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 영국군이 청나라 해안지방에 상륙하였다. 그 원인은 영국의 아편무역에 대한 청나라의 강력한 제재에 있었다. 조선은 서양 열강의 동양에 대한 진출을 위협적으로 인식했다.


청나라는 굴욕적인 협약을 통해 홍콩을 양도했으며 잠자는 사자에서 잠자는 돼지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조선도 그런 상황이 조선만은 피해갈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조선,1846년 한양
조선국왕(sSDADSF) : 저 거대한 청나라가 한줌의 서양 군대에 무너져 버렸소. 우리 조선도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왕세자(핸섬보이) : 영국의 주요 군사력은 해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조선도 제대로 된 해군을 창설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도원수(Daumkang) : 육군의 수도 늘려야 하옵니다.
조선국왕(sSDADSF) : 예부판서, 아라사와의 관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예판(만년삼) : 관계가 진전되고 있사옵니다. 또한 교류를 통해 군수물자도 수입되고 있사옵니다.
호판(월터) : 재정의 대부분을 군수물자의 수입에 쓰고 있사옵니다.
조선국왕(sSDADSF) : 일단 육군의 수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수송선단을 구성하도록 하라.


조선국왕(sSDADSF) : 드디어 일차적인 목표가 달성되었군... 새로이 구성된 선단을 왕립해군이라 명명하노라. 호조판서, 지금까지 모은 물자는 어찌되었는가?
호판(월터) : 보시옵소서, 이제 조선도 6사단을 추가할만한 물자가 쌓여있사옵니다.

호판(월터) : 하오나, 사단들을 징집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아직 부족하옵니다. 예산을 더 모아야 할 것 같사옵니다.
1857년 드디어 조선은 육군 사단을 더 증설하게 되었다.

조선국왕(sSDADSF) : 이제는 사단을 증설할 만한 상황이지 않는가?
호판(월터) : 예산은 충분하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병조의 예산을 늘이고, 백성들을 징집해야 하옵니다.
병판(반장) : 그일은 소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도원수(Daumkang) : 소신은 군사의 훈련을 책임지겠사옵니다.
이판(원더오웬) : 군의 증설은 새로운 장수들을 필요로하옵니다. 소신이 새로운 부원수를 천거하겠나이다.
영의정(형님아gg) : 이제 조선은 율곡선생의 10만양병의 대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조선국왕(sSDADSF) : 아라사와의 동맹관계가 형성된지 어느덧 3년이 흘렀소.
예판(만년삼) : 아토전쟁(크림전쟁)때의 사절파견 덕이지요. 이제 조선은 고립된 나라만은 아닌 세계의 하나의 주권국가이옵니다.
조선국왕(sSDADSF): 아라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야합니다. 얻을 것은 그들의 기예만이 아니지요.


예판(월터) : 군대의 증설이후 지출은 증가하였습니다만 증설된 군대는 국가의 방위에 많은 기여를 할 것입니다.
조선은 이렇게 차근차근 근대화를 향한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참고자료
장숙필(고려대 강사)
栗谷이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십만 양병을 건의했다는 것은 율곡 [年譜] 계미년(선조 16년) 4월조, 沙溪 金長生이 지은 율곡 [行狀], 月沙 李廷龜가 찬술한 [栗谷諡狀], 白沙 李恒福이 찬술한 [栗谷神道碑銘], {宣祖修正實錄} 임오년(선조 15년) 9월조 등에 기록된 이후 사실로 믿어져 왔다. 특히 해방 후 사학계에서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십만 양병설이 사실로 거론되고, 그러한 과정에 당시 율곡의 주장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西厓 유성룡과 대비하여 율곡의 선견지명이 추숭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왔다.
근래에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에 반론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한 논자의 반론 근거를 들어보자면, 애초의 {선조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며, {선조수정실록}의 기록과 [연보]의 기록 사이에 시기가 일치하지 않고, 율곡의 다른 어떤 군정개혁책에도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 등이다. 한마디로 {선조수정실록}의 십만양병설은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장악한 西人들이 날조한 것이고, [연보] 등의 기록도 같은 맥락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필자는 당시의 상황을 검토해 볼 때, 십만양병설 주장의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려우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서인들의 조작에 불과하다고 하는 주장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율곡이 평소부터 양병책을 포함하는 군정개혁안을 구상하고 제기하였으며, 말년의 병조판서 재임시에는 양병 계획을 세워 오라는 선조의 명을 받아 [六條啓]를 올리고 그 가운데 "面對하여 아뢰겠다"는 언급이 있는 등, 십만양병설 주장의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십만이란 군병의 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또 지나치게 군병을 많이 기르려 한다는 반대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음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또 조작설의 근거로 제기된 몇가지 논의는 나름대로 해명이 가능한 것임을 볼 때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하겠다.
첫댓글 조회수9에 보는 산뜻함.
다...단무지의 대기병군단![응?]
인력 안습...
인력이 마이너스네요.. 군사모아서 중국 치실생각인가요?
군사 10만이네요... 그런데, 국방예산 풀로 해놓으면 재정이 마이너스라... 중국 치기 직전에 국방예산 올리려고요... 국방예산 풀로 해놓으면, 인력은 마이너스가 아니랍니다.
혹시..... 야전 지휘관 안될까요? 나중에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참모총장아니면 육혹은 해군 참모총장이되는 인물로..... 그리고.... 재미있네요^^
육군 장군 당첨 ㅋㅋ
흠... 이러한 상황이면.. 땅은 빼앗지는 못하겠지만 버틸수만 있다면(중국군이 조선 본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배상금+그 이외에는 할 수가 있겠군요.
보시면 아실꺼예요
태클 하나! 사실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정유왜란후에 율곡이이의 제자들이 묘비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적어놓았을뿐 조선왕조실록이나 공식적으로 없는 기록이라고 다큐멘터리를 보았어요
참고자료를 올렸으니, 봐 주세요.
저 혹시 육군 저격수 안되나요?
오오.. 근대화를 위한 몸부림.
1859년이라..
하악 중꿔놈들을 부숴버리는거임!!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