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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세계-하이데거
온울에
2008. 5. 7. 10:29
목 차
1.서론
2.『존재와 시간』에서의 언어의 문제
1)언어의 개시성
(1)현존재의 개시성
(2)개시성과 말
(3)들음과 침묵으로서의 말
2.언어의 은폐성
1)현존재의 퇴락ㆍ빈말
(1)빈말(das Gerede)
3.언어와 세계
1)언어
(1)하이데거의 언어관
2)세계
(1)언어와 세계
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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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와 세계
박유정
부산대
국문요약
이 글은 하이데거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양식으로서, 그 전체성에 있어서 보고자 한다. 참으로 말하는 것은 존재이며 세계이고 언어이다. 여기에서의 세계는 언어를 통한 비은폐성의 세계이며 존재의 양식이다. 그리고 재창조된 전체성의 이해이며 의미부여 작용이고 의미의 총체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난 언어의 문제를 논한다(Ⅱ장). 즉, "현존재의 존재틀 내부에서 언어라고 하는 현상이 차지하는 존재론적인 '장소'(Ort)1)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언어에 접근 하였다. 이에 따라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를 두 가지 방면, 즉 언어의 개시성과 언어의 은폐성으로 나누고, 전자에 대해 현존재의 개시성으로서의 말을 후자에 대해 현존재의 퇴락으로서 빈말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존재론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하였다(Ⅳ장). 따라서 이 언어에 대한 종래의 탐구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언어관을 그의 세계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개진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게오르게의 시〈말(das Wort)〉을 다룬 글, 「말」과「언어의 본질」을 가지고 언어와 세계에 대해 논해 보았다.
요컨대, 언어는 근원적으로 시이며, 이해의 양식이며, 존재의 세계화이며, 따라서 존재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 시, 세계, 존재,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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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인사도 말이고, a2+b2=c2이라는 피타고라스 정리도 말이다. E=mc2라는 물리법칙도 말이다. 笑而不答도 또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은 전달의 수단이며, 표현의 도구이고, 수용의 매체이며 이해의 방법이다. 우리는 말을 하면서, 그리고 말과 더불어, 말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은 세계이며 인식(논리)이며 존재이다. 철학은 언어를 가지고 대상을 탐구하기도 하고 언어자체가 철학의 탐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언어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종래의 언어탐구와는 다른 접근을 한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양식, 즉 존재의 드러남이며, 인간의 인식과 논리의 구조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전기와 후기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는 현존재인 실존에서 경험되는 실존론적 말하기(Reden)2)였다.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는 존재를 이해 연관으로 분절하는 '인간의 언어'였다면,『철학에의 기여』나『예술작품의 근원』으로 오면서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 즉 '존재의 언어'로 규정된다. 따라서 그는 언어의 본질(Wesen der Sprache)을 탐구한다기보다는 근원적으로 본질의 언어(Sprahe des Wesens)를 탐구한다고 말한다3).
본질의 언어는 세계와 관련해서만 의미 있게 이야기될 수 있다. 즉, 언어와 세계는 등근원적(等根源的)으로 존재에 기반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세계는 존재가 언어화되는 해석학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가 세계와 관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 세계가 바로 언어적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난 언어의 문제를 이야기할 것이다(2장). 그리고 이러한 언어존재론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해볼 것이다(3장).
2.『존재와 시간』에서의 언어의 문제
1)언어의 개시성
(1)현존재의 개시성
자신의 본질을 그의 존재가능에 두는 존재자를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고 말한다. 현존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 눈앞의 존재(Vorhandenes)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되어 존재하는 실존(Existenz)으로 있다. 그리고 이 존재자에게 그의 존재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때마다 각기 '나의 존재'이다4). 이와 같이 현존재는 본질(essentia)에 대한 실존(existentia)의 우위와 각자성(Jemeinigkeit)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눈앞의 존재와 같이 있지 않고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다.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 거주하면서 세계의 유의미성(Bedeutsamkeit)의 구조, 즉 세계성(Weltlichkeit)을 구성하며 공간을 주위세계로서 만나며 다른 현존재와 더불어 있으면서 심려(F?rsorge)하면서 현실적으로(faktisch)존재한다.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로서 그 자체가 그때마다 Da-sein, 즉 개시되어 있다. 현존재는 세계에 폐쇄되지 않고 열어밝혀져 있다. 이 개시성으로 인해 현존재는 자신이 세계-내-존재로서 밝혀져 있고 다른 존재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가 밝음(Lichtung)이다. 현존재의 현-존재함을 구성하는 두 개의 등근원적(等根源的)방식을 심정성(Befindlichkeit)과 이해(Verstehen)에서 보며 이 둘은 등근원적(等根源的)으로 말(Rede)에 의해 규정된다.
