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동유럽 작가들처럼
고통이 빛이 되는
삶은 내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한밤중 택시를 타고 달릴 때
문득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가곡처럼
죽은 시인과 죽은 외할머니가
함께 잠들어 있는 내 환한 다락방처럼
꿈에서도 손가락을 박는 재봉사의
잠과 밤처럼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것
모국어라는 이상한 공기처럼
시라는 이상한 암호처럼
- 2020. 08.21. <서울신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에어컨이 없는 방에서 밤을 보낸 아침 거울 속의 괴물을 보았다. 영상 49도. 온몸에 붉은 땀띠가 일었다. 땀띠라기보다 수포에 가까웠다. 약사가 “프리클리 히트(prickly heat)”를 반복하며 하얀 가루약을 주었다. 온몸에 가루약을 도배하고 거울 속의 나를 보는데 연민이 일었다. 여태껏 편히 살았지? 이제 고생 좀 해.
2년 가까운 인도 체류, 몸을 학대할 때 마음에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감자 두 알과 밀크티 한 컵으로 하루를 견디며 불가촉천민의 마을을 걸어갈 때 숲의 꽃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비로소 알았다. 고통이 빛이 되는 삶은 내 것 아니기 바라는 시인의 마음 이해한다. 언젠가 그에게 지난 고통을 사랑하게 될 날 올 것이다.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 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나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 갔다
창 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 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 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 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감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 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 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 2013. 7. 29 <동아일보/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
'단 한 번의 여름'이라면 한평생을 사계절로 나눴을 때의 여름, 청춘을 뜻하는 것이겠다. 나무로 치면,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보고, 왕성한 식욕으로 햇빛을 빨아들이고, 폭풍도 뇌우도 제 생장의 기폭제로 삼아 더욱 싱싱해지고, 이윽고 열매를 맺기 시작할 시기. 그런데 화자는 오직 '옛날 영화를 보다가/옛날 음악을 듣다가' 그 시기를 보냈단다.
입맛에 맞는 영화를 보고, 음악이나 들으면서 몽롱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세상 편하고 달콤한 일이다. 앗,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보다 내가 더 나이를 먹어버렸구나! 화자는 화들짝 놀라며 자기가 현실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음'을 깨닫는다.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 연애도 취직도 장래를 위한 공부도, 따라서 실연도 어떤 실패도 좌충우돌도 없이, 아무짝에도 쓰이지 않은 청춘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다'. 우두커니 우거지는 그 현실을 미처 보지 못했네. 몇 세기 전 사람과 몇 세기 전 장면, 그 환상을 사랑하고 그려서. 그 빛이 눈을 가득 채워서!
이제 더이상 자기가 젊지 않다는 깨달음은 꽤 기를 죽인다. 젊음에 대한 안달과 젊음을 헛되이 보냈다는 이런저런 자책과 회한이 유난히 가슴을 찌르는 시기가 있다. 시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고뇌를 삭일까. 혹은 새길까.
나는 운전 중이었다 한적한 산길이었고 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아카시아 숲이 불어오고 있었다 해체된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문득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고 그러나 이 길은 너무나 익숙해서 생각 없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오후였고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집에서 멀어지고 있고 옆 좌석에 누군가 잠들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차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운전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면허증도 없는 내가 왜 핸들을 잡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하게 잠들어 있다 차는 우리를 싣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집으로 가고 있다 관목 숲에서 밤하늘로 푸른 박쥐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