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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5-18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을 본 군중이, 자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려 하자, 두 사도는 이를 말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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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내려왔다며 두 사도에게 제물을 바치려 하자, 사도들은 자신들도 군중과 똑같은 사람이라며 이를 말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을 행합니다. 그러자 군중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두 사도는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왜 리스트라 사람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처럼 떠받들려 했던 것일까요? 사도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처럼 아직 복음을 선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려고 목숨을 바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에 머물면서도 교회의 본성인 복음을 전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리스트라 사람들처럼 자신이 속한 교회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제자들에게만 드러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알려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갈라 5,22 참조)이기에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 그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께서 당신을 알게 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면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그 성령을 주시는 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려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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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고립되어 있지 않고 타자를 향해 행동하고, 자신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관심에 공감하며, 하나의 목적에 도달하려는 열정을 일으킬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와 능력이 모두 예수님에게서 왔음을 확신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켰을 때, 신화적 세계에 갇혀 있던 그리스 사람들은 신이 사람 모습으로 내려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두 사도를 신으로 모시려는 우매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헛된 우상에 빠진 이들을 질책하며 자신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방인들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상대방의 생각에 관심이 없고 자기만족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소유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상대와 나누는 사랑의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려고 더 멀리 보고, 더 진지하게 들으며, 더 소중하게 상대를 만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짧은 시간이라도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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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고로 인정과 칭찬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누구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을 때 자존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랑과 신뢰와는 달리, 허영과 위선은 우리 안의 ‘거짓된 자아’가 ‘참된 자아’를 삼켜 버리는 죄를 낳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사람들이 그를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질책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의 힘에서 온 것임을 확신했기에, 사람들에게 받는 칭송에 우쭐대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감추어진 허영과 위선은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본색을 드러냅니다. 계명은 사람들에게 요구할 때만 필요하고, 내게 불리한 계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경쟁과 적자생존의 사회에서 남을 배려하는 삶은 실패한 인생이 될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고, 새기며, 지켜 줄 때 자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실천이 있어야 진짜입니다. 이기적 본성이 일어날 때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는 기적을 만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이기적 본성을 치유하시고, 사랑하는 능력을 되살려 주시도록 청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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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내일 독서의 앞부분을 이어서 묵상하면 두 부분의 대조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예찬과 영광을 거부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바오로의 믿음이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앉은뱅이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늘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경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신자들 사이에서 환대와 존경을 받곤 합니다. 하기야 성경도 훌륭한 원로들, 특별히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애쓰는 이들은 존대를 받아 마땅하다고 권고하기도 합니다(1티모 5,17 참조).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환영을 받아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환영을 받기보다는 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 쫓겨났고, 이코니온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며, 지금 리스트라에서는 환영을 받지만 내일 독서에서는 이코니온에서 온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는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릴 것입니다.
이때에 바오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면서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신뢰심을 갖고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시고 그를 지켜 주실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진리 안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며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과 시련을 당할 때, 주님의 말씀이나 시편의 한 구절, 또는 어떤 가르침 등이 마음에 번쩍 떠오른다면, 그것 역시 바로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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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부모님은 식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식당에서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 것이 무척 싫었습니다. 손님이 한창 붐빌 때에는 텔레비전도 맘 편히 보지 못한 채 나가서 그릇을 치우고, 콩나물을 다듬거나 마늘을 빻아야 했습니다. 저희 집이 식당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데다가 친구들이 노는 시간에 일을 하려니 억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일한 것이 아니면서도 철없던 그때 저의 마음은 그러하였습니다.
철이 들면서 조금씩 나아지다가 특히 군대에 가서는 부모님의 처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입고 싶고 쉬고 싶은 것 다 참아 가며 매일 식당 일에 매달리며 고생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더 이상 부모님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식당 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부끄럽게 생각한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뒤로는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신학생이 되어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부모님은 제게 일을 잘 시키지도 않았지만, 저는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일을 도와 드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아니, 부모님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지 못한 데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자연스럽게 지켜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명을 잘 지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에 얽매인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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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서로 닮는다고 하지요. 특별히 금슬이 좋고 사랑이 깊은 부부일수록 더욱더 닮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다 해 주고 싶고, 늘 함께 있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면 함께 기쁘고, 슬퍼하면 같이 슬프고, 아파하면 그 고통이 같이 느껴지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을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하게 되고 그분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피하게 됩니다. 그분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했지요(1요한 4,20 참조).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해도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의 행동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의 표현은 십계명에서 말하는 윤리적 질서를 갖고 사는 것이 기초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웃에 대한 희생과 봉사를 하는 삶이 있어야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 사랑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엎어지고 넘어져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당신과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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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은 곧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분의 당부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와 같습니다.
꿩을 기르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모든 꿩에게 ‘안경알 없이’ 태만 굵은 플라스틱 안경을 씌워 놨습니다. 옆은 못 보고 앞만 보게 하는 장치입니다. 자연히 꿩은 하늘만 보게 됩니다. 갇힌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울타리를 보면 본능적으로 넘으려 하기에 그걸 막으려 특수 안경을 씌운 거라고 했습니다.
본능의 조절에는 ‘특수 안경’이 필요합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윤리와 도덕을 내세워 ‘다른 것’을 못 보게 했습니다. 특수 안경을 씌웠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그 ‘안경’을 율법에서 찾았습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율법에 매달렸습니다. 율법에서 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안경’을 주십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늘 만나는 가족입니다. 자주 만나는 이웃입니다. 그들을 소홀히 하면 삶의 방향은 당연히 흐려집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더욱 빛나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랑!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존경하는 소설가 김훈 선생님께서 여러 차례 결혼식 주례사를 서셨는데, 그나마 덜 비판 받은, 어느 정도 성공한 주례사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셨는데, 참으로 공감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인데, 힘들어도 꾸역꾸역 살아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소중한 동력이 됩니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갑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립니다.
연민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연민에는 이기심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한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연애를 오래했으면 서로 성격을 잘 알 터인데,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입니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가십시오.”
가끔씩 우리는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제한적 사랑, 유한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지속적인 정화와 쇄신과정을 통해 신적 사랑으로 충분히 승화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랑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한 전문가 집단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대체로 약 30개월 정도랍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슴설레는 순간, 불같은 순간 30개월이 지나게 되는 바로 그 시점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장시켜나가기 위한 불굴을 노력을 시작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순교자의 후손 답게 순교 영성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향한 순교자적 인내와, 목숨 건 기도와, 불굴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장시켜나가는 데 아주 좋은 조건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시들해갈 무렵, 다른 사람들은 그 고통, 그 결핍을 채우지 못해 방황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좋습니까? 인간에 대해서 실망을 느낄 때, 염증을 느끼고 좌절을 느낄 때, 찾아갈 때 마다 반겨주시는, 불멸의 연인, 영원한 연인이신 우리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주님 사랑 안에 위로를 받고, 다시 힘을 내서 사랑의 유효기간을 더 연장시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영성생활이요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놀랍게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 사이에서 주고받는 사랑 안에도 불사불멸의 사랑, 절대적인 하느님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한하고 나약하고 사멸하는 흙부스러기 같은 피조물인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끼리 주고받는 작은 사랑을 통해 무한한 신적 사랑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참으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까?
관건은 사랑에 대한 충실성, 사랑에 대한 지속성, 사랑에 대한 신의요 배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그릇 안에 있는 담겨 있는 순수하고 밝은 것,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을 지속적으로 내어놓는 행위야말로 참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더욱 빛나고 품위 있는 삶, 완성되어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그분은 시종일관 우리에 대해 낙담하거나 염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태생적으로 지닌 결핍이나 나약함, 한계와 죄까지도 당신 뜨거운 사랑으로 정화시켜주십니다.
어제의 배신, 어제의 죄, 어제의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새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새롭게 우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신적 사랑입니다. 갚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제의 나를 잊어버리시며 새롭게 시작하자고 늘 초대하십니다. 어제 하루 우리가 아무리 어둡게 살았어도 늘 밝고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은총을 받을 좋은 그릇이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고을에 착하고 예의바른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농사라곤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부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밭에 무씨를 뿌렸더니 정말 좋은 무가 났습니다. 착한 농부는 “농사가 잘 된 것은 모두가 원님 덕분”이라며 제일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원님도 이렇게 착한 사람이 내 고을에 있는 것을 신통방통해하며 관리를 시켜 선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큰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심술궂은 농부가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를 바쳐 황소를 받았다면 자신이 기르는 황소를 바치면 더 큰 선물을 받겠다 싶었습니다. 과연 이 농부는 “저희가 잘 사는 것은 다 원님 덕분입니다.”라며 기르던 황소를 바쳤습니다. 원님은 이처럼 착한 백성이 많다고 칭찬하며 “창고에 무엇이 있느냐?”고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창고에는 착한 농부가 바친 무가 있었습니다. 원님은 심술궂은 농부에게 그 무를 선물했습니다.
청하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먼저 꼭 필요해서 쓰려고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지만 미래를 대비해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까요? 어떤 사람의 청이 더 간절할까요? 어떤 사람의 청이 더 진실할까요? 만약 모으려고 청하는 줄 알면서도 준다면 그 주는 사람이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청한 것을 받으면 이제 하느님께 덜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가진 것이 충분한 사람은 덜 의탁합니다. 그러니 청할 때 모두 소진할 마음으로 청해야합니다. 그래야 주시는 분이 보람 있어 하십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이 가진 성령의 에너지를 다 소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겐 사랑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의 말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당신께서 그 사람에게 가서 살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보고 만나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려고 하는 의지를 먼저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을 원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더 바라는 이에게 먼저 선물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시종에게 며느리 될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시종은 아브라함의 가문에 맞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 자신의 낙타 10마리에게 물을 길어주고 자신에게도 주는 여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신 며느릿감이라고 여기겠다고 기도합니다.
레베카란 여인이 그렇게 합니다. 낙타 한 마리가 40리터의 물을 마신다고 하니 한 여인이 하기는 너무도 벅차고 바보 같아 보이는 일인데도 레베카는 목말라하는 낙타와 사람에게 물을 길어줍니다. 사랑의 의지가 없다면 이런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 하고 탈진 상태에 있는 레베카에게 아브라함의 시종은 금은보화와 장신구를 줍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공동 작업시간에도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고 기도만 하려고 드는 수녀에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그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기도는 성령을 받는 일인데, 그것이 이웃사랑에 소진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려면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려면 그 성령을 소진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모으기만 하는 사람처럼 청하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더라도 내면은 사막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면서도 기쁨과 평화도 함께 잃게 됩니다. 충만히 퍼내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행복을 누립니다. 기도와 활동의 균형이 맞아야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책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은 작은 즐거움입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것이 생각나기도 하고,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배우기 전에 철학을 배웠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감성, 지성, 이성으로 자연현상, 사회현상, 인간 자신을 성찰하기 때문입니다. 자연현상은 자연과학, 사회현상은 사회과학, 인간 자신은 인문과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오감을 통해서 체험하고 경험하는 인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성을 통해서 사유하고 분석하는 인식입니다. 경험은 모두가 같을 수 없고, 경험은 부정확하기에 때로 회의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지성은 모두에게 주어지 않기에 지성을 소유한 이들에 의해서 독점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인식의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동양의 노자 철학에서 이야기하듯이 ‘도를 도라고 규정하면 이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경험과 지성의 크기로는 초월적인 자아, 우주, 신을 규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실천과 판단을 통해서 절대적 자아, 우주, 신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철학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신학은 사물을 인식하는 새로운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관과 절대자에게서 오는 사랑이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오랜 수양을 통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성과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양과 기도가 절대자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면 역시 지성과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는 사건이 계시이며, 은총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다락방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울이 이방의 세계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도, 경험과 지성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변화되었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변화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가진 것을 나누고, 교회를 세운 것은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엥베르 주교는 만 리가 넘는 길을 떠나 조선으로 왔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외모가 달랐고, 문화가 달랐고, 박해가 심해서 잡히면 죽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과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해박해를 피하지 않았고, 순교하였지만 그분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했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초월적인 자아, 우주, 절대자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 전쟁과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 자연의 파괴에 신음하는 지구별의 아픔을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줍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의 주신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자신에게 잘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시며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이들까지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이 지니는 나약성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만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협조자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내가 하지 못하던 그 사랑이 가능해 집니다. 그것은 마치 잔에 물이 넘쳐흐르는 모습처럼 내게 사랑이 채워지면서 그것이 흘러넘쳐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도 줄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협조자이신 성령과 더불어 매 순간 사랑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저는 만년필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글을 만년필로 쓰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만년필은 비록 고가는 아니지만 가볍고 필기감이 좋으며 제 손에 딱 달라붙을 정도로 느낌도 좋습니다. 그밖에도 장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제가 잘 쓰고 있는 만년필을 보고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신부님, 왜 그런 만년필을 쓰는 거예요? 유명 브랜드도 아니고, 필기감도 떨어지지 않나요? 저도 이 제품을 써 본 적이 있는데 못 쓰겠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만년필에 대한 나쁜 말만 늘어놓는다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상대방에게 반대의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고, 또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되면 그냥 무시하면서 침묵할 것입니다.
만년필에 대한 예를 이렇게 말했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에 대해서 누가 흉을 늘어놓습니다. 이때에 기분이 좋을까요? “맞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면서 맞장구를 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 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이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왜 신앙심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님을 좋아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누가 뭐라 해도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으면 저절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주님께 대한 믿음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받아 먼저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먼저 지켜나갈 때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조차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자신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다. 이것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다(톨스토이).
먼저 웃고 사랑하고 감사하자(이해인,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중에서)
안팎으로 힘든 일이 많아 웃기 힘든 날들이지만 내가 먼저 웃을 수 있도록 웃는 연습부터 해야겠어요.
우울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한 이들에게도 환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도록 아침부터 밝은 마음 지니도록 애쓰겠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는 노력의 열매가 사랑이니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다가가서 해주는 겸손과 용기가 사랑임을 믿으니까요.
차 한잔으로, 좋은 책으로, 대화로 내가 먼저 마음 문을 연다면 나를 피했던 이들조차 벗이 될 것입니다.
습관적 불평의 말이 나올려 할 땐 의식적으로 고마운 일부터 챙겨보는 성실함을 잃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주는 소중한 밑거름이니까요.
감사는 나를 살게 하는 힘 감사를 많이 할수록 행복도 커진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그동안 감사를 소홀히 했습니다.
