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제국을 허물었을까 / 김종국
서민들에게 아파트처럼 살기 편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짜임새 있게 설계한 거며 온갖 편의 시설들이 주변에 모여 있어 이만저만 살아가기에 편리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다.
깔끔하고 수려하게 꾸며진 아파트, 여행길에 며칠 밤 묵고 떠나는 잠자리라면 몰라도 내 집으로 살기는 마뜩찮다는 생각이다. 질서 정연한 거실에 종이 꼬물 하나만 떨어져도 부담을 느껴 불안할 것만 같아서다. 꼭 그래서 아파트를 기피해 온 건 아니지만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지금 사는 집도 건축한 지 꽤 오랜 단독 주택이다. 거실 한 쪽에는 늙은 호박들이 뒹굴고 있다. 그 옆에는 효소를 담가 둔 단지며 담금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렇게 한 없이 늘어놓아 어수선 하건만 나는 우리 집이 편안하고 안정감이 있어 좋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익숙해진 환경이어서 그런가보다. 아내는 이 집에서 생을 마쳤으면 좋겠다는 말을 가끔 한다.
여름에 앞뜰로 통하는 거실 문을 열어 두면 이웃집 하얀 고양이가 사뿐사뿐 들어와 먹을 것을 찾다가 나가기도 한다. 그 녀석도 어수룩한 우리 집 분위기에서 친정에 들른 딸처럼 정겨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사용하는 방은 둘이다. 한가로이 TV를 보거나 잠을 잘 때는 현관 오른편에 있는 방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거실을 지나 화장실 곁에 붙은,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벽면에 가지런히 책을 꽂아놓은 방에 머문다. 트럭에 식재료를 싣고 다니는 행상인의 볼륨 높은 확성기소리만 아니면 집 앞 골목길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어서 방해 받을 일이 별로 없다. 나만의, 나만을 위한 공간은 그래서 확실한 나의 영역이다.
지난해 가을 어느 날 아침, 간밤에 TV를 보면서 마시고 놓아둔 유자차 잔을 옮기다가 차 잔 안에 뭔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티끌이나 먼지 정도로 오인했을 것이다. 움직임으로 보아 개미임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 중에 그렇게 작은 개미를 본 적이 없다. 잔에 남은 달짝지근한 당분을 먹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뛰고 있었다. 단 것 좋아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도 나를 꼭 닮았는지 모르겠다.
소리 없이 침입하여 둥지를 튼 무법자들을 발견한 순간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어 방바닥을 살폈다. 찻잔이 놓였던 근처에 여러 마리의 개미가 마치 누군가가 그들 더듬이를 떼어내어 방향 감각을 잃은 것처럼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다리가 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는 작은 몸집이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이렇게 살펴나가다가 문기둥에서부터 방 구석진 곳에 놓인 휴지통까지의 1m 남짓한 거리에서 놀라운 강경을 목격했다. 오와 열을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개미 군단의 행진을 발견한 것이다. 어림잡아 백 마리가 넘을 것 같았다.
“요것들이 도대체 언제부터 쳐들어와 거대한 제국을 세웠을까.”
그 순간, 어둔 야밤에만 출몰하여 주방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바퀴벌레를 따라다니며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에프킬라 통을 떠올리다가 좀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마냥 동거하기에는 성가신 존재들이지만 그렇게 혐오스럽지는 않아서다.
시간이 지나면서 본의 아닌 동거자들에게 조금의 관심이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개미들이 기상했는지를 살폈다. 입에 문 것도 등에 진 것도 없이 헛걸음만 반복하는 그들 속내가 궁금해서 동태를 한참동안 관찰하기도 했다. 개미제국은 이렇게 점점 흥미의 대상이 되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들에게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미운 녀석도 곁에 두고 살다보면 정이 드는 이치하고 같다고나할까. 청소할 때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산발적으로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발에 밟혀 죽거나 허리를 다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거대 제국만큼은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국의 행렬 앞에서는 청소기를 조심스레 다뤘다.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왕성하던 개미제국이 눈에 뜨이게 쇠진해가는 듯했다. 하루하루 숫자가 줄더니 어느 날인가 그 긴 행렬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거하던 누군가가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어느 날 홀연히 떠나간 기분이랄까. 이상하게도 홀가분함은 어디가고 궁금증만 커졌다. 기후변동에 따른 이동인가? 아니면 더 이상 점령할 영토로써의 가치가 없어서인가? 그도 아니면 주인의 마음을 읽어서인가? 여러 가지 추리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우리 집 주방 원형식탁은 거실만큼이나 어지럽다. 소속이 애매한 것들이 혼재하여 피란처를 삼고 있어서다. 청국장 분말, 마 가루, 비타민 병 그리고 자그마한 꿀 병도 그들 중에 섞여 있다. 꿀 병은 멀리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후배가 건네준 선물이다. 어느 날 무심코 그 꿀 병을 열었다. 맑고 투명해야 할 꿀에 먼지 같은 잡티가 표면을 덮고 있었다. ‘누가 검은깨 가루 묻은 숟가락으로 꿀을 펐나?’얼른 그렇게 생각이 들다가 뚜껑이 느슨하게 닫혀 있었던 것에 의구심이 생겼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꿀 병이 흔들린 것도 아닌데 깻가루가 조금씩 움직였다. 그 순간, 침실에서 사라진 거대 제국이 떠올랐다. 틀림없었다. 대부분 축 늘어져 있고 최근에 빠진 녀석들은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을 하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움직여 보지만 이미 몸 전체가 꿀에 범벅이 된 상태라 전능하신 구세주의 손이 아니곤 누구도 그들을 구해 낼 수 없게 생겼다. 멍하니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애잔한 마음이 들면서 슬그머니 연민의 정이 솟았다.
“유자차 찌꺼기를 핥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니? 천신만고 끝에 꿀 병으로 스며들어 ‘지화자!’를 외쳤구나. 그 단 꿀 몇 모금이나 마셨니. 가여운 것들!”
일주일이 멀다하고 잦던 가을비가 또 오려는 건지 하늘은 잔뜩 흐리고 내 마음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하던 울적함이 쌓인다. 유독 이 가을엔 왜 이리 하늘도 나라도 우울함으로 가득차야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