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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3. 한국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1598년)
명군의 참전 이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여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단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통보한 요구 사항도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의 외교 창구를 담당하고 있던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는 그 요구 사항이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손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국서의 내용을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살짝 바꿔서 전했는데, 이 또한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러 가는데 조선은 그 침공할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베이얼 호 전투로 카라코룸을 파괴한 역사도 있었고 토목의 변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다. 게다가 이때까지는 큰 위협은 아니었지만 여진족도 있다. 이런 판국에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 데다가 병력을 20만 이상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려 요동, 동남부 해안가, 그리고 수도 북경이 위협받게 된다. 그러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이 막대한 비용을 두고두고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이 북원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면 아무리 명나라라도 간단히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 이후 명나라에 침략을 하기는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다.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 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온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건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만력제 본인에게도 임진왜란 참전은 상당히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만력제는 후계자 문제로 인한 쟁국본과 본인의 태업으로 인해 신하들과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만력제는 권위를 확보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터진 임진왜란은 만력제로선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위기에 처한 번국인 조선을 구원하고 감히 천조의 질서를 어지럽힌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명분은 천자로서의 위엄을 떨치고 권위를 확보할 매우 확실한 방법이었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 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 때문에 조선을 도운 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는 현재 중국이 북한을 놓지 못 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 당시나 현재나 기갑 부대가(그 당시엔 기병) 신의주에서 출발하면 수도인 베이징(북경)이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 중간에서 완충 역할 및 유사시 동해와 태평양으로 투사할 전력의 발판이 되어줄 북한이 필요하다 보고 있는 것.
현대 중화인민공화국도 주변국이 대부분 적대국이란 상황 역시 왜란 당시 명과 유사하다. 인도,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중화민국), 일본 전부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영토 및 영해 분쟁으로 엮인 가상 적국이며 러시아와의 관계 역시 과거의 무력분쟁 등을 보면 그저 우호라고 보기엔 애매한 관계다. 특히 인도는 중국과 덩치마저 비슷하다. 북한은 몇 안되는 중국의 우호적인 주변국 중 하나인 것. 한국 역시 아직까지 대놓고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까지는 보고있진 않지만 중국에 대해 중국위협론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북 간 종전선언 논의가 나오는 현재 미중 간 완충지로 북한을 중립화하여 국체 자체는 놔두고 비핵화 및 무장해제만 하자는 논의가 나오는 것이다. 미국과 직접 충돌하는 상황은 중국이 정말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4.4.2. 명군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던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
제1차 조승훈의 5천 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 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불랑기포라는 신무기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 27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 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군과 동장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명나라와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1593년 5월 18일)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벽제관 전투, 사천성 전투와 같은 몇몇 패배한 전투가 있기는 하지만 평양성 전투, 직산 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는 것을 보면 명군이 아예 못싸운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명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당장 고니시가 평양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원인의 근본 원인은 공세 종말점에 도달한 고니시 군의 상태이긴 하나 명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명군은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인들의 역할을 수행하긴 했다. 전란 중 각지에서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해서 활약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싸우긴한다.
더불어 명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 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부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는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크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고, 정유재란 즈음에는 대규모 파병으로 명군이 주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군은 약 5만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군은 최대 11만에 달했다.
이 외에도 명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에 따른 조선의 식량 사정이 나아졌다. 사실 명나라 역시 자국 군대가 조선에 끼친 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 지원한 식량은 후일 조선에서 환대미라 하여 다시 상환했다.)
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 준할 레벨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 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 +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민간인까지 학살하는게 기본 옵션인 왜군'과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로 패악질을 하는 명군'을 같은 레벨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명군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 일본이 이길 줄 알고 일본군에 붙거나 협력한 조선인들도 의외로 적지는 않았는데 명군이 참전해서 상대적으로 조선에 힘이 더 실려 그런 내부적 불안 요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일단 명의 조선 황제가 계속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조선 혼자서 일본이란 강적과 싸울 때보다는 사기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
4.4.3.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상기한 이유로 참전한 만큼의 몫을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수천 문의 화포를 동원해 성 안에서 방어만 하고 있어도 적 지휘관이나 부대를 전멸시키던 과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게다가 징비록 등 여러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명군의 장수들이 조선의 장수와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군 일이 많아서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렇게 명군이 장수와 병사 할 것 없이 조선의 조정,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나쁜 모습을 보여준 탓에, 명은 멸망의 원인이 됐을 정도로 성심껏 자국의 역량을 다 들어바쳐서 조선을 도와주고도 비난받는 꼴이 됐다. 당시의 명군은 기강이 엉망이었고, 여러 지방에서 온 장수들이 군벌처럼 병사를 거느린 탓에 상호 협조나 전략적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안가 모문룡 같은 막장스러운 장수가 나타난 것도 명군의 말기적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
약탈과 보급상 무리수가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
•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군의 식량 보급이 명의 은본위제를 이용해 식량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에 상당 부분 의존했는데 조선은 이때까지도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은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나라 중앙 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이 은본위 경제 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나라 병참 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 경제 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결국 두번째 방법인 직접 수송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명은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 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심지어 협조하는 상인들조차 이제까지 하던 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해 놓아서,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 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 체계 하에서 명군의 주요 기지인 평안도는 예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후방 거점에 쌓여서 제대로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군 참전 이후 의병들이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도 있는데, 상당수의 의병들도 이 수송 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없이 현지 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 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조선에는 이미 그런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명군이 상국의 구원병이라는 오만함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탈에 가까운 현지 조달이 일상화되었다.