먼저 웃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감사하자. 그리하면 나의 삶은 행복할 것입니다.
<참사랑이 되게 하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아직은
뿌연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불타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모자란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차고 넘치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바라는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가르는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모든 이 품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나를 위한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벗을 위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주저하는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두려움 없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재는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목숨 바치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불순한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맑고 깨끗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의심 품은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믿음에 뿌리내린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나 아직은
의롭지 못한 사랑일지라도
참으로 사랑이고프니
사랑이신 그대여
나에게 오시어
정의를 이루는 사랑이
되게 하소서.
새 창조의 맏아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에서(Oratio 1 in Christi resurrectionem: PG 46,603-606. 626-627)
생명의 권세가 찾아와 죽음의 권세는 멸망되었습니다. 새 사람, 새 생명, 새 생활 양식이 나타나 우리 본성은 변화되었습니다. 이 새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잘 들어 보십시오. 간략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새 존재는 신앙으로 잉태되어 세례라는 재생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교회는 그의 어머니로서 교리와 교훈으로 그를 젖 먹이고 천상의 빵으로 양육시킵니다. 그리고 이 새 존재는 거룩한 생활로써 어른이 됩니다. 그의 혼인은 지혜와의 결합이요 그의 자손은 희망이며, 그의 집은 하늘 나라이고 그의 유산과 재산은 천국 낙원이 기쁨이며, 그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이 아니라 합당한 이들에게 예비되어 있는 지복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입니다.” 이날은 시간의 흐름으로 측정되는 세상의 창조 때 만들어진 그러한 날과는 다릅니다. 이날은 제2의 창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이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셨습니다. 어떤 하늘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하늘입니다. 어떤 땅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비를 받아 여러 가지 열매를 맺는 착한 마음의 땅입니다.
이 새 창조에서 태양은 순수한 생명이고, 별들은 덕행들이며, 공기는 흠 없는 생활이요, 바다는 지혜와 지식의 깊음과 풍요함입니다. 풀과 씨앗들을 목장의 백성, 즉 하느님의 양 떼가 양육되는 하느님의 가르침과 건전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이날에 하느님의 모습대로 참 사람이 창조됩니다. “주께서 마련하신 이날.” 바로 이날에 새 세상이 우리에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언자가 분명히 말하는 바와 같이, 이날은 어떤 날과도 다른 날이며 어떤 밤과도 다른 밤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날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은혜에 대해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날은 죽음의 고통이 없어지고 부활한 이들의 맏아들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날입니다. 살아나신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께로 그리고 나의 하느님이시고 너희들이 하느님이신 분께로 돌아간다.” 오, 놀랍고도 좋은 소식이여! 성부의 외아들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형제들이 되게 하시고, 인성을 지니시고 하느님께로 승천하실 때 이제 당신 가족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데리고 가십니다.
내 마음 안의 성령
곽승룡 비오 신부님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사람을 영적인 인격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인간 곧 사람의 몸과 영혼 그리고 성령을 먼저 알아 차려야 한다.
먼저 먹고 숨을 쉬는 몸은 육적인 여러 기능을 수행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영혼은 생각하고 결정하며, 세상을 안다.
끝으로 성령은 마음 안에서 아빠 아버지를 부른다.
다시 말해서 내 안의 성령께서 기도를 하는데,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올려드린다. 영적인 사람은 이처럼 수덕의 삶에 관한 지성적 성찰들을 공유하고, 아름다운 모든 이야기 담론들을 말할 수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누구나 이와 같이 단순하게 믿는 모두를 영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각자 마음 안에 성령이 거처하시기에, 모든 사람은 영적 인격을 선물 받은 품격 있는 존엄한 사람이다. 내 마음의 성령이 영적 인격을 살도록 감도하신다.
신앙으로의 완성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걸어온 길, 어느 사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믿음의 사람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동안의 모두를 기억하며 반추한다. 믿음으로 말씀에 힘이 있으며 죽음 앞에 두려움이 없다. 하느님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나는 오늘도 하루를 디자인 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기도와 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하루를 열며 ‘이런 일을 하겠다’를 정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일을 한다’고 선언한다. 어느 새 나는 그 일이 내 일이 되고 있다. 그리고 무리수를 쓰지 않고 그 하고자 하는 일의 유리수부터 찾아낸다. 그리고 그 찾아낸 일부터 행동으로 옮긴다. 하루를 살고는 내가 어떤 진행의 결과를 얻었는가를 살핀다. 그리고 매일을 정리하고 일기를 쓴다. 이렇게 유리수를 살고나면 무리수를 향한 무한도전이 된다. 불가능은 가능이 되어있다. 이는 내 인생이 되고 보람이 되고 행복이 된다.
나는 오늘도 하루를 디자인한다.
20년 전 만났던 신부님을 만났다.함께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훌적 무심코 지나버린 시간 같지만 속이 꽉찬 20년의 시간들이었다. 그 속에 디자인해서 살았던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또 들었다. 행복한 시간이다.
어린시절 신작로 가로수로 심겨진 ‘포풀라’ 숲을 나는 나이들어 바라 본다. 당시는 회초리 나무를 심었는데 오늘 그 나무들은 산소탱크가 되어 사람들 향해 신선한 공기를 뿜어내고 있다.
창조 때에 우리를 닮은 인간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4~26)”
‘아버지 나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를 따로따로 다 설명하신 대목입니다.
사람이라면 자기가 한 말에 책임 질 수 있어야 존엄한 인간이라 하죠.
하느님도 말씀하시고 그 책임을 지신다고 간단히 이해하셔도 맞습니다.
하느님(아버지)=말씀(예수님)=책임(성령)이 삼위일체라는 설명입니다.
창세기에서 사람 창조 때에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복수)라는 표현이 삼위이시고 인간도 그런 구조로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을 닮은 인간의 속성구조가 이렇다는 데에 감탄합시다.
하느님과 통할 수 있는 속성상 같은 점 깨닫도록 선교로 일깨웁시다.
'탓 버리고 화두 살기'(요한 14장 21~2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부모를 존경하는 아들은 부모가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고 화두로 삼아 성장하고 성숙해갑니다.
인간은 행동함에 있어서 누구나 부모, 성인, 어린이의 모습을 지닙니다.
어른이 철부지, 애가 어른같이 ‥
부모는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자식은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데 인간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100% 완벽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교훈을 삼는것이 내 몫!
이스가리웃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때 완전 도둑 심보만 지니고 있었을까요?
그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잘해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Here and Now 지금 이순간 여기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나간것을 붙잡고 지금을 괴롭히며 산다면 너무 아까운 시간입니다.
과거 어느 환경, 부모에게서 양육되고 자라왔든 '탓'을 하며 살면 어른이면서 어린이처럼 유치합니다.
항상 지금 내가 선택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행동이 내일의 모습이 된다는 인식을 한다면 ??
'지금 여기서 답게 사는 것을 선택하고 잘 모르겠으면 예수님 보고 따라하기'
주님의 사람 -사랑의 사람, 말씀의 사람, 성령의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 우선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자유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참 좋은 제목의 수도승 영성에 관한 책이 있어 원장에게 주문을 부탁했습니다.
“시간되면 다음 2권의 책도 주문해 주세요. 수도승 영성에 관한 좋은 책 제목과 내용만 봐도 마음이 설레네요.”
“예, 주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주고 받은 메시지 내용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참 좋은 말씀과 책을 대하면 부자가 된 듯 참 행복함을 느낍니다. 어제는 주문한 2권의 책을 받고 마음이 기쁨으로 설레었습니다. 책 표지의 제목(1.렉시오 디비나, 2.영원한 삶에 이르는 길)과 그림만 봐도 행복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도 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과 말씀이 주님을 만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지 다음 주님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인지요. 막연한 주님 사랑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의 계명을,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바로 이때 주님의 사랑도 받고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사랑은 주님 사랑이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니 말씀의 역할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말씀을 만나야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을 지킬 것을, 말씀에 순종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를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래서 말씀을 늘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지니고 지키며 살 때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도 친히 우리와 함께 살 것입니다. 하여 제가 늘 피정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성생활은 습관입니다.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실천하여 습관화, 생활화하여 제2천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날마다 매일미사책에 나오는 말씀들을 묵상하십시오. 매일미사에 참석하시든 못하든 ‘입당송부터 영성체후기도’까지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이보다 더 좋은 영성습관은 없습니다. 매일미사에 참석하시면 더욱 좋구요.
하루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매일미사입니다. 매일미사책갈피에 제가 드린 기도문 끼어 놓고 자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늘 말씀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 갈망에 또 매일 강론 준비를 위해 늘 매일미사책을 들고 다닙니다.”
이런 요지로 말씀의 생활화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주님 말씀의 중요성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날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도움을 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고별사에사 약속하신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성령보다 더 좋은 스승도 영적지도자도 없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참으로 주님의 사람은 말씀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성령을 통해 두 사도와 하나되어 복음을 전하며 일하십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바오로 사도는 태생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큰 소리로 말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말씀의 힘, 성령의 힘입니다. 바오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치유받은 사람입니다. 두 사도를 헤르메스와 제우스 신들로 착각한 무지몽매한 리스트라 사람들을 일깨우는 말씀과 성령의 사도들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답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회개요 겸손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가까이 계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잊어,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세상 헛된 것들인 우상들에 빠져 자기를 잊고, 잃고 지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 만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입니다.
또 하나 기쁜 소식을 소개합니다. 오늘 5월20일은 ‘세계인의 날’입니다. 이 날은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지정된 법정 기념일로 지난 2008년부터 매년 5월20일에 기념식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계인의 날에는 농촌발전과 교육사업에 매진했던 전 안동교구장님이셨던 프랑스 출신의 두봉주교님(90세)이 ‘올해의 이민자상’을 받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90세의 고령에도 영혼은 영원한 청춘인 사랑의 사제, 말씀의 사제, 성령의 사제 두봉 주교님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사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제 내린 단비로 가뭄에 목타던 대지와 초목들이 생명으로 촉촉이 젖었으니 이 또한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파스카 신비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하시어 당신 말씀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옵니다.”(시편115,1). 아멘.
진실의 가르침
노중호 신부님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장 21-26)
전승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카는 예수님께서 골고타(해골산)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닦아드린 예루살렘의 어느 여인입니다.
그녀는 병사들이 채찍으로 내리치고, 수많은 군중이 침 뱉고, 돌을 던지는 십자가의 길에서 용기를 내어 자신의 베일로 성면(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을 닦아 드렸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주님의 모습이 새겨졌다고 전해집니다.
라틴어 ‘베로니카’는 베라(참된, 진실한), 이콘(형상, 성화상)의 합성어로 성녀 이름 자체로 ‘그리스도의 진실한 형상, 참모습’이란 뜻이 됩니다.
베로니카 성녀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덕을 배웁니다. 주위 눈치를 보거나, 체면을 차리다 진실을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용기를 내야 할 때 용기를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진실을 외면하고 싶을 때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진실하신 예수님을 깊이 품고 세상에 진실을 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 진실의 영, 성령께서 우리의 보호자로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진실의 길을 훤히 밝혀주실 것입니다.
* 거짓이 난무하는 가운데 진실 앞에 서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요한 14, 21)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담뿍 받으십시오.
오늘 복음(요한 14, 21~26)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과 일치하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 21)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대한 관심과 그 사람의 말에 대해서 존중하고 그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사랑의 훈계를 하고 좋은 길로 가도록 말씀하시는데, 그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자녀는 부모를 존중하지도 않는 것이며 사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또 부모님은 자녀의 말을 들으시면서 그 자녀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과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의 계명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 (요한 13, 34)고 하는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며, 또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존중하고 받들고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정중하고 귀하게 대하듯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사랑의 말씀은 곧 인간을 구원하시는 말씀인데, 그것을 잘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이렇게 사랑하는 관계가 될 때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는 사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 제자가 예수님께 그 이유를 묻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 24)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성령으로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행복의 이룰 수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 24~26)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도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과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결국에 가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을 거절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의 마음으로 지켜야 하며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결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해주소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랑하는 것도 나고, 말씀을 지키는 것도 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내가 할 일을 주님께 맡기고 청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이론적인 생각보다 앞서는 것이 우리의 존재론적인 처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온전히 그 말씀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 우리는 그러한 우리 처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늘 기도합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게,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러시고는 혹시라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못할 경우를 대비라도 하신 듯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오늘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의 사랑 안으로 더 깊이 이끌어 주셔서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담뿍 잠기고 취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잠겨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분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주님의 뜻을 실현하게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끄시고 힘을 주시어 우리가 능히 주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움직이실지 모르지만, 우리를 주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일에 열매를 맺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순종과 사랑,< 요한 14/21-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대한민국 사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와 관계 맺고 살려면 서로의 말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있기에 여지로써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자기는 없어지고 “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 응답하시며 실천하신 행위는 아버지 사랑이 지극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에게 천사가 나타나 순종을 요구하시지 않지만 성령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은 아버지가 보내신 하느님이며 서로의 순종으로 일치하여 사랑으로 일치를 완성하십니다.
우리를 하느님으로 살고 일치도록 이끄시는 분은 성부가 보내주신 성령입니다.
성령체험을 어떻게 힐 까요? 성령은 성령을 구하는 조용한 기도 중에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떠나신 다음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사도는 조용히 모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바람같이 오시어 그들의 행동요령을 지시하시고 말과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하나 됨은 각각 사명이 다르면서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로 들어갑니다. 각각 계신 것 같아도 함께 계시고 성령의 일이 아버지의 일이고 아들의 일이 아버지의 일이고 성령의 일이 아버지와 아들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치의 모텔을 알고 믿고 있으면서 일치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서로 헐 듣고 거부하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살면서 불목과 분열을 이르깁니다. 저는 공산주위자도 성령의 말씀을 중심에 두면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서로 절망하고 서로 나를 따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을 바로 보게 하시고 산만하거나 목표를 잃은 눈으로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오로지 하나 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성령을 충만이 받으려면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성령을 기다리도록 기도합니다. 서로 순종함으로 서로의 사랑을 완성 합시다.