(2)개시성과 말
하이데거는 "말은 심정성(일종의 기분)과 이해와 함께 실존론적으로 등근원적(等根源的)이다5)"고 한다. 심정성과 이해가 등근원적(等根源的)으로 현존재의 개시성이다. 심정성은 일종의 기분으로서 현존재가 세계 내에 처해있는 분위기를 말하며 이해는 그런 심정성 속에서 그가 자신을 이해하고 기투하는 방식이다. 심정성과 이해가 실존론적으로 등근원적(等根源的)인 것은 이 두 존재 방식이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임을 전체적으로 개시해 주는 실존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은 세계 내에 던져진 현존재의 심정성을 수용하고, 그것을 기능성으로 이해하고 기투하는 현존재의 개시성을 근원적으로 분절하여 실존론적인 언어적 차원으로 구성해 내는 근원적인 존재 방식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말이 심정성과 이해와 더불어 현존재의 근원적 실존범주인 것이다.
(3)들음과 침묵으로서의 말
하이데거는 "말하면서 언명하는 데에는 듣는 것과 침묵하는 것이 가능성으로서 속한다. 이 두 현상에서 실존의 실존성에 대한 말의 구성적 기능이 비로소 완전히 분명해진다6)"고 한다. 들음(H?ren)은 말함을 구성한다7).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공동존재로서 현존재가 타자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 개방되어 있음(?ffensein)의 근거는 이해이다. 이해하기 때문에 듣는 것이고 이미 이해하고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말의 또 다른 본질적 가능성으로 침묵(Schweigen)을 든다. 하이데거는 "침묵하는 자는 끝없이 말하는 자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즉 이해내용을 형성할 수 있다8)"고 한다. 침묵은 사유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것은 형식이기 때문에 구조(langue)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사유가 외면적으로 표면화된 것이 말(parole)이다. 그리고 침묵의 사유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느낌을 포함한 생각, 즉 감성과 초월성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침묵하는 자는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이며 이해를 형성할 수 있는 자이다. 침묵은 고요나 정체가 아니라 외침이며 창조이고 형성이다.
2.언어의 은폐성
1)현존재의 퇴락ㆍ빈말
(1)빈말(das Gerede)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심정성, 이해, 말로서 개시되어 있는 반면에, 일상적으로는 퇴락해 있다. 현존재의 일상적인 존재양식인 퇴락(Verfallen)은 기투의 비본래적 양상이다. 현존재의 개시성으로서의 말은 대개 언표됨으로써 언어가 된다. 이 언표된 말속에는 이미 이해된 내용과 해석이 들어 있는데, 이 이해내용에는 세인의 공공성에 의해 이미 해석되어 있다는 '피해석성'(Ausgelegtheit)이 들어있다. 이 피해석성은 전재적(vorhanden)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현존재적이다. 현존재는 우선 어느 한계 내에서는 부단히 이 '피해석성'에 맡겨져 있어서, 이것이 평균적 이해와 거기에 속하는 심정성의 가능성을 규제하고 공급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그 이해를 평균화한다. 이것을 통해 말이 언급되는 존재자와의 일차적 존재관계를 상실했기 때문에, 말은 확대해서 말하고(weiterreden) 모방해서 말하는(Nachreden) 방법으로 전달된다. 이 확대해서 말하고 모방해서 말하는 것이 빈말(das Gerede)을 구성한다. 말은 현존재의 본질적인 틀에 속하고 현존재의 개시성을 함께 구성하지만 그 말은 또한 빈말이 되고 빈말로서는 세계-내-존재를 분절된 이해 안에 개방하기는커녕, 도리어 폐쇄해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은폐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9). 즉, 빈말은 근거 없이 이야기되고 어떤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발설하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내-존재에 대한 이해를 개시하지 않고 중지하며 폐쇄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빈말에 의한 피해석성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재가 거기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개시성이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말에 의해 구성되는 그런 존재자, 즉 이런 존재론적 틀 속에서 그의 현(Da)이고 '세계-내' 존재인 그런 존재자만이 그런 근절(근거상실)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진다10)"고 한다. 현존재의 퇴락과 빈말은 그의 비존재를 형성한다기 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일상적이고 끈질긴 '실재성'(Realit?t)을 형성하는 것이다.
