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탕평의 당이 옛날 당보다 더하다
최고 인재 발굴+최적 자리 배치=정조의 ‘탈탕평’
영조, 당파 없애려 당파별로 관직 배분-점차 기계적인 할당에 매몰 본질 훼손
정조, 할당제 거부 과감하게 인재 등용

정 조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이 말과 똑같은 의미의 사자성어가 있었다. 바로 ‘당동벌이(黨同伐異)’다. ‘당이 같으면 동조하고, 당이 다르면 공격한다’는 의미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지도 않고, 자기편은 무조건 동조하고, 상대편은 덮어놓고 공격한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숙종 때 당쟁이 심해지면서 이 말은 유행어가 됐다. 이 시대를 살았던 거물 정치인 치고 당동벌이를 하지 않은, 또는 당동벌이의 대상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시대 최고의 대학자로 추앙받는 송시열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룩한 임금만 믿고 어리석은 소견을 털어놓다가 여러 사람에게 시기를 받게 되었지만, 임금만 알았을 뿐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임금을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자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인가? 하늘이 내려다보거니와 다른 마음은 아예 없었다.’
한쪽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듣는 송시열이었지만, 다른 당 사람들은 송시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토색질이 끝이 없고 뇌물이 마구 몰려 땅과 집이 열 군데가 넘는데, 옮겨 다니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그가 가는 데로 도당(徒黨)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 피해가 이웃 마을에까지 미치고 닭과 개들까지도 편치 못했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 집을 두고 돌아다닌 건, 송시열뿐만 아니라 누구나 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당동벌이가 극에 달하다 보니 이런 일상적인 삶의 형태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당동벌이를 얘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게 ‘선물과 뇌물’이다. 송시열의 숙적, 윤휴는 문제의식이 투철한 개혁가로 유명했지만 그런 윤휴조차도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런 뇌물 수수 혐의는 모두 무고였을까? 아니면 이 당 저 당 할 것 없이 전부 타락했던 걸까?
여기에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화폐나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 물물교환이나 증여, 선물 이런 것들이 일상화돼 있었다. 누구도 이런 것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데, 이게 좋게 보면 선물, 나쁘게 보면 뇌물이다. 아니, 우리 당 사람이 받으면 선물이고 다른 당 사람이 받으면 뇌물이었다.
하지만 당쟁은 좋게 보면 긍정적 기능도 있다. 일당 독재를 방지하고 서로 간의 부정, 정책 실패를 견제한다. 그런데 당쟁이 당동벌이로 가면 이런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고, 그야말로 이권 쟁탈전만 남게 된다. 숙종대의 당동벌이를 뼈저리게 느꼈던 영조는 당쟁의 폐단 중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이 ‘당동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고질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영조는 일단 인사 할당제부터 시행했다. 당파별로 고르게 관직을 배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영조의 탕평책이다.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독히도 미워하는 것은 당동벌이이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탕평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탕평책은 영조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요즘도 많은 조직에서 영조식(式) 탕평 인사를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크게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탕평 인사라는 것이 영조가 추구했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탕평 인사는 사실상 당동벌이 풍습을 없애기 위한 과도기적인 정책이었다. 이상적인 인사정책은 탕평이 아니라, 적절한 능력자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 탕평책부터 실시한 것인데, 나중에는 탕평책의 할당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린다.
“영조의 진심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만들어버렸다. 인사 하나를 할 때도 할당제에 매몰돼 이쪽저쪽의 비율을 맞추는 것이 본질이 돼버렸다. 탕평이란 당파를 잊어버리고 나를 잊자는 것인데, 비율에 집착하니 거꾸로 자기 당파를 등용하는 방법이 돼 버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탕평의 당이 옛날 당보다 심하다’라고 한다.”
정조가 할아버지의 탕평책에 대해 내린 평가다. ‘탕평의 당이 옛날 당보다 심하다’는 건, ‘탕평의 폐단이 옛날보다 더 심하다’는 뜻이다. 형식적인 탕평, 할당제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 정조는 어떻게 이 폐단을 해결하려 했을까? 정조의 솔루션은 단순했다. 정조는 할당을 거부하고 당파의 비율이 맞지 않더라도 과감하게 인재를 등용한다. 채제공이나 정약용 같은 남인 계열들이 중용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인사정책의 결과였다.
‘인사가 만사’라고 한다. 어떤 조직이든 기업이든 최고의 성공을 거두는 비결은 최적의 인재를 배치하는 것이다. 지역이나 학벌, 정파에 의한 할당제는 말 그대로 고육지책일 뿐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할당제를 한다고 파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당동벌이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리더가 깨어있는 수밖에 없다. 일단 리더부터 할당제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다음 조직원들도 할당제에 대한 환상을 깨고, 할당제에 기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리더의 몫이다. 리더의 생각이 깨어 있는 이런 조직이야말로, 공정한 경쟁과 노력이 살아 숨 쉬는 조직이고, 영조와 정조가 꿈꾸던 조선 르네상스의 이상이다.
<노혜경 호서대학교 창의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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