여름의 향연을 즐기는 날이다,
최민석 신부님
일선학당 어르신들과 나들이를 가는 날. 즐거운 소풍날이다. 그 동안 학당에서는 공자님의 사서 중에 대학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학당에서 배우는 내용이 뭐 그리 새로운 것 아니다. 아주 단순하게 사람의 도리를 배우며 인간의 길을 여럿이 함께 나누는 작은 모임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14,15-19)
삶을 나누고 배우면 배울수록 삶은 단순하다. 삶은 사랑이다. 그렇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사는 일이다. 사는 일이란 더 단순하게 말하면 그냥 숨 쉬는 일이다. 이 삶의 원리로 사는 것이 사랑이다. 숨을 잘 쉬어야 건강한 생명이다. 건강한 생명은 사랑으로 산다. 사랑이 숨이요, 숨이 사랑이다. 그 숨이 생명을 이어준다. 살아있으니 숨 쉬고 있고 숨을 쉬고 있으니 살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진실이다.
있는 그대로를 숨 쉬며 살면 된다. 지금 이대로가 삶 자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이며 지금 이대로이다. 지금 이대로가 삶의 진실이다. 지금 여기에 자유와 평화가 있고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것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 내게 있다. 그분이 바로 늘 나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 성령이다.
성령께서는 늘 나를 한 생명이 되게 하신다. 한 생명을 살면 모두 더불어 잘살게 된다. 그리고 자기 생명만 살려하면 삐걱 거린다. 너도 나도 모두가 힘들다. 더불어 한 생명을 숨 쉬는 이 간단한 생명원리를 배우는데 나는 평생이 걸렸다. 일선학당에서 배움은 나눔과 섬김과 사귐이다. 삶과 사랑을 나누며 한 생명을 배운다.
일선학당 학생은 8명이다. 학당을 시작 한지 벌써 4개월이다. 매주 화요일 마다 열리는 학당에 결석은 없다. 성실한 학생들의 인생 공부는 늘 재미있고 진지하고 눈물겹다. 진지하고 재미있고 눈물겨운 삶의 보따리가 풀려서 그렇다. 일선학당 나들이 자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자연을 교과서로 하여 자연에서 배우는 날이다. 그러니까 이 나들이는 수학여행이 되는 셈이다.
인생은 먼 길을 돌면서 중년 이후 외모가 변해간다. 삼단복부 이중 턱 구부정해지는 허리 등 그리고 흰머리 빛나는 대머리 또 늘어진 피부 자꾸 자꾸 처지는 눈꺼풀 등 그래도 말년을 앞에 둔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나눠 줄 수 있는 것은 德이다. 덕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쌓이는 것이다.
도가 덕이 된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미움과 절망이 인간을 구제할 수도 있다. 노년이 갖춘 도덕의 연륜은 미움과 절망까지도 품을 수 있다. 성실하게 살면 이해도 지식도 사리 분별력도 자신의 나이만큼 쌓인다. 그런 것들이 쌓여 후덕한 인품이 완성된다.
노년이 되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지혜다. 내면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오직 매 순간순간의 ‘현재’만 있게 될 때, 그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긍정됨으로써 비롯되는 엄청난 생명력이다. 온갖 생명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넘치는 기쁨이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이사야65,17-19)
시간에 갇히면 두렵고 잔혹하다. 노년 이후에는 '진격'보다는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한다. 오래 살게 되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 따라서'잃어버림'을 준비할 때다. 그것은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잃어버림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주변의 사람도, 재물도, 그리고 의욕도 자신을 떠난다. 이것이 노년 이후의 숙명이다. 추한 것, 비참한 것에서도 가치 있는 인생을 발견해 내는 것이 중년이다. 여자든, 남자든,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외양이 아닌 그 사람의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는 정신 혹은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좋다.
만일 내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그 누가 없어도 잘 돌아가게 되므로 우리는 안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조금씩 비우다 결국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세상을 뜨는 게 하늘의 뜻이다 세월 따라 기력이 쇠퇴해지는 만큼 마음도 따라 너그러워지는 노년이길 바란다.
여름의 향연을 즐기는 날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흐르는 길목 연록이 초록으로 흐르는 생명의 충만한 산과 들녘으로 나서는 나들이다. 기쁨을 나누는 미소는 빨간 장미를 닮았고 슬픔을 나누는 눈물은 하얀 백합을 닮았다. 한결같은 사랑의 꽃잎으로 생명 축제는 참 아름답다. 다 비워내고 침묵으로 흐르던 고요와 그 충만, 그 생명 축제 현장으로 떠나는 날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비온 뒤
모든 것이
새롭고 깨끗합니다.
가르침과 깨우침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방식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주실
성령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는
삶을 가르치시고
소중한 진리를
우리 삶안에서
잘 기억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에
우리가 충실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내적인 변화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의
성장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성령을 통해
다시 시작되고
다시 살아나는
우리의 삶입니다.
삶의 모든 시련과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거짓되고 완고하며
어리석고 굼뜬 마음을
바꾸어 주십니다.
새 마음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께
우리 삶을 의탁합시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시는
성령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또는 강의 준비를 할 때에 갑자기 막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고, 글이 잘 써지지 않고, 강의 진행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떠올려지지 않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참을 고심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에서 SNS 메시지가 왔다는 표시등이 뜹니다. 머리가 복잡했는데 잘 되었다는 생각에 확인을 하고나서 가입되어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어떤 글이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E-Mail 함도 열어보지요. 잠깐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참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서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하려고 하면 어떨까요?
처음의 막막함이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뿐이 아니라 더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예 확인을 하지 않습니다. E-Mail 함에는 확인하지 않은 메일이 가득입니다. 제 글에 어떤 댓글이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니 겨우 시간 낭비를 줄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일이 메일을 확인하고, 제 글에 대한 모니터링을 계속한다면 어떨까요? 정말로 해야 할 것들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보니 이밖에도 유혹을 가져오는 세상의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들이 내게 커다란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정작 할 일은 뒤로 제쳐두고 순간의 쉬운 만족만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의 일보다도 세상의 일이 먼저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뜻과는 점점 먼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고 싶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대한 관심만 가득한 상태에서 겨우 주일미사 한 번 참석하는 것만으로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겠다고 말하는 것은 커다란 욕심이고 착각이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이런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을 받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주님이 세상의 것보다 먼저인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큰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단 번에 가능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불가능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보호자이며 협조자이신 성령을 우리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사실 제자들 역시 성령을 받아들인 뒤에 비로소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가 있었지요. 이 성령은 용기와 지혜를 가져다주어서 올바른 판단과 함께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주님께 온전하게 의탁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들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주님을 맞이하는 힘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의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 주면 달걀 프라이가 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성소주일이었습니다. 일주일 전의 예보는 비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성소국장이 열심히 기도하면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기도 때문은 아니겠지만 3일전 예보를 확인하니 오전에는 흐리고 오후 3시부터 비가 올 거라고 하였습니다. 당일 날의 예보를 확인하니 오전에는 흐리고 오후부터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소주일 아침에 명동에서 혜화동까지 걸어가는데 종로 5가 쯤에서 비가 조금 내렸습니다. 순간 저는 주머니에 있던 묵주를 꺼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성소주일은 아주 시원한 날씨 속에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걱정보다는 기도가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미사를 주례해 주신 주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1960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쓰셨던 일기장을 보여 주셨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기를 쓰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58년 동안 일기장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사람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매일 복음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작은 일이지만 저도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소주일에 두바이에서 잠시 휴가를 왔다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두바이에서 일을 합니다. 신부님의 묵상 글이 제게는 영적인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형제님의 말씀이 제게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집을 이루는 벽돌 한 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 장의 벽돌이 모여서 아름다운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구청 마당에는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들은 모두 많은 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잎 하나는 작지만 그 잎들이 모이니 교구청은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만 조심하면 됩니다. 나뭇잎이 자기가 나무라고 생각한다면, 나무가 자기가 숲이라고 생각한다면 조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자신들이 교회의 벽돌 한 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신들은 교회라는 숲에 있는 작은 잎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언제 어디서나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 -사랑愛, 봄見, 앎知-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잘 듣는 귀도 중요하지만 잘 보는 눈은 더 중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또는 넘어 볼 수 있는 눈도 있습니다. 눈의 모습, 색깔, 크기도 다 다릅니다. 눈빛 또한 다 달라서 깊고 그윽한 눈빛도 있고 따뜻하고 부드러는 눈빛도 있고 천박한 또는 차가운 눈빛, 어둡고 무거운 눈빛 등 참 다양합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비단 육안肉眼만 아니라 심안心眼, 영안靈眼도 말하곤 합니다. 볼 ‘견見’자가 들어간 한자가 봄의 중요성을 입증합니다. 의견意見, 견해見解, 견성見性, 편견偏見, 선입견先入見,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단어도 있고, 관상觀想도, 깨달을 ‘각覺’자도 볼 ‘견見자’가 들어 있습니다. ‘맹목盲目’이란 단어도 ‘안목眼目’이란 단어도 눈‘안眼’ 눈’목目’자로 이뤄졌습니다. 모두가 잘 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는데 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뿐 아니라 눈빛도 그 사람의 내면이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굴도 눈빛도 잘 돌보고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세월따라, 마음따라 변하는 얼굴이요 눈빛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카의 핀란드 흰 올빼미 도자기 전시회에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이란 말뜻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올빼미에서 마지막 눈동자를 잘 집어 넣는 것이 절대적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올빼미의 눈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올빼미의 모든 특징이 압축적으로 그대로 드러난 기다림, 외로움, 그리움으로 깨어있는 눈빛이었습니다. 만약 올빼미에 눈이 없다면, 또 눈이 이런 정서를 담고 있지 않다면 올빼미는 전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눈이 없다면 창문 없는 온통 벽만의 답답한 방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 얼굴에 눈이 없고 온통 얼굴뿐이라면 창문없는 벽처럼 답답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하여 눈을 마음의 창, 마음의 거울이라 일컫곤 합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참행복 선언중 여섯째 항목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여 마음의 눈이, 심안心眼이 그처럼 중요합니다. 마음따라 보는 육안입니다. 하여 편견, 선입견이란 말도 있습니다. 눈이 욕심으로 가려져 있으면 있는 그대로, 또 넘어 바라볼 수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의 눈은 관상의 눈, 지혜의 눈입니다. 관상가, 신비가의 눈이 이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변의 모두는 하느님 향한 성사聖事의 문이 될 수 있겠지만, 이런 눈이 없으며 주변 환경이 그저 무의미하고 답답한 벽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국은 눈에 대한 묵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예수님의 두 말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며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눈이 마음의 눈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말씀을 지킬 때 열리는 마음의 눈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탐욕이 많다면 아무리 육안이 좋아도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뜬 맹인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되니, 사랑-봄-앎이 하나로 직결됩니다. 사랑할 때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뵙습니다. 바로 이런 눈을 지니신 예수님이요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리스트라에 태생 앉은뱅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바오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음을 꿰뚫어 보는 관상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체없이 “두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큰 소리로 말하자 즉각적인 치유의 기적입니다. 무지에 눈 먼 군중들은 기적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바르나바를 제우스로, 바오로를 헤르메스로 믿고, 또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제물을 바치려 합니다.
육안은 멀쩡해도 영안이 눈먼 이들입니다. 반면 영의 눈이 활짝 열린 바오로 사도의 감동적인 설교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선물로 가득한 세상이요, 어디서나 충만한 하느님 현존 체험입니다. 이렇게 살아있음 자체가 생생한 하느님 체험이 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하늘에서 비와 열매를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느님께 눈이 가려진 눈뜬 무지의 맹인들에게 삶은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한없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답은 하느님뿐인데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느님의 선물들로 가득찬 세상에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삶일 것입니다. 무지의 치유에 자발적 하느님 사랑의 찬미와 감사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늘 당신을 닮아,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살게 하시며 날로 당신과의 우정도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옵니다.”(시편115,1). 아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주님과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4. 30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요한 14,21-26 (성령을 약속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과 함께>
짓밟힌 벗을 일으켜주지 않고
제 살 길 찾아 머뭇거리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쓰러진 이의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머물러
움켜쥠에서 오는 수치심을
함께 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뿌듯함으로 바꾸어주실 테니까요.
지금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의 부끄러운 마음에 이미
주님을 모실 귀한 자리가 있으니까.
치열한 경쟁에서 벗들을 밀쳐내고
홀로 승승장구하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슬퍼하십시오.
당신의 성공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기도 드린다 해도
당신과 함께 하는 이는
소외된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기심에 젖은 당신 자신이니까요.
하느님을 향한 당신의 기도는
그저 공허한 독백이니까요.
벗으로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쉬울 것 없는 지금에 머물지 마세요.
언젠가 허물어진 모래성에
당신의 삶을 저당 잡히지 마세요.
주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하는 참 삶의 기쁨을
당신의 것으로 보듬으세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어느 한 스님이 일반 신자들이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니까 대중들에게 다가가서 그저 매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반복하여 바치라고 했답니다. 그리스 정교회도 신자들이 말씀묵상과 성체조배에 익숙하지 못하니까, 화살기도라는 형식으로 ‘주님!’ 이라고만 청하거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또는 ‘주님, 어서 오십시오.’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짧은 단어나 한 문장을 반복하면서 주 하느님께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때는 묵주기도나 쉬운 기도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가까워지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과 기도의 방법을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잘 느끼지 못하거나 그야말로 무미건조할 때를 아시고 마치 대비라도 해주시려는 듯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5-26절) 덧붙여주십니다.
자주 주님을 생각합시다. 걸을 때나 일할 때나 매순간 잘 이해되지 않고 깨닫기 힘든 주님의 말씀과 행적의 의미와 뜻을 헤아리며 주님과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서고,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어 주님을 더 깊이 더 확연하게 깨우치고 믿고 따르며 주님께 나아가도록 의탁합시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자단을 떠나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도 자녀들을 두고 먼길 떠나야 하는 부모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안타깝고, 안쓰럽고, 걱정되고, 눈에 밟히고...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대신해서 제자들을 동반하고 안내하고 가르쳐주실 또 다른 스승을 당신 대리자로 즉시 보내주셨는데, 바로 성령이십니다.
승천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 앞에서 사라지셨지만 초대교회 사도들은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매순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관계로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당당했습니다. 의기양양, 위풍당당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 지니고 있었던 인간적 미성숙도 떨쳐버렸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니 약한 믿음은 굳센 믿음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금상첨화격으로 인간적 야심이자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났으며 지극한 겸손의 덕까지 겸비했습니다.
