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357장 (구 397장) / 갈라디아서 2 : 1 - 10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357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1절 – 10절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아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따돌림을 받는 왕따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자기를 따돌리는 “자따” 도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자기 스스로 위축되어 마음의 벽을 쌓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성도가 성도다우려면 '왕따' 뿐만 아니라 '자따' 또한 없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셔서 죄인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에 기독교의 역동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마음에 드는 한 두 사람이 아닌 열두 명을 팀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 최소한 두 사람이 함께 가서 서로 격려하며 네트워킹 하는 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혼자서 사역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도 유무상통하고 가르침에 함께 열심을 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팀을 이루어서 전도여행을 했다는 것은 더불어 복음 사역하는 지혜를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공동체성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개인주의,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불어 사는 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거짓형제들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갈라디아교회에 거짓 형제, 곧 가짜 신도들이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초창기부터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려는 무리가 계속 요동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 신앙이 든든하게 교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교리를 따르게 하는 이단이나 불건전한 사상들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복음을 변질시키고 훼손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론이 정연한 똑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종말은 지옥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영향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복음의 경주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믿을 때는 너무 잘하다가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나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지도자들과 하나가 되어 더불어 살지 아니하면 이 영적인 전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고, 등대처럼 쓰임받기 위해서 바른 교훈, 바른 복음을 받고, 교회에 든든히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둘째, 복음을 아름답게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보면 “복음과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복음을 아름답게 보존하려고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머리에만 있는 복음이 아니라 가슴이 뜨거워지고 생활로 옮겨지는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이라는 군중속의 무리와 교회라는 공동체의 멤버는 서로 다릅니다. 무리는 직위가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멤버들이 교회의 영적, 재정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함으로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결과는 다른 이유는 그 상황을 대하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따라 살며 서로를 세워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몸입니다.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공동체성이 회복됩니다. 교회에서는 예배공동체로, 주중에는 각 셀 목장에서 소그룹 모임으로 이 복된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만 위하고, 우리 교회만 위하는 개인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나보다 못한 이웃과 우리교회보다 약한 교회가 더불어 잘 되고 행복해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만족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와 삶이 자신의 영혼도 채워지고, 교회도 부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만의 유익이 아닌 성도와 교회의 역할과 기능을 잘 이루기 위해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강력한 복음전파를 위해서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 7절 - 9절 말씀을 보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우리는 더불어 손을 잡아야 됩니다. 아무리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라도 혼자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네트워킹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교제의 악수는 강력한 복음 전파를 위한 악수로 만남에 대한 축복, 상호 인정, 용납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사도 중에 대표성을 가졌지만 그 마음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서 자신들은 유대인을 위한 사도이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임을 알고 서로 교제의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이처럼 나 자신과 내 교회만의 만족을 위한 예배와 봉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본질의 회복을 위해, 성도와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거룩한 네트워킹이 이루어져 함께 부흥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불어 사는 지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먼저,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데 열정을 가져야 됩니다. 입술만이 아니라 삶으로 배우고 가르치므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에 교회는 내부의 적들과 외부의 적들에게 시달렸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왔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따르며 성도와 지도자가 한 마음이 되어 거짓형제들의 도전에 단호히 대처합시다. 교회공동체의 맴버로서 공동체성을 회복하여 개인적인 만족감만 추구하는 영적 이기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추구함으로 복음을 보존하며 삽시다. 그리고 함께 영적 네트워킹을 이루어 강력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됩시다.
그래서 불신 영혼들이 돌아오므로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기뻐하시며 천국잔치를 벌이는 날이 되고, 우리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