3.언어와 세계
1)언어
(1)하이데거의 언어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실재의 드러남이었던 언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는 실재와 분리된 명제가 되었다. 이러한 언어와 사물의 분리로 언어는 내면을 표현하는 도구로 되었고, 따라서 이 도구는 사물 자체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불충분하고 한계가 명백한 것이었다. 따라서 언어는 표현, 즉 진술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진술 이전에 이해가 있다고 말한다. 즉, 진술이 사물과 일치하는 곳에서 진리가 성립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는데, 그 일치 이전에 그러한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 즉 존재이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해 없이는 진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언어의 비도구적 성격을 이해개념으로부터 살펴보자, 해석학에서 이해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슐라이어마하(Schreiermacher, 1768-1834)에서 언어중심의 문법적 해석이 아닌 저자의 정신과정을 파악하는 심리적 해석으로서의 이해가, 딜타이에 와서는 정신과학의 기초로서의 생의 체험인 이해가 된다. 하이데거는 이들이 추구했던 해석학의 보편적 방법이었던 이해를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라고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제 이해는 방법이 아니라 존재이다. 따라서 해석학은 이해와 해석의 존재론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 이해는 존재이해이다. 그것은 내가 존재자를 표상하므로써 존재자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존재 한다는 것이 곧 내가 존재이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11)"
이해는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의 한 양식이며, 세계 속에 있는 실재가 아니라, 경험적 수준에서 현실적인 이해작용이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존재구조이다. 따라서 이해는 인간현존과 등근원적(等根源的)이며 모든 해석의 기초이다12). 이해는 존재와 등근원적이기 때문에 이해 없이는 존재가 있을 수 없고, 존재가 없이는 이해가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해석학적 순환 속에 있다. 이처럼 존재와 이해는 서로 제약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언어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이해는 근원적으로 언어적 현상이다. 이와 같은 존재와 이해의 말함(Sagen)으로서 언어를 바라보지 않을 때 언어는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언어의 진정한 기초는 말하는 행위(das Sagen)이라는 현상이다. 모든 사물은 이 현상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언어관이 의미하는 바를 에벨링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이해13)"라고 했다. 요컨대 존재이해의 지평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 사물(존재자)을 그 사물로서 만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언어관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실재의 분리에 반대하여, 언어와 실재의 일치에 관심을 가졌던 헤르더나 훔볼트에 따르면 그 일치의 기반이 헤겔적 의미의 이성, 정신에 있었다. 따라서 훔볼트는 언어는 각 민족마다 부여 받은 내부형식의 창조적 생성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 그들이 말하는 언어도 존재자에 머물고 있다. 왜냐하면 각 민족마다 다양한 내부형식이 외부로 표현된 것이 언어라면, 언어는 다양하게 되고 그것은 존재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자로서의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민족의 주관의 산물을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언어와 실재가 일치하는 생성하고 창조하는 이성의 매개자로서의 언어를 주장하였지만, 언어 자체는 도외시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언어가 주관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하이데거의 세계개념에서 출발해 보자. 세계는 이해의 바탕이다. 왜냐하면 세계와 이해는 현존재의 실존범주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세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또한 세계는 이해를 통해 구성되는 해석학적 순환 속에서, 존재가 언어로 되는 해석학적 과정이다. 예를 들어, '저 나무는 푸르다'는 말을 했을 때, 이 말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화자의 주관이 아니라, 사태 자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무의 존재가 탈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가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상황에 참여함으로써 말한다. 그는 전승의 흐름 속에서 말을 따라 배우고 언어를 경험한다. '저 나무는 푸르다'는 진술을 하게 한 배경적 언어, 즉 세계에 참여함으로써만 말을 하게 된다. 따라서 언어는 정신이나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상황과 존재의 표현이다. 따라서 언어는 주-객관의 통일적 현상이다. 이처럼 언어는 포괄적 현상이다. 언어를 주관성의 도구로 여기는 것은 언어의 사건적 성겨과 시간성을 상실하게 만들며, 사상자체보다는 어떤 주관의 한계 내에 가두는 오류를 범한다. 언어는 우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 속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정신(Geist)이 다양하게 부여한 민족마다 다른 언어의 총체성을 보며, 정신이 인간 내면에 부여한 내부형식으로서의 언어는 주-객의 도식에 머물러 있는 근대 관념론의 산물이다.