사도행전은 확연히 변화된 사도단이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가 심한 박해를 받는 중에도 여러 지방을 두루다니며 거침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리스트라라는 지방으로 피해갔을 때, 거기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털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스스로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설교 도중 그의 존재가 바오로 사도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말씀에 몰입해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새 삶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사도행전 14장 10절)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의 그 한 마디 말에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모습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유다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소 몇 마리를 잡아서 왔으며, 커다란 화환을 들고 왔습니다. 이게 뭐냐고 묻는 사도들에게 유다인들은 말했습니다. “저희가 볼 때, 두 분은 신(神)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는 어불설성, 신성모독이라는 표시로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치유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두 사도의 깊은 신앙과 놀라운 겸손의 덕이 돋보입니다.
틈만 나면, 치유, 종말, 기적, 신비스런 현상들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스스로를 우상화시키면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사이비 지도자들이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교만한 그들에게 결핍된 점은 겸손의 덕입니다.
가끔 아주 작은 우리의 일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찬사와 박수갈채 앞에 우리가 어떤 자세,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염철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버지께 사랑받을 것이며, 그런 사람만이 당신을 진정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묻습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유다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다시 한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 말씀, 곧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데, 당신이 하신 말씀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외아들 예수님은 말씀을 지키는 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머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이 점을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에 관해 약속하십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치시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 말씀을 잘 실천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올바로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제자가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 말씀 따라 걷기
*진리의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김없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가장 좋은 기억은
주님 말씀이기에
예수님 말씀에
머물게합니다.
머무르는 기쁨이
바로 말씀의 시간이며
말씀을 붙잡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 말씀으로
불안한 삶의 중심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삶의 중심이
예수님의 사랑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십니다.
사랑의 일치된
관계를 맺게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말씀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을
채워주시는 분또한
성령님이십니다.
말씀이 계신 곳에
성령님또한 계십니다.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가
말씀의 자리이길
기도드립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말씀으로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성령께서는
알고 있는 것을
지키고 실천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해주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이
참된 사랑이며
참된 용서임을
기억합니다.
책장에서 2014년 8월에 한국을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화보집을 발견했습니다. 이 화보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 당시에 가졌던 감동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 화보집에는 교황님의 강론과 연설문 등이 담겨 있었는데, 이 글들을 읽으면서 자주 이런 글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사실 교황님이라고 하면 왠지 거룩하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또한 죄 많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기도만 해주실 분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한 분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자주 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황님 역시 기도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분이라고 해도 이 분 역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어떨까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이 기도는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바치는 기도는 관심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자주 명하셨지요. 그리고 이렇게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얼마나 지키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향한 사랑만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에 반해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때로는 내 자신에게는 손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달라졌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세리와 창녀들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했던 성인성녀들 역시 달라졌습니다. 사랑을 줌으로 인해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바로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분명 가장 큰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리더만 있을 뿐이다(김성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에게 ‘말탐’을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전에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기억이 나는 말씀입니다. 어머니의 말, 선생님의 말, 어른의 말을 잘 따르라는 뜻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먼저하고, 예습과 복습을 하는 일입니다. 형제간에는 사이좋게 지내고, 주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당에 가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꼭 바치고, 기일이 되면 함께 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집에 오시면 꼭 큰 절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시간이 나면 책을 읽으라는 말입니다. 돌아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는 ‘말탐’을 하는 것이 꼭 손해를 보는 것도 같았고, 쩨쩨한 것도 같았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형제들을 보면 역시 ‘말탐’을 잘 하는 것이 삶에도, 신앙에도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지시한 일을 겨우 하는 사람, 지시한 일을 성심껏 하는 사람, 지시한 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과 일을 하고 싶어집니다. 시간이 흘러서 함께 일했던 분들의 자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지시한 일을 겨우 하는 사람은 늘 그 자리이고, 눈에도 힘이 없는 것을 봅니다. 성심껏 했던 사람은 새로운 자리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봅니다. 지시한 일은 물론이고 더 많은 성과를 내던 사람은 이제 지시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을 봅니다. 역시 ‘말탐’을 잘 하는 것이 사회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머리로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지만, 가슴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과 공기는 우리가 너무 쉽게 접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물과 공기처럼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은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자주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 탐욕과 교만’은 우리의 가슴에서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탐’을 아주 잘 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합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그리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고,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전如前한 삶 -영원한 현역現役, 영원한 학생學生-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여전한 삶, 한결같은 삶이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얼마전 피정자들에게 강의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제가 요셉 수도원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오랜만에 방문하는 분들에게 이구동성 듣는 기분 좋은 말은 “여전하시네요!”라는 말입니다. 10년전이나 20년 전이나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라는 찬사입니다. 강의 중 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원인을 깨달았습니다.
“아, 저절로 여전한 삶이 아닙니다. 여전하기위해 참으로 매일매일 노력합니다. 제 좌우명대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무너지지 않기위해, 망가지지 않기위해, 말그대로 살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영국 보수주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나무가 늘 푸른 이유는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잎을 끊임없이 바꾸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끊임없이 변해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여러 예까지 들었는데 모두 공감하는 분위기였고 개신교에 다니는 한 자매는 카톡으로 그 소감을 보내줬습니다.
“신부님, 강론 넘 감사드립니다.
전 개신교 신자여서 성체 못 모셔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피정은 다시 가고 싶습니다.
주님과 더 깊은 관계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여전하시기위해 물밑에서 오리발헤엄 열심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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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현장에서 70에 죽어 70에 묻히도록 여전히 살아가겠습니다.”
강의는 주로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관계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라는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 나이까지는 치열한 삶을 살다가 현장에서 물러나면 대부분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을 믿는 이라면 ‘나이 70에 죽어 70에 묻혀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은퇴가 없는 주님의 ’영원한 현역’이요, 졸업이 없는 주님의 '영원한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말그대로 죽어야 제대요, 죽어야 졸업인 ’주님 사랑의 전사戰士’이자 ‘주님 말씀의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또 오늘의 ‘스승의 날’을 앞두고 38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 셋이 선물을 들고 찾아와 스승의 노래도 힘차게 불러줬습니다.
50대 초반의 중년들이 초등학생처럼 서서 힘차게 노래 부르는 순수한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사셔야 한다는 말에 더욱 여전한 삶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영원한 현역이자 영원한 학생으로서 여전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여전히 푸르른 삶을 살게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
주님 사랑 체험은 비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실천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이들과 주님은 함께 사시고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바로 주님 말씀을 지켜가면서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됩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이 새롭고 좋은 여전한 삶을 살게 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주님과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 결정적 도움을 주시는 분이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다.”(요한14,26).
바로 성령께서 우리의 스승이 되시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란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의 복음 선포의 열정이 놀랍습니다.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가 열정과 순수의 원천이요 여전한 삶의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두사도의 기적적 치유에 신들로 착각하여 자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려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옷을 찢으면 외치는 두 사도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14,15).
성령의 도움으로 세상의 헛된 것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주님께 돌아와 말씀을 실천할 때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깊게 하시며 세상 헛된 것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시편115,1ㄱㄴ참조).
아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
보호자이신 성령 안의 삶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아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단지 바라만 보았던 진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것이다. 오직 의인들만 “수려한 모습의 임금”(이사 33,17)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유다가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22절) 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한쪽은 당신을 사랑하고 다른 한쪽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자녀들과 세상을 구별하는 것은 한마음이 된 이들을 한 집에 살게 하는 사랑이다. 이 집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사시며,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사랑을 주신다. 이 사랑은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이 실행될 때는 자기의 뜻을 죽이고 그분의 계명을 따를 때이다. 자기의 뜻을 따를 때는 그분의 뜻을 거스르게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과 지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나와 아버지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 안에서 모든 악습과 욕정을 태워 버리시고 그들을 당신의 깨끗하고 합당한 성전이 되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의 마음 속에 오시어 그 안에 사신다. 이 말씀은 그분이 당신 친구라고 부르신 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시며,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이다.”(24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하신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드님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외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그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그것들은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는 위에서 오는 빛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의 권위를 따르게 되었다. 즉,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이 말씀은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은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지혜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과 함께 온전히 깨닫게 되며 아들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삶을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는 삶이 되도록 은총을 청하며 기도하자.
♣ 슬픈 기쁨의 시절에 찾는 행복의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 우리는 슬픈 기쁨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이 참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희망의 빛을 보며 흐뭇해 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대지의 기운과 공기마저 신선하게 다가온다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이 기쁨은 슬픈 기쁨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우리에게 신선함을 주고 감동을 주는 움직임들은, 사실 지극히 상식적이며 정상적인 것들이 아닙니까? 당연한 것들 앞에서 기쁨을 느끼고 경탄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어찌 보면 슬픈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또 금새 요동치기 시작하는 악의 무리들의 움직임을 보면, 참으로 기뻐하기에는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좋은 뜻이 담긴 작은 변화의 시작만으로도 이렇게 큰 기쁨과 희망을 주지 않습니까? 이런 현실은 너무도 당연한 진실과 공평과 정의, 인간존엄의 가치가 얼마나 철저히 왜곡되고 실종되어왔는지를 반증해줍니다. 우리는 헬조선, N포세대, 흙수저와 금수저, 출구 없는 절망의 빈곤,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의 일상화, 권력과 자본의 횡포, 부정부패 등과 같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몸부림쳐왔고, 여전히 그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슬픈 기쁨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14,21.23)
우리 삶의 목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생명이고 참 행복이지요. 그러나 이런 행복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요 거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을 바란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지키는 투신과 헌신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어 서로 발을 씻겨주고,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겠지요. 그분의 말씀과 행적 전체를 받아들여 실제로 살아낼 때에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수난과 부활의 길입니다. 그 길은 정의의 실현과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맺는 평화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본받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실현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와 거짓, 무관심과 차별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물론 어떤 경우에도 존엄한 인간 생명이 짓밟히지 않도록 반드시 진실을 규명해야겠지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을 도구화하고 상품화하려는 비정규직과 시간제 노동을 철폐함으로써, 인간다운 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10%의 소수가 45%의 이익을 독차지하는 탐욕의 뿌리를 없앰으로써 하느님의 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희망을 호흡할 수 있도록, 상식이 통하고 정의롭고 공평한 질서를 실현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도록 온 힘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슬픈 기쁨'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어둠의 터널을 완전히 통과하여 사랑과 정의가 일상화 하는 '참 기쁨"의 날이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최원석 님
요즘에 대통령이 당선 되신분이 각료 및 비서진들을 임명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공하려면 국민과 하나되는 사람이어야지 자신이 혼자 결정하고 소통하지 않고 나는 왕이야 혹은 나는 대통령이 지명하였으니 나의 권한을 맘데로 행사 할수 있어 하면 그러면 그 정부는 끝이나 마찬가지이지요 .. 권리를 받았지만 그것은 국민으로 부터 위임을 받은것이지 자신이 혼자 독단적으로 사용하라고 준것은 아니지요 ..소통의 리더쉽 그리고 섬김의 리더쉽 이것이 있어야지 진정으로 성공할수 있습니다.. 소통과 섬김을 이야기 하다보니 주님이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나의 말을 들러아 나의 말을 들으면 나와 아버지가 같이 가서 라는 표현을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주님이 같이라는 표현을 우리라고 하십니다.. 항상 주님은 하느님을 섬기셨고 그리고 같이 가서 그사람안에 머문다는 말씀이 .. 같이 공유한다.. 머문다 .. 공유한다 이렇게 들립니다. 하느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가서 공유하고 같이 기쁨을 나눈다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지배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섬기고 나눈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를 위하여서 아버지와 내가 같이 가서 그와 함께 사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이 인간과 하느님의 가교 혹은 기쁨을 공유하시는 분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나를 내세우지 않으시지요 항상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의 기쁨과 하느님의 기쁨을 나누려 하시는 분이시지요.. 주님의 개방성과 선한 모습을 우리가 보고 맛들이고 우리도 그와 같은 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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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그분의 향기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 향기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스며 나오는 향기입니다.
결국, 타인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어떤 향기도 맡을 수 없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과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타인에게 그리스도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향기로운 모범적 삶을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외침에 앞서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세상이 더욱 거칠어지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향기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향기를 어떻게 낼까 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고,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스며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타인이 그리스도를 느끼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참 의미를 타인이 느낄 수 있게 하십시오.
그것이 잘 안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어떤 무게를 가지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자기 반성과 더불어 좀 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나는 우리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지 않나? 따라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떠올린다면, 어쩌면 기도가 필요 없다고도 말할 수 있어.”
이 말에 그의 친구는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아니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해돋이를 볼 수 없듯이, 하느님이 늘 우리 곁에 있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기도해야 하네.”
기도하는 사람은 늘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안에 평화를 얻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으며,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앞선 사람의 말처럼, 사랑의 하느님만을 강조하면서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구원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디언들의 기도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비가 오지 않아 가물 때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로 반드시 비가 온다고 굳게 믿지요. 그리고 실제로 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현존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할 수 있으며, 그 희망으로 현재를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란 이렇게 하느님을 느끼고 깨닫게 해 줍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느끼고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로 함께 하면서, 생활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당신의 큰 사랑으로 함께 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작은 정성만으로도 큰 효과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작은 노력을 통해서 큰 효과를 얻는다면 이 사회에서는 매우 현명한 행동이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공평하십니다. 우리들의 잔재주만을 내세워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떤 효과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그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할 때, 그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모든 훌륭한 사람이 좋은 생각, 좋은 아이디어, 좋은 의도를 갖는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극소수다(존 행콕).
부를 축적하는 법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학생 1,50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돈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사람과 자기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두 부류를 나누었지요. 이 두 부류는 그 숫자가 명백하게 나뉘었습니다. 우선 돈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사람은 1,500명 중에서 자그마치 83%나 되었고, 반대로 가치 있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사람은 17%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앞으로 20년 뒤에 어떻게 되었을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20년 뒤에, 이 1,500명의 학생 중에서 101명의 백만장자가 나왔답니다. 그런데 100명이 가치 있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그룹에서 나왔으며, 돈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그룹 중에서는 단 한 명만 나온 것입니다.
이 실험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주안점을 둘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면 물질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을 이 대학의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까요.
물질에 주안점을 두는 삶, 가치 있는 삶에 주안점을 두는 삶. 어느 그룹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어른이므로,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계급이 상사 분이므로 순종 명령 지시대로 받아들입니다.
부모님 스승님이라는 연결이 되어 있기에 말을 그대로 들어 따릅니다.
