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죽음
내 한평생 중 노릇은 동생이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생각 없이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순전히 동생 덕분이다.
나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스물다섯 살에 동생을 잃었다. 그때는 죽고 싶을 만큼 절망스러웠다.
그런데 돌아보면 두 사람의 죽음이 내겐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큰 스승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나를 출가로 이끌었고 동생의 죽음은 내가 수행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두 사람은 나를 수행자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간 불보살들임에 틀림없다.
내 동생은 나와는 네 살 터울이었다. 동생은 악기를 참 잘 다루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한테 기타를 하나 빌려서 갖다 놓았는데 나는 보름이 다 되어 가도 도레미파밖에 못하는데 동생은 사흘 만에
노래 한곡을 연주할 정도로 소질이 있었다. 동생은 나중에 배문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바순을 불며 악장 노릇을 했다.
내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오자 동생이 군대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왕이면 해군에 지원하라고 했다.
동시 해군 군악대는 해외에서 운동경기가 있을 때 지원을 나갔기 때문에 육해공군 가운데 지원율이 가장 높았다.
동생은 해군에 지원했다가 위장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나는 해병대 현병 장교로 있는 고교 동창의 형님에게 부탁해 동생을 해군에 입대하게 해 주었다.
군대에 가기 전 동생이 물었다.
“형, 절에 가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살면 안 돼?”
“아니, 나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 사람이 못 된다.”
그것이 동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몰랐다.
동생한테 면회나 한번 다녀와서 절로 들어갈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동생이 입대한 지 한 달쯤 흘렀을 것이다.
친구들과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충무 앞바다에서 훈련을 받던 배가 전복되어
해군 훈련병 316명 가운데 160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뉴스였다. 1974년 2월에 해군 예인정 YTL이 침몰한 사고였다.
설마 내 동생이 죽었으랴 생각하고 계속 밥을 먹었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갔더니 불이 환히 켜진 채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실종자 명단에 동생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래도 설마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비롯해서 집안 어른 몇 분과 함께 서둘러 해군본부가 있는 진해로 내려갔다.
진해 통제부는 아수라장이었다. 훈련병 가족들이 천여 명이나 몰려들어 자식과 형제를 찾고 있었다. 사흘이 지나자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진해 통제소 강당으로 달려 보니 바다에서 바로 건진 시신들이 줄줄이 눕혀져 있었다.
동생이 거기 있었다. 관속에 누워 있는 게 내 동생이 맞았다. 환하게 웃던 동생이, ‘형’ 하고 부르며 쫒아다니던 동생이,
하나뿐인 내 동생이 거기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 때문에 머리가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구부러진 채
좁은 관 속에 눕혀져 있던 동생, 그 모습을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고 억장이 무너진다고
해야 하나, 참, 기가 막혔다. 이제 막 피어오르던 스무 살 푸른 청춘의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손위 사람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과 손아래 사람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은 그 무게가 다르다.
손위 사람의 죽음은 그저 슬플 뿐이지만 손아래 사람의 죽음은 애간장이 녹는다고 할까.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치듯 가슴을 덮쳐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나는 그때 진해에 일주일 가까이 있는 동안 시내를 가다 해군만 보면 두들겨 팻다.
그 사람이 내 동생을 죽인 것도 아닌데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산이 너무 많아 화장터에서 미처 다 화장을 할 수 없게 되자 서울에서 화장만 하는 육군본부 영현중대가 내려왔다.
화장 시설이 되어 있는 트레일러를 매단 차가 열두 대 내려와서 화장을 했다.
하필이면 동생의 시신이 제일 낡고 오래된 트레일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이름을 불러 가며 “아이고, 살아서도
그렇게 불쌍하더니 죽을 때도 저런 고물차에 들어간다냐. 저 옆의 차는 새 건데” 하면서 우셨다.
죽고 난 다음에 새 차에 들어가든 헌 차에 들어가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자식이 죽었으니 그렇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낡은 차는 길이 들어 불이 잘 붙는데 새 차는 불을 붙이면 자꾸 꺼지고 연기만 펄펄 났다. 유가족끼리 소주 댓 병을 놓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아버지가 “우리 아들은 살아 있을 때 말도 잘 듣더니 탈 때도 저렇게 잘 탄다”고 넋두리를 하자
그 옆에 있던 사람이 “그러면 우리 아들은 살아서 말을 안들어서 연기가 난단 말이냐”며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둘이 멱살을 잡고 싸웠다. 붙잡고 싸우다가 다 같이 또 엉엉 울고, 아비지옥도 그런 아비지옥이 없었다.
