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름을 그대로 적어놓고 그 아래에 그 독후의 느낌을 적는다는 것은
내가 그다지 선호하는 바가 아닙니다만,
지금에 있어 더욱 중요한것은
제목이 무엇이 되느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난 이렇게 책 한권,영화 한편을 보고서는 컴퓨터를 키고
인터넷이라는 것 안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 옵니다.
그 직후에 다가오는 슬픔 혹은 행복 같은 것이 내게 주는
전율은 혼자 견딜 수 없기에.그것이 슬픔일 경우에는 더욱.
신사동의 멋진 재즈바에서
칵테일 한잔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나 책 읽기를 좋아한다 라고 말을 하였고,
그 말을 들은 동생녀석이 나에게 이 책을,
봉순이 언니라는 사람과 공지영
이라는 작가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 풍요로움이 지금 나에겐
"봉순이 언니"에게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미안한 것이어서
어떻게 갚아야 할까.
그대의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나 그 풍요로움 속에서 접하게 되어.
멋지게 개조까지 한 넓은 아파트의 집안에서.
따뜻한 침대에 앉아 고상한 클래식을 들으며
내가 그대의 불행을 음미하고 그것을 동정하였다 라고 생각하면
책을 읽을때도 없었던 눈물마저 흐르려 합니다.
왜 그 순간에 공지영씨는 메리의 눈빛에 무관심으로 답하였고,
왜 그 순간에 작가는 30년만에 마주친 봉순이 언니에게 등을 돌려야 했을까요.
가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비참함을 황송하여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것.
왜 그 뼈저린 가난을 맛보았던 작가의 어머니는
그 자신의 말처럼 "있는 사람"이 되어 봉순이 언니에게 등을 돌려야 했고,
그와 똑같이 그의 딸은,작가는 사회의 저명한 인사가 되어
3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어둠속에 살고 있는 봉순이 언니를 외면해야 했나요.
되돌아 보면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곳에
내 삶의 메리와 같은 존재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나 역시 봉순이 언니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처럼 된적은 없었던가.
먼 훗날 언젠가,
나도 내 삶을 위해 그들을 뿌리치고 말것인가.
그렇게 되지 않음을 위해
난 더 많은 봉순이 언니들을 만나보아야 하고,
더 많은 밤을 잠 못 이루어야 하고.
끊임없이 알아야 하고,
스스로와 만나야 하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어두운 거실을 희미하게 비추는 모니터 앞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굳게 다짐을 해야 하니.
나 평생을 절대 어두움에 등지지 않으리라.
내 소박하며 큰 꿈을 위해 노력하여.
나 30년 후에 봉순이 언니와 그 지하철에서 마주치거든.
결단코 그 앞에 다가가 다정히 안아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