이런 상하관계 외에는 평등관계이거나 조직관계며 이해관계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로울지 해로울지를 따지며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남의 말을 들을 땐 무슨 조건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랑이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그냥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 복음을 전할 때 공허하게 느껴진다면 >
전삼용 요셉 신부
제가 지난 사순절 때 결심했던 것은 사순특강 요청을 거절하지 말고 다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무 번 정도의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반응이야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은 칭찬과 감사를 받았습니다. 아프라카 선교를 위해 기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책도 함께 팔았습니다.
그러나 특강이 다 끝난 마지막 순간에 느낀 것은 ‘공허함’이었습니다. 나름 고생하며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느꼈는데,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엄습해왔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묵상해보니 저는 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강의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린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 또한 보상을 받고 싶어 했었던 것입니다. 칭찬과 감사를 많이 받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당연히 그것을 받아야만 한다고 믿게 됩니다.
사실 아무리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광 또한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오롯이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앉은뱅이를 고쳐주어 사람들이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 할 때 매우 슬퍼합니다. 그리고 설득하고 설득하여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은총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기 때문에 영광도 받을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 주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그 기대에 합당하지 못하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주님께 해당하는 주님의 몫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전하면서 받는 영광이 있다면 그 또한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사람들에게로 가야하고 또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은 주님께 올려 드려야하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 안에 머물게 되면 그것이 독이 됩니다. 선악과가 주님께 해당하는 것처럼 영광도 주님께로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때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받아야 했던 상처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걸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우리 또한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겠습니다. 마음을 채워주시는 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영광을 올릴 줄 아는 이들에게만 성령을 베푸시어 그 마음을 기쁨과 평화로 채워주십니다. 주님을 전하건 또 무언가를 베풀어주건 사람에게서 절대 보답을 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면 공허하지만,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면 주님은 당신 영광이신 성령님으로 채워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물을 좋아해서 ‘스쿠버 다이빙’을 배웠습니다. 물속에서 중성부력을 유지하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중성부력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공기를 너무 넣으면 쉽게 물위로 올라가버립니다. 반대로 공기를 너무 많이 빼버리면 바다 속 깊이 빠질 수 있습니다. 물속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중성부력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물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남은 공기의 양을 점검해야 합니다. 긴급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늘 짝과 함께 다녀야 합니다. 연습을 많이 하고, 원칙과 규칙을 정확하게 지킬 수 있다면 누구나 아름다운 바다 세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지만, 예전에는 줄을 서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새치기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힘이 센 사람이 먼저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어릴 때 저는 학교 가는 버스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줄을 서지 않고 버스가 오면 모두들 작은 입구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체구가 작고 힘이 없었던 저는 버스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걸어서 학교를 간 적도 있습니다. 어렵게 버스를 타서도 내릴 때가 힘든 적도 있었습니다. 버스 안에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을 뚫고서 출입구에 나오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지켜야 할 원칙과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원칙과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힘이 있는 사람,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만이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규칙과 원칙을 어기게 되면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되고, 사람들은 정의와 양심의 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규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들어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 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 듣는다’ 했을 때 그것은 귀로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먼저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수다를 떨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 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 결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가 항상 먼저이기를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표징들입니다.”
사랑한다면서 행하는 행동들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스타일에 맞추거나 소유하려는 욕망들에 의한 상처입니다. 가끔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받는 쪽에서 부담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떠나보낼 수 있는 내적 자유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공존해야 합니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삶은 극복이 아닌 통과다 -파스카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극복이 아니라 통과의 과정입니다.
파스카 신비의 핵심도 통과에 있습니다.
죽음을 통과해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부단히 죽음을 통과해 부활의 파스카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를 참아 기다리게 하고, 마음의 상처를 최소화하고, 자유롭게 하고, 초연하게 합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지나갑니다.
우리 역시 이런저런 과정을 통과해 갑니다.
극복이라 생각할 때는 힘들지만 통과의 과정이라 생각할 때는 훨씬 마음이 가볍습니다.
지금 여기까지 우리는 무수한 과정을 통과해 왔고 또 앞으로도 통과해 하느님 아버지께 갈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이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흘러간 시절은 되돌아 갈수도, 되돌릴 수도 없고 과거의 추억속에 계속 머물수도 없습니다.
머물러야 할 곳은 지금 여기 '주님 안'뿐입니다.
삶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통과의 과정입니다.
겨울인가 했더니 겨울을 통과해 봄이요, 봄인가 했더니 봄을 통과해 초여름입니다.
눈부시게 변화해가는 세월의 흐름만 봐도 삶은 통과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그러니 지금 주님께서 나를 통해 행하시는 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고백성사 때 보속의 말씀 처방전으로 많이 써드리는 구절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오늘 여기에서의 통과 과정에 충실하게 하는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킵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킬 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아,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 현재의 순간을 잘 통과해 갈 수 있습니다.
성공적 파스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통과 과정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오늘 복음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두 사도는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태생 불구자를 치유하였고, 이어 자신들을 신으로 착각해 제물을 바치려는 군중들을 설교를 통해 하느님께 방향을 잡아 줍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사도의 설교가 감동적입니다.
두 사도를 통해 활동하시는 분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 역시 부단히 세상의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통과 여정의 삶을 살아갑니다.
두 사도와 함께 하시어 성공적 통과 여정의 삶을 살게 하신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통과전례인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하루도 잘 통과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사도 14,15)
-오상선 신부님-
많은 사람들은 성직자, 수도자들을 존경합니다.
때론 그 존경심이 과하여 마치 성자처럼, 신의 대리자처럼 떠받들 때도 있지요?
오늘날엔 언론매체들이 스타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성직자들도 그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소위 유명인사가 되고 교주처럼 행세하기도 합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신으로 떠받드는 존경을 받습니다.
교주가 되고도 남을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옷을 찢고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강변합니다.
칭찬 앞에 참으로 겸허할 줄 알아야 복음은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 내가 행여라도 받게 될 존경이나 공처사가 있으면 정말 나는 보잘 것 없는 죄인일 따름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남들로부터 과도한 칭찬을 받으면 흐뭇해 하고 반대로 칭찬받지 못하면 실망하며 스스로 자기 칭찬을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올바른 복음선포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성령 안에서 정체성을 사는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의 시대는 다문화, 다종교, 융복합, 정보화에 따른 다중접속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 환경의 변화 때문만은 아닐 터이지만 신앙인들마저도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 곧 고유한 색깔을 찾고 보존하며 그에 따라 소신껏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신앙을 여러 선택사항 중의 하나이거나 필요시 이용하는 피난처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시대와 역사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는 15절에서 언급했던 말씀을 되풀이함으로써 보다 심오한 이해의 차원에로 들어간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께서 몸소 보여준 모범(발 씻어줌)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참여했던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또한 예수님도 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14,21)
예수님의 계시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소유를 추구하는 세상과는 부합되지 않는다(14,22 참조). 예수님의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통교, 특히 하느님의 참모습이 나타나 보이는 한없는 사랑의 통교이다. 예수님을 알아 뵙고 하느님과 일치하려면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길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논리적 지식을 넘어선 신앙이 필요하다. 이 신앙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말씀 안에서 받아들이는 실존적인 개방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14,23)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적인 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함’ 이 세 가지가 궁극적인 삶의 힘이요 방향이며 목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힘과 기준에 따라 살아가고, 온갖 불의와 고통과 시련에 도전할 수 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과 깊이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관건은 그분의 말씀의 수용과 말씀에 따른 사랑의 실행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 의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면서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자유와 사랑의 공간을 열어준다(14,24 참조). 세상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인 신자 공동체는 예수님 안에서 신앙의 중심과 핵심을 발견한다. 사실 신앙은 한 개인까지도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로 만든다.
성령은 특정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가 공유하도록 교회에 오신 분이다. 성령으로부터 받은 다양한 직분과 은사는 공동선을 위해 나누어야 한다. 성령의 현존은 또한 공동체를 세상과 구별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확인해 준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이들을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신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가르치는 교사이며,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14,26 참조).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머물며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헌신적으로 실행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영의 사람이 되고 영이 아니고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음을 명심하자. 보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으며, 관념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사랑을 실행하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과 말씀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이란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말씀은 생명과
빛으로 드러나며
삶의 본질이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되돌려놓으며
회개와 정화로
참된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말씀을 지키고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의 참된 본질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의미있는
사랑으로 엮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풍요롭게 하는 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사랑에 있습니다.
말씀의 원천은
사랑이고
사랑의 원천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됨'으로
이끌어 갑니다.
말씀을 지키는 이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기에 결코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이웃들을 향한
존중과 연민으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는
말씀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께
내어맡기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에
내어맡길 것이며
서로를 살리기 위해
내려놓을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10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겨울에 운전을 하다가 빙판에서 제 차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빙글 돌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도로 옆에 있는 어느 집 담벼락에 차를 처박고 말았지요. 제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사고였고 정말로 뜻밖의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로 주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리막길이어서 어느 정도의 속도가 붙어있을 때였고, 차가 돌기 시작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제가 했던 행동은 눈을 꾹 감고 핸들을 꽉 잡고 있는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운전을 하면서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안 된다고 말을 하더군요. 특히 사고가 나려할 때에, 즉 저의 경우처럼 차가 조정이 안 될 때에는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신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는데도 다행히 몸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커다란 주님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고가 나려할 때에 절대로 눈을 부릅뜨고 내가 가야 할 곳에 고정시켜야 한다는 말이 어쩌면 우리의 삶에도 똑같은 규칙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내 뜻대로 잘 안 될 때 눈을 감아버리거나 다른 곳을 바라볼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 때 역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가 가야 할 곳만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어 떤 일이 잘 안 된다고 또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눈을 감아버리고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까? 큰돈을 잃었다고 뒤돌아보며 후회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또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대해서도 예전 일만 떠올리며 슬퍼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이들과의 갈등으로 내 마음의 눈을 감아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이렇게 후회하면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포기하면서 두 눈을 꾹 감아서도 안 됩니다. 대신 내 마음의 눈을 내가 원하는 곳에 철저하게 고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을 향해 내 마음의 눈이 고정되어 있을 때, 우리들은 어떤 실망이나 좌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참 기쁨과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당신의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일만을 바라보는데 모든 힘을 다 쏟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상일을 뒤돌아보면서 후회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마음의 눈을 감아버려서도 안 됩니다. 대신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의 눈을 그분께로만 향할 때,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당신이 오늘 베푼 선행은 내일이면 사람들에게 잊힐 것이다. 그래도 선행을 베풀어라(마더 테레사).
주님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언젠가 원로신부님과 함께 대형 마트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고르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나, 이런 곳 처음이다.”
‘어떻게 이런 마트에 한 번도 오신 적이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께서 젊었을 때에는 이러한 대형 마트가 없었을 것이고, 연세가 드신 뒤에는 주방을 담당하시는 식복사가 알아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주셨을 테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신부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구입하시지를 못하십니다. 제가 “신부님, 필요한 것 없으세요?”라고 물어도, 쇼핑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 어떤 것도 선택하시지 못하더군요.
물건도 사 본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긴 저 역시 비슷한 체험이 있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저 혼자서 옷을 사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와 함께 가서 주로 추천을 받은 옷을 구입하곤 했지요. 그런데 급하게 바지가 필요해서 옷가게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옷을 사야하는지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결국 직원이 추천해 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바지를 급하게 하나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물건도 사 본 사람이나 살 수 있는 것, 당연하지요. 그렇다면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냥 갑자기 주님께 다가갈 수 있을까요? 갑자기 주님이 느껴지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그러한 주님을 알고자 하는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야 비로소 주님을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 본 사람이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 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 내 마음의 그릇의 크기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큰 스님이 젊은 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스님은 모든 일에 항상 불만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늘 투덜거렸습니다.
어느 날 아침, 큰 스님은 제자를 불러 소금을 한줌 가져오라 하고 소금을 물 컵에 털어 넣게 하더니 그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그 물을 마셨습니다.
큰 스님이 물었습니다.
“맛이 어떠냐?”
젊은 스님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짜죠.”
큰스님은 다시 소금 한줌을 가져오라 하시더니 근처 호숫가로 제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소금을 쥔 제자의 손을 호숫물에 넣고 휘휘 저었습니다. 잠시 뒤 큰 스님은 호수의 물을 한 컵 떠서 제자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맛이 어떠냐?”
“시원 합니다.”
“소금 맛이 느껴지느냐?”
“아니요....”
그러자 큰 스님이 말했습니다.
“인생의 고통은 순수한 소금과 같다. 소금이 짠 것처럼 누구나가 다 그러한 수준의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짠맛의 정도가 그것을 담는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듯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도 그 사람의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소금이 짠 것을 탓하지 말거라. 내 자신의 그릇이 작은 것을 탓해야 한다. 스스로 넓은 호수가 되어라.”
잉크를 한 방울씩 바다에 떨어뜨려 보십시오. 수천 방울을 떨어뜨리면 바다가 잉크 색으로 바뀔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그릇에 담긴 물에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그 색은 변하게 됩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이는 잘 받아넘기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것 때문에 비관하여 삶을 망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잉크방울이 자신을 그렇게 망쳐노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망친 것은 자신의 마음의 크기를 넓히려고 노력하지 않은 자신의 탓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 은총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갈까요? 물론 성체는 사람에 상관없이 똑같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쥐가 물어갔다고 해서 그것이 성체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쥐는 그 은총을 전혀 받지 못하겠지만 그 성체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이 그 은총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크기가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겠다고 합니다.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방법은 바로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인데, 성령님이 곧 사랑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근거는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냐에 있는 것인데, 그것에 따라서 당신도 ‘그만큼’ 사랑을 주시고 또한 ‘그만큼’ 당신을 알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해주는 만큼 당신도 사랑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같은 성체를 받아 모셔도, 같은 강론을 들어도 그 효과가 똑같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밭에 같은 씨가 뿌려져도 그 땅에 따라서 수확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님의 ‘아멘!’은 전적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완전히 한 몸이 되셨습니다. 온 우주보다도 크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셔야 했다면 그 마음이 온 우주보다도 컸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충만하게 주시는 은총을 대부분 그냥 흘려버릴 수가 있습니다. 누구 하나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며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식과 행복의 열매를 충만히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한 은총의 선물을 주시는 분께 얼마나 죄송한 일입니까? 성체를 많이 영하거나 특강을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만큼 예수님의 뜻을 따라줄 수 있는가 하는 나의 의지의 정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제의 말에 ‘아멘!’ 할 때마다 다만 하나라도 더 그분의 뜻대로 나를 변화시켜가겠다는 굳은 마음을 주님께 봉헌 드려야겠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알기 어려운 게 우리 인간입니다.
