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고종(高宗, 1192년~1259년)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고종(高宗)의 시대에는 안으로는 권신(權愼)들이 서로 이어가며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하였고, 밖으로는 여진(女眞)과 몽고(蒙古)가 군대를 보내어 해마다 침입하였으므로 당시 나라의 형세는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법을 지키고 모욕과 치욕을 참아냈기에 왕위[寶位]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정권이 다시 왕실로 복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이 오면 성을 굳게 지켰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태자를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친조(親朝)하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직(社稷)이 훼손되지 않았고 왕업을 오래도록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 고려사 세가 권제24.
고려의 제23대 국왕.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고려에서는 안효대왕(安孝大王)으로 원나라가 내려준 시호는 충헌왕(忠憲王)이다. 원나라의 시호와 고려의 시호를 합쳐서 충헌안효대왕(忠憲安孝大王)으로 불린다. 휘는 철(㬚). 자는 일신(日新). 강종의 아들. 최충헌의 적(嫡)매형이자 사돈 간이기도 하다. 최충헌은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하였는데, 아들 원종의 장인이었던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사위였다.
2. 재위
고려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길었다. 자그마치 46년. 하지만 그 기간 내내 권력을 최충헌을 비롯한 최씨 정권에게 빼앗기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강도)로 옮기며 7번에 벌어진 몽골 침략에 시달리는 등 안습 크리를 자랑했던 왕. 그래도 최충헌 집권 때 5살로, 최씨 정권의 흥망(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4대)을 모두 지켜본, 풍운의 왕.
강화도에 들어와서 나오지 못한 채로 죽었다. 재위 기간 후반부 대부분을 몽골과의 전쟁으로 보낸 인물. 최씨 정권이 망하자 심한 낭비로 관리들의 상소가 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종의 업적 중 저 평가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인 태자를 몽골에 입조토록 한 점이다. 고종은 9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을 몸소 겪으면서 더이상의 전란을 막기 위해 화약을 맺도록 한 것이다. 본인이 나이가 많아 직접 입조할 수 없어 태자 왕정(훗날 원종)를 입조토록 했고, 이 부분은 몽골도 이해를 해줬다. 무인들의 반발을 누르고 오랜 전란의 시대를 마감케 하였지만, 그것이 항복으로 평가되기에 저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고려 고종은 오랜 기간을 버티었고 그 재위동안에 경험을 살려서인지 외세의 도움없이 무오정변때 간접적으로나마 개입하여 자체적으로 최씨무신정권을 종식시킨 인물이 되었다. 하필 상대는 여기에 가담한 김준이었으니 문제였다.
3. 여몽전쟁(麗蒙戰爭)
고종 4년인 1216년부터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이 시기에 고려 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최씨 정권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게 없긴 했다.
4. 사망
태자 왕전이 원나라에 입조하려 간 사이 몸이 좋지 않아서 유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 당시의 집권자였던 김준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고종이 죽기 직전 남긴 유언에 의해 태손 왕심이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되었고, 태자는 그 이듬해인 1260년에 귀국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5. 기타
부인인 안혜 왕후는 폐위된 희종의 딸로, 고종과는 6촌이 된다. 베트남 리 왕조의 마지막 후예 중 하나인 이용상 왕자를 받아줘서 잘 대우한 군주이기도 하다.
다음 왕조에서 같은 묘호를 받은 임금과 능호까지 한자로도 똑같다(홍릉, 洪陵). 또한 둘 다 재위 기간이 40년을 넘었으며(고려 고종 46년, 조선 - 대한 제국 고종 43년), 재위 내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는 절묘한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