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의 소왕(昭王) 40년에 태자가 죽자, 2년후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삼았는데
안국군은 많은 첩에게서 얻은 아들이 스무명이 넘었다.
그 첩들 가운데서 가장 총애하던 희첩(姬妾)을 정부인(正夫人)으로 삼고 그를 화양부인(華陽
夫人)이라고 불렀으나 그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또한 안국군의 첩 가운데서 하희(夏姬)라는 첩에게는 이인이라는 소생이 있었으나 그녀가 크게
총애를 받지 못한탓에 그의 아들 이인이 조(趙)나라에 불모의 신세가 되어 있던중 진나라로부터
잦은 침공을 받은 조나라는 이인을 크게 박대하였고 이인 역시 조나라에서의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매우 곤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재화가 풍부한 여불위가 어느날 조나라의 도읍인 감단(邯鄲)에 장사차 들렸다가 이인이 겪고
있는 생활상을 보고 이인에게 금 500근을 주어 생활비와 빈객을 받아들이는데 쓰도록 하였고,
조나라를 설득하여 이인이 진나라로 귀국토록 주선한 여불위는 뒤에 금 500근으로 진귀한 보석을
마련하여.. 화양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동생 양천군(陽倩君)을 찾아 누님인 화양부인
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하였다.
"왕후께서 지금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으나 만약에 왕께서 돌아가시고 자혜 왕자가 즉위하면
왕후의 궁에는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인 왕자는 현명한 분이니 지금 왕후께서 그를 불러다가 양자로 삼으시고 태자로 책봉되도록
한다면 왕자님은 나라를 얻으시고 왕후께서는 아들을 얻어 영화를 길게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서..
이인에게 자초(子楚)라고 이름까지 고치고 초나라 복장을 입혀 화양부인을 찾아뵈니 화양부인은
초나라 복장을 한 이인을 보고 "나도 초나라 출신이란다." 하며 기뻐했는데 양천군을 통한 여불위의
설득이 주효하여 화양부인은 이인(자초)을 양자로 삼았다.
그 무렵 여불위는 여러 첩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출중한 미모의 조희가 자초의 마음을
사로 잡아 반하게 되고 조희를 자기에게 달라하니 여불위가 그 청을 들어 조희는 여불위의 첩에서
자초의 첩이 되었다.
당시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지만, 임신 사실을 숨긴체 자초와 관계 하였고
산기(産氣)가 찾아와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정(政) (진시황) 이었다. --- 이 설이 유력하다.
그러던중 안국군이 왕위에 올라 효문왕(孝文王 재위: B.C. 251~250)이 되었고 화양 부인은 왕을
설득하여 자초를 태자로 책봉시켰고, 효문왕이 왕위에 오른지 3일 만에 그만 죽어 마침내 자초가
왕위를 이어 받으니 그가 곧 진나라 30대 왕인 장양왕(莊襄王 재위: B.C. 250~247)이다.
자초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여불위는 그동안 벌어놓은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했던 것이다.
여불위의 활약으로 왕위에 오른 장양왕 자초는 여불위에게 진나라를 나누어 주지는 않았지만 그를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식읍으로 낙양(雒陽/ 洛陽)의 10만호를 하사, 기화(奇貨)를 사놓은 여불
위의 계획은 적중했고 그는 장사꾼에서 일약 일국의 승상이 되었다.
그러나 장양왕 역시 즉위한지 3년만에 죽었고 그가 죽은 해인 BC 246년, 그의 아들인 정(政)이 그
뒤를 이었는데 나이가 13세에 지나지 않는 소년이었으니 그가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다.
정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왕의 후견인이 되어 왕으로부터 상국(相國 - 최고의 관직으로 승상보다
높은 칭호임)에 임명되고 옛날 제나라 환공이 관중에게 부여했던 중보(仲父-작은 아버지)라는 존칭
까지 얻게 되었다.
13세에 왕위를 이어받은 진시황이 22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30세 전후의 조희는 태후가 되어 수렴
청정을 하게되어 생각지도 않은 권력구도 속으로 빠져 들었고, 한편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어 버린
태후(조희)는 여성으로써 정신적.신체적으로 매우 불행하였다.
태후로써의 입지는 위엄스린 권력과 섭정이 당연하겠으나 젊은 여성으로써의 조희는 물오른 살이
밤의 유혹을 이겨내기 어려웠으므로 옛 남편이었던 여불위와 자주 사통을 하기에 이르는데 여불위
는 태후를 다스리려 궁궐을 장악하였고 뛰어난 문사들까지 모아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진시황이 이러한 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어린 나이 이지만, 훗날 장성한 진시황이
태후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챌 것이 자명한 일이므로 여불위는 전전긍긍하면서도 이 문제를
극복해 내어야만 했다.
이때 여불위의 고민 해결은 바로.. 전국에서 체격이 좋고 남성이 훌륭한 그런 남자를 찾아 태후께
대령하여 여불위 스스로 자연스럽게 태후와의 관계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건장한 남성을 물색하였는데 바로 '노애'였다.
노애는 남근이 유달리 큰 덕에 여불위의 심복이 되었고, 태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애로 하여금
남근에 끈을 묶어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끌게 했고 그 소문을 들은 태후는 노애를 얻고 싶어 했다.
태후가 애원하는 눈 빛으로 여불위에게 말했다.
"노애를 내곁에 둘 방책이 없겠소?"