신비 아닌 것이 없지만 인간은 신비입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1독서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신들처럼 대하는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쳤던 이 말마디를 읽는 순간,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 같으면서도 똑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으로 부활 선포의 복음의 일꾼이 된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이들 우상을 섬기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나 이방 민족의 사람들과 같겠습니까?
수심가측(水深可測), 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있으나, 인심난측(人心難測),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릅니다.
하여 함께 사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신비는 하느님만이 해결의 답을 줍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리 물어도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나를 믿을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하여 우리 인생은 선물이자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고귀한 인간 존재이지만 미완의 과제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하느님을 닮아 가는 평생과제를 부여 받은 우리들입니다.
참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직업을 봐도 얼마나 많은지 끝이 없습니다.
타고난 재능들도 끝이 없습니다.
다양함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도 사람입니다.
인면수심이란 말도 있듯이 밖으로야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지만 천사표 같은 사람도 있고 야수 같은 사람도, 괴물 같은 사람도, 악마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래서 불신과 불통이요 소통의 어려움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교회의 주님을 닮은 무수한 성인들을 대하면 마음이 놓이고 격려와 위로가 됩니다.
아, 나도 이렇게 성인처럼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도 갖게 됩니다.
사람이 되는 길은 단 하나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길뿐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우리들이 수도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을 찾는다'는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기 때문이요, 바로 이게 성소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라 복음을 전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열정의 사도,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리스트라에서 앉은뱅이의 치유가 참 통쾌합니다.
그를 유심히 바라 본 바오로는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자 즉시 치유를 선언합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말씀 같습니다.
좌절과 절망, 숙명론의 정신적 앉은뱅이 땅의 삶에서 벌떡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예전의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바오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부활하여 참 나를 찾은 앉은뱅이입니다.
이에 놀란 제우스 신전의 사제가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 하자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격렬한 반응이 그대로 복음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길 하나뿐입니다.
하느님께 돌아 와 회개로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볼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우리를 양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시는 주님을 체험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돌아와야 비로소 세상 헛된 환상에서 해방되어 삶의 실재를, 삶의 진실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몰라, 하느님을 떠나, 세상 헛된 것들에 집착하여 헛되이 인생 낭비하며 헛개비 되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제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해도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사랑과 지혜, 겸손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런 참 사람이 되는 비결을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친절히 가르쳐 주십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사람이 되는 길은, 답은 주님과 일치의 사랑 하나 뿐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할 때 저절로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이며, 그 때 주님과 아버지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비단 계명뿐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동전례기도에 충실할 때 우리는 그 기도 안에서 살아 계신 사랑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닮아 참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모심으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옵니다."(시편115,1ㄱㄴㄷ).
아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그분의 향기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 향기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스며 나오는 향기입니다.
결국, 타인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어떤 향기도 맡을 수 없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과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타인에게 그리스도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향기로운 모범적 삶을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외침에 앞서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세상이 더욱 거칠어지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향기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향기를 어떻게 낼까 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고,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스며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타인이 그리스도를 느끼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참 의미를 타인이 느낄 수 있게 하십시오.
그것이 잘 안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어떤 무게를 가지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자기 반성과 더불어 좀 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베어나는 우리이기를 희망합니다.
보호자 성령님
-윤종국 신부님-
저는 예비 신자 교리를 할 때 그들의 신상명세서를 미리 살펴보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세속적인 조건을 미리 알면 편견이 생길까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후에 예비 신자반의 구성을 살펴보면, 교수님도 계시고, 고위 공무원이나, 외교관, 변호사, 의사 등 높은 지위에 계신 분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교리를 처음 시작할 때 보면 분명히 우리말로 하고 있는데도 학력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눈빛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성사를 받고 나면 그때 온전히 눈이 뜨이는 것을 봅니다. 세례 때 성령께서 오시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 기억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견진성사를 받고 어느 순간 성경에 흥미를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예비 신학생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신학교를 다니고 사제서품을 받고 지금껏 사제로 살고 있으니 제 안에 계신 성령께서 견진성사를 통해 모든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세례성사 때 우리 안에 오신 보호자 성령께서는 우리가 큰 죄와 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우리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어느 때 불현듯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도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 조그만 틈새로 당신의 빛을 비춰주시기 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식사시간에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배님들이 드시는 음식이었지요. 글쎄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넣어서 비벼 먹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유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처럼 아주 신기하기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저것을 먹지?’라는 말과 함께 절대로 못 먹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오히려 제가 즐겨 먹는 음식이 되더군요.
이와 비슷한 체험을 군대에서도 했지요. 자대 배치를 받고서 선임 병들의 라면 먹는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글쎄 라면을 끓여먹는 것이 아니라 불려서 먹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 자신이 생각하기에 라면은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버너와 같은 화기를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라면 봉지에 뜨거운 물을 넣어서 라면을 불려 먹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봉지라면’입니다. 우동 면발처럼 퉁퉁 분 것을 어떻게 먹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없어서 못 먹더군요.
살면서 ‘아니다’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니다’ 싶은 것들이 더 괜찮은 경우도 있더군요. 그러므로 무엇이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쉽게 단죄해서도 안 됩니다. 대신 ‘그럴 수도 있어.’라는 마음. 특히 여기에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더해진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다투고 싸우는 세상이 아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세상이 분명히 될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가 이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말만 할 뿐, 가장 실천하지 않는 단어가 또 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비싼 학원에 보내거나 비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 주면 잘 크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녀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자녀들은 문제아가 되어 나중에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중요한 것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주님의 진정한 언어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을 다시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리고 지금 당장 행해야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싫증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행복에 너무 익숙해졌을 뿐이에요. 코감기에 걸려 봐야 코로 숨 쉬는 일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깨닫는 것처럼(애거사 크리스티).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떤 선배 신부님께서 오랫동안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십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이런 말씀을 해주시네요.
“그런데 너의 글에는 고민이 없는 것 같아.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 같아서 좀 아쉽구나.”
이 말에 다른 신부님께서도 “맞아. 글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 깊이가 부족해.”라는 말도 해주십니다. 모두가 더 글을 잘 쓰라고 해주시는 말이겠지요. 물론 제 스스로도 저의 글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칭찬이 아닌, 이러한 비판의 말에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더군요.
겉으로는 비판을 많이 해달라고, 그래야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는 칭찬받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더군요. 즉, 비판받고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자신이 듣고 싶은 칭찬과 긍정적인 말을 나의 이웃에게도 해주었으면 합니다. 사실 잘 생각해보니 그런 말에 대해서는 인색했고, 대신 비판과 부정적인 말만 쉽고 편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입에 발린 말도 때로는 필요한데 말이지요.
오늘은 이런 말을 해 보면 어떨까요?
“멋져요. 예뻐요. 아름다워요. 당신과 함께 있어 기뻐요.” 등등의 상대방이 좋아하는 말을....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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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구체적인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지킨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보통 오감에 의존한다.
그러니 우리의 오감으로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맡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그분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해도 관념적이거나, 막연한 느낌, 혹은 뜬구름 잡는 듯한 피상적인 느낌이기 쉽다.
만약 우리의 삶이 그분께서 일러주신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인 혹은 막연한 느낌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분을 느끼고 사랑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을까?
오감이 아니라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도 자신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음으로 바라보고 들어야 한다.
그분의 눈빛을 읽어야 하며, 그분의 뜨거운 가슴을 느껴야 한다.
그분의 삶을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소망도 마음으로 보여드려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마음으로 느끼려 할 때, 그 다음은 성령께서 알아서 도와주신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느낌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한 번의 십자가를 긋더라도 마음으로 그어야 한다.
< 비밀은 선물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간에 화제가 됐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2010년 아내 엘린 노르데그렌과 이혼할 당시 우즈의 외도에 의한 이혼으로 이혼합의금으로 5억 달러(5200억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준 이유는 외도와 불륜에 대한 책임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외도에 대해 침묵해준다는 대가라고 합니다. 노르데그렌은 이 돈을 받는 대가로 우즈와 관계된 외도에 대해 어떤 인터뷰는 물론 책도 쓸 수 없고, TV 출연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죤 드리아든은 “하인에게 비밀을 얘기하는 사람은 그 하인을 자기의 상전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비밀을 잡아 그것으로 상대의 재물을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비밀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아무에게나 말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다도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예 수님은 당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진리의 성령님을 통해서인데 그것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곧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관계를 가져가면서 그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로의 비밀을 나누게 됩니다. 그만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는 증거이고 믿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가장 소중한 비밀을 말해버리는 사람은 조심해야합니다. 애정결핍이거나 그 비밀을 이용해 애정을 얻으려는 속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 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상대의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됩니다. 그만큼 깊은 관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누구에게나 드러내 보이시지 않고 당신 계명을 지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당신 비밀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믿고 말한 것은 다른 이에게 발설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시는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둘의 관계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아 그 비밀을 지켜줄 수 없는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이비나 이단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신흥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한 번 이상은 기성종교를 거친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기성종교에서 그릇이 합당하지도 않은데 많은 진리들을 가르쳐주어서 그것을 이용해 이단을 만들게 만든 책임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왠지 믿음이 가서 자신의 속내를 다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앞에서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선물은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믿을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지켜보시다가 믿을만한 사람에게만 당신 소중한 비밀을 선물하십니다.
사랑을 사랑 않는 가여운 영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너무 지당한 말씀이기에 그 뜻을 새기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한 번 새겨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유심히 보니 받는다는 말에 뜻을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 사랑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계명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오해치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신대로 하느님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니 사랑을 가려서 주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주시는 분의 문제가 아니라 받는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준다고 다 받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우리가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부탁을 받아도 그 부탁을 우리가 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부탁을 하면 거절할 것이고 싫어하는 것을 부탁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계명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 아니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의 계명을 받아들일 겁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사랑은 아무리 준다 해도 우리는 싫어하고, 그러기에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받아들이지 아니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사랑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라면 모든 사랑을 다 사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사랑치 않는 사람이 있고, 사랑을 사랑한다 해도 원치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저희 프란치스칸 성가 중에 “사랑을 사랑 않는 인생을 성부께 전구하소서.”하고 프란치스코에게 기도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정말 사랑을 사랑치 않는 영혼,
특히 인간의 사랑은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사랑치 않는 영혼,
이런 영혼이 있다면 참으로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치 않아서 가엽기도 하지만 주시는 사랑을 받지 않아서 가여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가엽다고 하기 전에 내가 그 가여운 신세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면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0.35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타자가 투수의 공을 보고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시간은 약 0.25초랍니다. 그렇다면 투수의 공을 보고서 스트라잌 또는 볼을 구별할 수 있는 시간은 몇 초일까요? 그렇습니다. 타자는 약 0.1초 사이에 방망이를 휘둘러야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0.1초의 판단을 제대로 하는 타자는 우수한 타자라 평가받을 것이며, 그에 반해 0.1초의 판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선수는 후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빠른 판단으로 승패가 갈려지는 경우를 보면서, 우리의 판단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그리고 얼마나 빠른 판단을 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책에서 본 경영학자인 짐 콜린스 박사의 말이 기억납니다.
“유능한 경영자는 결정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코 뒤로 미루지 않는다. 10개의 실패 가운데 8개는 판단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제때 결정을 못 내렸기 때문이다.”
과도한 조심, 즉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 역시 이러한 판단과 선택이 필요합니다. 바로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곧바로 선택할 수 있는 빠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제때에 하기 보다는 뒤로 미룰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를 신중하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니면 게으르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보다는 나중에 시간이 충분히 있다는 잘못된 판단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중에’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합니다.
‘나중에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나중에 봉사할께요.’, ‘나중에 자선활동 해야지요.’, ‘나중에 기도생활도 철저히 해야지요.’ 등등....
이렇게 계속해서 ‘나중에’를 외치면, 먼훗날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나중에 보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고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즉, 지금 당장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공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지금 당장 하는 것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냥 평범한 삶만을 추구하며 사시겠습니까?
실패했다는 것은 크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도전하지 못한 비겁함은 더 큰 치욕이다.(로버트 H. 슐러)
성령과 기억
-허광철 신부님-
복음서들을 보면,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여러 가지 ‘말씀과 행위’들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서에서는 ‘사랑의 계명’과 그에 대한 실천에 대해 계속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상태를 볼 때, 예수님은 상당한 무리수를 두고 계시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도 뿔뿔이 흩어질 정도로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엇을 보신 것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오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보내 주실 당신의 성령을 믿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온전히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통해서입니다. 특별히 성령을 통해 ‘기억’의 가치는 극대화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하는 기억입니다. 하지만 그 기억을 하게 되는 근본 동인動因이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라 고백할 때, 인간적인 어떤 기억도(비록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신앙적’이요 ‘복음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와 죄에 대한 기억도 성령 안에서는 ‘복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
- 김선류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그래, 사랑하면서 살아야지. 그런데 …. ‘나는 지금 힘겨운 상황이어서, 가진 것이 없어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네가 잘못해서 등등 그런 이유로 사랑할 수 없어. 언젠가는 사랑할 테지만 ….’
이처럼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들자면 백하고도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일단 사랑을 실천하고 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이유들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수많은 이유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을 하지 못할 수많은 이유와 싸울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것. 단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바다와 하나 되기 위해 바다로 들어간 소금인형처럼 우리는 그저 각자의 모습 그대로 모든 것을 던져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께 내 사랑을 받을 것이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으로 진정 사랑을 나누며 아버지와 하나 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당신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런 하느님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음미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 사랑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다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건, 당신을 사랑하지 않건 당신 사랑의 원리에 따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사랑을 안 해주시기에 사랑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해주셔도 안 받기에 못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사랑해야 받는 법이지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사랑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싫어한다면 사랑을 받겠습니까?
물론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싫고, 어떤 사람의 사랑은 싫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좋아도 하느님의 사랑은 싫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이 싫어서 하느님의 사랑이 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싫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스토커처럼 당신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당신 사랑을 보이십니다.