명은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 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명군은 내몽골 및 만주와의 국경을 지키는 몽골인과 여진족 그리고 다우르족 (거란 잔존 세력) 혼성 부대인 북병과 조총 및 불랑기포로 무장한 남병이 있었다. 북병은 주로 기병이었고 거의 주축은 몽골 기병이었으며 남병은 보병 및 포병이었다. 여기서 북병은 대부분이 말도 안 통하던 유목민들로 기강이 엉망이었으며 되려 평양을 명군의 몽골 기병대가 약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조선은 명군에 대해 북병은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유성룡도 이 부분을 징비록에서 수시로 불평하고 있다. 조총과 불랑기포 그리고 불화살 등의 화약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군은 전투를 회피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일본군이 심하면 심했지 명군도 당연히 덜하진 않았다.
물론 이에 대해서 명군을 그럼 배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명군의 수적 우세가 그래도 필요하긴 했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정규군도 개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수성전에 치중했다. 그렇다보니 조선으로서는 명군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단적인 사례로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을 보면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조선 군인 1만여 명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뜩이나 바다에서 제해권을 뺏겨 보급이 영 힘든 일본군 입장에서 명군의 참전은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전선에 있던 일본 장수들의 의견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니었다. 참고로 고대일록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 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4.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 모르게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에 의해 조작된 것이 사이쇼 조타이에 의해 발각되어 파기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히데요시는 회담의 진행에 적당히 개입을 하고 강화 조건을 조절하면서 명나라가 '책봉은 가능하지만 무역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도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책봉을 받고 나서 '조선에서 사죄의 표시로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화를 낸 후 세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단적으로 히데요시의 책봉 교서와 만력제의 칙유, 관복, 인장이 지금까지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에 관한 한중일 학계의 결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유학자와 병법가들이 내용을 왜곡하여 기록하였고 널리 퍼지면서 해당 이야기가 실제 사실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콘텐츠의 내용 또한 이를 반영하고 있다.
4.5.1. 기존의 알려진 이야기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가 명나라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고 히데요시는 분노했고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 화의를 주선한 심유경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 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린다. 고니시도 히데요시한테 책임 추궁으로 처형 당할 뻔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이듬해(1597년) 정유년, 일본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4.5.2. 실제 사실
위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한중일 학계의 연구 결과 사실이 아니라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사실을 파악했다. 아래 내용은 이에 관한 논문과 연구들을 요약한 것이다.
일본군은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의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내어 진주성 함락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선의 전라도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그러다보니 일본군 내부에서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드니 물러서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김시민에 대한 분풀이와 일본군의 세력 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다. 주로 조선군은 진주 대첩 때의 두 배 정도인 6천 ~ 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 9만 명이 넘는 적을 상대로 9일동안이나 항전했으나 황진 등이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성이 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성을 함락한다고 피해가 심각했다.
또한, 김덕령,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 이 과정에서 의병 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을 제외하고 13만 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평화 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군사 17만 5천이 3만 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 전쟁의 양상이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된 국지전으로 변모해서 대규모 병력이 불필요했다.
• 선조는 명군에게 전투를 맡기고, 조선군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재건을 서두르고 싶었다.