그렇게 화장을 해서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동생을 묻었다.
그때의 비통함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해군이 지원했다 떨어졌을 때 내가 아는 형에게 부탁만 하지 않았더라면 해군에 가지 못했을 테고 죽지도 않았을 텐데. 독한 구석이 있는 나지만 동생이 죽은 2월이 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동생과 나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서로 의지하면서 컸기 때문에 정이 남달랐다.
동생은 머리는 좋은데 조금 굼뜬 편이라 내 속을 많이 썩였다. 나는 형으로서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있었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매도 많이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뜨겁다.
동생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이 되어 당진 바닷가에 사는 고모 댁에 놀러갔다. 고모는 어머니를 일찍 여윈 우리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고모가 외출한 사이에 동생이 채 익지도 않은 복숭아를 장대로 땄다. 그러자 고모부가 ‘왜 남의 집에 와서 말썽을 부리느냐’고 우리를 혼냈다.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방학이면 이집 저집 돌아다니는 우리 신세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길로 짐을 싸서 동생을 데리고 고모 집을 나왔다. 바닷가로 가서 갯벌에 동생을 떠밀어 놓고 마구 두들겨 팼다.
“이 자식아, 왜 말썽을 부려서 그딴 소릴 듣는 거야.”
동생이 울면서 대들었다.
“왜 때려 형, 왜 때려 형.”
동생이 죽고 나자 좋았던 일보다는 가슴 아팠던 일들만 자꾸 생각이 나서 가슴이 저며 왔다.
서울 선학원에 동생의 영정을 모셔 놓고 49제를 지내는 동안 매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갔다.
일어나면 술 한 병 사 들고 가서 동생에게 한 잔 따라주고 그 다음에 내가 마셨다.
한겨울 그 차가운 물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 동생을 생각하며 49일 동안 매일 술을 마시면서 울었다.
저녁이면 묘지를 관리하는 군인들이 와서 그만 울고 가라면서 문밖으로 내보냈다.
나중엔 위장이 상해 목에서 피가 넘어왔다. 그때 한세상 살면서 울 건 다 운 것 같다.
무엇이 왔다 간 것인가? ‘형’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 ‘형, 절에 가지 말고 나랑 같이 살면 안 돼?’ 하며 사정하듯이
바라보던 그 눈빛, ‘면회 한번 와 줘’ 하던 편지 속의 말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제는 뼛가루가 되어 묻혀 있는데 뭐가 왔다 간 건가. 도대체 사는 건 뭐고 죽는 건 뭐지?
이 세상에서 꼭 이십 년을 살고 떠난 동생을 생각하면서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황량한 바람 앞에서 ‘이게 뭐지?’했던 그 물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죽음이란 뭐지?’ 내가 목숨처럼 사랑했던 동생이 이제 여기 묻혀 있는데 나는 거기에 대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염불을 해서 극락을 보낸다? 극락 가면 뭐하는데?
때가 되면 나도 한 줌 재가 될 텐데 그렇다면 뭘 위해 살아야 되는 건가? 대체 왜 사는 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출가를 결심했을 때만 하더라도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환상, 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나는 동생의 죽음과 함께 그런 환상을 모두 버렸다. ‘도대체 나는 뭔가? 무엇이 나고 죽는 것인가?’ 하는 의심 하나만 딱 남았다.
숨 한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죽는 게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과연 무엇일까.
49재 마지막 날 국립묘지를 나서며 원을 세웠다.
‘생사에 대한 문제, 존재에 대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영예가 될 것이며,
극락에 간 들 무엇이 그리 즐겁겠는가. 내가 날 모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를 무등 태우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양 옆에서 나를 부축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진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고 죽는 이 주인공의 본래 모습을 바로 알 수만 있다면 나는 하루에 천 번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들어가고,
천 번 쇠꼬챙이로 몸을 쑤시고 찌르고 토막 내는 지옥에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가겠다‘
그때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 원력은 몇 십 년 중 노릇하는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지금도 역시 그 원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나의 평생 중노릇은 내 동생이 시키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명진 스님 / 스님은 사춘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