여불위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궁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고발한 후, 궁형에 처한척 속이고 환관(내시)행세를 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궁형:남성을 거세하는 형벌)
"옳거니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여불위는 곧 노애를 관가에 고발하여 궁형을 받도록 했다. 태후는 형리에게 몰래 뒷 돈을 주고
궁형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노애의 수염과 눈썹을 모두 뽑아 고자로 보이게 하여 환관(내시)을
만들었다.
어느듯 진시황이 22세가 넘어 권력 구도가 태후에서 진시황으로 넘어 왔고.. 태후는 귀찮은(?)
권력을 던져주고 노애와의 환락생활에만 젖어갔다.
태후는 유난히도 남근이 큰 노애와 매일같이 뜨거운 액체를 쏟아 내다가 어느날 임신을 하게되자
거짓으로 점을쳐서 액운을 피해야 한다는 구실을 만들어 궁궐 바깥에 나가 살았다.
임신 덕분에 더욱 가까이 지내며 두명의 아들까지 낳고 부부가 되었는데 노애는 태후가 누리던
권력을 자신이 행사하고 3천명의 노비를 거느린 거대한 저택도 소유하게 되었다.
태후는 노애를 만난후 부터 밤마다 홍콩을 드나들었으므로 막대한 권력을 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음모를 진시황에게 고해바친 내부 고발자 신하가 있었으니 장차 이 풍파를 어찌
감당 하오리오~
진시황은 관리를 동원하여 내막을 조사하였고 노애란 자는 남근을 거세 시킨 내시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큰 남근으로 환락까지 일삼으며 두 명의 아들까지 낳았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물론
장차 차기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노애는 그 질로 수천명의 심복을 동원하여 반란을 획책 하였고, 이에 짐짓
뒷걸음 치던 진시황은 즉시, 상국 여불위를 불러 노애와 반란군 잡아 들일것을 명(命)하였다.
노애와 반란군들은 여불위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는데 진시황이 큰
목소리로..
"노애를 생포해 오면 금 일백냥이요, 노애 머리를 들고오면 금 오십냥 이다~!!" 라며 고함을
친 끝에 달아난 노애는 결국 생포되어 삼족까지 죽임을 당해야 했고, 태후가 낳은 두 아들까
지 죽임을 당하였다.
그기에다 친모인 태후마저 옹 땅으로 추방하자.. 불효를 이유로 대신들의 상소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태후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진노한 시황제는 대신들 27명의 목숨을 차례대로
끊었다. 서슬퍼른 공포 정국에 감히 나설 대신이 없던차 28번째로 목을 내놓은 대신이 있었
으니 그가 모초(茅焦)였다.
"이미 대신 27명이 죽었느니라~!!" 하며 시황제께서 검을 빼어 들었다.
"천하를 통일해야 할 황제께서 어미를 옹 땅으로 추방하는 불효를 저지르면 백성들이 외면
하므로 천하를 통일할 수 없게 됩니다~!!" 하며 모초는 스스로 관복을 벗고 목을 내 밀었다.
모초는 목이 끊어져 나딩굴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27명 대신들의 목을 쳤던 시황제 께서
엎드린 모초의 옆구리를 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모초는 어떻게 살아 났을까? 바로 [천하 통일을 이룩하려는 시황제]를 역설 하였던것이다.
다른 27명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 불효자 시황제]를 역설 하였기 때문..
그렇게 모초가 진시황을 설득하였고 태후를 옹땅으로 부터 불어들여 함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노애를 태후에게 붙혀준 여불위에게 또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1년여 만에 진시황의 서신이 당도 했는데..
"첫째,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는 그대에게 하남을 봉하고 10만호의
식읍을 내렸는가? 둘째,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가 있기에 중부(仲父)라고 불렀
는가? 셋째,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아라~!"
첫째와 둘째는 이유를 물었고, 셋째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여불위 스스로 알아서 취
해야 할 일들이었다.
촉나라로 이주명령을 받은 여불위는 언젠가 진시황의 참수 명령이 떨어질 것으로 미리
예상하여 체면과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여울-
첫댓글 간단 요약하자면 볼모로 잡혀간 불쌍한 왕자를 장사꾼이 투자 해서 그 왕자가 왕이 되고 권력을 잡고 장사꾼이 자기 씨를 뿌린 첩을 그 왕자에게 주어서 자기 아들이 왕이 되게 햇지만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애기
황제 칭호를 처음 쓴 군주로 삼황 오제의 준말이며 도량형 통일 분서 괭유 전국에 도로를 낸 황제 무소불위 였지만 아들이 삐리하여 2대로 천하 통일이 끝남
가능성이 매우 낮은 추측에 불과하다고.....아주 많은 책들에 나와있습니다...하라 야쓰히사 라는 만화작가가 그린 킹덤이라는 작품에 추측이 아니라 거의 진짜 그렇다는 식으로 그려져 있어서 다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만 가능성이 희박한 추측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킹덤은 역사를 바탕으로한 거의 픽션으로 봐야죠 그래도 요즘 최고로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간다간다 거의 픽션이지만.....저도 겁나 재미지게 보고 있습니다....ㅋㅋ
내가 어릴땐 고우영이 쓴 만화 보앗는데
야사와 정사 명확하게...나타내고 잇는지요?..제가 알기는 야사라고...알고 잇어요...
이야기의 중심 맥락은...무시마는 일단 좁이 좁같이 크고 좁가치 생겨야 한다?...뭐 그런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