기호언어학은 언어에 대한 형식적 접근을 한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하에서 언어와 실재를 분리한 가운데, 오직 언어 속의 형식적 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그들이 밝혀낸 언어의 특성들은 언어의 보편적 구조가 아니라, 형식적 구조, 부분적 구조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언어는 그러한 형식적 관계 이전의 언어, 따라서 비형식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분석철학에서 다루어졌던 지시적 언어관에 대해 언어의 비지시적 성격, 즉 언어의 존재론적 측면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언어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이다. 따라서 형식적 구조는 언어의 파생적 형태인 진술밖에 담아내지 못한다. 언어는 '존재의 사유'이지 '존재자의 표상'이 아니다. 언어는 말함(das Sagen)이고, 그것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에서 언어의 비형식적ㆍ비지시적 성격을 밝혀보자,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는 차라리 '무'(無)이고, 내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는 '초월'이다. 존재는 모든 개념ㆍ이론ㆍ정립ㆍ추상 이전에 존재 그 자체이며 현실 그 자체이다14).
그렇다면 존재-그것은 무엇인가? 존재는 존재 그 자체이다...〈존재〉-그것은 신도 아니고 세계 근거도 아니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보다 그 이상(weiter)이며, 어떠한 존재자 보다도 인간에게 더 가깝다(n?her)...존재는 어떠한 존재자보다도 더욱 존재적이다...아마도〈있다(ist)〉는 말은 어떤 방식에서는 존재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기에, 모든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고 결코 진정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15).
존재는 다른 무엇도 아니고 존재 그 자체이다. '있다'는 어떤 표상이 아니고 그 스스로 있는 것, 스스로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는 '자기화'(Eignung)이며 '사건'(Ereignis)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인가? 존재와 언어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이데거는『휴머니즘에 관하여』에서 그 관계를 "언어는 존재의 집 ? 이집은 존재에 의해서 세워지고 다음에 증축된다. ? 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본질은 존재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되어야 하고, 인간의 본질에의 응답, 인간의 본질의 거처로 생각되어야 한다16)"라고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존재는 언어적이다. 존재는 비은폐될 때, 즉 존재가 언어올 드러날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가 없는 존재가 있을 수 없고 존재가 없는 언어가 있을 수 없다.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말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이해하는 것, 즉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며 인간은 거기에 참여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형식적인 것도 지시적인 것도 아니다. 사물은 말씀(언어)안에서 그리고 언어 안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고 또 존재하는 것이다17).
2)세계
하이데거에 있어서 '세계'(die Welt)란 주관적으로 파악된 것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고찰된 환경도 아니다. 세계는 그러한 주-객 분리의 도식에 선행한다. 따라서 세계는 그 속에 존재하는 것을 끌어 모은 집적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처해있는 전체성이다. 세계는 이처럼 포괄적이고 우리에게 전제되어 있는 친숙한 것이라서 이를 의식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세계를 통해 모든 것을 본다. 이러한 세계는 이해를 통해 드러난다. 세계와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세계는 사물이 훼손되는 데서 눈에 띄게 된다고 말한다. 훼손된 망치는 도구연관전체성 속에서 망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물의 존재는 이론적인 파악 이전에, 그 사물이 세계의 도구연관 속에서 탈은폐되는 순간에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모호한 채로 남아있던 세계는 이해를 통해, 즉 이해가 작용하는 적재전체성(Bewandtnisgandzheit)내에서의 유의미의 성(Bedeutsamkeit)에서 그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게 된다. 언어는 이처럼 자기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주시방식을 담고 있다 "언어는 그때마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개념성을 그 속에 담고 있다18)." 가다머는 이러한 것을 우리의 세계정향의 언어성이라고 표현하였다19). 이러한 것을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말과 언어는 단지 말하고 쓰는 교섭을 위해 사물들을 포장하는 포장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사물이 되고 그 사물이 비로고 존재하는 것은 말과 언어 속에서이다20)." 고 한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존재가 언어로 주제화되는 해석학적 과정의 영역이다21). 그런데 하이데거에 있어서, 특히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존재가 언어로 되는 과정인 세계는 예술의 경우에 가장 잘 드러난다. 거기서 세계는 존재의 언어적 건설이며, 진리의 수립이다. 그리스 시대의 사원은 단순한 사물의 복제가 아니라, 존재의 열림의 언어적 건설이다. 그 사원 속에서 도구로서 훼손되었을 때 세계를 잠시 보여주고 사라져 버리지만, 예술작품은 사물의 사물성을 언어적으로 정교화함으로써 세계를 드러낸다.