• 선조는 계속된 명군의 삽질 때문에 명나라에 대해 원군을 요청한 결정 자체도 삽질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명군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 선조는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안했고, 따라서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명군에게 전투를 맡김으로서 조선군을 줄여 군의 규모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 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와 블러핑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블러핑이 섞였다곤 해도 히데요시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명과 조선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송응창이 내세웠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
그러나 일본의 요구조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 조항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나라 황녀 문제:화번공주라 하여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를 외국의 지배자와 공식 혼인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선례는 분명 많았다. 따라서 만약 히데요시가 천황의 정비, 혹은 최소한 실권자인 명이 봉하는 일본 국왕 히데요시 본인의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명나라로선 조금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정식 황후도 아니고 겨우 후궁이었으니 이는 고려하고 말고가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2, 3. 무역 증서제 부활 및 각서 교환: 그나마 명나라 측에서 수용할 수 있는 부분. 무역 증서제란 감합 무역이라 부르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랑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전국 시대에 다이묘들이 너나없이 명나라랑 교역하려고 하자 폐지되었다. 즉 이 두 조항은 일본과 명나라의 공식 관계 수립 및 교역의 정상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명나라 측에선 그나마 타협이 가능한 부분이다.
4. 조선 4도의 할양: 항목 중에 제일 무리한 조건. 명이 강화 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즉 일본을 평화롭게 물러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영토 절반을 빼앗길 판에 명나라가 강요한다고 해서 조선이 들을 리 만무하다. 히데요시가 주장한 4도 할양은 사실상 일본군이 그 시점에서 점령한 경상도를 비롯한 조선 남부 지역 4도(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 경기도or강원도)를 내놓으라는 뜻이다.쓸모없는 황무지로만 가득찬 변방 지역이라고 해도 조선 측에서 수용할 리가 없는데, 이 지역은 조선에서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가장 많은 핵심 지역이다. 이걸 내놓으라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철군한 뒤 조선에게 전쟁을 맡기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선 대륙 정벌의 망상에서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질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점령해봤자 반란만 잔뜩 일어날 놈의 땅을 달라고 씨도 안먹힐만한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이 정도로 국제적 현실성이 결여되고 자기 혼자만의 욕심에 사로잡힌 요구는 들어줘도 문제다. 그래서 어찌어찌 조선의 4도를 일본이 먹었다 치자. 맨날 일어나는 반란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소중화의 문명국임을 자부한 조선인이 야만인이라 멸시했던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리 절대 없었을 것이며 당시 일본은 전국 시대라서 자국의 통일조차도 엉성한 봉건 할거 상황이었고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우르트메르의 십자군처럼 바다 건너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로 임나일본부 실사판이나 찍다가 히데요시 사후, 잘해봤자 얼마 못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것이 뻔하다.
5, 6. 왕자의 석방 및 볼모 송환: 임진왜란 이전의 한국사에서 일반 신하도 아니고 왕자를 해외에 볼모로 보낸 것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실성 마립간이 복호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과, 고려 때 여몽전쟁 및 이후의 원 간섭기 시절 왕자를 보낸 사례 정도가 있다. 그나마 전자는 인질을 빌미로 선왕의 아들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고, 후자는 고려가 몽골에게 굴복하여 보낸 것이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조선 측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7.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 : 이는 두가지의 문제가 있다. 먼저 '권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해석해야 하는데 히데요시는 선조도 군주가 아니라 자신처럼 '덴노'의 아래에서 실권을 가진 신하라고 여겼다. 이는 선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국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조선을 침공한 책임은 엄연히 일본에게 있었는데, 이 책임은 전혀 대가를 치루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게 신의를 강요하는 주장은 조선 입장에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조건들을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 담당 승려)을 통해 강화사로 위장한 송응창 부하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이대로 전할 수 없고 특히 명나라 황녀를 보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순의왕(알탄칸)의 예가 있다면서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국 공주와 천황의 결혼, 조선 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의 관계가 끊긴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나라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 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사용재와 서일관은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을 그대로 보고하는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국왕으로 임명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라고 허위 보고한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강화의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항표문을 요구했고 강화사 파견에 대한 답례사 겸 가짜 항표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죠안(內藤如安, 코니시 죠안)이 만력제를 배알하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책봉 할 무장의 명단도 함께 제출하였다.
이에 명 조정은 이전의 조건과 더불어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석성은 일본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요구한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은 하지만 무역은 요구하지 말 것.