항상 자기밖에 모르는 노신사가 기차에 올라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바로 옆자리에 여행용 가방을 올려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사람이 옆자리에 못 앉게 함으로써, 편안히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기차가 막 떠나려 할 때, 한 형제님이 같은 찻간에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노신사의 옆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노신사는 자기 옆자리에 누가 앉는 것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자리가 있어요. 내 친구가 곧 올거요.”
이 형제님께서는 실망하셨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급하게 뛰어오느라 힘들어서 그렇거든요. 그럼 그 친구 분이 오실 때까지만 앉아있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가방을 그의 무릎에 놓고 노신사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로 그때 열차가 떠나려는 기적이 울리고 열차는 스팀을 내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 형제님께서는 갑자기 가방을 번쩍 들어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노신사는 깜짝 놀랐지요. 그러면서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고 형제님께 따졌습니다.
이에 형제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세요.
“친구 분이 늦으셨어요. 기차를 놓쳤으니 가방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해드려야지요.”
편하게 가려고 거짓말을 했다가 오히려 자신의 가방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지요. 우리 역시도 나의 편함을 위해서, 또 나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된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나만 괜찮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우리들은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떨까요?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신사처럼 뜻밖의 어려움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곤 합니다. 즉, 하느님과 멀어지는 행동들을 끊임없이 하지요. 이러한 행동들로 과연 영원한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결국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헛된 것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대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 가정을 원만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한 나라를 통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몽테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고뭉치인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나이는 아직 어린데도 도벽, 가출, 흡연, 음주, 폭력성...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음료수를 한잔씩 마시면서, 도대체 왜 인생 그렇게 사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의 지난 삶에 대해서, 가족들로부터의 버림받음에 대해서, 가슴깊이 아로새겨진 진한 상처에 대해서, 나름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때 마다 부딪쳤던 한계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참으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녀석인데, 지난 삶으로 소설을 몇 권 쓸 정도였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아이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 그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지니고 있는 깊은 상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파악하게 되니, 그 아이는 더 이상 미운 존재가 아니라 측은한 존재, 그저 토닥거려 줘야할 가련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아이의 그릇된 행동 앞에서도 미워만 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감싸주고 더 많이 사랑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솟아났습니다.
아는 만큼 사랑합니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려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군지를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면 알수록, 그분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가르침과 계명에 더 충실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안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이해하고,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될 때, 우리 삶은 지금 보다 훨씬 더 당당해질 것입니다. 그 어떤 열악한 외부환경에도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운 십자가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확신하니 기쁘게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보여주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며칠 바쁘다가 컴퓨터를 오랜만에 켜니 영화배우 설경구씨와 송윤아씨의 결혼 발표기사가 나서 읽어보았습니다.
송윤아씨는 유명한 신부님도 계신 천주교 집안 딸이고 설경구씨는 제가 알기론 결혼 했다가 이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설경구씨가 신자도 아니었고 교회에서 혼인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인 송윤아씨와 성당에서 혼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송윤아씨는 설경구씨의 한결같은 모습에 믿음과 사랑이 커져갔다고 했습니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설경구씨가 일기 형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은 사랑의 노트를 써서 한 권이 다 써지면 그것을 송윤아씨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벌써 자신의 마음을 담은 러브노트가 5권이 넘었다고 합니다. 설경구씨가 지극정성으로 송윤아씨의 마음을 잡았던 것 같습니다. 송윤아씨도 처음엔 설경구씨가 선배일 뿐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었지만 이런 정성에 마음을 준 것 같습니다.
설경구씨가 사랑의 노트를 쓰게 된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을 보여주는 이유는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도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송윤아씨가 첫 번째 노트부터 읽고 설경구씨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조금씩 지쳐가서 설경구씨도 다섯 권까지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일기를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관계는 이렇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더 자신을 보여주면서 더 깊어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하나하나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셔서 아드님을 통해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보면서 아버지를 보지는 못합니다. 다 보여주시기는 한 것이지만 볼 수 있는 눈을 모두에게 주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실까요?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즉, 당신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아버지도 알게 하실 것인데, 당신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당신의 계명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받아들여지는 만큼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여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처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때 정말 당신이 불러주시는 것인지 확신을 가지고 싶어 당신을 좀 보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무리 청해도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먼저 성소를 받아들이고 신학교에 들어 간 이후였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보여주시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 당신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지를 시험하십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먼저 따르고 나서부터이지 그 분을 보고 나서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우리의 사랑을 키워주십니다.
세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고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더 슬픈 일은 하느님과도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그 분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줍시다. 그러면 그 분은 당신을 더 많이 드러내 보이실 것이고 우리는 그 분을 더 알아가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정작 사랑이 필요했던 쪽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더 확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 봅시다. 그 분은 그만큼 당신을 더 알고 사랑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사랑함으로써 더 행복해집니다.
일념으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리스트라에 온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 복음 선포의 성과를 거둡니다.
그런데 리스트라에 온 것은 이코니온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고, 그러니 리스트라에 와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전 다른 지역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人間萬事 塞翁之馬(새옹지마)라고 하였습니까?
어떤 일이 당장은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다음의 성공을 위한 것이요,
성공으로 보이는 일이 다음 불행의 씨앗이기도 한 것이 인간사입니다.
그러니 성공과 실패로 一喜一悲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바꾸어 얘기하면 인간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복음의 선포라는 주님의 계획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가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고 했는데 유다인들과 유지들이 분노하지만 바로오는 같이 분노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이 공격하면 발의 먼지를 털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
시비를 걸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과 대적치도 않습니다.
갈등(葛藤)이 풀리지 않음은 칡(葛)과 등(藤)나무가 서로 얽기 때문인데 바오로는 그들의 어떠한 시도에도 얽혀들지 않고 그저 복음을 전파하는 것 일념입니다.
율법과 교통 신호등
-손우배 신부님-
우리는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함께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마음에 새기며 실천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어기게 되면, 내가 그 사람의 사랑을 배반했다는 생각에 가슴 아파하고 또 그 사람이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느끼게 될 아픔과 실망에 나 또한 마음이 아픕니다. 주님의 계명은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마치 교통 신호등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계명은 빨간 불일 때 건너선 안 되고 파란 불일 때 건너야 하는 규율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저 빨간 불일 때 길을 건너 신호등을 어겼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구약의 율법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사랑하는 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나 역시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분의 말씀을 지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교통 신호등과 같이 인격적인 사랑이 없기에, 계명을 어겼다는 두려움만이 있을 것입니다.
성장하는 사랑
- 김태훈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며 마음 한편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못 된다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애쓰지만 자주 나약함에 져서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리스어 단어의 의미는 저를 위로해 줍니다. 21절에 나오는 ‘지키다’의 일차적 의미가 ‘준수하다’는 뜻보다 ‘보존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다.’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얼마나 제대로 실천하는가보다 우선적으로 얼마나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가 예수님의 일차적 관심사이고, 그것이 우리 사랑의 첫 번째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그렇게 쉽게 흘려버리지 않는 법이고 또 그렇게 마음에 새기려는 노력 자체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새기려는 노력에서 출발해 실천이라는 단계에서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일어나고 하는 긴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성장하고 어느덧 완전한 실천 단계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서 출발해 사랑으로 걸어가고 사랑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완전한 상태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만을 원하시면서 그런 긴 넘어짐의 과정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계속해서 받아주시는 인내로운 사랑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과정에서 기다리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그 새긴 말씀을 적절한 때 기억나게 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마치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머니처럼. 오늘도 비록 부족한 묵상이지만 그분에 대한 내 사랑을 고백하면서 일상의 짧은 시간이라도 쪼개어 봉헌해 봅니다.
들음
-이정민 신부님-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듣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가정. 신부와 신자가 서로의 바람에 귀 기울이는 본당. 교사와 학생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학교. 부부가 상대방의 말을 ‘들음’은 둘 이상이 모인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들음’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첫 번째 표지가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들어주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분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은 항상 하느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께 귀 기울일 만한 침묵과 여유가 없는 듯합니다.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분의 말씀을 먼저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기도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 대로 살라
- 이흥우-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보신 것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전해 주셨다. 그것은 곳간의 열쇠도 보물지도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해졌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아이들은 마치 이솝 우화 같은 동화를 떠올린다. 성경을 너무 글자에 맞춰 경직되게 읽으면,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 그대로 전달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황해도 뭍에 사셨던 장모님이 백령도로 시집가서 보니 시아버지가 서낭당 제주셨다고 한다. 보통 마을 어른이 동제(洞祭)의 제주가 되는데 뭍에서 시집온 새색시, 더군다나 천주교를 믿는 신여성인 장모님 마음엔 이것이 걸렸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심심할 때 읽어보시라며 성경을 베개 밑에 놓아드렸다고 한다. 다행히 책 읽기를 좋아하는 시어머니가 틈틈이 꺼내 읽어보시더니 어느 날 “이렇게 좋은 말씀이 어디 있겠니?” 하며 동네 친지들을 삼삼오오 모아 성경을 읽어주셨다. 결국 백여 명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며 자랑하신다.
학창 시절 시험 때,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자면 밤새 머리에 쏘옥 들어갈 거라는 위안처럼 베개 밑에 넣어드린 ‘말씀’이 그대로 전달된 것일까?
"원장님, 안 그래도 일손이 많이 부족하실 텐데, 저희 아이들 너무 많이 보내서 정말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며칠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한동안 망연자실했습니다. 요셉 의원 선우 경식(요셉) 원장님께서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실려 가셨고,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다고, 기도해달라고...
불과 한 달 전, 요셉의원 후원자, 봉사자 피정 강사로 초대해주셔서 뵈었을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이제 몸이 많이 회복되어 병원에 자주 나올 수 있어 행복하다며 환하게 미소 짓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오늘은 영정 사진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남아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영안실에는 대통령님을 비롯해서 국무총리님, 추기경님들, 각계각층의 요인들이 보낸 화환으로 빼곡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분들의 추모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요셉 원장님은 이제 떠나셨는데, 더 이상 우리 곁에 안계신데...
개인적으로 저는 요셉 원장님 신세를 톡톡히 진 사람입니다. 제가 하고 있던 일의 성격상 길거리를 떠돌던 아이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날락하던 청소년들을 많이 만났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체면불구하고 아이들을 요셉의원으로 보내곤 했습니다.
화려한 영등포역을 뒤로하고 을씨년스런 골목길로 접어들면 보기만 해도 정겨운 요셉의원 간판이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곳은 마치 훈훈한 벽난로 같은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들어설 때 마다 늘 들었던 느낌은 편안함이었습니다. 따뜻함이었습니다. 환대받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곳에서는 늘 문전박대 당하던 가난한 이웃들도 제 집 드나들듯이 당당히 출입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 모든 것 보다 더 좋았던 것 한 가지는 요셉 원장님께서 그곳에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요셉 원장님, 돌아보니 참으로 자상했던 분이셨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고왔던 분이셨습니다. 관대한 분이셨습니다. 늘 무엇 하나 더 챙겨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지난 달 후원자 봉사자 피정을 마치고 요셉의원을 나오던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원장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점심 식사 때,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뭘 그리 이것 저 것 꼼꼼히 챙겨 주시던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차 가지고 오셨냐? 차 가지고 오셨으면 아이들 먹을 것 좀 실어드릴 텐데, 다음번 오실 때는 꼭 트럭 몰고 오시라, 그래서 좀 실어가시라고.
열차 시간에 쫓겨 황급히 뛰어가는 제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시더군요. 빨리 들어가시라고 손짓해도 계속 거기 그렇게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끝이군요. 요셉 원장님. 너무나 아쉽습니다.
요셉 의원은 한 마디로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떠도는 환자들을 위한 의료봉사뿐만 아니라 세탁, 목욕, 무료급식 등이 함께 이루어지던 참 교회였습니다.
더욱 저를 기쁘게 한 일 한 가지가 그곳은 한마디로 ‘나눔의 교차로’였습니다.
원장님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에 따르면, 생필품이나 의류, 식료품 등을 기증하겠다는 전화가 오면, 일단 사양하지 않고 모든 물품들을 접수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늦도록 분류작업을 하고 잉여 분량에 대해서는 즉시 보다 가난한 시설이나 단체와 나눠 쓴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많은 아이들을 요셉의원에 보내곤 했기에, 그래서 원장님께 끼친 민폐가 만만치 않았기에 한번은 제가 인사치레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원장님, 안 그래도 일손이 많이 부족하실 텐데, 저희 아이들 너무 많이 보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 하신 원장님의 말씀은 정말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 그런 말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저희 병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들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 저희 병원에 안 오면 저희 병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 닫아야 합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앞으로도 계속 아이들 많이 보내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사랑의 계명 준수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셉 원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랑의 계명에 충실한 삶인지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요셉 원장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사랑의 실천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통해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것이 천상에 계신 요셉 원장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겠지요.
지난번 요셉의원 후원자 봉사자 피정 강의 갔을 때 제가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곳 요셉의원에서 봉사하시고, 또 이곳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시는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들이십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두 가지 모습으로 다가오시는데, 첫 번째 모습이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입니다. 이곳을 찾는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은 예수님의 또 다른 얼굴이 확실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고통이란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곳 요셉의원에서는 이 두 가지 예수님의 얼굴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만 들어서면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현존이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곳 요셉의원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현존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들의 작은 나눔과 봉사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봉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흐뭇한 얼굴로 별로 영양가 없던 제 강의를 듣고 계시던 원장님의 얼굴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셉 원장님. 이제 더 이상 통증도, 과로도 없는 천국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천지차이인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 박사인 요한의 복음은 늘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그만큼 사랑에 대해 새로이 눈뜨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우리의 의문을 자아내는 그런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도 많은 의문을 자아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이런 말씀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말이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아버지와 당신이 사랑하시고 그와 함께 사실 것이라는 말씀이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의문을 자아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이 우리를 사랑치 않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을 감추시겠다는 말씀인가?
이 말씀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함께 계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인가?
그럴 이 없으신 주님이시고, 그럴 이 없으신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을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이 현재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이 보이는 것이라는 말씀이겠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골라서 사랑하고 누구에게는 일부러 감추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요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똑같이 사랑하시고, 그저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랑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것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천지 차이입니다.