(1)언어와 세계
하이데거가 특별히 명료하게 사유의 경험이 언어를 가지고 행해진 경험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한 시인은 스테판 게오르게이고 그에 관한 강연에서였다22). 1957년 말과 1957년 초에 하이데거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강연인「언어의 본질」과「말」을 하는데, 모두 스테판 게오르게의 시 〈말〉을 가지고 한다. 하이데거는「말」에서 언어의 수수께끼를 시 자체로 하여금 토로하게 하자고 하면서, 게오르게의 시 〈말〉23)을 인용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시는 시를 쓰기 위해 어려움을 겪는 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인이 언어와의 관계에서 변화되는 언어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이 시는 마지막 연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연이 두 개의 세 연 구조(Triaden)24)로 되어 있다.
앞의 세 연들이 말하고 있는 시인의 여행은 뒤의 세 연이 표현하기 위한 유일하고 특별한 여행과는 다른 것이다. 첫 번째 세 연 구조에서, 시인이 먼 곳의 경이와 꿈을 자신의 나라의 경계선에서 가지고 와서 여신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 그는 그 보석을 가지게 되엇고 그것은 온 천지에 꽃피었다. 그런데, 두번째 세 연에서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통해 시인은 보석에 해당하는 이름이 없다는 것을 노르덴 여신으로부터 듣는다. 그럼으로써 그 보석은 내 손으로부터 빠져나가고 나의 나라는 그것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세 연은 마지막연에 연결되게 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그래서 나는 슬프게도 체념을 배운것이다: 말이 결여된 곳에는 사물도 없을 것이다"고 한다. 이 마지막 연의 음향은 체념25)이라는 말 가운데로 응결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체념한다는 것 가운데, 말한다는 사실이 지배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말한다는 것이 지배하는 것일까? 체념한다는 것은 단념한다는 말하는 방식인데, 시인이 체념을 통해 체험한 것은 언어의 부재와 함께 그리고 동시에 보석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석을 처음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서 지속시키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말은 더 이상 단지 이미 표상된 현존하는 것(Anwesende)을 이름 지워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말이 비로소 현존(Anwesen), 즉 존재를 증여한다. 이 존재 속에서 어떤 것이 존재자로 나타나게 된다26)"고 한다.
4.결론
이글은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와 세계에 대한 고찰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는 그것의 전체성에 있어서 존재할 수밖에 없고27), "현존재 분석론에 근거해서 말이 구조의 존재론적 실존론적 전체를 미리 끌어내는 것28)"이었다. 언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가 그 모든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있다. 언어가 있는 그 곳에 결단과 활동, 행동과 책임, 자의와 소란, 퇴락과 착란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일어나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오직 세계가 있는 곳에 역사가 있다. 언어는 단지 언어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재보이며 인간이 역사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한 보증이다. 언어는 인간이 자의로 처리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최고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생기(Ereignis)이다.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이고 시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이다.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시이다. 이러한 언어의 모습은 예술작품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예술작품은 존재의 언어적 건설, 진리의 자기 수립이다. 이 진리의 자기 수립은 시이다. 이것은 그 본래적 의미에서 시(詩作)이다. 하이데거는 휠더린을 인용하여 이러한 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인의 시는 민족의 소리이고 이는 전설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여기서 신은 초월적이거나 유명(幽冥)의 신이 아니라 사물에 내재하는 질서와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이해와 공감의 신이다. 모든 민족언어에는 이 창조의 신이 있다. 우리가 타 언어에 공감하는 것도 이 신 때문이며 번역이 가능한 것도 이 신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는 시와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이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언어에 응답하는 것이다29). 이러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세계와 관련해서만 자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러한 본질의 언어는 인간이 스스로 참여하고 그에 응답하기 때문에, 세계와 분리될 수 없고, 세계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어서, 어떤 식으로 고착화시켜 표현해 버릴 수 없는 근원적인 바탕, 즉 인간의 고향인 것이다. 참으로 철학의 연구는 언어 일반에는 어떤 존재양식이 속하는가를 물어볼 결의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