 갈망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지만,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삶. 그것이 유한하기에 더욱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선이의 말대로 억겁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비록 그땐 네가 너인지, 내가 나인지 모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