작년 12월, 간석4동 성당에 부임한 뒤에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또 왜 이렇게 일들이 저를 좋아하는지……. 이것저것 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았던 것도 상당히 많았고, 그리고 많이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여유를 가지고서 다시금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그럼으로써 재충전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여행을 하다 보니 당연히 이제까지 새벽에 쭉 해오던 것에 문제가 있네요. 즉, 새벽 묵상 글과 새벽 인터넷 방송을 이번 일 주일 동안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시간이 허락하고 근처에 피씨방이 있으면 여행기를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요 며칠 동안 여행 준비를 하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자전거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고생을 사서 하냐고들 말씀하십니다. 편한 차를 놔두고서 자전거로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하는 신부님들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있는지 모른답니다. 왜냐하면 다들 자전거를 좋아하고, 너무 빠른 차를 타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힘들다고 피하려는 이런 여행을 하면서도 너무나도 기쁜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어떤 사람이 겪는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커 보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도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그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이 실제로는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와 보통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들 어렵다고 하는 자전거 여행 안에서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탓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중요한 계명을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이지요. 그 사랑을 지켜나가면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이 나를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꾸고,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 힘차게 사셨으면 합니다.
사랑합시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
-김동하 신부님 -
하늘에 맞닿은 달동네에는 아직도 사람내가 물큰합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 ‘변소’에서 나는 냄새, 간간히 어른들 싸우는 광경.
달동네 사람들이 버거우면서도 올망졸망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늘도 가깝지만 이웃이 지척이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하늘을 배운 터라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기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싸울 줄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법도 훤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가까이 하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내 몸의 자리를 내놓고 내 마음의 자리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이라면 반은 내놓아야 하고 셋이나 넷이라면 나를 삼등분 사등분하여 두 몫이나 세 몫은 내놓아야 합니다. 많이 모이면 모인 만큼 내놓아야 하기에 내 자리는 작아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예수님과 함께 살자면 전부를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부이신 분이고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필립 1,21참조). 하늘이신 예수님께 배우고 이웃이신 예수님과 부대낄 수 있다면 그분의 향기는 우리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계명 실천으로
- 송제호 신부님 -
부활5주를 맞이하는 교회는 부활축제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움과 절망의 끝에 서서 모든 희망을 포기하려 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산을 넘어서야 하는 단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의 전부이신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절망감이 찾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제촉 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심지어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할 순간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가질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당신과 성령께서 늘 함께 하여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선포된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 고별 담론을 통해 성령의 보내심과 주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만이 그 제자 됨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일치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힘이 된다고 하십니다(15절). 즉 예수님의 계명은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천, 제자들이 체험한 사랑의 실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계명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겹고 마치 멍에처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마치 계명의 실천이 나의 자유와 의지를 구속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변명을 준비해두고 일탈의 삶에서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늘 소극적으로 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더 크고 완전한 자유의 삶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을 통한 진정한 친교는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고 축복되게 합니다.
사랑을 살지 않는 이에게는 계명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멍에이지만, 사랑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라면 계명은 너무나도 가볍고 편한 멍에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선포함에 조금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필립보는 낮선 사마리아지방으로 달려가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복음을 선포함에서 더 큰 기쁨을 알게 하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1독서).
우리는 생명에로 초대받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증거만이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은 늘 우리의 사랑 고백보다 먼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독서강론> :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 경규봉 신부님-
바울로 일행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티오키아 유대인들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로 일행을 박해했다. 그들은 바울로를 돌로 쳤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내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신도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바울로와 일행은 1차 전교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데르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각 도시마다 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또한 각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세워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의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불림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며, 주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음으로써 현실적인 손해를 입을 수가 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고, 지금도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육체적, 정신적인 고문에 시달렸으며,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참 그리스도인에게 박해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박해를 받고 십자가상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요한 17,14-16) 세상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요한 15,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복음을 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기쁨과 평화를 주님께서 주시며,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다(요한 20,19).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쁨에 충만하도록 하셨다(요한 20,22). 그들이 다락방에서 뛰어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셔서 용기와 힘이 넘치도록 하셨다(사도 2,1-4).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도들이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갖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어려움과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움과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러한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주님의 말씀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사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함으로써 세상의 고통과 박해를 이겨내는 신앙인이 되자.............◆
사랑은 움직이는 것
-노성호 신부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율법의 준수를 그 어느 것보다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365가지의 금령과 248가지의 명령으로 구성된 총 613가지의 율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면서 살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의인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많은 율법 조문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하고 말씀하시면서 수많은 율법 조문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의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는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배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눈높이를 맞추시며,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 쪽으로 움직여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어렵고 두렵고 저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으로 찾아오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 주시려고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움직여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 오면’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니 마치도 한권의 서정적인 시집을 읽고 난 것 같이 머릿속이 환해져오고, 또 길고도 잔잔한 여운이 남더군요.
트럼펫을 전공한 현우는 관현악단 오디션에서 거듭 고배를 마실 뿐 아니라, 떠나가는 사랑도 잡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접은 현우는 강원도 산골 한 중학교 악대부 임시 교사로 가게 됩니다.
낡은 악기, 찢어진 악보, 색 바랜 트로피와 상장들, 전국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면 강제 해산해야만 악대부, 그러나 현우는 시골 아이들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제자들을 위해 손수 라면을 끓이는 스승, 그 아이들과 함께 머리 맞대고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라면을 먹는 스승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를 돕기 위해 그렇게 강하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카바레 밤무대까지 뛰는 스승, 가슴 아픈 제자와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스승, 가끔은 엄격함을 버리고 친구처럼 다가갈 줄 아는 센스를 지닌 스승의 모습,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또 다시 스승의 날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지난 세월 제가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제가 종사했던 일의 성격상 잘 풀린 아이들보다는 주로 늘 뭔가 꼬인 아이들, 노력해보지만 안타깝게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방황을 거듭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제도 최근 가까운 소년원에 오게 된 한 아이가 ‘스승의 날’이라고 편지 한통을 보내왔더군요. 화가 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신부님,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편지를 드리니 정말 창피하네요. 신부님과 함께 했던 살레시오...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네요. 신부님, 보고 싶어요. 예전에 함께 외출하던 기억, 등산가서 한잔 하던 기억, 싸우면서 운동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많이 창피해하는 아이에게 빨리 답장을 써야겠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미안해할 것 하나도 없다. 다 네가 시대를 잘못타고 난 때문이다. 지난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란다. 널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 잊지 말거라...”
오늘 스승의 날을 맞아 고마우신 모든 선생님들, 잊지 못할 은사님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열악한 교육 풍토 안에서 우리 선생님들 정말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꼬이고 꼬인 교육제도 아래에서도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다가서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들도 많으시더군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춤을 배우는 선생님들, 아이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학습을 제공하기 위해 불철주야 교안작성에 여념 없는 선생님들, 아이들이 너무 좋아 결혼조차 포기하신 선생님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장학금을 내어놓는 선생님들...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자라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스승으로부터 듬뿍 영양분을 제공받은 그 제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 사랑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 풍성히 나누어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스승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듯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라는 예수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소리 없는 눈물 앞에 함께 눈물 흘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 안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많은 결실을 맺도록 지지해주고 격려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요한 14, 21-26)
-유광수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신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세 번이나 말씀하시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언급하신다.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강요하지는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뜻을 밝히시고 알려주시기만 하신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셨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내가 지키는가 아닌가? 가 그 기준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때 사용한 동사는 희랍어로 "Tereo"(떼레오)라는 단어이다. "떼레오"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돌보다, 보살피다, 지키다, 감시하다, 간직하다, 붙들다, 주시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 계명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의 계명(말씀)을 조심스럽게 돌보고,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누가 빼앗가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지키고 감시하고 붙드는 사람이다. 마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계명(말씀)을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마치 애인의 글을 받았을 때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대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누가 나의 보물을 빼앗가지 않도록 지키고 감시하듯이 나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의 계명(말씀)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며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의 계명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 105)라고 했듯이 등불이요, 빛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고, 생활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계명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 나의 삶이 주님의 계명을 따라서 생활했는가 아닌가를 점검하고 충실한 삶이었으며 주님께 감사드리고 충실하지 못한 삶이 발견되면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교정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생활하니 주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 사랑 받을 일만 하고 사는데 사랑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고 또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뜻이나 계획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주님의 계명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즉 무엇을 말하고 행동할 때 주님의 계명을 먼저 생각하고 그 상황에 알 맞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명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실천하려는 생활에서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생활의 등불, 빛으로 삼고 생활하는 데에서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중요성을 두지 않는 사람이며, 무관심한 사람이며, 주님의 말씀과는 아무 관계없이 생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에 준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즉 삶의 기준이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다. 주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또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너는 너, 나는 나대로의 삶을 계속해서 살 때 점 점 더 주님과 멀어지고 주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멋대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가볍게 들릴런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차이는 엄청나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차이가 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킨 사람은 예수님을 점 점 더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모르게 될 것이고사랑에 굶주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함께 생활할 때 잘 드러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때 또는 대화를 할 때는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일이 잘 된다. 말이 통하고 대화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이 일치되고 일을 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생활할 때에는 사사건건 문제가 일어나고 문제꺼리가 되고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힘들고 일하는 것이 힘들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일치를 이루고 알아듣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치가 안되고 자기 중심으로 일을 하고 말을 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게 된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보다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생활하게 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서로 일치하기가 힘들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짊어져야할 십자가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의존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에 바탕을 두고 그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한테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려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순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코후 4, 8-11)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성
-박상대 신부님-
우리기 익히 알고 있듯이 유독 요한복음사가만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긴 고별사를 보도한다.(13-17장)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13-14장이 요한복음의 원초적인 고별사에 속하고 15-17장은 추가로 편집된 것으로 주장한다. 요한복음 21장이 추가로 편집된 것과 같이 15-17장도 요한복음 공동체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후에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5-17장은 13-14장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14,21-26)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 행하신 기나긴 고별사(13-17장)의 원초적인 첫 부분(13-14장)에 해당된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김(1-11절), 발을 씻겨줌의 의미(12-20절), 유다의 배반예고(21-30절), 새계명 선포(31-35), 베드로의 장담과 배반예고(36-38절 끝) 등을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선포하신 내용과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1-14절), 성령의 약속(15-26절), 그리고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27-31절 끝)에 관한 가르침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별사를 요한복음 13-14장으로 한정할 때, 고별사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 ② 아들의 자기계시와 정체,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公開)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순서대로 다루어지거나 독자적인 단락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고별사 전체를 오가는 흐름을 주도한다. 물론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는 14,15-26에 한정되는데, 여기에서도 사랑의 계명은 함께 언급된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성령의 약속과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시선을 오늘 복음(14,21-26)에 집중시켜보자. 우선 예수께서는 사랑의 테마를 재삼 언급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나아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통하여 아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21절) 그런데 11제자 중에서 유다 타데오가 예수께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한정하여 나타내 보이려 하는 의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22절) 이 질문은 사실상 불만과 의구심을 담은 질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가 ’국가·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참에 왜 예수께서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수 없는지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의 의도를 비켜간다. 그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세상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으며, 또 메시아로 자신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메시아적 자기계시는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즉 적어도 제자들에게 한정되는 셈이다.(23-24절) 제자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들었으며, 듣고 응답하였으며, 응답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그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살아 있는 집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26절)을 통하여 밝혀지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다.
이미 16-17절에 걸쳐 언급되었고, 26절에 다시금 언급되는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는 요한복음의 특허품이다. 신약성서 전체에 ’성령’이라는 단어는 235번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용도는 ’성령’이라는 단독적인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보도된다. 요한복음사가도 처음에는 이런 맥락에서 ’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32; 1,33; 3,5; 3,8; 3,34; 7,39; 20,22 참조) 그러나 요한복음의 고별사에서 보도되는 표현은 전혀 다르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이 다소 ’비인격적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 속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엇’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글자 그대로 ’그분’(14,17)이라는 인칭대명사를 부여하여 하느님의 또 다른 ’위격’(位格)으로, 나아가 ’협조자’, ’진리의 성령’으로 계시하고 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진리의)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26절) - 병행구절 15,26; 16,13; 16,15 참조. 이로써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본성(本性)을 지니신 제3의 위격, 즉 ’하느님 성령’으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주님승천대축일을 일주일 앞두고, 성령강림대축일을 이주일 앞둔 시점에서 오늘 부활 제5주간 월요일에 성령 하느님의 강림에 관한 약속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영에 의해 생명을 부지(扶持)한다면 오늘부터라도 성령강림을 잘 준비해야 하겠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황혼의 미학>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황혼의 미학’(분도출판사)이란 책을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한 말씀 한 말씀이 어찌 그리도 설득력 있고 명쾌한 말씀인지...
제목만 보면 즉시 ‘노인들을 위한 책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드시겠지만, 읽다보면 노인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에게도 아주 유익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굴에 선량함을 가득 담고 침묵하는 노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부드러운 ‘황혼 빛’을 비춰준다. 부드러운 가을빛은 시들어 말라가는 낙엽도 빛나게 하지 않는가. 늙어가면서 중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다.
침묵하는 법을 배운 노인은 외롭다고 푸념하지 않는다. 침묵은 그를 하느님 세계로 훌쩍 옮겨놓는다. 고요한 노인은 말없이 자기 삶의 ‘그림책’을 훑어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여 산다. 그리하여 그에게서는 평화와 고요가 흘러나오고 다른 사람들도 이 고요 한에서 편히 쉬고 싶어 한다.”
누구나 희망하는 ‘아름다운 노년기’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선량함, 부드러움, 너그러움, 침묵, 감사, 내적인 고요, 하느님과의 일치...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반된 현실 앞에 힘겨워하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어갈수록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이 계십니다.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발하게 활동하실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폭풍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끔찍한 고통 가운데서도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조차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시며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가시더라도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고, 그때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 가능할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계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성령의 현존, 성령의 역할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 안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활력, 활기, 새로움의 원천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가 꽤나 오래 되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색창연한 고딕식 교회 건물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이제 ‘한물 간 단체’, ‘박물관’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에 아직도 생기가 넘치는 젊은 교회입니다.
성령은 마치도 한 마을의 중심인 공동우물 같은 존재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들의 이 끝도 없는 갈증을 지속적으로 채워주고 우리의 이 숱한 죄를 매일 깨끗이 씻어주는 맑은 샘과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에너지 충만한 당신의 입김을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불어넣어주십니다. 성령께서 부여해주신 힘으로 우리 영혼의 성덕의 불을 지필 수 있으며, 그분의 에너지로 우리는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며, 그분의 불길로 덕지덕지 낀 우리 영혼의 죄를 태워버릴 수 있으며, 그분의 지혜로 평화와 선을 향한 투쟁을 계속해나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