3. 조선과 화해하고 (일본이) 번속국이 됐으므로 (같은 번속국인)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
이후 명나라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지만 일본군의 완전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였고 고니시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을 살펴보면 히데요시는 이미 자신이 일본국왕에 책봉됨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서를 지참하는 것, 무역을 하게 될 경우 금인으로 증거를 삼고자 하였다.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나머지 4개 도만 갖겠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소 중 10개 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의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나라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으로 돌아와 부산 지역에 있던 일본군의 군영 2/3를 불태웠지만 여전히 책봉 정사 이종성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하였고 책봉사의 일정이 지체되는 것을 다시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이 때 정사 이종성이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고 더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진 책봉사절은 책봉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한다. 조선 측에서는 황신을 정사로 삼아 사절단을 보낸다.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구경꾼들에게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프로이스가 기록하고 있다. 이후 책봉식에서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순화왕(順化王)에 책봉되었고 다이묘들 또한 각기 서열에 따른 명나라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책봉문, 금인, 관면을 수령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오사카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장면을 기록한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이 일본의 승려 겐소의 선재고, 유럽의 선교사 프로이스의 기록, 조선 사절의 정사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조선왕조실록이다. 다이묘들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왕환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한 기록들에서는 히데요시도 명나라의 관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일본 측의 기록인 선재고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인을 받고 명복을 입고 만세삼창을 했다고 써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 국토에서 최대의 국주들이었다.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도 수령했기 때문에 이것을 착용하기 해서 별실로 갔다고 기록되었다.
조선 측 기록은 두 가지이다. 조선 사신단의 정사인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서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았고 다이묘 40명도 관대를 착용하고 수직(授職)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자세한 내용을 묻자 봉작례가 행해졌으며, 관백이 뜰에 서서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려주는 의복을 받았으며, 그의 신하 40여명이 모두 차등있게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말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덕수의 보고에는 책봉장에 있었던 왕귀가 이야기한 것을 황신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데 황신과 다르게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우준민이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책봉을 받은 후 히데요시는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명측 사절이 철군 문제를 거론하자 불쾌감을 드러내며 천조가 사신을 보내어 자신을 책봉하니 내가 우선 참겠으나 조선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고 전쟁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에 명나라 사절들은 자리를 파했고, 며칠 후 히데요시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전쟁을 재개한다.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일방적 철군을 하면 자신은 손해만 보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명나라의 강화 책임자였던 심유경은 강화 실패의 책임과 감히 황제를 속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된다.
4.6.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파일:천조장사전별도.jpg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중 일부
1597년 8월 27일, 일본은 총 14만의 군세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공한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왜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1달만에 임진년에는 발도 못 붙였던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 <정유재란 당시의 군 편성>
◦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 제2군 가토 기요마사 10,000명
◦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10,000명
◦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 제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13,300명
◦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11,100명
◦ 제8군 모리 히데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40,000명
• 이상 합계 12만 1100명. (수군은 제외)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성 전투 전후로 왜군 장수들이 바친 코 숫자가 3,500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나중에는 일본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코 베기를 하지않으며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조선 백성들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조선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지배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판단한 데다 노예 장사나 착취를 해서라도 전쟁에서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 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5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 한성을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4천 명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다. 이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다시금 명 기병의 위력을 보았고, 명군이 빠르게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
당시 일본군의 종군 승려였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재차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 수군은 육군의 진격에 맞추어 서해로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하는데, 바로 이 때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명량 해전. 앞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켰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133척의 압도적인 수군 병력의 우세를 믿고 서해 진출을 시도했으나, 단 13척의 병력으로 서해로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돌아온 성웅에게 다시 한 번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전라도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역시 그대로 후퇴한다.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고, 이후로 전쟁은 대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일본군이 자기들이 조선 남부에 쌓은 왜성들 속에 농성을 하여 조명 연합군이 공성 과정에서 피해만 크게 보고 함락도 못하였기에 명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군의 전투인 노량 해전과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한 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도 전투를 끝으로 7년간의 대전쟁이 종결됐다.
4.7. 일본군 퇴각의 이유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 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연합 성격이 강하며, 그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군사력 역시 통합 체제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영주와 직속 상관에게만 충성했으며, 협력과 협조보다는 서로 반목하는데 더 능했을 정도다. 이들이 조선으로의 출병을 결정한 것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한 충성 따위는 찾아 볼 수도 없었고, 그저 조선에서 땅을 넓히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이로 인해 조선 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 선봉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개무시당하고, 1군 선봉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선봉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결국 편을 갈라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서군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이유로 동군에 참가. 실제 서군의 대장은 흔히 알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다. 그러나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인 이유는 모리 데루모토는 말 그대로 바지 사장이기 때문. 자세한 내막은 관련 인물들을 볼 것.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이후 일본 내에서 영주들 간의 파워 싸움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고, 이미 승산 없는 전장인 조선에서 시간만 질질 끌고 있어봐야 무의미한 상황이었기에 일본군은 전 병력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자기 살을 깎아먹은 탓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임진왜란의 최종 승자는 다름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